제4장.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자신 있나? (2)
앞으로 나간 신준석과 스웰던의 사이를 파고든 연결이었다.
투욱!
외질은 공을 앞으로 흘리는 동작으로 정지우와 수비수들을 살폈다.
왼쪽에서 램지가, 오른쪽에서는 산티카솔라가 달려들었다.
물러설 마음은 없었다.
이런 강팀과 한 번쯤 붙어 보고 싶었다.
강렬한 라이트 불빛 아래에서 외질이 공을 길게 날렸다.
퍼어어엉!
시커먼 하늘,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빛줄기, 영국의 밤에 빛나는 파란 잔디, 스파이크가 잔디를 밟는 소리, 관중들의 함성.
그 사이를 뚫고 공이 날카롭게 정지우의 앞으로 날아왔다.
후욱! 후욱!
정지우는 자세를 낮추고 공을 노려보았다.
라파엘이 거친 호흡을 내쉬며 램지를 향해 달렸고, 무둔바는 정해진 자리에서 산티카솔라와 산체스를 막아섰다.
빠르게 날아온 공이 섬뜩할 정도로 정교하게 오른쪽으로 감겼다.
산티카솔라와 산체스가 몸을 띄웠고, 무둔바가 그들의 앞에서 함께 솟구쳤다.
휘이이익!
달려오며 하는 점프다.
산티카솔라는 무둔바보다 머리 하나가 위에 있었다.
정지우는 빠르게 오른쪽으로 반걸음 움직였다.
왼쪽을 봐! 왼쪽! 왼쪽을 비웠어!
분명 왼쪽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공은 오른쪽으로 올 거라고 확신했다.
전반에 산체스도 그랬다.
후욱! 후욱!
정지우는 잔뜩 웅크린 자세로 공을 노려보았다.
터어엉!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산티카솔라의 이마에 정확하게 공이 맞았고,
화아아악!
정지우는 오른쪽으로 무너지듯 몸을 던졌다.
오른쪽이었다.
골대 바로 안쪽의 그라운드를 노린 것처럼 공이 파고들었다.
걸렸다! 이건 완벽하게 준비했던 코스였다.
산체스가 힌트를 주었고, 산티카솔라에게서 확신을 얻었다.
FA컵 아스널전과 지난 거의 모든 경기에서 정지우는 왼쪽을 비워 주었고, 왼쪽으로 점프했었다.
터억!
정지우의 손에 공이 걸렸고, 이어서 골대 기둥에 어깨가 걸렸다.
털썩!
“예에에에에에에-!”
홈 관중들이 모처럼 커다랗게 고함을 질러 댔다.
벌떡 일어난 정지우는 동료들을 돌아보았고, 무둔바와 손을 마주쳤다.
아스널 선수들의 표정 따위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유니온 시티다운 경기를 하는 것이, 정지우다운 플레이를 펼치는 것이 저들의 표정을 보는 것보다 백번 중요한 거다.
“무둔바! 지금처럼만 도와줘!”
무둔바가 땀이 흘러내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데이빗!”
정지우는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 구석을 데이빗에게 가리켰다.
아스널의 코너킥이었다.
“아스너- 얼! 아스너- 얼!”
아스널 원정 관중들이 팀 이름을 함성처럼 부르는 동안 외질이 달려가 코너킥을 준비했다.
“헤이! 꼼빠니!”
정지우는 손을 입에 대고 고함을 버럭버럭 질렀다.
막자! 막아 내자!
우리 전에도 이 팀 이겼었다.
외질이 공을 차기 직전에 손을 높다랗게 들어 사인을 보냈다.
그 순간이었다.
정지우는 힐끔 중앙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승부다! 준비해!’
박상민을 먼저 보았고, 이어서 레믹을 보았다.
퍼어어엉!
공은 정지우가 예상했던 그대로 날아왔다.
골키퍼 앞으로 날아오다가 바깥쪽으로 휘는 코너킥의 정석.
알면서도 절대 뛰어나가지 못하는 코스였다.
와락! 와라락!
코스를 짐작한 아스널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고, 라파엘과 데이빗, 스웰던이 그들을 몸으로 막아서며 뒤엉켰다.
와락!
정지우는 이를 악물며 공을 향해 달려 나갔다.
실패하면 텅 빈 골대에 공이 꽂히는 것을 봐야 한다.
그러니까! 난! 이 공을 꼭 잡아야 한다고!
휘이이익!
수비수들과 아스널 선수들의 바로 앞에서 마치 공을 잘라 먹으며 헤더를 하는 선수처럼 정지우가 뛰어올랐다.
어떻게 이 각도에서 공이 계속 솟구치지?
궤적으로 보면 떨어져야 하는데?
“이이익!”
틱! 자가락!
정지우가 악을 쓰며 뻗친 손가락 끝에 공이 걸렸다.
끔찍한 통증이 중지와 검지 끝에 느껴졌는데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지우의 손에 맞아 속도가 죽어 버린 공이 하늘로 튀었다가 얌전하게 떨어졌다.
꽈악!
정지우는 공을 잡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달려!”
한국말 고함이었다.
와락! 와락! 와라락!
박상민, 레믹, 꼼빠니, 카알, 신준석이 죽을힘을 다해 중앙선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번엔 내 차례다!
상황을 눈치챈 아스널 선수들이 자기 진영을 향해 뛰었고, 옐로카드를 각오한 것처럼 램지가 정지우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휘이이익! 콰악! 콰다당!
공을 던진 순간에 램지가 덮쳤고, 둘이서 함께 넘어졌다.
“예에에-!”
주심이 양팔을 아스널 방향으로 뻗었다.
유니온 시티의 공격을 위해 파울을 불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투욱!
『공을 받은 박상민! 오늘 처음으로 드리블을 선보입니다! 박상민! 공격 다섯! 수비 다섯!』
『빼 줘야죠! 넘겨줘야죠!』
투우욱!
박상민은 해설자의 조언을 들은 것처럼 오른쪽을 향해 공을 차 주었다.
다들 데니인 줄 알았다.
그런데 공은 박상민의 옆에서 달리고 있는 신준석의 앞을 구르고 있었다.
데니에게 몰렸던 아스널의 수비수 둘이 당황해서 다시 나오는 순간,
투욱!
신준석이 다시 박상민에게 공을 넘겨주었고,
투우욱!
공을 받은 박상민이 수비수들을 피해 오른쪽으로 공을 깊게 찔러 주었다.
“예에에-!”
오른쪽 페널티 에어리어 앞을 구르는 공을 향해 데니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신준석과 박상민을 향해 뛰어오던 수비수들이 급하게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퍼어엉!
데니가 체흐 골키퍼 앞을 지나는 크로스를 넘겼다.
와락!
레믹이 달려들었고, 체흐가 왼쪽으로 몸을 움직이며 각도를 좁혔다.
레믹의 발이 공에 닿는 순간에 체흐가 몸을 날렸다.
투욱!
레믹의 선택은 데이빗이었다.
몸을 던진 체흐를 스치듯 지나간 공이 텅 빈 골대 앞으로 흘렀고, 데이빗과 메르테자커, 코시엘니가 함께 달려들었다.
콰아악!
셋이 동시에 슬라이딩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 사람이 공과 함께 모두 골대 그물 안으로 처박혔다.
삐이익!
함께 뛰어왔던 주심이 휘슬과 동시에 중앙선을 가리켰다.
“예에에에에에에에에-!”
홈 관중들이 펄쩍펄쩍 뛰어가며 오늘 내내 기다렸던 함성을 질러 댔다.
골대에서 빠져나온 데이빗을 향해 동료들이 뛰어들었다.
솔직히 모양은 좀 이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밀렸던 것을 한 방에 만회하는 골이었다.
정지우는 양손 검지를 높다랗게 들고 영국의 밤하늘을 보았다.
‘어머니, 아직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데 약해졌었나 봐요. 오늘부터 다시 시작할게요. 그리고 잘할게요.’
손을 내린 정지우는 동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스널의 왼쪽 코너 플래그 쪽이었다.
일부러 보려고 한 게 아니었다. 시선 속에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보였다. 허리에 손을 얹은 체흐가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말이다.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홈 관중들이 양손을 이마 쪽으로 뻗으며 특유의 구호를 외쳐 댔다.
『공은 둥글다는 말을 하는데, 오늘 경기가 그 말을 잘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전반과 후반 중반까지 밀리던 유니온 시티가 단 한 번의 기회를 멋진 골로 연결했네요! 체흐가 먼저 기습을 시도했고, 정지우가 반격했기 때문에 마치 골키퍼들의 대결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데이빗에게 연결되는 과정이 정말 매끄럽지 않았습니까?』
『유니온 시티, 이렇게 오늘 아스널을 침몰시킨다면 이번 시즌 어쩌면 놀라운 성과를 이룰지도 모르겠네요. 꾸역꾸역 이기고 있거든요.』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어깨를 부여잡은 관중들이 제자리에서 뛰어가며 함성을 질러 댔다.
삐이익!
투욱! 툭!
경기 재개를 알리는 휘슬과 동시에 아스널은 빠르게 공을 돌렸다.
툭툭!
지루가 데이빗과 카알을 벗겨 내기 위해 드리블을 시도했다.
콰악!
그러나 오늘따라 거칠게 뛰는 데이빗과 부딪쳤고, 카알에게 공을 빼앗겼다. 양손을 높이 들고 억울함을 표시했으나 주심은 그런 지루를 외면했다.
투욱! 툭!
다시 유니온 시티의 공이었다.
바쁠 것 없다. 시간을 끄는 것도 나쁘지 않다.
깔끔하게 뛰던 아스널 선수들이 조금은 거친 동작을 연달아 펼쳤는데, 그런다고 공을 빼앗길 정도는 아니었다.
투툭!
공을 잡은 데니를 산체스와 몬레알이 막아섰고, 몬레알의 발에 맞은 공이 터치라인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삐이익!
『벵거 감독! 교체 카드를 꺼내 듭니다. 램지를 빼고 15번 옥슬레이드 채임벌린을 넣습니다.』
『후반 들어서 스웰던 쪽의 공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거든요. 오늘 전반적으로 아쉬웠던 램지를 교체하네요.』
교체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몸에 딱 달라붙는 유니폼이라 그런지 아스널 선수들이 어쩐지 좀 더 강인한 인상입니다.』
옥슬레이드 채임벌린이 자리로 달려오며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후반전이 20분쯤 남은 시간이었다.
아스널이 악착같이 달려들면서 경기가 좀 더 격렬해졌다.
한 골을 넣었지만, 솔직히 전체적인 리드는 역시 아스널의 몫이었다.
“Jun! Jun!”
마틴이 신준석에게 위치를 가리켰다.
좀 더 데이빗에게 집중하란 의미였다.
투욱!
데이빗이 찔러 준 패스를 아르테타가 가로챘다.
투욱! 툭!
아스널 특유의 패스가 살아나면서 공격의 중심이 또다시 그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골을 넣은 건 분명 유니온 시티지만, 경기의 전체 흐름을 아스널이 쥐고 있는 건 변함이 없었다.
투욱! 투욱! 퍼엉!
“예에-!”
그리고 세 번의 패스 만에 페널티 에어리어의 왼쪽으로 옥슬레이드 채임벌린이 달려들었다.
휘익!
그는 손을 뻗어 낸 스웰던을 뿌리치고 왼쪽 코너 플래그 앞까지 곧장 달렸다.
툭툭! 투욱!
두 번쯤 공을 몰고 온 그가 빠르게 페널티 에어리어 모서리를 향해 공을 빼 주었다.
수비수들의 위치는 나쁘지 않았다.
정지우는 공이 흐르는 대로 몸을 틀며 자세를 낮췄다.
툭!
아르테타가 넘어온 공을 그대로 방향만 바꿔 오른쪽으로 굴려 주었고,
투우욱!
외질이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 구석을 향해 찔러 넣었다.
투욱!
산티카솔라가 공을 향해 뛰어들었다.
완벽한 슈팅 동작이었다.
정지우가 움츠린 상태에서 그의 왼쪽 발의 방향을 노려보는 순간,
휘익!
그는 공을 그냥 지나쳤다.
퍼엉!
뒤에서 나타난 산체스가 공을 강하게 찼다.
눈으로 공을 따라가기조차 바쁜 느낌이었다.
빠르게 정지우의 앞을 지나친 공이 왼쪽 코너로 깔려 지나갔고, 아르테타가 달려들고 있었다.
움찔!
정지우가 자세를 잔뜩 웅크릴 때,
퍼어엉!
슈팅이 날아왔다.
화아아악!
생각할 틈이 없었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발에서 공이 떨어지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이 솟구친 느낌이었다.
이번에도 오른쪽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스널은 정지우의 오른쪽을 노리고 있었다.
시커먼 하늘과 야간 조명등이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고, 공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환상적인 연결이었고, 허를 찌르는 타이밍.
아스널의 능력과 실력이 완벽하게 발휘된 슈팅이었다.
정지우는 그러지 못했다.
그냥 몸이 반응했다.
발에서 공이 떨어지는 순간에 이미 몸이 솟구친 거였다.
터억!
손가락 끝에 공이 걸리는 순간, 또다시 끔찍한 통증이 팔을 타고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막았다!
통증을 느낀 순간에 정지우가 한 생각이었다.
털썩!
바닥에 떨어진 정지우가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
“예에에에에에에-!”
골을 넣은 것만큼이나 엄청난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를 가득 메웠다.
“이 괴물아!”
데이빗이 달려와 정지우와 손을 마주쳤고, 라파엘과 무둔바가 뛰어와 정지우의 머리와 등을 두드려 주고 달려갔다.
슈팅을 날린 아르테타, 패스를 연결해 준 산티카솔라와 산체스가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코너킥이었다.
시간이 아쉬운 아스널 선수들이 이번만큼은 골을 넣어 주마 하는 얼굴로 달려들었다.
삐이익!
휘슬이 울었고,
퍼어어엉!
패스처럼 공이 오른쪽 페널티 에어리어 구석으로 날아갔다.
퍼어어엉!
그리고 그 공이 왼쪽 골대 앞으로 날아왔다.
정지우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화아아악!
그리고 몸을 날렸다.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센터링인 것처럼 찼지만, 마지막 순간에 휘어 들어오는 공이었다.
꽈악! 털썩!
“예-!”
공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했던 아스널 선수들이 뛰어들었다가 정지우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공을 끌어안은 정지우의 주변으로 수비수들이 달려왔다.
무둔바와 스웰던, 신준석을 확인한 뒤에야 정지우가 천천히 일어섰다.
외질이 멍한 눈으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