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07화 (207/262)

제4장.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자신 있나? (1)

전반 막바지였다.

신준석과 스웰던이 밀고 올라간다고 해서 당장 크게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데이빗을 지켜 주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유니온 시티 진영에서만큼은 숨통이 트였다.

“오- 오오! 오- 오오!”

유니온 시티 관중들의 응원이 그라운드를 비추는 조명처럼 레드 블레이트를 메우기 시작했다.

아스널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실력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유니온 시티가 패스하는 도중에 공을 뺏길 정도는 아니었다.

투욱! 툭! 투욱!

유니온 시티의 패스가 점차 빠르게 살아나면서 잃었던 리듬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럴 때가 기회다.

정지우는 어딘가에 묻혀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던 레믹에게 계속 시선을 주었다.

힐끔.

레믹이 고개를 돌려 정지우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역할을 바꿔! 도와줘!’

정지우는 양손 검지를 그라운드로 향해 놓고 레코드판을 돌리는 것처럼 좌우로 움직였다.

‘도와주라! 이기자! 이겨 보자!’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반응은 빨리 나왔다.

“헤이!”

레믹이 중앙선까지 내려와 공을 달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투욱!

데이빗이 빠르게 질러 준 패스를 그가 곧바로 데니에게 연결했다.

“예에-!”

멋진 연결이었다.

수비수를 달고 달리는 박상민을 대신해서 레믹이 패스의 줄기를 열어 주었고, 그 덕분에 공격에서도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투욱!

데니의 패스가 모처럼 페널티 에어리어로 향했다. 그곳으로 옮겨 간 레믹에게였다.

퍼어어엉!

그리고 전반 막바지에 처음으로 유니온 시티의 슈팅이 나왔다.

“우-!”

짝짝짝짝짝짝짝!

빠르기는 했지만 날카롭지는 않았다. 체흐 골키퍼가 편안하게 가슴으로 받을 딱 그 정도였다.

『유니온 시티! 오늘 첫 유효 슈팅입니다.』

『수비수들이 박상민에게 몰린 틈을 타서 레믹이 멋진 연결과 슈팅을 보였어요! 후반을 풀어 나갈 실마리를 찾은 느낌인데요, 여기에 벵거 감독이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합니다.』

체흐가 길게 찬 공이 중앙선을 훌쩍 넘어왔다.

휘이익! 휘익!

데이빗과 램지, 카알이 동시에 솟구쳤는데 공은 카알이 따냈다.

터엉!

그의 머리에 맞은 공을 신준석이 잡았고, 아스널의 페널티 에어리어 중앙으로 빠르게 찔러 넣었다.

투욱!

레믹이었다.

그가 공을 잡자마자 바로 몸을 돌렸고, 아스널의 골대를 향해 치고 들어갔다.

“와아-!”

미드필더와 수비수 셋이 레믹의 앞을 막아서는 순간,

투욱!

레믹은 왼편의 꼼빠니에게 공을 주었고,

툭!

꼼빠니가 수비수들 틈으로 공을 찔러 넣었다.

와락! 와락! 와라락!

박상민이었다.

공을 향해 수비수들 틈에서 뛰어든 박상민, 그리고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든 수비수들.

콰악! 콰다당!

메르테자커의 태클이 있었고, 그와 박상민, 그리고 베예린이 뒤엉켜 골대 앞에 쓰러졌다.

“우와-!”

공이 골라인 바깥으로 흘러 나갈 때, 홈 관중들이 벌떡 일어서며 기대에 찬 함성을 질러 냈다.

그러나 주심은 고개를 저었다.

몸을 일으킨 박상민이 양손을 벌려 보이며 억울함을 표현했고, 레믹이 주심에게 달려들었다.

“우-!”

골대 근처의 관중들이 야유와 거친 말들을 퍼부었으나, 주심은 꿋꿋한 얼굴로 경기를 진행했다.

『박상민의 발을 먼저 건 것처럼 보이는데요?』

캐스터가 의아한 느낌의 질문을 던질 때 느린 그림이 나왔다.

메르테자커의 왼발이 박상민의 오른발을 걸었고, 중심을 잃은 박상민이 앞으로 넘어지면서 베예린을 덮친 모습이었다.

『주심은 공을 먼저 건드렸다고 판정한 거 같네요.』

『선심이 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유니온 시티로서는 많이 아쉬운 장면입니다.』

그라운드에 공을 놓은 체흐가 코시엘니에게 차 줄 때, 추가 시간 2분이 표시되었다.

아스널이 서서히 앞으로 몰려왔다.

빠른 패스는 여전했다. 그러나 눈에 익었고, 잠시나마 분위기가 유니온 시티로 넘어온 상황이었다.

분위기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흐름이 어느 팀으로 넘어오느냐는 경기 전반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긴장을 풀어낸 것처럼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좀 더 편안하게 달렸다.

아스널의 패스가 전처럼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오지 못하면서 시간이 끌렸고,

삑! 삐이익!

주심이 전반 종료를 알렸다.

정지우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통로를 향해 걸었다.

수비수들과 동료들을 지적하기에 앞서 오늘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Ji! 기운 내!”

목청 큰 관객의 응원을 들으며 정지우는 통로에 들어섰다.

아스널 선수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세계적인 선수면 뭐? 어떡하라고?

이름값에 주눅이 든 건 정지우도 동료들과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휘익! 터억!

라커룸에 들어선 정지우는 자리로 돌아가 수건과 장갑을 있는 힘껏 자리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JI WOO JUNG’이라고 적혀 있는 라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부끄럽다. 이런 모습까지도.

그러나 참고 있던 화가 한순간에 폭발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기가 어려웠다.

“후우!”

숨을 토해 낸 정지우는 자리에 앉아 물을 마셨다.

라커룸의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반병쯤 물을 들이켠 뒤다. 물병을 손에 든 채 정지우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분위기 망쳐서 미안해. 그런데 내 플레이가 못마땅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정지우는 다시 남은 물을 마지막까지 전부 마셨다.

“후! 다른 때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솔직히 오늘은 아스널의 이름값에 주눅이 들었었나 봐. 내가 어설프게 굴어서 전반을 망쳤어. 미안하다. 후반은 제대로 할게.”

숙연한 분위기에서 다들 땀을 닦거나 물을 마셨다.

달칵.

5분쯤 지난 뒤에 마틴이 들어왔다.

“전반을 제법 잘 견뎠는데 분위기가 왜 이래? 경기 끝난 줄 알았다.”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Ji! 박 감독이 전해 달라는 말이 있다.”

정지우뿐만 아니라 동료들 전체가 마틴이 전해 줄 말을 듣기 위해 시선을 들었다.

마틴은 분위기를 이끌 줄 아는 감독이었다. 그는 바로 이야기를 전하지 않고 픽 웃으며 뜸을 들였다.

“거칠게 하라고! 얌전하게 당하는 건 Ji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하더군.”

마틴이 진지한 표정으로 전해 준 말이었다.

“나도 느낀 바가 있지. 우리가 챔피언십에서 뛰었던 모습들을 떠올렸다. FA컵을 우승할 때 사자같이 뛰던 유니온 시티 선수들은 어디 갔나?”

마틴이 천천히 라커룸을 돌아보았다.

“또다시 레이디스 팀이 된 건가? 스웰던! 얌전한 스웰던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데이빗이 몸으로 선수들을 막고 있을 때 어디 있었나? 사이드라인이 잘 그려졌는지 확인하기라도 했나?”

마틴이 천천히 구석으로 걸어가서 물병을 집어 들었다.

따르륵.

그가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삶은 캐비지처럼 늘어진 유니온 시티 선수의 모습이라니! 이제 고작 7라운드다! 철강 노동자의 축구팀, 유니온 시티가 뛴 경기 수다!”

마틴의 음성이 꽤 높아져 있었다.

“질 때 지더라도! 꼬리에 불붙은 황소처럼 달리는 게 철강 도시의 선수들이다! 정교함으로 아스널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나! 너희는 오늘 끔찍한 전반을 보였어!”

마틴의 이런 모습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그동안 ‘얌전한 아가씨들’이라고 약 올리면 올렸지, 경기 중간에 소리를 지른 적은 없었다.

“Ji.”

“예, 코치.”

“교체를 원하나?”

“아닙니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자신 있나?”

“물론입니다.”

선수들이 마틴과 정지우를 번갈아 보았다.

“스웰던.”

“예스, 코치.”

“후반에는 벤치에서 휴식이 필요한가?”

“아닙니다.”

마틴은 그제야 손에 들었던 물병을 움직여 목을 축였다.

“레믹.”

“예스, 코치.”

“후반에도 전반 막판처럼 팀을 위해 헌신해 주겠지?”

“물론입니다.”

레믹이 손날을 가로로 저으며 분명하게 답을 했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바라는 경기! 유니온 시티의 본질을 잊지 않는 경기!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경기다!”

말을 마친 마틴이 날카롭게 안을 둘러보고는 라커룸을 나섰다.

달칵.

문을 닫는 소리 뒤로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그 바람에 홈 관중들이 부르는 응원가가 좀 더 분명하게 선수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우리 전반이 엉망이었던 건 인정하자. 하지만 후반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성적을 내도 항상 우리를 응원해 주었던 관중들을 잊지 말자.”

데이빗이 나직하게 동료들에게 말을 건넨 다음이었다.

“내가 너무 얌전했었던 모양이군.”

스웰던의 걸걸한 음성이 들렸고,

“Ji, 전반엔 나도 당황했었다. 후반에 내가 주의할 것들을 알려 줘.”

무둔바의 굵직한 당부가 나왔다.

후반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분위기를 잡아야 할 순간이었다.

“코치의 말대로 나부터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어. 후반은 우리 방식대로 하자. 악착같이 달려들고, 좀 더 뛰고, 빈자리 도와주는 우리 경기.”

동료들 전체의 시선이 정지우를 향해 있었다.

“원래 자리를 지켜 줘. 밀리지 마. 나머진 내가 책임질 테니까. 레믹! 수비 도와주고, 아까처럼 경기 풀어 줘.”

레믹의 눈에 사명감이 잔뜩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후반을 준비하라는 벨 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코치가 바라던 경기를 한번 해 볼까?”

데이빗이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들을 격려했다.

자가락! 자가락!

후반을 위해 통로를 걷는 동안, 아스널 선수들과 자연스럽게 스쳤다.

시선 따위 신경 쓰이지 않았다.

FA컵에서부터 지금까지 오는 동안, 한국에서 브라질 국가대표를 상대한 적도 있었고, 첼시, 리버풀과도 멋진 승부를 만들어 낸 경험도 있었다.

아스널도 무실점으로 막아 냈던 정지우다.

정지우는 묵묵하게 통로를 걸어 그라운드로 나갔다.

짝짝짝짝짝짝짝짝!

후반을 기다렸던 관중들이 선수들을 박수로 격려해 주었다.

저녁을 누런 봉투에 담긴 햄버거로 대신한 관중들이었다.

입장료를 부담하며 홈 팀의 승리를 간절하게 바라는 관중들이었다.

프로 선수라면 저들에게 제대로 된 경기를 선보일 의무가 있는 거다.

정지우는 정해진 골대로 움직여 양쪽 포스트를 발로 찼다.

그리고 중앙으로 걸어가 높다랗게 뛰며 크로스바를 터치했다.

“예에-!”

한결같은 함성이었다.

기록을 위해 뛴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뛴 덕분에 만들어진 기록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기록이라는 이름에 눌렸던 모양이었다.

와라! 와 봐라!

정지우는 양팔을 높게 들어서 어깨와 가슴을 펼치고 앞을 노려보았다.

삐이익!

후반을 알리는 휘슬이 들렸고, 정지우의 눈에 영국의 밤하늘이 보였다.

막아 낸다. 이 경기도 최선을 다해 막아 낼 거다.

“오- 오오! 오- 오오!”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양 팀 모두 전반과 선수 변화는 없어 보입니다.』

『특별한 이상이 없는 한, 70분 근처로 해서 교체가 있을 것 같네요. 전반의 좋은 흐름을 계속 이어 가려는 아스널과 리듬을 되찾으려는 유니온 시티의 대결이 되겠어요.』

투욱.

레믹이 공을 가볍게 차 주었다.

박상민이 후반 시작과 함께 공을 받았고, 곧바로 데이빗에게 넘겨주었다.

투욱!

데이빗이 카알에게, 카알이 신준석에게 패스했고, 그 공이 다시 데이빗에게 돌아갔다.

리듬이 좋았다. 전반에 비해 동료들의 움직임도 훨씬 부드럽게 보였다.

퍼어엉!

좋은 리듬은 좋은 결과를 낳는다.

빠르게 유니온 시티의 진영을 돌던 공이 길게 넘어갔다.

“와아-!”

앞쪽으로 무게를 실은 아스널의 빈 곳을 제대로 찌른 패스였다.

데니가 달려가 공을 잡았고, 곧바로 레믹에게 넘겼다.

퍼엉!

“예에-!”

레믹은 공을 잡자마자 이번에는 반대편 코너로 공을 날렸다.

꼼빠니였다.

그가 데니처럼 빈 곳을 파고들어 공을 잡았다.

툭툭!

두 번 치고 달린 꼼빠니가 스웰던에게 공을 빼 주었다.

퍼어어엉!

스웰던이 골대를 향해 공을 날렸고, 선수들이 뒤엉켜 뛰어올랐다.

솔직히 밋밋한 센터링이었다.

그러나 좋은 흐름에서 나온 모처럼 만의 공격이라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화아악!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몸을 날려 공을 잡은 체흐가 마치 정지우를 흉내 내는 것처럼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달린 거였다.

너만 해? 우리도 할 수 있어!

느낌은 그랬다.

휘이이익!

그가 기다랗게 던진 공을 아르테타가 받았고,

퍼어엉!

아르테타는 곧바로 유니온 시티 한중간에 있는 외질에게 전해 주었다.

“예에에-!”

원정 관중들이 커다랗게 함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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