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Ji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를. (2)
박용근이 멍하니 전술판을 바라보고 있는 바람에 어색한 침묵이 소파 주변으로 번졌다.
잠시 후, 상황을 알아차린 박용근이 정지우와 동기들을 돌아보았다.
“미안하다. 무슨 질문이었지?”
“아, 예. 아스널을 상대로도 준석이와 스웰던이 공격에 치중해도 될지를 여쭸어요.”
박상민이 전술판을 슬쩍 밀면서 얼른 질문을 다시 건넸다.
“흠.”
박용근은 제대로 된 답이 생각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감독님, 내일 영상 보면서 다시 여쭐게요. 저도 궁금한 게 있었는데 정리가 아직 안 됐거든요.”
“그게 좋겠다. 감독님, 그럼 전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정지우의 말에 신준석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럴래?”
“예, 감독님. 편히 쉬세요.”
정지우는 박상민과 함께 현관을 나섰다.
스쳐 가는 바람 끝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감독님, 무슨 걱정 있으시냐?”
“글쎄다.”
“너도 모르는 것 같긴 하더라. 아효! 우리 감독님, 리저브 팀 챙기랴, 우리 챙기랴, 거기에 리그 경기까지 준비해야 하시니까 솔직히 걱정이 없는 게 이상하긴 하다.”
신준석이 입맛을 다시며 푸념 같은 걱정을 털어놓았다.
“간다. 푹 자고 내일 보자.”
“길 찾아갈 자신 있지?”
“어이구! 올 때도 혼자 왔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파트를 좀 큰 거로 옮기자고 해 볼까? 손바닥만 한 데서 함께 있으려니 눈치 아닌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러면 어제 와서 자고 가지?”
“다음 주에는 정말 신세 질지 몰라. 간다!”
신준석이 손을 흔들고는 집을 향해 움직였다.
“들어가자.”
박상민과 함께 현관에 들어섰을 때 박용근은 아직 거실에 있었다.
“감독님, 저 올라갈게요. 편히 쉬세요.”
박상민이 2층으로 올라갈 때, 정지우는 소파로 걸어가 박용근의 맞은편에 앉았다.
“걱정 있으세요?”
박용근은 잔잔하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아직은 말하기 곤란한 박용근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는 먼저 잘게요. 편히 쉬세요.”
“그래. 잘 자라.”
무슨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박용근이 딱히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분명 그럴 사정이 있거나, 아니라면 시간이 필요한 일인 거다.
정지우는 잠자리에 들면서 아스널과의 경기를 머릿속에 그렸다.
경기를 하루 앞두고 특별한 전술을 익힌다는 건 무리다.
월요일 오전은 역시 지금까지의 리듬을 잃지 않는 선에서 간단한 훈련이 있었다.
그 외에 마틴은 프리킥 상황이나 코너킥 상황에서 신준석과 스웰던의 적극적인 공격 가담을 주문했다.
“지금까지 코너킥 상황에서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경계가 허술할 수 있어. 외곽에서 뛰어들면서 헤더를 따냈으면 싶다. 그때는 데이빗과 카알이 수비를 지원해 주고.”
마틴의 지시에 따라 꼼빠니가 코너킥을 올렸고, 스웰던과 신준석이 골대로 달려들며 점프했다.
“좋아!”
몇 차례 상황을 반복한 마틴이 손뼉을 치고는 훈련을 마쳤다.
점심을 먹었고, 식사가 끝날 무렵 명단이 올라왔다.
아스널전의 선발 명단은 이전과 한 명이 달랐다.
바로 박상민의 선발이었다.
최근 들어 완전히 물오른 기량에 ‘유니온 시티의 폐’라고 불릴 정도로 활동량이 뛰어난 박상민이니 어쩌면 선발은 당연한 일일 거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빤한 스쿼드에서 어떡해서든 변화를 주려는 스태프의 고심이 보이는 명단이기도 했다.
한 명의 선수를 고심 끝에 바꿀 정도로 아스널은 어려운 상대였다.
***
기사를 작성하던 장진모가 책상 한쪽에 놓인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화면 하나에 6개의 보도 방송이 동시에 올라왔는데, 이어셋을 꽂고 번호를 누르면 선택한 채널의 음성이 들린다.
『아스널이 내일 경기에서 유니온 시티를 이긴다면 선두로 올라설 수 있지만, 패배할 경우 맨시티와 토트넘의 경기 결과에 따라 3위로 밀릴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스포츠 채널이었다.
앵커는 어쩐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소식을 계속 전했다.
『오늘 인터뷰에서 벵거 감독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지난 FA컵 경기에서 유니온 시티에 의해 탈락한 아픔을 지니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인터뷰 영상 보시겠습니다.』
바뀐 화면에서 벵거 감독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유니온 시티의 무실점 기록을 깰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득점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입니까?』
『득점 없이 승리할 방법이 있다면 알려 주시오.』
벵거의 답이 떨어진 직후였다.
『Ji는 FA컵에서 아스널을 상대한 이후로 지금껏 무실점입니다. 그때와 다른 무언가가 없다면…….』
『그는 분명 훌륭한 재능을 지닌 선수요. 그러나 그가 앞으로 있을 모든 경기를 무실점으로 끝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소. 그러니 이제는 그 이상한 질문 말고 좀 더 기자다운 질문을 좀 부탁하겠소.』
벵거가 기자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는 장면에서 화면이 멈췄고, 앵커의 음성이 다시 나왔다.
『이번 시즌 최고의 팀은 유니온 시티입니다. 그들은 소위 스타급 선수를 단 한 명도 영입하지 않은 채 훌륭하게 초반을 견뎌 왔고, 선두에 올랐습니다.』
정지우의 선방 장면을 시작으로 박상민, 신준석의 모습이 이어졌고, 벤치에서 경기에 집중하는 박용근의 모습이 나왔다.
『다음 소식입니다. 프리미어리그에 재정상 문제가 불거질 팀이 나올 거라는 루머가 돌고 있습니다. 어느 팀인지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마케팅을 위해 일부러 추문을 뿌린 것이란 말이 나도는 가운데…….』
장진모는 이어셋을 뽑고 작성 중이던 기사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유니온 시티는 아닐 거 아냐?”
혼잣말을 중얼거린 장진모가 고개를 모니터에 들이밀었다.
“젠장! 몇 번이나 봤다고!”
그러면서 그는 계속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되게 보고 싶네.”
타다닥! 타다다닥!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자판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나왔다.
***
아스널과의 경기는 9월 29일 화요일 저녁 7시였다.
최근 몇 경기가 연속해서 평일 저녁에 있어서 유니온 시티를 응원하는 홈 관중들에게는 부담스럽기도 할 일정이었다.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대략 오후 5시가 살짝 넘어간 시간이었다.
그때쯤 관중들이 줄줄이 통로를 통해 들어와 좌석을 메우기 시작했다.
누런 종이봉투에 저녁을 대신할 햄버거를 들고 올 정도로 급하게 달려온 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통로를 나와 선수들을 보는 순간에 주먹을 불끈 쥐곤 했다.
저녁을 저렇게 때워도, 급하게 달려오느라 숨이 차도, 그들이 응원하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보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는 의미의 제스처였다.
저렇게 좋을까?
막말로 그 힘겨운 노동을 대신해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주면서?
프로 선수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저런 관중들에게 최고의 경기를 보여야 하기 때문인 거다.
관중석을 둘러본 정지우가 얀센과 호흡을 맞추며 잠시 달리고 난 뒤였다.
“Ji! Ji!”
익숙한 음성이 정지우를 찾았다.
관중석이 아직 다 차지 않아서, 응원가 소리가 평소보다 작아서 들을 수 있었던 음성이었다.
본부석 쪽 코너킥 자리로 고개를 돌린 정지우가 얼굴에 웃음을 담았다.
골키퍼 장갑을 낀 채로 두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는 빌을 발견해서였다. 그의 양옆에서 토미와 샌디가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잠시만.”
정지우는 천천히 달려서 빌의 앞으로 움직였다.
우르르.
관중들이 앞으로 몰려들자 안전 요원들이 단박에 정지우를 막아섰다.
“잘 지냈어?”
“물론이야! Ji! 나 인정받는 골키퍼가 됐어!”
주변에 몰려든 관중들이 정지우를 향해 ‘미스터! 어메이징! 유니온 시티를 지켜 줘!’ 하며 악을 써 대는 바람에 더는 대화를 잇기 어려웠다.
정지우는 눈인사와 미소로 답하고 몸을 돌렸다.
“누구야?”
“내 친구.”
얀센이 놀랍다는 투로 힐끔 빌을 보았는데 더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스널은 강한 팀이다. 한 번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더 부담스러운 팀이었다.
얀센이 던져 주는 공을 받으며 정지우는 문득 FA컵에서 아스널을 상대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병원에 있던 릴리와 초대권으로 입장한 빌이 지금과 같이 응원해 주던 그날, 그 경기를 말이다.
라커룸으로 향할 시간이어서 정지우는 통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라운드를 향해 쏟아지는 우렁찬 응원가 속에서 아스널 선수들이 대놓고 정지우를 바라보곤 했다.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팀 선수들, 그중에서도 매 경기 선발 출전하는 선수들이라면 어지간한 팬들은 이름을 기억한다.
지금의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그랬다.
그러나 아스널의 선발은 이미 몇 해 전, 아니라면 그 이전부터 이름을 떨치던 스타급 선수들이 많았다. 함께 경기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거나, 마음 같으면 사진 한 장 개인적으로 찍고 싶은 선수들이다.
실제로 신준석은 딱 그런 눈으로 아스널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어쩐지 긴장되는걸?”
실제로 긴장한 얼굴로 던지는 말이라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라커룸의 분위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치러 낸 리그 경기의 경험 덕분에 처음같이 팽팽하지는 않았지만, 아스널이라는 무게에 다들 긴장을 털어 내지는 못한 느낌이었다.
경기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스널이 주는 중압감이 서서히 라커룸을 차지하고서 선수들을 짓눌렀다.
정지우는 시선을 내려 손에 든 골키퍼 장갑을 바라보았다.
FA컵, 커뮤니티 실드 등에서 강팀들을 상대해 왔고, 그들을 물리쳐 왔지만, 당시에는 정지우를 전혀 인식하지 않을 때라 지금과 비교하기 어렵다.
무실점이라는 타이틀이 그들에게 굴욕으로 느껴질 상황이고, 이미 이전 경기와 리그 경기들을 통해 정지우를 분석했을 아스널이다.
“후우.”
정지우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동료들을 믿어야 한다.
상대가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유명한 선수들로 도배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승리를 담보하지는 않는 거다.
아스널의 반도 안 되는 몸값의 팀이라도 승리할 수 있는 경기, 그것이 축구다.
『아스널은 4-5-1의 포메이션을 선택했습니다. 최전방 공격수에 12번 지루, 이어서 램지, 플라미니, 외질, 산티카솔라, 산체스, 포백에 베예린, 메르테자커, 코시엘니, 몬레알, 골키퍼 장갑은 이번 시즌 첼시에서 이적해 온 체흐가 끼었습니다.』
『유니온 시티를 상대하는 팀은 4-5-1 포메이션을 정답처럼 선택하고 있어요. 이전 경기들을 통해 유니온 시티의 특징을 파악한 벵거 감독이 어떤 전술을 들고 나올지 기대됩니다.』
『유니온 시티는 오늘 박상민을 선발로 내세웠습니다.』
캐스터가 유니온 시티의 선수를 소개했다.
『맥슨 자리에 박상민 선수를 세웠어요. 오늘은 양 팀 벤치가 들고 나온 전술을 비교하면서 경기를 보시면 더 재미있을 것 같네요.』
평택의 빌라는 역시나 새벽에 TV를 틀어 놓았다.
고대했던 박상민의 선발이었다.
9월 말이라 잔인했던 더위가 한풀 꺾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박상민의 부친은 얇은 담요로 다리를 덮고 있었다.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우리 선수 세 명이 선발로 나서는 경기를 본다는 게 가슴 뿌듯하네요. 이정렬 선수가 얼른 부상에서 회복해서 우리 선수 네 명이 선발로 나서는 것을 보고 싶은 욕심도 드네요.』
관중들의 함성 속에서 선수들이 벤치를 향해 섰다.
정지우는 천천히 숨을 뱉어 냈다.
간단한 행사가 끝나고 데이빗이 동전을 던졌으며, 정지우는 또다시 골대를 선택했다.
아스널 선수들이 차례대로 움직이며 악수를 나누며 지나갔다.
손을 잡으면 자연스럽게 상대 선수의 눈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의 눈빛에 담긴 것은 승리에 대한 욕망이었다.
차례로 인사를 마친 아스널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들어설 때 유니온 시티 선수들도 몸을 돌려 그라운드로 움직였다.
정지우는 골대로 움직여 양쪽 포스트를 발로 확인했다.
홈경기다.
이 골대는 늘 훈련하던 바로 그 골대이고, 골키퍼 에어리어의 잔디 상태까지 세세하게 아는 레드 블레이트다.
골대의 중앙에 선 정지우가 펄쩍 뛰어서 크로스바를 터치하는 순간이었다.
“예에에에에에-!”
『지금은 저 동작을 관중들이 오히려 기다리는 분위기입니다. 마치 골을 넣은 것처럼 커다란 함성이 터졌습니다.』
『아무래도 아스널을 상대하는 데다 오늘 경기가 현재 프리미어리그 선두와 2위의 싸움이기에 더 그럴 거예요. 아스널이 이 경기를 잡으면 바로 선두로 올라서거든요.』
『양 팀 선수들 중앙에 섰습니다.』
삐이이이익!
『주심, 휘슬로 경기 시작합니다. 아스널의 선공, 지루, 외질에게, 외질, 가볍게 공을 뒤로 돌립니다.』
『빠르죠. 아스널의 저 빠른 패스가 앞으로 나올 때를 조심해야 해요. 특히 외질의 패스만큼은 반드시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어요.』
“우와- 아!”
『박상민, 공을 향해 빠르게 달립니다. 움직임으로 봐서는 박상민이 외질을 담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레믹부터 박상민, 꼼빠니, 데니가 공의 움직임에 따라 달려들었다가는 곧바로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