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정지우를 믿었다. (3)
얀센의 왼쪽이었다.
퍼어엉!
라파엘을 제친 아그본라허가 곧바로 슈팅을 날렸다.
공은 왼쪽으로 치우친 얀센의 오른쪽을 낮게 파고들었다.
이미 몸이 기운 상태라 되돌리기는 늦었다.
화악!
얀센이 오른발을 쭉 뻗었고,
티잉.
발끝에 공이 걸려 위로 튀었다.
무릎 높이로 튀어 오른 공이 골대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퍼엉!
골대를 향해 몸을 날린 신준석이 거짓말처럼 공을 걷어 냈다. 회전을 먹은 공이 커다랗게 휘어서 골라인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예에-!”
“우-!”
양 팀 관중들의 함성과 탄식이 뒤엉켜서 그라운드로 쏟아졌다.
아그본라허가 양손을 높게 들고 골대로 들어갔었다는 의미로 선심을 돌아보았다.
TV 화면에서 카메라가 골대 위로 빙글 움직였다.
양쪽 골포스트를 잇는 선이 나오고, 공의 위치가 그 위에 따로 그려졌다.
『이렇게 보면 분명 라인을 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골이 아닙니다!』
『얀센이 우선 발로 막아서 속도를 줄였구요! 그걸 신준석 선수가 걷어 냈어요!』
얀센이 다가가 신준석과 손바닥을 마주치고 코너킥에 대비했다.
공을 세워 놓은 카를레스가 높다랗게 손을 들었다.
골대 앞에서 선수들이 뒤엉켜 뛰어다니고, 몇 명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삐이이익!
휘슬과 동시에 카를레스가 달려 나왔다.
퍼어엉!
그는 짧게 공을 날렸다.
휘이익! 휘익!
스웰던과 산체스 모레노, 라파엘과 웨스트우드가 동시에 뛰어 올랐다.
터엉!
공은 스웰던의 머리에 맞고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 쪽으로 날아갔다.
퍼어엉!
그라운드로 떨어지는 공을 7번 바쿠나가 그대로 걷어찼다.
제대로 걸렸다면 막기 어려울 슈팅이었다.
그러나 살짝 빗겨 맞는 바람에 얀센이 곧바로 엎어지며 잡아냈다.
짝짝짝짝짝짝짝!
일단 위기를 넘겼다.
데이빗이 동료들에게 팔을 뻗어 가며 라인을 조절했는데 적당한 순간이었고, 나쁘지 않은 조율이었다.
투욱!
얀센은 카알에게 공을 굴려 주었다.
카알은 신준석에게 공을 주었다가 다시 돌려받았다.
투우욱!
그 공이 데니에게 넘어갔고, 데니가 카알, 카알이 맥슨에게 넘기며 유니온 시티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애스턴 빌라 선수들이 데니를 막아서며 터치라인으로 공이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삐이익!
애스턴 빌라가 선수 교체를 요청했다.
후반이 20분쯤 지난 다음이었다.
『애스턴 빌라, 25번 카를레스 길 선수를 빼고, 19번 아예우 선수를 투입합니다. 좀 더 변화를 주겠다는 의미일까요?』
『아예우는 개인 돌파가 가능한 선수거든요. 후반이 25분가량 남았으니까 꼼빠니와 스웰던 쪽을 공략해 보겠다는 의도처럼 보이네요.』
아예우가 들어오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유니온 시티의 스로인이었다.
신준석이 카알을 향해 공을 던져 주었다.
이후로 10분쯤 빠르게 공격을 주고받았지만, 딱히 위협적인 장면 없는 경기가 이어졌다.
맥슨이 날린 중거리 슛이 관중석 중간으로 날아간 다음이었다.
삐이익!
『애스턴 빌라의 최전방 공격수 아그본라허가 나오고, 39번 제스테트가 들어갑니다. 어? 유니온 시티도 선수 교체가 있습니다.』
『수비수 멜스 선수네요. 그렇다면 무둔바나 신준석을 교체할 가능성이 있는데요?』
『신준석이 나옵니다.』
『오늘 정지우 선수나 박상민 선수도 그렇고, 월드컵 예선에 따른 피로를 계산한 교체라고 보이네요.』
짝짝짝짝짝짝짝.
신준석이 천천히 달려와서 멜스와 교체했다.
벤치로 걸어온 신준석이 힐끔 고개를 들었다.
잘 풀리지 않는 경기를 뛴 선수들은 쉽게 지친다. 지금 신준석의 표정이 꼭 그랬다.
경기가 다시 진행되었다.
이후로 추가 시간이 표시되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삑! 삑! 삐이익!
『프리미어리그 제5라운드 유니온 시티와 애스턴 빌라의 경기는 0 대 0 무승부로 끝납니다. 이로써 양 팀은 승점 1점씩을 나눠 가졌습니다.』
『전체적으로 양 팀이 다 엉덩이를 뒤로 뺀 상태에서 경기를 진행했기 때문에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지는 경기였네요.』
『이번엔 박상민 선수가 화면에 나옵니다. 아무래도 박상민을 기용하지 않은 데 대한 의문 같은 걸까요?』
말을 마친 캐스터가 간단한 인사말을 전한 후, 중계방송을 마쳤다.
호프집은 김빠진 맥주처럼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정지우가 빠지니까 확실히 재미가 없네. 박상민이라도 좀 내보내 주지. 그랬으면 한 골이라도 넣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축구가 골키퍼 바뀌었다고 팀 분위기가 바뀔 수가 있는 건가? 오늘 좀 이상한 거 맞지?”
“우리가 알던 유니온 시티 경기는 아닌 거지.”
남은 맥주와 안주를 즐기는 남자들 몇몇을 제외하고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있었다.
홈 관중들에게 인사를 마친 선수들이 통로로 들어선 다음이었다.
“얼른 가서 저녁 먹어.”
전은주는 두 사람을 쫓듯이 보내 주었다.
데이지와 주차장으로 향한 정지우는 그녀가 가져온 승용차의 조수석에 올랐다.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승용차였다.
“저녁 예약 안 했죠?”
“아!”
토요일 저녁이다. 예약하지 않고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은 거였다.
“차를 준비하지 않는다고 할 때 알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곳에 가도 되겠어요?”
“미안해요.”
씨익 웃어 준 데이지가 차를 움직였다.
꼬박 한 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유니온 시티 외곽의 허름한 식당이었다. 맥주와 정지우의 손바닥만 한 스테이크, 그리고 햄버거를 파는 그런 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어? Ji?’ 하고 소리쳤고, 이어서 거의 모든 손님이 정지우를 향해 손을 흔들거나 소리를 질렀다.
“데이지, 예약 안 한 건 미안한데, 좀 더 괜찮은 곳으로 가는 게 어때요?”
“나 때문이면 괜찮아요. 내가 좋아하는 곳이거든요.”
데이지가 주변을 둘러볼 때 수첩과 볼펜을 든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먼저 커다란 손을 내밀어 정지우에게 악수를 청하고 나서 주문을 받았다.
“여기 스테이크 괜찮아요.”
“그럼 그걸로 하죠.”
두 사람분의 스테이크를 주문했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음식을 먹는 동안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신, 지금도 축구 생각이 머리에 남아 있죠?”
스테이크를 삼킨 데이지가 고개를 기울여 정지우를 들여다보았다.
“내가요?”
“솔직히 말해 봐요. 그런 거 맞죠?”
정지우가 픽 하고 웃자 데이지가 비슷하게 따라 웃었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어요.”
냅킨으로 입을 닦은 데이지가 차를 먼저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저녁 먹자고 안 했으면 데이트 신청 안 할 생각이었어요? 난 당신이 내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라도 자리를 만들어서 꼭 확인하고 싶었어요.”
머리를 자연스럽게 내린 데다 재킷을 입고 있어서 의사 가운을 걸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은 거죠?”
“그게 가장 현명하기도 하죠.”
정지우는 처음에 느꼈던 감정부터, 관심이 없나 싶었던 순간, 그리고 축구에 집중하지 못할까 염려했다는 말까지를 순서대로 털어놓았다.
“감독님은 뭐라셨어요?”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시던데요?”
이번엔 데이지가 먼저 웃었고, 정지우가 비슷하게 따라 웃었다.
“우리 나가요.”
데이지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정지우는 그녀를 따라 식당을 나섰고, 함께 차를 타고 움직였다. 경기가 끝나서도 아니고, 공항에서 이동하는 것도 아닌데 어두운 도로를 달리는 거다.
갑자기 이런 상황이 웃겨서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왜요?”
“그냥요. 경기나 공항에서 오는 게 아닌 거로 이렇게 밤에 움직여 본 게 얼마 만인가 싶어서요.”
20분쯤 달리자 항구가 나왔다.
가을이 시작되는 영국의 밤바다 앞에 차를 세웠다.
차 문을 여는 순간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코를 타고 들어왔다.
바다를 정면에 둔 나무 벤치에 데이지와 둘이서 앉았다.
“환자를 잃거나, 너무 힘들다고 느껴질 때면 오는 곳이에요. 그냥 멍하니 앉아 있으면 바다가 위로해 주는 느낌이었거든요.”
멀리 시선을 둔 데이지가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바다에게 약속했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소개해 주겠다고요.”
데이트 신청도 데이지가 먼저 했는데, 프러포즈도 그녀가 먼저 한 꼴이었다.
“뭐라고 인사하면 되는 거죠?”
데이지가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솔직한 게 제일 좋아요.”
고개를 끄덕인 정지우는 바다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자주 올게, 이 사람과.”
이럴 때 뭔가 멋진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정말이지 멍청한 말이 나오고 끝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Ji, 우리 천천히 가 보죠. 당신 속도에 맞춰서.”
시선을 돌린 데이지가 편안한 미소와 함께 건네준 말이었다.
“당신이 나랑 같은 감정이라는 것에 만족할게요. 그리고 응원할게요.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으로요.”
데이지가 팔을 뻗어 정지우의 목을 안아 주었다.
“그날 병원에서 고마웠어요. 릴리 수술 들어가기 전에요. 당신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 그때 처음 했었어요.”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11시쯤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박용근과 전은주, 박상민이 모두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저녁은 먹었니?”
“예.”
세 사람이 소파에 있는 이유가 뭐겠나.
정지우는 오늘 있었던 일을 대강 설명해 주었다.
“뭐야? 가능하면 경기 다음 날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고? 그게 다야?”
박상민은 상당히 실망한 얼굴이었다.
“그럼 뭘 기대한 거야? 아 참! 2주 뒤에 저녁 초대하기로 했어요. 날짜는 어머니랑 의논해서 정하기로 했구요.”
첫날의 데이트는 그렇게 끝났다.
일요일에 회복 훈련이 있었다.
정지우는 부상자 명단이고, 박상민은 경기에 나서지 않아서 굳이 구장에 갈 이유는 없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둘이서 애스턴 빌라전의 영상을 함께 보았다.
“상민아, 저기 중앙에서 공을 받을 때 말이야.”
정지우는 어제 경기에서 느낀 바를 말하기로 했다.
“첼시나 아스널, 맨유 같은 팀이 영상 분석을 안 할 리는 없잖아. 그러니까 그들도 너를 꽁꽁 묶을 방법을 가지고 올 거라고. 그런 상황에서 공을 지킬 방법이 필요해.”
박상민이 입술에 힘을 꾹 주고 화면을 노려보았다.
“준석이가 한 방에 넘긴 게 그나마 가장 효과적이었거든. 빠른 역습도 좋은데, 내 생각엔 네가 데이빗이나 카알과 포지션을 위아래로 바꾸는 게 어떨까 싶은데?”
“내가 날 마크하는 선수들을 끌고 나왔을 때, 그 빈 곳을 노리자는 거지?”
“그렇지! 대신 중간에 공을 빼앗겼을 때 네가 오히려 수비에 가담해 줘야 하는 부담은 있다.”
“뛰는 건 자신 생겼어. 그런데 이런 걸 우리끼리 정하고 해도 될까?”
박상민의 염려는 일리가 있었다.
“어차피 오후에 유로파 리그 상대 팀 영상 함께 볼 거니까, 그때 여쭤보자.”
애스턴 빌라의 영상을 모두 보고 나서 박상민은 자신이 느꼈던 답답한 부분을 정지우에게 털어놓았다.
둘이서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신준석이 들어왔다.
“사모님! 저 왔습니다! 어라? 형이 왔는데 인사들 안 하냐?”
진지하던 분위기를 녀석이 단박에 바꾸고 말았다.
전술 훈련, 영상 분석, 그리고 저녁마다 박용근과 전술에 관해 의논하는 동안 나흘이 훌쩍 지났다.
명단은 애스턴 빌라전과 똑같았는데 시간만 오후 7시였다.
솔직히 말해서 홈경기인 데다, 카라바크는 객관적으로 유니온 시티보다 한 수 뒤지는 팀이어서 평가는 낙관적이었다.
수요일 저녁에 정지우는 멍하니 소파에 있었다.
무언가 빼앗긴 것 같았다.
답답하기도 했고, 심지어 불안하기까지 했다.
카라바크 팀의 영상을 다 보고 난 다음이었다.
“답답하지?”
박용근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정지우의 일로 어린이 축구 교실에서조차 밀려났었던 박용근이다. 그의 앞에서 고작 열흘이 답답하다는 답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번이 관중석에서 보는 마지막 경기다. 지켜보면서 애스턴 빌라전과의 차이점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배워라. 마틴 감독의 의중이 바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네가 강팀들과의 대결에서도 그라운드를 확실하게 지배하라는 것.”
박용근이 눈빛을 빛내며 정지우에게 건넨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