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원망하지 않는다는 약속쯤. (2)
금요일 오전은 간단하게 몸을 푸는 수준에서 훈련을 끝냈다.
정지우가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는 소식이 있기는 했는데, 동료들이 부상의 정도를 이미 알고 있어서 분위기가 나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전 훈련을 마치고 라커룸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한국의 우체국 표시가 그려진 엄청난 숫자의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워우!”
동료들이 탄성을 지르며 정지우와 박상민, 신준석의 자리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놀라고 부러운 시선 앞에서 정지우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여러 종류의 과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중간중간에 손으로 쓴 편지, 정지우의 얼굴이나 공을 막기 위해 몸을 솟구친 장면을 그린 그림 등이 있었다.
“이거 먹어 봐도 될까?”
그럴 것 같지 않던 카알이 초콜릿 종류의 파이를 들고서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식사 전인데 괜찮겠어? 보내 준 분도 아마 함께 먹길 바랐을 거야.”
카알이 대뜸 포장을 뜯어서 파이를 입에 물었다.
“이거 정말 환상적인 맛인데!”
그의 반응에 결국 동료들이 모두 달려들었다.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그들이 대략 두세 개씩 먹어 치웠는데도 양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클락이 추가로 도착한 소포를 가지고 왔다가 2개를 먹어 보고는 워낙 떠들어 댄 바람에, 스태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마틴까지 나타났다.
“Ji, 다음번에 월드컵 예선이 있다면 나도 좀 끼워 달라고. 그러면 이런 환상적인 선물을 나도 받을 수 있을 거 아냐?”
데이빗과 레믹이 능청을 떨어 대는 동안, 무둔바는 2개를 한 번에 입에 넣는 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점심을 위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커멓게 변했던 멍이 가라앉은 대신에 정지우가 보기에도 얼굴이 좀 우스워 보였다.
다들 과자를 먹는 바람에 식욕이 당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적당하게 음식을 담아서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과자를 뜯느라 시간을 지체한 탓에 식사를 하기도 전에 클락이 들어와 애스턴 빌라전 선발 명단을 붙였다.
역시나 정지우는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박상민은 서브로, 신준석은 선발에 이름이 올랐다.
“Ji, 내가 선발이야.”
얀센이 음식을 담은 식판을 들고 정지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그렇지.”
정지우가 웃는 것을 본 얀센이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얀센.”
정지우는 냅킨으로 입을 닦고는 얀센을 불렀다.
“당신은 내가 임대 선수로 왔을 때부터 주전이었고, 지금도 내겐 우리 팀을 프리미어리그로 올려놓은 영웅이야. 우리 팀의 스태프와 선수들, 그 누구도 당신이 이뤄 낸 성과를 잊은 사람은 없을 거고…….”
박상민과 신준석이 반쯤 알아들은 얼굴로 시선을 주고 있었고, 데이빗과 카알, 무둔바, 꼼빠니는 어딘가 감동이 올라온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골을 만들지 못했다고 골키퍼인 우리가 필드 선수들을 원망하지 않는 것처럼, 애스턴 빌라전에서 비록 골을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선수 중 누구도 당신을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없을 거야.”
슬쩍 상체를 기울였던 레믹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내 컨디션이 좋아서 내가 선발을 맡고 있지만, 임대로 있을 때 당신은 정말 대단했어. 그때의 모습으로 골대를 지키면, 애스턴 빌라는 우리에게서 절대 점수를 가져가지 못할 거야.”
정지우의 말이 끝난 다음이었다.
“이봐, 얀센.”
데이빗이 그를 부르며 시선을 당겼다.
“우린 자네가 이룬 업적을 잊은 적은 없어. 팀을 위해서, 우리를 응원해 주는 팬들을 위해서, 앞으로도 팀은 최상의 컨디션을 지닌 선수를 선발로 내세우겠지만, 챔피언십에서 치렀던 경기를 추억할 때의 내겐 당신이 영원한 선발이야.”
얀센이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려는 것처럼 나직하게 ‘후!’ 하고 숨을 뱉어 냈다.
“이렇게 되면 내일은 좀 더 악착같이 뛸 수밖에 없겠는데?”
“카알, 그럼 내가 골대를 맡았을 때는 편안하게 뛰었다는 거야?”
“그런 오해를 하면 곤란해, Ji.”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카알 덕분에 가벼운 웃음이 돌았다.
“빡빡한 일정이 돌아오는 거잖아. 이렇게 한 경기, 한 경기를 최선을 다하고 나서 데이빗의 말처럼 오늘을 기억할 때 함께 뛰었던 동료들이 모두 생각날 그런 시즌을 만들어 보고 싶어.”
다들 동의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챔피언십에서 뛰었던 선수들과 모두 함께 프리미어리그로 가게 해 달라던 정지우의 계약 조건을 알고 있어서 더 믿음이 가는 얼굴이기도 했다.
“애스턴 빌라가 안됐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체를 이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레믹이 황야에 나타난 나쁜 놈 같은 표정을 하고 뜬금없는 말을 꺼내 들었다.
“오늘의 감동 덕분에 내가 해트트릭을 기록할 거니까.”
짝짝짝짝짝짝짝짝.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비슷하게 손뼉을 치며 레믹의 말을 받아들였다. 박상민과 신준석은 오간 대화를 짐작만 하는 눈치였다.
과자를 어느 정도 챙겨서 집으로 가져갔다.
“이게 뭐니?”
정지우는 전은주가 과자를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어서 팬들이 보내 준 그림과 편지들을 보여 주었는데, 그중 한 장이 전은주의 눈물샘을 콕 하고 찌르고 말았다.
골키퍼 복장을 한 정지우가 박용근에게 달려드는 그림이었다.
“사모님, 제 것도 한번 봐주세요.”
이번엔 박상민이 그림을 내밀었다.
눈시울을 붉히던 전은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헐크처럼 근육이 우락부락한 박상민이 공을 몰고 달려간 뒤편에 상대 팀 선수들이 전부 쓰러져 있는 약간 코믹한 그림 탓이었다.
박용근이 도착해서 네 사람이 함께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여보? 그럼 내일 지우는 어디에서 경기를 봐?”
“벤치에 들어올 수 없으니까 당신 옆에 앉아야지.”
답을 들은 전은주가 정지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우야, 그럼 그 의사 아가씨, 내일 오라고 해서 함께 경기 보면 어떠니? 토요일이니까 끝나고 저녁 먹으러 가기도 좋고.”
“예?”
“그래! 그거 괜찮다! 밥 먹고 전화 한번 해 봐라.”
“예.”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감독님, 지우가 그 아가씨 이야기만 나오면 좀 모자란 표정 짓는 거 맞지요?”
“너도 그렇게 보이냐? 당신은 어때?”
“어제 그렇게 놀렸으면 오늘은 그만해!”
정지우가 박상민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시늉을 하면서 웃음도 터져 나왔다.
데이지와는 몇 번 통화한 적이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정지우는 방으로 들어가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 비번일 수도 있고, 당장 내일이 토요일이라 다른 약속이 있을 수도 있어서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웠다.
[성 마테오 병원입니다.]
“닥터 데이지와 통화가 가능할까요?”
[누구라고 전할까요?]
근무하는 날이었나 보다.
“정지우라고 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방문을 바라보며 잠시 기다렸을 때였다.
[여보세요?]
데이지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건너왔다.
“나예요, 정지우.”
[알아요. 어쩐 일이에요?]
바쁜데 방해한 건가 싶었다.
“혹시 내일 시간 어때요? 애스턴 빌라전 함께 보고, 괜찮다면 저녁도 했으면 싶은데요.”
[어디로 가면 되죠?]
“2시까지 레드 블레이트 서쪽 입구로 오면 돼요.”
[자동차 없죠?]
“예.”
[내가 가져갈게요. 내일 봐요.]
약속이 잡혔다.
뭔가 좀 로맨틱할 줄 알았는데, 실상은 마치 업무 전화를 마친 느낌이었다.
“어렵다!”
정지우는 등받이에 몸을 척 기댔다가 바로 일어났다.
아무리 선발이 아니더라도 영상 보는 시간을 빼먹어서는 곤란한 거였다.
토요일 오후.
레드 블레이트는 언제나처럼 승리를 바라는 홈 관중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누군가 응원 구호를 시작하면 주변에 있던 관중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함께 구호를 외쳤고,
“우리가 챔피언이 될 거야!”
“예에에-!”
프리미어 선두라는 기쁨을 고함과 함성으로 즐겼다.
오늘 출전하는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 때, 정지우는 클락과 함께 구단의 휴게실에 있었다.
관심이 없을 때라면 몰라도, 승점 1점이 소중한 이 순간에 경기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일인 줄은 몰랐다.
“Ji, 곧 2시인데요.”
정지우의 눈치를 살피며 클락이 조심스럽게 시간을 알려 주었다.
정지우는 그와 함께 일어나 레드 블레이트의 서쪽 출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구단 스태프나 선수가 아닌 사람이 직원 전용 통로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허락받은 구단 직원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라운드에서 달려온 홈 관중들의 응원가가 통로로 뛰어들어 정지우와 클락을 스치고 저 멀리 달려갔다.
클락이 고개를 넘겨 밖을 보고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끼이익.
감색 재킷, 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회색 바지.
머리를 어깨로 늘어트린 데이지가 문밖에 있었다.
“어때요?”
“몰라볼 뻔했어요.”
정지우의 놀라는 표정이 마음에 드는 것처럼 데이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들어와요. 이쪽은 전에 봤죠? 클락. 클락, 닥터 데이지.”
데이지와 인사를 나눈 클락이 두 걸음쯤 앞에서 걸었다.
“데이지, 사실 경기를 보면서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데이지가 궁금하다는 눈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설명할 건데,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분이에요.”
그라운드로 다가가는 만큼 함성이 커지고 있었다.
“박용근 감독님 부인 말인가요?”
그때 데이지가 뜻밖의 질문을 건넸다.
“당신 기사들을 찾아봐서 짐작한 거예요. 어머니 일은 유감이에요.”
그러면서 데이지는 ‘꼭 뵙고 싶었던 분들인데요.’ 하며 전은주와의 만남이 기대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쩐지 데이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경기 출전을 위해 통로에 대기할 때 있잖아요. 그때 어떤 생각을 해요?”
데이지가 통로를 가득 메우며 달려드는 함성에 눌린 듯한 얼굴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날 경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 정도요? 상대 팀하고 함께 서 있는 거라서 절대로 약한 모습 보이지 않겠다는 각오도 하고, 우리 팀 동료 중에 긴장하는 선수도 좀 살펴 주고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네요.”
“말을 하니까 그런 거지, 딱히 이번엔 이걸 할 차례구나, 뭐 그런 식은 아닌 거죠.”
관중석으로 빠져나가는 출입구 앞에서 클락이 웃으며 서 있었다.
“고마워.”
“고마워요.”
“천만에요.”
클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왔던 길로 몸을 돌렸다.
관중석으로 들어서자 기분이 묘했는데,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Ji!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
“얼른 털어 내고 유니온 시티를 지켜 달라고!”
근처에 있던 관중들이 손을 뻗어 댔고,
“Ji! 다음에는 그라운드에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목청 큰 관중의 음성이 통로 건너편에서 들렸다.
스태프 전용 통로라 벤치 바로 위쪽으로 나온다.
먼저 앉아 있던 전은주가 정지우와 데이지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말씀드린 데이지예요.”
우선 한국말로 소개했고,
“데이지, 내가 말했던 사모님.”
영어로 데이지에게 전은주를 소개했다.
“반가워요.”
전은주가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네자,
“데이지예요. 뵙게 돼서 기쁩니다.”
데이지는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정지우가 사이에 앉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전은주가 한사코 권하는 바람에 데이지를 가운데 앉게 했다.
관중들의 응원가가 커다랗게 울려 나오는 동안, 몸을 풀던 선수들이 통로를 향해 움직였다.
유니온 시티 동료들이 정지우를 한 번씩 돌아보고는 눈인사나 고갯짓, 혹은 손을 들어 주며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지나간 선수는 얀센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꼭 보여 주고 싶다던 프리미어리그 선발 경기였다.
정지우의 뒤편 어딘가에 그의 가족이 있을 거였다.
얀센이 시선을 돌려 정지우를 찾는 순간이었다.
‘레드 블레이트를 지켜 줘.’
정지우는 앉은 자리에서 양손을 이마쯤 높이로 들고서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우와아- 아!”
그 모습을 본 관중들이 나직하게 함성을 지를 때였다.
‘고마워, Ji. 최선을 다할게.’
얀센이 골키퍼 장갑을 낀 왼손을 들어 다부지게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