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89화 (189/262)

제5장. 한 번만 더 잡자. (1)

최전방 공격수가 후반 시작과 동시에 페널티킥에 실패했으니 선수들의 사기가 단박에 꺾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대- 한민국!”

둥둥둥! 둥둥!

귀를 파고드는 응원 구호를 들으며 김문호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선수들에게만 맡겨 두었다가 잘못되면 여기에서 모든 게 끝난다. 벤치에서 무언가 조치를 취해 줘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슬쩍 고개를 돌려 박용근의 눈을 본 김문호는 픽 하고 웃으며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 경기를 시작할 때 약속했던 일이다.

벤치는 박용근에게, 그라운드는 정지우에게 맡기고, 김문호 자신은 결과가 안 좋을 때 날아드는 욕을 감당할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박용근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지켜보고 있으니 다른 말을 꺼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혹시나 정지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김문호가 고개를 돌려 정지우를 보았을 때였다.

정지우가 뭔가를 말하며 검지를 치켜들자 이정렬이 잘못했다는 것처럼 두 손을 딱 붙여서 이마 위로 들었고,

“우와- 아!”

또 그 모습을 본 관중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트렸다.

김문호는 실없는 사람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선수들! 저런 상황에서 장난을 주고받으며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골을 넣은 것만큼이나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저러기 쉽지 않을 텐데, 정지우 선수도 그렇고, 이정렬 선수도 참 대단하네요! 축구 해설을 하면서 오늘처럼 우리 축구의 미래를 확신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 한민국!”

둥둥둥! 둥둥!

페널티킥의 실패를 잊으란 것처럼 우렁찬 응원이 다시 그라운드를 가득 메웠다.

후반이 어느덧 15분쯤 흘렀다.

조동익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화면에 집중했다.

페널티킥을 실패했을 때, 하마터면 함성을 지를 뻔했었다.

30분 남았다.

조동익의 간절한 바람이 통했나 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아예 똬리를 틀고서 전혀 뛰어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 내가 봐도 그게 가장 잘하는 거다.’

실력 차가 월등히 떨어지는 팀이 저렇게 웅크려도 골을 넣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사우디아라비아가 페널티 에어리어에 촘촘히 박혀서 지키는 경기다.

‘하늘이 나를 저버리지는 않는구나.’

조동익은 반응이 궁금해서 슬쩍 문광국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후반 20분이 흘렀다.

이창진과 선도민이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하는 선수들처럼 뛰어다녔고, 김오영과 이재범이 그들에 맞춰 수시로 위치를 바꾸었다.

게다가 신준석은 수비 라인을 이끌고 올라가 사우디아라비아가 걷어 내는 공을 단단하게 잡아 주었다.

그런데도 결정적인 장면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와아아-!”

『이재범! 김오영에게! 김오영! 안으로 찔러 줍니다!』

퍼어어엉!

『아! 오사마 하위사위! 공을 빠르게 걷어 냅니다!』

지금도 그렇다.

공을 걷어 내고도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은 단 한 명도 공을 향해 뛰지 않은 채, 페널티 에어리어를 꿋꿋하게 지켰다.

『강서준이 공을 잡았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 중앙선을 넘으면 벌금이라도 내는 모양입니다. 꼼짝도 않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수비 전술인데요. 쉽지 않네요! 시간이 좀 안타깝습니다.』

강서준이 신준석에게 공을 패스해 주었고, 신준석이 그 공을 박상민에게 바로 넘겨주었다.

『박상민이 페널티 에어리어로 움직입니다!』

박상민이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약을 올리는데도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박상민! 공을 뒤로 넘겨줍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골대 앞을 보면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선수 열한 명이 모두 페널티 에어리어 주변에 있어요.』

『후반전이 20분쯤 남았습니다. 두 골이 아쉬운 한국!』

“우우-!”

『아! 이건 좀! 사우디의 6번 무스타파 알 바사스 선수! 또 쓰러집니다! 지병이 있는 건 아닌지, 저 선수는 종합검진을 받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박상민이 공을 받아서 몰고 가자 사우디 선수들이 쓰러진 6번 선수를 가리키며 공을 차 내 줄 것을 요구했다.

삐이익!

보다 못한 주심이 먼저 휘슬을 불었다.

『주심이 의료진을 부르는데 들어오질 않습니다!』

『이건 경고가 좀 있어야 할 것 같네요!』

“우우-!”

주심이 쓰러진 선수에게 달려가 그라운드 바깥을 가리켰다.

『몸을 일으키는 무스타파! 허허!』

캐스터가 기가 막힌 웃음을 흘렸다.

일어난 무스타파 알 바사스가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이며 그라운드를 안 나가려고 하고, 그제야 들어선 의료진은 또 선수 옆에 서서 경기를 지연시키고 있어서였다.

이정렬은 벤치 근처로 달려가 라인 밖에 놔둔 물병을 받았다.

비타민이 섞인 음료다.

플라스틱 병의 몸통을 꽉 누르자 미지근해진 물이 입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렬아!”

그때 박용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교체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페널티킥 실수를 꾸짖으려고?

솔직히 박용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도 무시할 순 없는 거다.

이정렬은 물병을 잡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뺨을 얻어맞기 직전처럼 볼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박용근과 눈이 마주친 직후였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귀에 대고 고개를 바싹 디밀었다.

“왜 그렇게 기가 죽었어?”

“예?”

이정렬은 멍한 얼굴로 박용근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미안해? 탁자에 머리 찍던 이정렬이 어디 갔어? 스트라이커가 수비수들을 피해 다니면 어떻게 해? 가서 부딪쳐! 알았어?”

이정렬은 입에 남아 있던 물을 꿀꺽 삼켰다.

“전반처럼 수비수를 끌고 다녀! 네가 뒤로 빠지니까 쟤들이 단단해졌잖아. 골은 못 넣어도 돼. 대신 네가 수비수들을 달고 다닌 덕분에 앞에 두 골이 나왔다는 것을 잊지 마라.”

말을 마친 박용근이 이정렬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박용근 감독! 이정렬 선수에게 무언가 지시를 전하고 있습니다.』

『격려하는 게 아닐까요? 페널티킥 이후로 많이 뛰고는 있는데 자꾸 외곽으로 돌고 있었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이정렬이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주심이 공을 세운 지점에 내려놓고 박상민에게 차라고 알려 주었다.

툭!

박상민은 선도민에게 공을 넘겼고, 선도민은 다시 강서준을 향해 공을 뒤로 빼냈다.

『공을 뒤로 돌리는 한국! 후반 정규 시간이 이제 15분가량 남았습니다. 우리 선수들 정말 많이 뜁니다!』

『자료를 보면 박상민 선수가 벌써 12킬로미터 가까이 뛰었구요, 이창진, 선도민, 두 선수도 11킬로미터 수준입니다. 경기 끝날 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싶을 정도네요.』

신준석이 공을 받아서 다시 박상민에게 넘겼다.

『박상민 선수를 빼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벤치에서도 그게 고민일 것 같네요. 당장 박상민 선수만큼 공수를 조율할 만한 선수가 없거든요.』

툭!

박상민이 공을 받았을 때였다.

“상민아!”

앞에서 이정렬의 고함이 들렸다.

이정렬이 공을 달라고 발 앞으로 두 손을 내려 보이며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분명 박상민을 불렀다.

상대 수비들도 함께 들어서 2명이 이정렬을 따라붙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시선은 엉뚱하게도 이재범을 향했다.

투욱!

박상민은 짧게 본 이정렬의 시선을 믿기로 했다. 그래서 오른쪽을 파고드는 이재범에게 공을 밀어 주었다.

“와아-!”

이재범이 공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에 선도민과 박상민 역시 골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퍼엉!

이재범이 공을 띄웠다.

‘높아!’

툭 찬 공이다. 그런데 박상민과 선도민이 뛰어들기엔 너무 높았다.

“우와아-!”

시선을 돌린 곳에서 이창진이 떠올라 있었다.

터엉!

수비수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창진의 머리에 맞은 공이 골대의 정면으로 떨어졌다.

『선도민! 슈웃!』

터엉!

『수비 맞고 튀어나온 공! 김오영! 슈웃!』

티잉!

『아! 골포스트에 맞습니다!』

김오영의 슈팅이 왼쪽 포스트에 맞고 튕겨 나온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와락!

이정렬이 공을 향해 달려들었고, 골키퍼 왈리드 압둘라가 몸을 날렸다.

솔직히 따돌림당해도 할 말은 없었다.

건방 떨다가 리저브 팀으로 내려갔고, 박용근 앞에서 아버지와 갈등도 있었다.

전반에 한 골도 못 넣었으며, 후반 시작과 동시에 페널티킥 기회조차 날려 버렸다.

그런데 말이다.

페널티킥을 실패한 직후에 박상민이 다가왔었다.

“야! 설마 이런 거로 기죽거나 하는 거 아니지?”

박상민이 웃는 얼굴로 농담을 던졌고, 슬쩍 시선을 들었을 때 정지우가 검지로 가리키면서 ‘회식비!’ 하고 외쳐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정렬은 분명하게 보았다. 박상민과 정지우가 웃는 것을 말이다.

‘죽을 맛이지? 괜찮아, 인마! 우리가 더 뛰어 줄게!’

그 둘의 미소에 담긴 의미는 그렇게 느껴졌다.

당연하게 평소보다 더 뛰긴 했었다.

사람이니까 미안해서라도 더 달리는 게 당연한 거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앞에 두 골이 네가 수비수들을 달고 다닌 덕분에 나왔다는 것을 잊지 마라.”

박용근의 지시를 들으며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귀청을 파고드는 함성 속에서 이정렬은 공과 골키퍼만 보았다.

‘내가 골을 넣지 못해도 괜찮다.’

그리고 악착같이 발을 뻗었다.

‘우리 팀의 누군가가 넣어 주면 되는 거다.’

숨 쉴 틈 없을 정도로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그 짧은 순간에 주르륵 흘러갔다.

‘앞으로 축구를 못해도 괜찮습니다.’

이정렬은 발목을 꺾다시피 공의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야 골키퍼를 넘겨 공을 빼 줄 수 있는 거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골키퍼가 덮치면 그대로 발목이 부러진다.

‘페널티킥을 주든지, 아니면 이 공이 우리 팀 선수에게 전달되면 됩니다! 이게 내 마지막 터치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저 녀석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졌거든요!’

투욱!

분명하게 공이 이정렬의 발에 먼저 걸렸다.

‘지우야! 정말 고맙다! 상민아! 꼭 골로 연결시켜 주라!’

이정렬의 꺾인 발목 위로 왈리드 압둘라의 몸이 거칠게 떨어졌다.

콰드득!

‘아악!’

이정렬이 왈리드 압둘라와 함께 골포스트 왼쪽에 커다랗게 넘어졌다.

『이정렬! 공을 살려 냅니다!』

휘이익! 터엉!

『이창진! 다이빙!』

앞으로 몸을 던진 이창진이 공과 함께 골대 안쪽에 처박혔다.

삐이익!

주심이 중앙선을 가리켰고,

“우와아아아아아아-!”

관중들이 엄청난 함성을 질러 댔다.

『고올! 골!』

흥분하던 캐스터의 목소리가 바로 사그라졌다.

『아! 이정렬 선수! 고통스럽게 바닥을 구르고 있습니다!』

『공을 살려 내는 순간에 골키퍼와 충돌이 있었는데요.』

느린 그림이 바로 나왔다.

『하아! 발목이 완전히 꺾인 것 같은데요?』

『팀 닥터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삑! 삑! 삑! 삑!

그때 주심이 휘슬을 불며 달려갔다.

박상민과 김오영, 이재범, 선도민이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과 뒤엉켜 거칠게 밀치고 있었다.

벌러덩! 벌러덩!

그 직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두 선수가 엉뚱하게 얼굴을 감싸 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이건 매너가 아니죠! 부상당해 쓰러진 이정렬 선수의 허리를 발로 건드린다는 게, 이게……!』

『주심이 부심에게 의견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 흥분을 좀 가라앉혀야 하겠습니다.』

“우우우-!”

『어어? 왈리드 골키퍼가 이정렬 선수의 어깨를 잡아당깁니다!』

삑! 삑!

『박상민 선수! 참아야 돼요! 사우디 선수들이 의도적으로 박상민 선수를 자극하고 있거든요!』

정지우는 곧장 앞으로 뛰어갔다.

“지우야! 야!”

워낙 빠르게 달려가는 바람에 놀란 김문호가 급하게 불렀고,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이 곧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잡기까지 했다.

주변이 어떤지는 상관없다.

정지우는 일직선으로 박상민에게 달려가 녀석을 바라보는 자세로 섰다. 등 뒤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이 뭐라고 떠들었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상민아! 야!”

“후우!”

하마터면 눈이 뒤집힐 뻔했던 박상민이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지만, 동기가 당하면 단박에 꼴통이 되는 단순한 녀석, 박상민.

녀석이 정지우의 얼굴을 보더니 길게 숨을 내쉬었다.

“괜찮지?”

“어! 그런데 저 개새끼들이 쓰러진 정렬이를 발로 찼어!”

“나한테 맡겨. 나 믿지? 내가 1번 개야!”

“응!”

“준석이한테 가 있어. 정렬이 내가 지킬게.”

고개를 끄덕이는 박상민의 앞에서 정지우가 시선을 돌렸다.

동기는 이래서 좋은 거다.

눈을 마주친 신준석이 다가와 박상민을 안고 중앙선 쪽으로 걸었다.

터억!

그때 사우디아라비아 선수가 정지우의 등을 밀쳤다.

빤한 의도였다.

이렇게 시비를 걸어서 함께 퇴장당하거나, 아니면 시간을 끌겠다는 거였다.

정지우는 돌아보지도 않고 이정렬을 향해 걸었다.

김오영, 선도민, 이재범이 호위하는 것처럼 녀석의 주변을 빙 둘러 지키고 있었다.

고개를 디밀었을 때 이정렬은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좀 어때?”

“모르겠어.”

이정렬이 겁먹은 표정으로 겨우 답을 했을 때였다.

“교체하자. 이건 위험하다. 부축할 테니까 왼발을 디디지 마.”

팀 닥터가 무겁게 말을 하고는 스태프와 함께 양쪽에서 이정렬의 어깨를 받쳐 주었다.

“끄응!”

신음을 터트리며 이정렬이 몸을 일으켰다.

짝짝짝짝짝짝짝짝!

이를 악문 녀석이 팀 닥터와 스태프에 의지해 쩔뚝이며 라인 바깥으로 움직였다.

“정렬아!”

골라인 바깥으로 향하던 이정렬이 정지우를 돌아보았다.

“이번 어시스트! 진짜 대단했다!”

정지우의 말을 들은 이정렬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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