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88화 (188/262)

제4장. 좀 더 뛸 수 있겠냐? (2)

길지 않은 하프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박상민은 김오영과 이재범에게 어떻게 움직일지를 알려 주었고, 박상민의 뒤에 선 이창진과 선도민에게 변형된 포메이션에 맞는 위치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준석아! 라인을 빠르게 움직여 줘야 해!”

“뒤는 우리 넷이 어떻게든 지킬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대신 두 골, 정말 부탁한다.”

신준석이 농담기를 쏙 뺀 얼굴로 다부지게 답을 한 다음이었다.

“정렬아! 준석이 말 들었지?”

박상민이 고개를 돌려 이정렬에게 말을 건넸다.

라커룸의 모든 선수가 녀석을 바라본 직후였다.

“알았어.”

이정렬이 단단하게 답을 했다.

잠시 묵직한 각오가 라커룸을 떠돈 다음이었다.

“형! 제가 한마디만 해도 돼요?”

김오영이 손을 들고는 박상민과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이런 걸 말릴 이유는 없는 거였다.

“그래.”

박상민의 답을 들은 김오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형들을 빼고는 다 동기고 후배니까 편안하게 할게. 저기 지우 형 한번 봐줘.”

딩동댕동! 딩동댕동!

후반을 준비하라는 알람이 울렸는데 누구도 일어서지 않았다. 대신 김오영이 말한 대로 시선만 정지우를 향해 돌렸다.

“우린 저렇게 다치지 말자.”

뭐라는 거야?

신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김오영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지우 형이 저렇게까지 지켜 낸 이 경기가 끝났을 때, 우리는 서 있지도 못할 만큼 뛰고 또 뛰자. 내가 넣은 두 골? 그거 상민이 형이, 정렬이 형이, 그리고 재범이가 양보해 줘서 넣은 거야.”

나갈 시간이었는데 김오영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은 눈치였다.

“힘들어서 못 뛰겠다고 느껴질 때면 뒷정리하며 형들이 해 줬던 말을 떠올리고, 그래도 힘들 때면 지우 형을 보면서 마지막 기운을 쏟아 내자. 우리는 경기 중간이 아니라, 경기가 끝나고 쓰러지자.”

숙연한 각오가 라커룸을 가득 메울 때,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기 끝나고 다 모였으면 좋겠다.”

퉁퉁 부은 눈두덩, 그 속에 핏물이 가득한 눈으로 선수들을 돌아보며 꺼내 든 말이었다.

한순간,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는데,

자그락, 자그락.

“이 경기 승리한 뒤에 우리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자.”

정지우가 문을 향해 걸으며 던진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해 보자는 열기로 가득했다.

“가자! 두 골이다!”

신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를 덧붙였고,

“쟤네 두 골 더 먹으면 미친놈처럼 덤비지 않겠어요?”

선도민이 벌떡 일어나며 끼어들었으며,

“아무래도 엉덩이에 불붙은 놈들처럼 달려들지 않겠냐?”

박상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었다.

『후반전을 위해 선수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전반의 주요 장면을 다시 보았는데 정말 우리 선수들! 칭찬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그동안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며 쌓였던 답답함이 이 경기를 통해 완전히 씻겨 나가는 것 같습니다.』

『잠시 시청 앞 광장의 모습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화면이 바뀌더니 시청 광장의 대형 스크린 앞에 모여 있는 관중들과 리포터를 비춰 주었다.

『시청 앞 광장입니다. 이곳에는 2만 명이 넘는 축구 팬들이 모였는데요, 전반이 끝난 뒤에 오히려 더 많은 관중이 합류하고 있어서 지금은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리포터의 뒤편에서 관중들이 환호를 지르거나, 손가락으로 V 자를 만들며 연신 흔들어 댔다.

『오늘 경기 어떠셨어요?』

『미칠 것 같아요! 우리 선수들! 정말 고맙구요! 자랑스러워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목청껏 소리를 질러 댔다.

『후반에는 우리가 몇 점 정도 넣을 것 같아요?』

『세 골이요! 세 골 넣을 거구요! 정지우 선수가 무실점으로 지켜 내서 우리 월드컵 본선 나갈 거예요! 사랑합니다! 정지우 선수!』

워낙 분위기가 뜨거웠다.

『이상 시청에 모인 시민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리포터가 빠르게 인터뷰를 마쳤다.

『반응이 굉장합니다. 우리 축구 팬들과 국민이 원했던 경기가 바로 오늘 같은 경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우리 선수들! 후반에 꼭 두 골 이상 넣어서 반드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선수들이 통로를 나와 그라운드로 들어섰다.

『아! 정지우 선수! 눈이 정말 많이 부었는데요. 공을 잡는 데 문제가 없을까요?』

『의료진이 괜찮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왔을 텐데, 당장 보기에는 부기가 꽤 심하네요. 오른쪽 눈이 굉장히 충혈되었는데요.』

『일단 양 팀 선수 교체 없이 후반을 시작합니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의 자기 진영에 모여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호프집의 탁자에는 푸짐한 안주들이 맥주를 부르고 있었다.

연달아 이어진 선방이었다.

사장은 심지어 마지막에 한 골 넣은 것까지를 슈퍼세이브에 포함해서 ‘정지우 타임’이라고 외쳤다.

슈퍼세이브 한 번에 네 사람당 닭 한 마리, 또는 안주 하나가 제공된다. 그런데 무려 세 번의 슈퍼세이브가 연달아 나왔다. 거기에 테이블 하나에 12명씩 앉아 있는 상황이어서 아예 9마리의 통닭을 수북하게 쌓아 놓은 곳도 있었다.

“사장님! 여기 내 카드 가져가고 골든벨 한 번 울려 줘요! 그리고 500짜리 전부 한 번 돌려줍시다! 여러분! 이건 내가 사는 겁니다!”

땡땡땡땡땡!

“우와아아-!”

손해 본 거 아니냐고?

술과 음료수를 바닥에 쏟아붓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문이 들어오고 있어서 손해 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유니온 시티의 경기가 있는 주말에 자리를 예약하고 싶다는 손님들의 요구가 물밀듯 들어오고 있어서 오늘은 본전만 해도 남는 장사였다.

거기에 ‘오늘 아무리 손해 봐도 좋으니까 제발 사우디를 통쾌하게 이기자!’ 하고 악을 써 댈 만큼 사장 역시 피가 끓어 있었다.

삐이익!

『후반전이 시작됩니다.』

“우와아아아아아-!”

이정렬이 공을 뒤로 밀어 주었다.

투욱!

박상민은 받은 공을 바로 선도민에게 넘겼다.

『선도민! 천천히 사우디 진영으로!』

『어? 포지션을 바꾼 건가요? 이재범이 선도민의 뒤에 있어요! 왼쪽도 보세요! 전반에 두 골이나 넣은 김오영이 오히려 이창진의 뒤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정렬 선수도 박상민과 동일 선상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은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 자리 잡고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크하던 선수들이 엉뚱한 위치로 움직이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선수들! 페널티 에어리어 밖에서 천천히 공을 돌리고 있습니다.』

투욱!

슬슬 올라갔던 선도민이 오히려 뒤로 빠져 있던 이재범에게 공을 건네주고는 빠르게 페널티 에어리어로 달려들었다.

투욱!

그 순간 이재범은 공을 페널티 에어리어 정면에 있는 박상민에게 주었고,

투욱!

박상민은 다시 공을 이정렬에게 넘겼다.

수비수들을 달고 달렸던 선도민이 뒤로 빠져나올 때였다.

툭!

이정렬은 그런 선도민에게 공을 넘겼다.

투욱!

이번엔 공이 왼편에 있던 이창진에게 넘어갔다.

이창진도 김오영과 공을 주고받으며 골대 안으로 달렸는데, 결국 공은 이정렬에게 다시 빠져나왔다.

『사우디 수비진이 흔들리는 건 분명한데, 선도민과 이창진 선수가 저렇게 계속 뛸 수 있을까 싶습니다. 후반 시작인데요, 체력이 걱정될 정도로 많이 뛰고 있습니다.』

『보세요! 지금 이재범과 선도민, 그리고 왼쪽에서는 김오영과 이창진이 쉴 새 없이 위치를 바꾸고 있어요! 거기에 박상민과 이정렬 선수까지 좌우로 위치를 바꾸고 있네요.』

“와아아아아-!”

그때 골대를 향해 뛰어드는 선도민을 향해 박상민이 짧게 패스를 찔러 주었다.

『선도민! 공을 잡은 선도민!』

사우디의 수비수 셋이 선도민의 앞을 가로막았다.

투욱!

선도민이 지금까지처럼 다시 이재범에게 공을 빼 주었다.

투욱!

이재범은 그 공을 바로 박상민에게 넘겨주었다.

여기까지는 후반 시작하면서 계속됐던 장면이었다.

『박상민! 공을 받으러 움직입니다!』

사우디의 수비수들이 공이 돌 거라고 예상한 박상민과 이재범, 선도민에게 몰리는 순간이었다.

투욱!

패스를 받기 위해 달려들던 박상민이 발뒤꿈치를 이용해 이정렬에게 공을 툭 빼 주었다.

『박상민! 기가 막힌 패스!』

“우와아아아아-!”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의 수비수들이 우르르 오른쪽으로 쏠린 상태에서 이정렬이 공을 받은 거였다.

『이정렬! 슈우웃!』

퍼어엉!

이정렬이 달려들며 힘껏 슈팅을 날렸다.

왼쪽 골포스트 방향으로 낮게 깔아 찬 슈팅이었다.

화아악!

왈리드 압둘라 골키퍼가 몸을 날렸고,

터억! 터어엉!

그의 손에 맞은 공이 뒤로 날아가서는 골포스트에 맞고 튕겨 나왔다.

『골대를 맞고 나온 공! 김오영! 김오영-!』

김오영이 공을 향해 뛰었고, 사우디의 선수들 둘이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김오영이 조금 더 빨랐다.

툭!

녀석이 이정렬을 향해 공을 툭 찬 직후였다.

콰아악! 콰다당!

수비수가 날린 태클에 김오영이 골라인에 걸치며 커다랗게 넘어졌다.

삐이이익!

『주심! 파울을 선언합니다!』

주심이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달렸다.

그러고는 페널티킥 지점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우와아아아아아-!”

『페널티킥! 주심! 페널티킥을 선언합니다!』

『기가 막히네요! 사우디의 밀집 수비를 위치를 바꿔 가며 흔들었구요! 그 틈에 뒤로 물러나 있던 이정렬 선수가 슈팅! 다시 튀어나온 공을 김오영 선수가 잡았어요!』

『대단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선수들입니다! 저 선수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입니다!』

사회자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목소리로 떠들 때, 화면 오른쪽 아래로 시청 앞 광장의 모습이 작게 나왔다.

느린 그림으로 김오영이 넘어지는 장면이 나오는 동안, 광장의 관중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대- 한민국!”

둥둥둥! 둥둥!

“대- 한민국!”

둥둥둥! 둥둥!

사우디아라비아의 선수들이 아직도 주심을 둘러싸고 항의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정렬 선수! 페널티킥을 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이정렬이 공을 내려놓고는 ‘후!’ 하고 입으로 숨을 뱉어 냈다.

이정렬의 부친은 이제야 조금은 만족한 얼굴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골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누가 뭐래도 이건 이정렬이 만든 골이다.

페널티킥이 되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김오영이 또 넣었다면 얼마나 억울할 뻔했나.

한순간 밉다고 자식이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는 없는 거다.

‘넣어라, 정렬아. 네 인생을 좌우할 중요한 골이다!’

이정렬의 부친은 두 주먹을 꼭 움켜쥔 채로 숨을 들이켰다.

『주심! 휘슬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습니다!』

이정렬이 골키퍼를 힐끔 본 뒤에 다시 공으로 시선을 주었다.

수원월드컵경기장, 그리고 시청 앞 광장, 고수부지, 호프집에 있는 대부분의 관중들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페널티킥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 앞에서는 양 팀 선수들이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주춤주춤!

두 번이나 타이밍을 뺏는 동작을 보이며 이정렬이 공을 향해 뛰었다.

‘세게 차! 무조건 강하게 차!’

정지우는 이를 악물었다.

페널티킥의 방향을 미리 정하고 한쪽만 막기로 마음먹은 골키퍼는 대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상대 팀 골키퍼인 왈리드 압둘라는 양손을 어깨에 두고 이정렬의 움직임에 맞춰 움찔거리고 있었다.

슈팅의 방향을 읽은 뒤에 움직이겠다는 계산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구석으로 강하게 차서 속도로 이기는 게 최선이었다.

달려간 이정렬의 몸이 왼편으로 기울었다.

오른쪽을 노리기로 한 거다.

그 순간,

움찔!

왈리드 압둘라 골키퍼의 몸이 오른쪽을 향해 꿈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세게 차라고!’

『이정렬! 이정렬! 슈웃!』

터엉!

이정렬은 뜻밖에도 왼편으로 공을 찼다.

화아악!

무리한 거다.

차라리 처음대로 오른편으로 세게 찼어야 하는데 골키퍼의 동작에 속아서 무리하게 방향을 바꾼 거였다.

터억!

정말이지 패스한 것처럼 공이 평범하게 날아갔고, 몸을 날린 왈리드 압둘라의 손에 걸려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아!』

해설자의 비명이 상황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선수들이 달려들었는데, 왈리드 압둘라가 재차 몸을 날려 공을 끌어안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왈리드 골키퍼! 페널티킥을 막아 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선수들이 왈리드에게 다가가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앞에서, 이정렬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섰다.

“대- 한민국!”

둥둥둥! 둥둥!

침묵을 깨고 응원 구호가 울려 나왔다.

우리도 실망하지 않을 테니, 뛰는 선수들도 기운을 내달라는 의미다. 어렵고 지치겠지만, 지금처럼 계속 뛰어 달라는 당부였다.

“대- 한민국!”

둥둥둥! 둥둥!

그래서 어딘가 맥이 빠진 듯 시작했던 응원이 두 번째로 이어질 때는 좀 더 크고 강렬하게 변해 있었다.

『우리 선수들! 괜찮아요! 페널티킥은 실수할 수 있어요! 이정렬 선수! 여기에서 실망하지 말고 계속 지금처럼 뛰어 주길 당부합니다!』

『박상민 선수가 등을 두드려 줍니다!』

『저게 맞지요! 동료들이 격려해 주는 게 맞는 겁니다!』

박상민뿐만 아니라 이창진과 선도민까지 달려와 이정렬에게 무언가를 말하며 웃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