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87화 (187/262)

제4장. 좀 더 뛸 수 있겠냐? (1)

신준석이 달려와 고함을 지르며 정지우를 향해 뛰어들었다.

휘이익! 쿵!

둘이서 높다랗게 떠서 가슴을 세게 부딪쳤다.

“와아-!”

전국대회에서 하던 세레머니여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용근과 전은주, 그리고 신준석의 가족들은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동작이었다.

“길성아! 야! 앞을 잡아! 앞!”

정지우는 골대 중앙에서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정규 시간이 벌써 40분을 넘어서고 있어서 지금은 전반을 무실점으로 지키는 게 중요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상민아! 중앙을 지켜! 거기만!”

박상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안쪽의 자리를 차지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코너킥이었다.

공격수 셋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골대 앞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위치를 차지하려 애썼다.

주심이 입으로 휘슬을 가져갈 때였다.

정지우는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김오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이요?’

녀석과는 전에 브라질전에서 분명하게 경험했던 일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박용근의 지시에 역습을 연습하기도 했었다.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자 살렘 알 다우사리가 곧바로 공을 향해 움직였다.

퍼어어엉!

지금 뛰어나가는 건 위험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네 골을 위해서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도 없었다.

와락!

정지우는 공이 떨어지는 지점을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정지우! 공을 향해 달려 나옵니다!』

신준석과 강서준이 정지우를 지키기 위해 몸으로 버텼고, 주길성과 김범주가 상대의 헤더를 방해하기 위해 함께 솟구쳤다.

휘이이익!

정지우가 높다랗게 뛰어올라 공을 잡는 순간이었다.

퍼억!

나와프 알 아비드의 팔꿈치가 눈가를 세차게 때렸다.

별이 번쩍했고, 세상이 온통 시커멓게만 보였다.

웃기지 마! 내가 이런다고 공을 놓칠 것 같아?

정지우의 손끝에 공의 감촉이 걸렸다.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후에도 울릴 확률은 없다는 의미였다.

꽈아악!

공을 잡은 정지우는 바닥에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달렸다.

그라운드 앞쪽이 흐릿하게 보였다.

“와아아아-!”

지금은 동료를 믿고 달릴 때였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동료.

“상민아-!”

녀석이라면 알아줄 것 같았다. 눈을 얻어맞아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사우디 선수들을 막아 주라.

그리고 내가 언제 공을 던져야 할지도 알려 줘야 돼.

“달려! 더!”

박상민의 고함이 들렸다.

이를 악물고 달리는 동안 눈이 욱신거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통증이 아니었다.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언제쯤이야!

라인이 안 보인다고!

“지금이야! 지금! 그대로 똑바로 앞으로 던져!”

휘이이익!

정지우는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철퍼덕!

그리고 반동을 이기지 못해 앞으로 고꾸라졌다.

“와아아아아아-!”

김오영이 공을 받았는지는 정말 모른다.

공을 잡기 전에 신호를 보냈으니까 대강 눈치채고 알아서 잡아 주었으면 싶었다.

『김오영! 공을 잡고 질주하고 있습니다! 김오영! 김오영!』

함성이 엄청날 때 김범주가 달려와 정지우를 일으켜 주었다.

“형! 괜찮아요?”

그 짧은 순간에 정지우의 오른쪽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중앙선을 넘은 김오영! 한 명 제치고!』

『왼쪽에 이정렬! 오른쪽에 이재범이 있어요!』

사우디 선수 한 명을 제친 김오영이,

툭.

오른쪽으로 공을 흘려주었다.

『이재범에게! 이재범!』

『걸렸어요! 쏴야죠! 저건 쏴야 돼요!』

페널티 에어리어로 밀어 준 공을 향해 이재범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사우디 선수들 셋이 공 앞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와라락! 투욱!

거세게 달려든 이재범이 몸을 옆으로 눕히는 동작으로 공을 빼내 주었다.

“와아아아아-!”

워낙 빠르게 달려든 상태에서 공의 방향을 바꾼 거다.

그래서 이재범은 오른쪽으로 커다랗게 넘어지고 말았다.

『이재범의 패스! 김오영! 김오영 슈웃!』

퍼어엉!

공은 몸을 비트는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의 틈을 빨랫줄처럼 파고들었다.

시야가 가렸는지 골키퍼 왈리드 압둘라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철렁!

정말이지 통쾌하게 골 그물이 흔들렸고,

“와아아아아아아-!”

미친 듯한 함성이 수원월드컵경기장을 뒤덮었다.

『고오- 오올! 고올! 고올! 김오영! 오늘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킵니다!』

『정말 멋진 골입니다! 빠른 역습에 이은 환상적인 패스였어요! 사우디의 왈리드 골키퍼가 손 한번 쓰지 못했어요! 정말 우리 선수들! 오늘 굉장합니다!』

김오영이 사이드라인을 따라 달렸고, 선수들이 그와 함께 뛰고 있었다.

정지우는 양손 검지를 높다랗게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오른쪽 눈은 흐릿하게 보였다.

『정지우 선수, 오른쪽 눈이 많이 부은 것 같은데요?』

화면에 느린 그림이 나왔다.

정지우가 눈을 얻어맞고도 공을 잡아 앞으로 뛰었고, 그 앞을 박상민이 악착같이 지켜 주는 모습이었다.

박상민이 고함을 지르는 장면이 느린 그림으로 이어졌고, 그 직후에 있는 힘껏 공을 던진 정지우가 바닥에 엎어졌다.

『정지우 선수, 정말 뭐라고 칭찬해 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것이 우리 축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시아를 호령하고, 세계무대에 이름을 내걸 수 있었던 우리 축구! 오늘 정지우 선수와 우리 선수들! 잊고 있었던 우리 축구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제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해설자가 감동을 이기지 못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 이었다.

김문호는 고개를 앞으로 약간 숙인 자세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얼마 만인지 모른다. 그동안 분통이 터진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렇게 피가 끓은 것은 기억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그래! 이겨 보자! 이 경기가 우리 축구 팬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그런 경기가 되게 해 보자.’

각오를 다진 김문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박용근을 보았다.

그는 정지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저 친구가?’

처음이었다. 박용근이 저렇게 감정을 담은 얼굴을 하는 것은, 분명한 염려와 걱정이었다.

이걸 이해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김문호도 정지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추가 시간이 3분이 주어졌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이 시간을 끈 것에 비하면 좀 아쉬운 시간입니다.』

『서두를 것 없어요. 전반을 잘 마무리하고 후반에도 이 분위기를 살린다면 우리의 월드컵 본선 진출,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삐이익.

『사우디아라비아! 공을 바로 뒤로 돌립니다.』

『이대로 전반을 끝내자는 의미가 분명한 거 같네요. 보세요. 아예 11명의 선수가 완전히 중앙선 아래에서 움직이지를 않고 있어요!』

“우-!”

사우디아라비아는 정말이지 11명의 선수가 완전히 웅크린 채로 공을 돌리고 있었다.

박상민이 공을 뺏으러 달려가는 순간이었다.

삐이익!

『아! 이건 또 뭔가요? 전혀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무스타파 알 바사스 선수가 쓰러졌습니다.』

『머리를 감싸고 쓰러졌기 때문에 주심 입장에선 경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심이 의료진을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아……! 선수가 쓰러졌는데 의료진이 산책하듯 걸어 들어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의료진에게도 옐로카드를 주고 싶습니다.』

“우-!”

『이건 좀 정말 심하네요.』

시간을 끌던 선수가 힘겨운 표정으로 일어나서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나갔다. 그런데 카메라가 빤히 따라가고 있는데도 바깥에 나가는 순간, 그는 곧바로 투입시켜 달라고 주심에게 손짓을 해 댔다.

주심이 공을 내려 준 곳에서 박상민이 사우디의 골대를 향해 공을 길게 차 주었다. 주심에 의해 중단된 경기라 상대 팀에게 공을 넘겨주는 게 맞는 거였다.

『공을 잡은 왈리드 압둘라 골키퍼.』

캐스터는 입을 다물었다.

골키퍼가 공을 안고서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움직이기만 할 뿐, 전혀 패스할 생각을 않고 있어서였다.

시간을 끌던 사우디의 골키퍼가 한참 뒤에 공을 던졌을 때였다.

삐익! 삑! 삐익!

주심이 전반을 끝내는 휘슬을 길게 불었다.

그라운드를 걸어서 통로로 향하는 길이었다.

퉁퉁 부은 눈을 박용근과 전은주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지우는 일부러 벤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댄 나의 챔피언! 너와 나의 챔피언!”

수원월드컵경기장이 떠나갈 것처럼 우렁찬 응원가를 들으며 벤치 앞을 지날 때였다.

“지우야!”

전은주의 음성이 분명하게 정지우의 귀를 파고들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저렇게 애타게 불러 주는데 어떻게 모른 척하고 통로로 들어가겠나.

정지우는 고개를 슬며시 돌린 후에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괜찮아요, 어머니. 그냥 좀 부은 것뿐이에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전은주가 울음을 참고 있었다.

‘우리 이 경기 다 끝내고 맛있는 거 먹어요.’

들리는 것 같았다.

전은주가 훌쩍이는 소리까지 모두.

‘울지 마세요, 어머니.’

정지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웃어 주고 통로로 들어섰다.

한국 시간 오후 8시 11분, 영국 시간은 낮 12시 11분이었다.

데이지는 직원 휴게실의 스포츠 채널을 통해 정지우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Ji는 한국에서도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눈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달려 나갔고, 공을 던졌어요! 유니온 시티의 마틴 감독은 뿌듯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심경이 복잡할 것 같습니다.』

동시에 열리는 여러 중계 중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병원 스태프들은 한결같이 정지우가 나오는 한국 팀의 경기를 원했다.

『Sang은 분명히 상위권 팀에서 노릴 정도네요.』

전반이 끝나고 하이라이트 장면이 나왔다.

정지 화면에 나온 박상민의 모습 위에 하얀색 동그라미가 칠해지더니, 거기에서 화살표가 길게 이어졌다.

『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입니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달렸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이 방심한 겁니다. 그리고 파울을 얻어 내서 결국 골로 연결했지요.』

『유니온 시티, 올해 성적이 좋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데이지는 의자에 발을 올리고 두 손으로 안은 자세로 TV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궁금해요. 당신이 지금 어떤 생각으로 경기를 하는지. 생각하는 것, 상처, 기분, 느낌, 그냥 다 궁금하다구요.’

스태프들이 힐끔거리는 것도 모른 채 데이지는 계속 TV 화면만 보았다.

정지우가 발로 공을 막고는 바로 일어나 몸을 날리는 장면이 느린 그림으로 나오고 있었다.

팀 닥터가 달려와 정지우의 상처를 거듭 살폈다.

“초점은 괜찮아? 안쪽에 출혈이 있는데?”

팀 닥터의 뒤에서 박용근과 김문호가 무거운 표정으로 정지우를 지켜보았다.

“충분합니다. 공을 놓칠 정도면 제가 사인을 낼게요.”

정지우가 답을 건넨 직후였다.

“지우야, 무리하지는 말자. 축구는 오늘만 하는 게 아니야.”

김문호가 나직하고 무겁게 뜻을 전했다.

“감독님, 저 괜찮다니까요. 공을 놓칠 정도면 경기 망치는 건데, 문제가 될 것 같으면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팀 닥터가 상체를 돌려 김문호를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후반에도 나가는 것으로 하겠다. 조금만 이상해도 교체 신호 낸다는 약속 꼭 지켜.”

“예.”

말을 마친 김문호가 눈짓으로 팀 닥터를 불러 함께 나갔다.

박용근은 픽 하고 웃었다.

그리고 다가와 오른팔을 커다랗게 둘러서 정지우의 머리를 옆구리에 끼우는 것처럼 안았다.

“이 녀석이! 사람을 걱정시켜?”

“걱정하지 않으신 거 같은데요?”

정지우는 팔을 둘러서 박용근의 커다란 몸통을 안았다.

“어머니가 우시는 거 같은데,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나가면서 네가 말해.”

팔을 풀어낸 박용근이 정지우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퉁퉁 부은 눈가, 그리고 핏물이 올라온 것처럼 시뻘겋게 변한 눈동자를 그는 말없이 들여다보기만 했다.

“무리하는 거 아니지?”

“예.”

“이상하다 싶으면 교체 신호 낼 거지?”

“예.”

무언가를 말하려던 박용근이 씨익 웃으며 상체를 들었다.

“엄살 그만 부리고 라커룸으로 가 봐!”

“어? 엄살은 아니었어요!”

둘이서 비슷하게 웃었다.

라커룸으로 들어서자 선수들의 시선이 단번에 달려들었다.

“뭐야? 어떻대?”

그중에서 역시 신준석이 가장 빨리 질문을 던졌다.

“어떻긴 뭐가 어때? 후반에 나가서 세 골 정도 더 넣는 걸 이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 줘야지.”

선수들이 일제히 안도하는 얼굴로 웃었다.

“김오영!”

“예!”

“너, 아까 죽여줬다. 후반에도 좀 더 부탁해!”

“맡겨만 주십시오!”

뻔뻔한 대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후반에는 꽁꽁 잠글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4-2-3-1을 순간적으로 변형해서 밀고 올라간다. 상민아! 뭔지 알지?”

박상민이 고개를 끄덕인 후에 이창진과 선도민을 보았다.

“후반에 좀 더 뛸 수 있겠냐? 너희가 정말 많이 뛰어야 하는데?”

“형! 평생 뛸 거 오늘 다 뛰라고 해도 뛸 겁니다. 작전만 제대로 알려 주세요.”

곱슬머리를 넘긴 헤어스타일의 선도민이 다부지게 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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