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86화 (186/262)

제3장. 우리만의 축구를 보여주기 위해. (3)

사람이 어디 다 똑같은 생각만 가질 수 있겠나.

호텔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조동익은 어금니에 물고 있던 벌레가 터진 듯한 표정이었고, 한승관은 양주를 커다란 컵에 따르고 있었다.

“고작 한 골입니다.”

조동익이 힐끔 보았을 때, 한승관은 커다란 양주를 벌써 반병이나 처마셔서 눈가가 불콰하게 올라와 있었다.

이런 인간의 말을 참고하느니 태엽 풀린 시계를 보는 게 나을 거다. 그건 하루에 두 번은 맞는 거니까.

그래서 조동익은 고개를 반대로 돌려 문광국의 표정을 살폈다.

‘이런……!’

분노와 시샘, 원망이 그의 눈가에 가득했다.

문광국의 이런 표정은 솔직히 처음 봤다고 할 정도였다.

조동익의 시선을 느꼈는지 문광국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소집했을 때, 저런 몸놀림을 보여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응원을 준 적도 없었구요. 솔직히 저런 팀을 제가 맡았더라면 벌써 세 골은 뽑았을 겁니다.”

에효! 그동안 계속 저런 팀을 맡겨 준 덕분에 설쳐 놓고는!

그러나 조동익은 연륜이 있었다.

지금은 문광국을 보듬어야 할 시기인 거다.

“오늘을 기점으로 자네가 다시 만들어야지. 그러니까 잘 보고 있다가 저 녀석들을 기반으로 더 뛰어난 팀을 만들어 보라고.”

“그러겠습니다. 이걸 보니까 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전에 제가 다 만들었던 걸 거의 고대로 주워다 생색만 내는 거 아닙니까?”

문광국이 이런 인물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는 평소와 다르게 뻔뻔한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박용근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지난 경기에서 형편없는 성과를 낸 것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이게 혹시 문광국의 본모습일까?

“응원도 그렇습니다. 나를 그렇게 믿어 주겠다고 했으면 끝까지 저 경기를 외면했어야지, 간사하게 저기서 저렇게 응원가를 부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흠, 그렇지. 그러니까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자네가 움켜쥐고 꼼짝 못하게 만들라고. 그나저나 자네 보기엔 어때? 네 골이 나오겠나?”

문광국이 나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우디가 잠그는 거 같은데요. 저 상태면 잘해야 한 골 정도 더 뽑을까 싶고, 거기에 수비 라인을 너무 올려서 어쩌면 오히려 한 골 정도 먹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문광국의 판단인 거다.

“거기에다 사우디가 눕기 시작하면 경기 끝입니다! 이렇게 시간 끌 것 없이 경기 시작과 동시에 쓰러져야 하는 건데, 오늘은 좀 이상하네요.”

조동익은 어쩐지 보험을 들은 것처럼 속이 편안해졌다.

전반이 벌써 30분이나 흘렀다.

아예 선수 전원이 페널티 에어리어 앞에 몰려 있는 사우디를 상대로 틈을 만들기 위해 한국 팀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일 대 영으로 앞서고 있는 한국! 좀처럼 추가 골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열 명의 선수가 들어가 있어요. 바깥에서 공을 돌리는 것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투인데요!』

“우와-!”

『이정렬! 골대 앞에서! 슈웃!』

터엉!

『사우디의 사에드 알 수왈라드 맞고 나갑니다! 코너킥을 얻어 낸 한국! 아! 사에드 선수! 쓰러져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엉덩이에 맞았던 것 같은데요?』

슈팅 장면이 느린 그림으로 다시 이어졌다.

이정렬이 페널티 에어리어 왼편에서 날린 슈팅이 몸을 비튼 사에드 알 수왈라드의 엉덩이에 맞고 튕겨 나갔다.

『수원월드컵경기장의 잔디가 무척 푹신한 모양입니다. 사우디 선수들! 잔디의 감촉을 온몸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저럴 땐 주심이 빨리 밖으로 나가게 하든가, 아니면 경기를 진행해야 하는데…….』

주심이 손짓을 하는데도 사에드는 엉덩이를 만져 가며 통증만 호소하고 있었다.

『주심! 결국 의료진을 부릅니다!』

천천히 걸어 들어간 의료진이 사에드를 살피는 동안, 주심은 계속해서 양손을 그라운드 밖으로 움직이며 나가서 치료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우-!”

왼쪽 코너킥 지점에 공을 내려놓은 이창진이 답답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고, 박상민이 달려가서 경기를 빨리하자는 의미로 양손 검지를 빙글빙글 돌려 보였다.

『이제 일어납니다! 이 정도면 주심이 경고를 주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한 점을 뒤진 상태인 데다, 또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저렇게 밖으로 나가거든요.』

사에드가 밖으로 나간 다음이었다.

주심이 휘슬을 입에 물고 시선을 돌리자 이정렬과 박상민, 김오영, 이재범이 골대를 향해 움직였다.

그때였다.

“우우-!”

사우디의 오마르 하위사위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쓰러져 좌우로 굴렀다.

삑! 삑! 삑! 삑!

박상민에게 사우디 선수들이 몰려든 상태여서 주심이 급하게 달려왔다. 양손을 들고 뒤로 물러나는 박상민에게 사우디 선수들 셋이 거칠게 항의했다.

『느린 그림이 나오고 있습니다! 부딪친 건가요?』

화면에 나오는 그림에서 박상민이 골대로 움직이자, 멀쩡하게 뒤에 서 있던 오마르가 느닷없이 얼굴을 감싸고 옆으로 쓰러졌다.

박상민이 얼른 일어나라고 하자 선수들이 달려든 거였다.

『이건 좀…….』

해설자도 기가 막힌 모양인지 말을 잇지 못하고 헛웃음을 뱉고 말았다.

삐익!

주심이 박상민의 앞에서 물러나라고 지시하는데도 사우디 선수들은 자꾸만 박상민에게 다가가며 시간을 끌었다.

카메라가 잡고 있는 줄 몰랐는지, 엎어져 있던 오마르가 고개를 살짝 돌려 눈치를 살피고는 다시 손에 얼굴을 묻는 장면도 나왔다.

『사우디아라비아, 아시아의 축구 발전을 위해서라도 좀 더 깨끗한 경기 운영을 당부합니다.』

『고질적인 문제점이거든요. 자국의 리그 경기에서조차 한 점만 이기면 쓰러지곤 하는데, 이런 모습들이 결국은 아시아 축구를 얕보이게 하고, 전반적인 수준 하락을 가져오게 합니다.』

“우-!”

더는 지켜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주심이 쓰러진 오마르에게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언제 아팠느냐는 것처럼 그가 벌떡 일어나서 주심을 향해 비굴한 표정과 손짓을 보였다.

주심은 검지를 들어 그에게 구두로 경고를 주고는 뒤로 물러났다.

코너킥 상황이었다.

정지우는 어쩐지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의 움직임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두 번에 걸친 사우디 선수들의 지연 행위에 우리 선수들의 집중력이 많이 흐트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범주야! 야! 김범주!”

김범주가 뒤를 돌아볼 때였다.

삐이이익!

휘슬이 울렸고, 이창진이 기다랗게 공을 날렸다.

박상민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이었다.

휘이익!

이정렬과 김오영은 동선이 겹쳐서 둘이서 비슷한 곳에서 솟아올라 제대로 공을 따내지 못했다.

터어엉!

공을 따낸 것은 사우디의 6번 무스타파였다.

그가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걷어 낸 공을 향해 선도민이 달려들었는데, 살만 알 파라즈가 한발 더 빨랐다.

투욱!

『공을 잡은 사우디! 한국 진영을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습니다!』

『내려와야 돼요! 뒤에서 잡아 줘야죠!』

『수비 넷! 공격 셋입니다!』

투욱!

살만 알 파라즈가 김범주와 강서준의 중간으로 공을 툭 차 놓고 달려들고 있었다.

“우-!”

역동작에 걸린 김범주와 강서준은 살만 알 파라즈를 제대로 따라붙지 못했다.

경고를 먹더라도 잡아챘어야 했다.

그런데 둘은 그럴 정도로 경험이 풍부하지 않았다.

거기에 주길성과 신준석은 살만 알 파라즈와 함께 달리는 선수들을 따라붙느라 여유가 없었다.

『완전히 뚫렸습니다!』

살만 알 파라즈가 공을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악!

미친놈처럼 달려왔던 박상민이 뒤에서 몸을 날렸다.

터억! 콰다당!

“와아아-!”

살만 알 파라즈가 요란스럽게 앞으로 엎어졌는데 공은 박상민의 발끝에 걸려 있었다.

『박상민! 환상적인 태클로 공을 잡아냅니다!』

슬라이딩 태클로 몸을 날렸던 박상민이 벌떡 일어나 왼쪽의 이창진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공만 건드렸어요! 저런 건 아무리 항의를 해 봐야 꼬투리를 잡을 게 없는 거지요.』

이창진이 페널티 에어리어 앞에 있는 이정렬에게 공을 넘긴 직후였다.

투욱!

공을 받은 이정렬이 빙글 몸을 돌리고는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뛰어들었다.

“와아-!”

툭툭!

『이정렬! 드리블!』

“우-!”

그러나 수비수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고작 두 번 공을 터치한 직후에 바로 뺏기고 말았다.

퍼어엉!

그리고 그 공이 이제야 사우디 진영으로 움직이던 살만 알 파라즈에게 제대로 연결되었다.

공을 받아 주기 위해 박상민까지 사우디의 페널티 에어리어 앞에 있었고, 전력질주를 했던 신준석과 주길성 역시 중앙선을 넘어선 상태여서 정말 김범주와 강서준밖에 없었다.

『위험합니다! 한국! 공격 셋에 수비 둘입니다!』

“우-!”

관중들이 의도적인 야유와 탄성을 내지를 때,

투우욱!

살만 알 파라즈가 강서준의 옆을 스치는 패스를 찔러 넣었다.

와락!

오른쪽에서 뛰던 13번 야시르 알샤흐라니가 공을 받았고, 달리던 속도를 죽이지 않은 채 뛰어왔다.

정지우는 자세를 낮추고 중앙에서 한 걸음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아! 한국 팀 위기입니다!』

살만 알 파라즈의 바로 뒤에서 김범주와 강서준이 따라오고는 있었다.

『왼편에 14번 사우드 카리리 선수를 잡아 줘야 돼요!』

정지우는 자세를 잔뜩 낮추고 야시르 알샤흐라니의 발만 보았다.

중앙에 공격수 하나, 뒤따르는 수비수 둘, 좌측에 완전히 혼자 뛰어오는 공격수 하나.

그 상태에서 오른쪽을 가로지르며 야시르가 공을 몰고 달려드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할래?’

한 걸음 움직였으니 오른쪽 골포스트와의 거리는 1.5미터가 분명했다.

골대 앞 5미터까지 오면 슈팅이다.

패스를 한다면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골키퍼 에어리어 사이일 확률이 높았다.

퍼억! 퍼억!

여름밤의 후끈한 열기 속으로 스터트에 잘린 잔디가 튀어 올랐다.

와라! 이렇게 그냥 있잖냐! 그러니까 와! 좀 더!

정지우는 양팔을 벌린 자세로 주춤거리기만 했다.

여자 관중들이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온몸에 힘을 준 채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시르 알샤흐라니! 페널티 에어리어를 지납니다! 자세 잡은 정지우!』

힐끔.

야시르가 옆을 바라보고는 공을 툭 건드렸다.

‘어떻게 할 거냐고!’

정지우는 절벽 끝에 서 있는 매처럼 금방이라도 몸을 던질 듯한 자세로 있었다.

한승관이 커다랗게 외쳤다.

“멍청아! 먹을 때 먹더라도 나왔어야지! 잘난 척하더니!”

조동익의 옆에서 문광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발라 놓은 얼굴이었다.

호프집의 모든 이들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남자 손님들은 이미 골을 허용한 것같이 참담한 표정이었고, 여자 손님들은 온몸을 웅크린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야시르! 야시르! 골키퍼와 일대일!』

주인도, 손님도, 직원들도 모두 굳은 것처럼 TV를 보고 있어서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린 가게 같았다.

정지우의 오른쪽에서 달려오는 거다.

그래서 야시르가 슈팅을 날리려면 골대 쪽으로 몸을 비틀거나 공을 돌려야 한다.

멍청아! 넌 오른발을 쓰잖아!

파악!

골키퍼 에어리어 라인을 야시르가 밟는 순간이었다.

와락!

그때까지 굳은 것처럼 있던 정지우가 느닷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야시르! 슈웃!』

퍼어엉!

야시르의 슈팅은 급했다.

이 거리까지 기다렸던 정지우가 튀어나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급하게 슈팅을 하면 대개 넓어 보이는 쪽으로 찬다.

더구나 통로에서 힐끔거렸을 정도로 유명한 정지우가 골키퍼라면!

공은 낮게 정지우의 왼쪽으로 날아왔다.

화악!

정지우는 왼발을 쭉 뻗었다.

터엉!

“와아아아-!”

『정지우! 선방!』

『오오! 막아야죠! 달려들어야 해요!』

튕겨 나간 공이 왼쪽에서 달려오던 사우드 카리리의 앞으로 굴렀다.

왼발을 쭉 뻗는 바람에 뒤로 주저앉았던 정지우였다.

벌떡!

퍼어엉!

손으로 바닥을 밀치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도 정지우는 오로지 공만 노려보고 있었다.

화아악!

허공으로 솟구쳤고, 슈퍼맨이 움츠렸던 오른손을 앞으로 뻗는 것처럼 내밀었다.

판단? 선택? 그런 거 생각할 틈 전혀 없었다.

그저 공을 보며 반사적으로 움직인 거였다.

터억! 털썩!

“우와아아아아아아-!”

영국에서 들었던 것과는 다른 느낌의 함성이었다.

펄쩍펄쩍 뛰면서 계속해서 지르는 남자, 여자의 목소리가 뒤섞인 함성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정지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 앞니를 드러낼 정도로 고통스러운 표정의 사우드 카리리가 뒤통수를 끌어안고 있었다.

“꺄아아아!”

“으와아아아!”

호프집은 완전히 광란의 도가니였다.

옆 사람을 붙잡고 그 좁은 곳을 뛰느라 탁자에 있던 잔과 안주 그릇이 바닥으로 쏟아졌는데, 누구 한 사람 탓하거나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정지우를 위해! 대한민국 월드컵 진출을 위해!”

그나마 잔을 지킨 사람이 악을 써 댔고,

“우와아아아아!”

다 같이 함성으로 받았다.

사장의 표정만 살짝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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