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우리만의 축구를 보여주기 위해. (2)
“대- 한민국!”
짝짝짝! 짝짝!
관중들의 목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열정적인 응원이 수원월드컵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예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우디아라비아! 한 선수도 중앙선을 넘지 않은 채 공을 돌리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수비 위주로 경기를 풀어 나가겠다는 계산처럼 보이네요.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우리 선수들이 앞으로 나가면 역습을 노리려는 것 같습니다.』
정지우는 신준석과 주길성을 향해 양손을 앞으로 밀어 보였다.
‘좀 더 나가!’
‘위험하지 않겠냐?’
‘이게 최선이다! 빈틈이 보여야 저쪽도 움직여!’
신준석이 고개를 끄덕인 후에 주길성을 향해 손짓을 했다.
주길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다.
‘올라가! 그리고 밀어붙여! 오늘은 이렇게 간다!’
중앙 수비수 김범주와 강서준이 약간 처졌고, 양 끝의 주길성과 신준석이 중앙선을 밟다시피 위로 올라가서 마치 2-4-3-1의 포메이션처럼 보였다.
『왈리드 골키퍼! 공을 받아서 사에드 알 수왈라드에게. 이정렬이 끝까지 쫓아갑니다!』
“우-!”
『우리 선수들! 쫓아가는 건 좋은데 수비 라인까지 너무 올라가는 건 위험해요! 조금은 물러났으면 싶은데요!』
『수비 라인이 중앙선 부근까지 완전히 올라와서 경기장을 반만 사용하는 경기처럼 보입니다! 오사마 하우사위! 패스!』
그때였다.
박상민이 느닷없이 흘러가는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와아-!”
『박상민! 공을 가로챘습니다!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밀고 가는 박상민! 이정렬에게! 이정렬! 뒤로 김오영에게!』
『오른쪽이 비었어요!』
투우욱!
해설자의 말을 들은 것처럼 김오영이 오른쪽 코너에 공을 찔러 주었다.
『이재범! 공을 잡아서! 어디로! 다시 박상민에게!』
“와아아-!”
『박상민! 공을 받아서 골대 중앙으로! 박상민! 중앙의 이정렬에게 공을 넘깁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이 페널티 에어리어에 모두 들어 있다시피 해서 공간이 없었다.
퍼어어엉!
『이정렬! 슈우웃!』
“와-!”
공은 골대 왼편을 1미터쯤 벗어나서 밖으로 날아갔다.
『대한민국의 첫 번째 슈팅입니다.』
『나쁘지 않아요. 수비수들이 저렇게 몰려 있을 때는 차라리 지금처럼 중거리 슈팅을 날려서 앞을 막기 위해 뛰어나오게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공을 받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골키퍼가 바닥에 내려놓고 이리저리 차는 시늉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우-!”
『관중들이 야유를 보내고 있습니다. 왈리드 압둘라 골키퍼! 이제야 공을 찹니다. 이정렬과 이재범이 달려듭니다.』
『우리 선수들! 잘하고 있어요. 지금처럼 전방부터 압박하면서 침착하게 경기를 풀어 나가면 됩니다.』
정지우는 뛰고 있는 동료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덕분인지, 브라질전과는 다르게 우리 팀 선수들은 이미 긴장이 풀린 것처럼 뛰고 있어서였다.
전반이 10분쯤 지난 상황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 오히려 나쁘지 않다. 패스 연습을 하는 것처럼 뛰고 있어서 뜻밖에도 편안하게 몸이 풀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은 오늘 박상민의 몸놀림과 위치 선정이었다.
정말 많이 늘었다.
솔직히 저렇게 발전할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박상민은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김오영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래! 거길 맡아 줘!’
보인다! 거짓말처럼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의 움직임이 다 보였다. 그래서 사우디의 누군가가 움직이면 공이 어디로 갈 것인지도 대강 알 것 같았다.
“자신 있냐?”
“몰라.”
어젯밤이었다.
박상민의 질문에 정지우는 예상외의 답을 꺼냈었다.
“나는 골키퍼잖냐. 무실점으로 이기는 거라면 자신 있다고 하겠는데, 골을 넣는 건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그러면서 정지우는 박상민을 똑바로 보았다.
“상민아, 난 아버지를 모르고 살았잖아. 그래서 아버지가 있다면 꼭 감독님 느낌일 것 같아. 이번 경기는 나를 축구 선수로 키워 주신 그런 아버지에 대한 내 보답 같은 거야.”
아버지, 아버지라고 했었다.
박상민은 곰탕을 억지로 뜨면서 자신이 먹는 것을 자꾸만 바라보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누워 있는 것도 힘들어하는 양반이 식사가 끝날 때까지 소파에 기대 가며 버틴 거였다.
무뚝뚝하고, 자상한 말 따위는 전혀 없던 양반이었다.
그래서 아들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양반이 봉투를 내밀었을 때 억지로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떨었다.
돈에 욕심을 낸 거라면 마음이 아리지 않았을 거다.
‘우리 아들이 축구를 이렇게 잘하는데…….’
뒷바라지를 못해 주는 아버지의 아픔이 고스란히 입술과 힘을 꽉 준 볼, 눈물 맺힌 눈에 담겨 있었다.
박상민은 정지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경기! 우리 둘은 아버지를 위해 뛰는 거로 하자. 골대를 지켜 줘! 내가 공을 안고 골대로 뛰어들더라도 꼭 네 골 만들어 낼게.”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정지우가 픽 웃으며 머리를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
박상민은 천천히 몸을 뒤로 빼냈다.
“도민아! 오른쪽! 13번!”
이번엔 손짓을 하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도 다 보는 상황에서 굳이 압박 방향을 알려 줄 필요는 없는 거였다.
“허억! 허억!”
숨이 뚫렸다. 그래서 박상민은 편안하게 달렸다.
다들 긴장을 털어 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좋았다.
그때 박상민이 노리던 기회가 보였다.
투욱!
『사우디의 13번 야시르! 오른쪽으로 공을 돌립니다.』
와라락!
“와아아-!”
『박상민! 또다시 공을 가로챘습니다!』
콰아악!
그리고 그 순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7번 살만 알 파라즈가 거친 태클을 날렸다.
휘이익!
박상민이 몸을 띄우며 공을 빼내려 했으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삐이익!
『살만 알 파라즈의 파울! 중앙선을 살짝 넘어선 지점입니다! 박상민 선수! 초반이긴 하지만 정말 많이 뜁니다! 언제 또 오른쪽으로 가서 공을 뺏어 냈는지!』
『굉장하네요. 그뿐만이 아니구요, 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이나 위치 선정이 정말 탁월한데요. 지금 공을 가로챈 것도 상대 선수의 패스를 읽고 있다가 달려든 거거든요. 박용근 감독 아래에서 배우고, 유럽 선수들과 경쟁하면서 정말 많이 늘었습니다.』
공을 바닥에 내려놓은 박상민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준석아!”
신준석이 빠르게 달려왔다.
“혹시 공을 잡으면 밀고 올라오는 척하면서 바로 찔러 줘! 본머스전 때처럼!”
“알았어! 너를 노려?”
“응! 중앙에 정렬이랑 오영이도 있으니까. 지금은 그렇게 바로 찌르는 게, 거쳐 가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있을 것 같아. 네가 공을 잡으면 쟤들도 좀 방심할 거 같고.”
신준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포백의 라인을 조절하는 자신이 중앙선을 넘어가면 수비가 불안해지는 거다.
그런데 시선을 돌린 순간에 정지우는 다시 앞으로 손을 밀어 보였다. 밀고 올라가라는 의미였다.
정지우는 어떻게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저런 사인을 주는 걸까?
차원이 다르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는 것 같아서 신준석은 입가에 웃음을 달고 뒤로 슬쩍 물러났다.
“대- 한민국!”
짝짝짝! 짝짝!
모처럼 프리킥 찬스였다.
관중들이 좀 더 강렬한 응원을 보내 주고 있었다.
박상민이 공 앞에 서서 앞을 노려보자 이정렬과 이재범, 김오영이 사우디의 골대 앞에서 기회를 노렸다.
이럴 때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박상민은 김오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형? 나요?’
‘준비하고 있어! 정렬이에게 시선을 뺏겼을 때다!’
삐이익!
휘슬이 울리자 김오영이 사우디의 수비수 사에드를 뿌리치며 공간을 만들었다.
투우욱!
그러나 길게 찰 것처럼 뒤로 물러났던 박상민은 근처에 있던 선도민에게 공을 차 주었다.
“도민아! 뒤로 빼 줘! 준석이! 준석이!”
박상민이 앞으로 뛰어들자 오마르 하위사위가 따라붙었고, 무스타파가 앞을 막아섰다.
선도민은 뒤편에 있던 김범주에게 공을 넘겼고, 김범주는 그 공을 다시 신준석에게 빼 주었다.
『신준석! 강서준에게!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은 아예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강서준! 다시 신준석에게 패스!』
『무리할 필요 없어요! 좋은 선택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라인을 정비하면서…….』
해설자가 상황을 설명할 때였다.
퍼어어엉!
신준석이 느닷없이 골대를 향해 있는 힘껏 공을 차 주었다.
『신준석! 길게 공을 넘깁니다!』
박상민과 이정렬, 김오영이 공을 향해 일제히 뛰어들었다.
“오영아!”
김오영은 박상민의 고함을 분명하게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당장은 골대 앞에 사우디 선수들이 너무 많아서 저 공을 받아 낼 수 있을지 그것만 걱정됐다.
휘이이익!
김오영이 공을 노리고 몸을 띄우는 순간이었다.
‘형?’
콰아악! 와락! 와라락!
박상민이 사우디아라비아 선수 셋을 등과 팔로 막으며 버티고 있었다.
“동료를 믿고! 한결같이 응원해 준 저 팬들을 위해! 후회 없는 경기를 만들자!”
함성 대신 정지우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셋을 상대로 박상민이 얼마나 힘을 쓰는지가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모두 담겨 있었다.
휘이익!
김오영은 공의 방향을 꺾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골대를 향해 움직였다.
터어엉!
『김오영! 헤더!』
『오오오-!』
공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골대 오른쪽을 파고들었다.
화아아악!
왈리드 압둘라 골키퍼가 급하게 몸을 날렸지만, 코스가 워낙 좋았다.
티잉!
크로스바의 끝에 걸린 공이 골대 라인 안쪽에 깊숙하게 떨어졌다.
“와아아아아아-!”
『고오올! 고오올!』
『골! 골입니다! 김오영 선수! 이른 시간에 선취 골을 만들어 냅니다!』
바닥에 내려선 김오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골대 안에 있는 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에 있는 거지?
내가 골을 만든 거 맞지?
“와아아아아아아-!”
함성이 분명하게 들렸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와락!
그리고 그때 박상민이 김오영의 목을 끌어안으며 달려들었다.
“잘했다! 멋졌어!”
“형! 내가 넣은 거죠! 그렇죠!”
“이 자식!”
박상민을 따라 달리는 동안 동료들이 우르르 다가와서 김오영의 머리를 두들기고, 목을 끌어안았다.
김오영은 좋았다. 미칠 것처럼!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는 우리 선배.
훈련이 끝났을 때 뒷정리를 하며 한 걸음을 더 뛰어 달라고 부탁하는 선배, 그리고 부당하게 누르는 이들에게 거칠게 항의해 주던 선배.
정지우, 박상민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계속 뛰고 싶었다.
“오오-! 오오- 오오오! 오오-! 오오- 오오오!”
관중들이 제자리에서 뛰며 승리의 응원가를 불러 댔고, 화장지를 기다랗게 던졌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선취 골을 뽑아냈습니다. 김오영 선수! 정말 완벽한 헤더였습니다!』
화면에서 골을 넣는 장면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보세요! 뒤편에서 이정렬 선수가 수비수를 달고 함께 뛰었구요, 앞쪽 공간을 박상민 선수가 완벽하게 지켜 줬어요! 굉장하네요! 약속된 플레이였던 모양인데요!』
박상민이 이를 악문 얼굴로 사우디 선수 셋을 버텨 내는 장면이 나왔다. 뒤편에 있던 선수 한 명이 그의 목을 잡아당기는 것도 분명하게 잡혔다.
『성급한 판단이긴 하지만 이번 대회 최고의 수확은 박상민 선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충분히 칭찬할 만합니다! 거기에 김오영 선수! 체공시간도 그렇구요, 공중에 뜬 상태에서 완벽하다고 할 만큼 정확하게 코너에 찔러 넣었어요!』
『우리 선수들! 이렇게 가슴 후련한 축구를 본 게 얼마 만인가 싶습니다!』
선수들이 중앙선에 모여들 때였다.
“그댄 나의 챔피언! 너와 나의 챔피언!”
관중들이 어깨를 맞잡고 자리에서 뛰며 응원가를 불러 댔다.
정지우가 하늘을 향해 양손 검지를 드는 장면이 TV를 통해 나오자 호프집에 있던 여자 손님들이 눈가를 닦아 냈다.
왜 그런지 모르는데, 골이 들어간 직후에 하늘을 바라보는 정지우를 보자 왈칵 울음이 나온 거였다.
박용근과 코칭스태프를 얼싸안았던 김문호는 커다랗게 숨을 내쉬고는 넥타이를 만졌다.
후배들이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까마득한 후배들.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자꾸만 올라오는 감동을 누르기 위해 일부러 엄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정지우를 보았다.
‘고맙다, 지우야.’
저 녀석이 시작했고, 저 녀석이 만들어 냈다.
박용근과 자신은 이렇게 도울 뿐이다.
이게 발전하는 축구일 거다.
후배가 달리고, 선배가 돕는 것.
자랑스럽고, 고맙고, 대견하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실없이 웃음이 올라왔다.
사람 감정이라는 게 참 알 수 없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