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84화 (184/262)

제3장. 우리만의 축구를 보여주기 위해. (1)

토요일 오후.

외면받을지 모른다고 우려했던 최종 예선이었다.

그런데도 수원월드컵경기장의 관중석은 빈자리 하나 없이 가득 찼고, 고수부지, 시청 앞 광장은 물론이고 호프집, 가정마다 응원 열기로 가득했다.

『축구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시청자 여러분, 지금부터 대한민국 월드컵 최종 예선,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와 한국의 경기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중계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캐스터의 말소리 뒤에서 ‘대- 한민국!’이란 응원 구호와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이어지고 있었다.

가득 찬 곳은 또 있었다.

호프집은 지난번 본머스 경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가득했다. 그 넓은 홀에 직원들이 지나갈 통로까지 의자가 놓여서, 주문받은 맥주를 자리에 앉은 손님들이 손에 손을 통해 전달해 주는 지경이었다.

영국에서 해 주는 중계를 볼 때와는 달라서 응원 구호를 모두 안다.

“대- 한민국!”

짝짝짝! 짝짝!

붉은색 셔츠, 붉은 악마의 뿔을 연상케 하는 머리띠, 붉은색 머플러까지 들고 온 관중들이 TV에서 나오는 구호를 따라 함께 응원을 펼쳤다.

TV 화면에서는 선수들의 명단과 포메이션이 떠올라 있었다.

『오늘 한국 팀은 4-2-3-1의 포메이션을 선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김문호 감독은 최전방에 이정렬 선수를 두고, 그 뒤로 김오영, 박상민, 이재범 선수를 2선에 배치했네요.』

『수비진도 그동안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정지우 선수와 호흡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주길성, 김범주, 강서준, 신준석 선수가 수비 라인을 형성했구요, 그 앞에 이창진과 선도민 선수를 배치해서 수비 라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대화가 힘겨울 정도로 ‘대- 한민국!’이라는 응원이 크고 강하게 울려 나왔다.

『어떻습니까? 영국 리그에서 선두를 달리는 팀의 네 선수가 합류했는데, 오늘 그동안의 부진을 씻고 모처럼 우리 축구 팬들의 속을 후련하게 해 줄 경기를 보여 줄 수 있을까요?』

『브라질과의 평가전 전반을 뛰었던 시쳇말로 젊은 피로 구성된 팀이거든요. 그때의 경기력을 다시 보여 줄 수 있다면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수 기용을 보면 김문호 감독이 모든 것을 던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요?』

『맞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지우 선수를 비롯한 신준석, 박상민, 이정렬 선수의 어깨가 무겁지요. 오늘 이런 응원 열기를 끌어낸 것도 사실 박용근 감독과 정지우 선수를 비롯한 박용근 키즈들의 등장에 있는 만큼 부담감이 상당할 겁니다.』

해설자가 캐스터의 말을 듣기 위해 이어셋을 손으로 눌러 가며 겨우겨우 답을 했다. 그만큼 응원의 열기는 대단했다.

『부담이라면 김문호 감독도 상당할 텐데요. 워낙 이 경기에 기대하는 바가 큰데, 네 골 차 승리가 사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잖습니까?』

『경기 전 인터뷰에서 김문호 감독은 준비에 최선을 다했고, 그런 만큼 후회 없는 경기를 하겠다고 했거든요. 우리 선수들 역시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기를 희망합니다.』

TV 화면은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을 천천히 보여 주고 있었다.

<박용근 감독님! 우리도 월드컵 본선을 응원하고 싶어요!>

화면 중간에 관중이 높다랗게 든 글귀가 스쳐 지나갔다.

해 보자는 의지, 부담스러운 경기를 앞둔 긴장이 뒤엉켜 있어서 라커룸의 분위기는 복잡 미묘했다.

“대- 한민국!”

짝짝짝! 짝짝!

그라운드를 뒤덮은 엄청난 응원 구호가 라커룸을 파고드는 가운데, 정지우는 회색 골키퍼 유니폼을 입고서 골키퍼 장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국에서 경험했던 FA컵 결승전이나 중요한 경기들과는 또 다른 긴장과 부담감이 양어깨에 올라타서 덩치를 키우는 느낌이었다.

이기고 싶다.

오늘만큼은 협회니 미운 사람들을 모두 버리고, 저렇게 응원해 주는 관중들과 축구를 시청하는 팬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승리를 안겨 주고 싶었다.

‘어머니, 여기까지 왔어요.’

익숙한 장갑의 감촉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감독님과 함께 국가대표팀 경기, 꼭 같이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요. 멤버들도 마음에 들어요. 후회 없이 뛸게요.’

다들 제 나름의 방식으로 긴장을 풀고 있을 때였다.

달칵.

김문호와 박용근이 라커룸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먼저 선수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함께 훈련할 수 있었던 점에 감사한다.”

김문호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건 모두 내 책임이다. 그러니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너희의 실력이나 노력을 의심하지는 마라. 훈련하느라 고생 많았다.”

말을 마친 김문호가 옆에 있는 박용근에게 시선을 주었다.

“김문호 감독과 나는 국가대표로 함께 뛰었었다. 그때 우리는 경험이나 실력 모두 지금의 너희보다 부족했었지만, 그 어떤 상대 팀 선수들보다 열심히 뛰었다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다.”

박용근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오늘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이 경기가 너희 뒤에 뛸 누군가에게 기준점이 될 거다.”

정지우가 똑바로 바라보는 앞에서 박용근은 모처럼 눈빛을 강렬하게 빛내고 있었다.

“저 응원 구호를 가슴으로 들어라. 내가 뛰었던 경기 때도, 그리고 오늘도, 저분들은 늘 같은 응원을 주었다. 우리는 저 응원에 부족하지 않은 경기를 뛸 의무가 있다. 그것이 내가 아는 국가대표팀이다.”

박용근이 말을 마치자 김문호가 바로 몸을 돌렸고, 인사할 틈도 없이 박용근이 그의 뒤를 따라 라커룸을 나섰다.

이제 그라운드로 나설 시간이었다.

숨을 나직하게 쉰 정지우가 고개를 들었다.

“지난번에 우리가 못 보여 줬던 것들을 오늘 경기에서 모두 보여 주자. 가장 힘든 순간에 한 걸음씩 더! 잊지 않았지?”

나직하게 퍼진 정지우의 말이 라커룸에 있는 선수들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지금부터 우리만의 축구를 하는 거다. 동료를 위해, 저 응원을 해 주는 팬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가 아는 축구를 보여 주기 위해.”

신준석이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정지우에게 다가왔다.

꽈악! 퍼억!

녀석이 손을 내밀어서 함께 맞잡은 후에 오른쪽 가슴을 부딪쳤다. 이어서 다가온 것은 박상민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신준석이 걸음을 옮기며 주길성, 강서준, 그리고 옆에 있는 선수들과 비슷하게 손을 맞잡고 오른쪽 어깨를 부딪치기 시작한 것은.

“가자!”

신준석이 고함을 질렀고, 김오영이 그걸 받아서 또다시 ‘가자!’라고 외쳤다.

“해 보자! 고작 네 골이다!”

“가자! 가자!”

이정렬의 외침을 받은 것은 이재범이었다.

딩동댕동! 딩동댕동!

선수들의 대기 알람이 들렸다.

이제는 라커룸을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한 걸음만 더 뛰자!”

“예에-!”

정지우의 고함에 선수들이 일제히 답을 했다.

“동료를 믿고! 한결같이 응원해 준 저 팬들을 위해! 후회 없는 경기를 만들자!”

“예!”

정지우가 눈짓을 하자 신준석이 라커룸을 나섰다.

“대- 한민국!”

짝짝짝! 짝짝!

응원 구호가 단박에 귀를 파고들었고,

자그락, 자그락.

고함을 들었는지 통로에 있던 직원들과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이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대다수의 시선이 정지우에게 쏠렸다.

부담스럽다. 그러나 이런 시선을 당당하게 받을수록 함께 뛰는 동료들은 자부심과 자신감을 얻는다.

정지우는 당당하게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우리 팀 선수를 상대 팀의 선수들이 경계한다는 사실이 주는 자부심, 충분히 부담스러울 상황인데도 우리 팀 선수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볼 때 느껴지는 자신감, 이런 건 함께 서 본 선수들이 아니고는 경험하기 어려운 거다.

방송 카메라가 앞에서 선수들을 담고 있었다.

자가락, 자가락.

이정렬과 박상민, 신준석이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긴장을 털어 냈다.

“대- 한민국!”

짝짝짝! 짝짝!

메아리치는 엄청난 응원을 들으며, 상대 팀 선수들과 함께 통로에 서 있어서인지 선수들 사이에 다시 긴장이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친선전과는 달라서 그럴 거다.

4점 차 승리가 아니면 패배와 다를 바 없다는 부담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각자의 능력으로 이겨 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앞쪽에 있던 직원이 손을 움직여서 선수들에게 움직이라는 신호를 주었다.

자가락, 자가락.

통로에서 걸어 나가자 밝은 조명이 뒤덮은 그라운드가 눈에 들어왔고, 곧바로 아득할 정도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 대표팀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서고 있습니다.』

호프집에서도 엄청난 함성이 울려 나왔다.

그동안 이렇게 모여서 정지우를 응원한 것이 벌써 세 번이 넘는다. 영국의 중계방송이 아닌 우리 방송에서 회색 골키퍼 복장을 한 정지우가 붉은 유니폼을 입은 동료들과 함께 서 있는 거였다.

아는 사이도 아니다. 그냥 중계방송 보면서 응원만 했다.

그런데도 국가대표팀에 서 있는 정지우의 모습을 본 여자 손님 몇 명은 울컥 감정이 올라와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유정호, 신준석의 가족, 다시 왼쪽에 이정렬의 가족들이 있었다.

전은주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감추기 위해 자꾸만 얼굴 앞에 모은 손으로 손뼉을 쳤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아직도 옷장에 걸어 놓은 박용근이다.

축구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 그가 자신이 가장 아끼던 제자와 국가대표팀으로 함께 나선 경기를 보고 있자니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입이 삐죽거리는 것을 이겨 내기가 어려웠다.

당당하게 서 있는 정지우를 향해 엄청난 취재진들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영국 리그에서 뛰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영국은 물론이고 각국의 취재진이 정지우의 모습을 한 장이라도 더 담기 위해 플래시를 연신 터트렸다.

얼마나 긴장될까?

저 어린아이의 어깨에 올려진 짐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박용근의 명예를 위해서 이 경기를 뛰자고 했단다.

저 아이가 말이다.

전은주가 입술에 힘을 꾹 준 채로 코를 훌쩍일 때였다.

시선을 천천히 든 정지우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벤치 바로 위여서 찾는 건 문제가 없다.

영국에서도 이런 일은 흔하게 있었다.

씨익.

그런데 그때 정지우가 분명하게 웃으며 입을 움직였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전은주는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담고 말았다.

『행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지금부터 한국의 월드컵 마지막 예선이 시작됩니다!』

『우리 선수들! 아직 어린 선수들이 많아서 긴장할 수는 있는데요, 잘 이겨 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었으면 싶습니다.』

“대- 한민국!”

짝짝짝! 짝짝!

『양 팀 선수들, 자기 진영에 모여서 선전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붉은색 유니폼의 한국, 흰색 유니폼의 사우디아라비아.』

정지우는 동료들과 어깨를 마주 잡은 상태에서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후회 없이! 남김없이! 가자!”

“예에-!”

주장 신준석이 지른 고함에 선수들이 함성으로 답했다.

“와아아아-!”

팔을 풀어 낸 정지우는 곧바로 골대를 향해 걸었다.

터억.

먼저 왼편 골포스트를 건드리고, 다음으로 오른쪽 골포스트를 발로 찬 다음 중앙으로 걸었다.

휘익! 터억!

“와아아아-!”

『정지우 선수! 특유의 동작으로 골대를 확인합니다!』

『영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요, 저런 제스처가 동료들에게 힘이 된다는 기사도 있었어요.』

『우리 선수들! 그렇게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정지우 선수의 저런 모습이 있었거든요! 저런 모습이 커다란 의지가 됩니다! 우리 선수들! 젊은 피답게 브라질과의 평가전 전반에 보여 주었던 실력을 발휘한다면 오늘 경기,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합니다.』

정지우는 장갑의 손가락을 마주 끼워 가며 천천히 몸을 풀었고, 더불어 긴장을 털어 냈다.

선수들이 중앙선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 서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4-4-2 포메이션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네 골 차로 지게 되면, 같은 시간대에 열리는 아랍에미레이트와 우즈벡의 결과에 따라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거든요. 일단 수비에 치중하다가 역습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삐이익!

“우와아아아-!”

『주심! 휘슬로 전반전을 시작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선공입니다! 살렘 알 다우사리! 공을 뒤로 돌립니다.』

『일단 지금은 공을 돌리며 기회를 보겠죠.』

사우디아라비아가 천천히 공을 돌리고 있었다.

“와!”

『박상민이 건드린 공! 다시 사우디의 나와프가 잡습니다.』

『잘하고 있어요! 지금처럼 함부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 줘야 하죠! 박상민 선수! 정말 많이 늘었네요! 지금 보세요. 김오영과 이재범 선수에게 손짓하고 있는데요, 저렇게 하면 두 선수가 좀 더 자신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거든요.』

“우-!”

『사우디아라비아! 나올 생각이 없는 것처럼 계속 자기 진영에서 공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을 끌어내려는 것처럼도 보이구요, 아무래도 시간을 끌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을 겁니다!』

『좀처럼 중앙선을 넘지 않는 사우디!』

이정렬이 이리저리 쫓아다니고 있지만, 공은 계속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진영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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