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83화 (183/262)

제2장.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

파주 NFC 입구에 모여든 엄청난 기자들이 이번 예선전에 쏠린 관심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정지우 선수! 한마디만!”

붙잡고 매달렸지만, 정지우는 묵묵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 한마디가 어떤 오해를 불러올지 모르고, 또 앞뒤 뚝 자르고 단어 하나로 기사가 만들어지는 세상에서 공연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방에 가방만 놔둔 정지우는 동기 셋과 함께 미팅룸으로 움직였다.

“어? 형! 안녕하세요?”

미팅룸을 들어선 뒤에 인사를 건네는 선수들을 보며 솔직히 좀 놀랐다. 앉아 있는 선수들이 전부 브라질전 전반을 함께했던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지우 형! 잘 지내셨어요?”

특히나 기습 훈련을 하며 친해졌던 김오영과 이재범, 이창진이 반갑게 달려들었고,

“안녕하세요?”

그 외에 선도민과 박영길, 주길성과 김범주, 강서준도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대강 인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이래도 되는 거냐?”

신준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변에 앉은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브라질전 전반을 뛰었던 선수들과 김문호의 제자들이 주축이어서 정지우와 동기들이 가장 나이가 많았다.

신준석의 염려대로 박용근과 김문호, 두 사람 모두 뜻이 맞는 젊은 선수들로만 예선전을 치르겠다는 의미의 선발이었다.

거기에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우리가 이번 예선전에 축구 인생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너희끼리 뛸 수 있게 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긴 선발이기도 했다.

“각자 인사는 좀 나중에 할까?”

그때 김문호와 박용근이 굳은 표정의 스태프들과 함께 미팅룸으로 들어섰다.

“다들 온 거 같으니까 그럼 우선 나부터 소개하지. 나는 여러분과 함께 이번 경기의 감독을 맡은 김문호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뜬금없는 방식의 인사였다.

“여기는 나보다 백배는 유명한, 요즘 한창 뜨는 박용근 유니온 시티 리저브 팀 감독.”

박용근이 힐끔 김문호를 보고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선수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다.

이어서 스태프들의 소개가 있었다.

“시간이 없는 건 다들 알 거다. 여기에서 수요일까지 손발을 맞추고, 목요일에 수원으로 이동해서 월드컵경기장 적응 훈련을 할 예정이다.”

소집 첫날이다. 이런 날은 뭐 좀 정신이 어쩌고, 각오가 어쩐다는 말 한마디쯤은 해 줘야 하는 게 아닐까?

“앞으로 이틀간 오전엔 전술 훈련, 오후에는 미니 게임과 개인 훈련이 잡혀 있다. 포지션별 훈련 계획표는 각자 방으로 가져다줄 테니까 점심 이후에 참고하도록.”

그런데도 김문호는 정말이지 시간이 아깝다는 얼굴로 군더더기를 쏙 빼 버리고 필요한 말만 빠르게 이어 갔다.

설명을 마친 김문호가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너희가 하고 싶었던 축구, 원하는 경기를 해라. 그거면 된다. 이 경기에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건 감독인 내 몫이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그가 시선을 들어서 천천히 선수들을 둘러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의 축구가 얼마나 투지 넘치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최선을 다한 경기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 축구 팬들과 전 세계에 알려 주었으면 하는 거다. 잘 부탁한다.”

지금까지 대표팀 경기를 앞둔 국가대표 감독이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솔직한 김문호의 당부가 진하게 선수들의 가슴에 담겼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그리고 그래서인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다 같이 손뼉을 치며 김문호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첫날 오전 일정은 그 짧은 미팅이 전부였다.

점심 이후에 시작한 훈련 분위기는 당연하게 좋았다.

“달려! 바로 넘겨! 이정렬! 엉뚱한 곳 볼 거야!”

브라질전에서 함께했던 경험, 게다가 신준석, 박상민, 이정렬로 이어지는 역습 라인까지 있어서 박용근이 요구하는 전술을 선수들이 곧바로 이해하며 달렸다.

단판 승부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한 경기에 모든 것이 결정 나는 거다.

“길성아! 나가! 나가!”

정지우는 정지우대로 주전 수비수 4명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있는 대로 고함을 질러 댔다.

준비 기간이 워낙 짧아서 솔직히 서브 수비수들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쉬는 시간까지 항상 주길성, 김범주, 강서준, 신준석과 함께 지내며 의견을 나눴다.

“형! 그럼 아까처럼 저쪽에서 두 명이 오는데, 우리도 둘밖에 없으면 어떻게 하죠?”

“그래서 동선을 익혀 달라는 거야. 페널티킥 라인을 중심으로 공격수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봐. 내가 설 위치를 먼저 이해하고 각을 잡아 주면 어지간한 건 막을 수 있다. 나머진 내가 소리 지를게.”

강서준의 질문에 정지우가 답을 한 다음이었다.

“드리블을 할 수도 있거든. 그러니까 달려들지 말라는 거야. 위치만 잡고 그 자리를 뚫리지 않으면 공격수는 선택을 위해 시간을 끌 수밖에 없어.”

신준석이 수비수의 입장에서 동선을 일러 주었다.

“영국에선 이렇게 의논하고 뛰나요?”

“우리는 고등학교 때도 이렇게 훈련했었어.”

수비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박상민! 거기서 찔러 줘야지! 수비를 도우려면 포메이션 확인하고!”

박용근의 지시가 멀리서 들렸다.

정말이지 해 보고 싶었던 경기였다.

이렇게 호흡 맞는 동료들과 멋진 경기를 펼쳐 내고, 그래서 원하는 결과를 얻고 싶었다.

“훈련하자.”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브 골키퍼 강태섭이 얼른 공을 들고 따라왔다.

“지우 형, 시차 같은 거 안 느껴요?”

“얘는 내일 영국 갔다가 와도 또 이렇게 훈련할 거다.”

강태섭의 질문에 신준석이 쏙 끼어들어서 답을 했다.

“브라질전 전반만 뛴 게 아쉬워서 언제고 이 멤버로 꼭 한 게임 제대로 뛰고 싶었거든. 태섭아, 우리 노력하자. 그래서 다음번엔 네가 골대를 지켜 줘. 내가 응원하고 도울게.”

씨익 웃는 강태섭의 뒤통수를 정지우가 툭 쳐 주었다.

호흡이 잘 맞았고, 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어서, 굳이 부르거나 시키지 않아도 모든 것이 알아서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그랬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다 같이 미팅룸에 앉아서 사우디아라비아의 경기를 반복해서 보고, 또 봤다.

선수들이 박상민의 눈치를 보는 것 같기는 한데, 설마하니 저 녀석이 강제로 끌고 와서 그런 건 아니라고 믿었다.

수요일 오후.

파주 NFC에서의 마지막 훈련을 마쳤을 때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보통은 김문호와 박용근이 들어가고, 스태프들이 움직인 다음, 이어서 선배들 순으로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스태프들이 모두 들어간 다음에 박상민이 구석에 있는 공들을 한쪽으로 모으며 훈련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훈련이라 지난 며칠과는 다르게 시간이 제법 걸리는 일이었다.

안다. 왜 그러는지.

저거, 고등학교 때 정지우가 처음 했었던 일이기도 하다.

정지우와 신준석이 웃으며 움직여서 골대 근처에 흩어져 있는 공을 한쪽으로 모았고, 늘어져 있는 원뿔들을 모았다.

앞서서 들어가던 이정렬이 아차 하는 얼굴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형! 들어가세요!”

“괜찮아. 얼른 들어가서 먼저 씻어.”

“저희가 할게요.”

몇 살 차이 나지 않지만 김오영과 이재범, 이창진이 달려와서 말렸고, 주길성이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서성거렸다.

“힘들 때 있잖냐.”

바닥에 놓인 원통형 뿔을 집으며 박상민이 입을 열었다.

통뼈에 우직한 데다, 과묵하기까지 한 녀석이 입을 열자 다들 어려운 표정으로 시선을 주었다.

“지금 우리 모습 한 번만 떠올려 주라. 그리고 한 걸음만 더 뛰어 주라. 우리도 그렇게 뛸게. 정말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을 때, 그때 한 걸음만 더. 부탁한다.”

말을 마친 박상민이 허리를 숙여서 뿔을 집었고, 이번엔 신준석이 선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이거, 우리 고등학교 3학년 때 지우가 했던 거야. 우리 전국대회 우승한 거, 알지? 그때 우리 애들 전부 이런 마음으로 뛰었다.”

시선을 받은 1년 후배 주길성이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지우의 곁에서 공을 주웠다.

“길성아! 애들이랑 들어가라니까.”

“같이할게요. 그래야 각오가 더 단단하게 잡힐 것 같아서 그래요.”

결국 다 함께 공과 원뿔을 정리했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가 흩어졌던 공을 모으는 것처럼 하나로 모이고 있었다.

목요일 오전에 수원으로 장소를 옮겨서 적응 훈련이 있었다. 엄청난 카메라 앞에서 하는 훈련이라 간단한 몸풀기 정도가 전부였다. 게다가 사우디아라비아 팀이 입국해 있는 상태에서 굳이 주요 전술을 훈련할 이유도 없었다.

“잔디가 좀 아쉽다.”

신준석의 말대로 잔디 상태가 거칠기는 했지만,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경기를 앞둔 선수들의 표정이 정지우의 마음에 걸렸다. 지금껏 애써 외면했던 긴장이 수원월드컵경기장에 도착하자 조금씩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공식 회견 몇 시냐?”

“이따가 5시. 감독님은 왜 널 놔두고 날 주장으로 하셔서, 마음 무거워 죽겠다.”

“너, 유니온 시티 메인 화면에 나왔다던데? 주장이라고?”

“그래? 그럼 오늘 말 좀 잘해야겠는데?”

둘이서 킬킬거리자 박상민이 다가왔고, 이정렬이 뭔 일인가 하는 얼굴을 디밀었다.

지금은 이래야 할 때였다.

이렇게 웃어 주어야 긴장한 선수들이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금요일 저녁.

식사를 마친 박용근과 김문호는 수원의 호텔 객실에 마주 앉았다.

“거참, 시간 빠르다.”

박용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에 있는 자료들을 마지막으로 챙겼다.

“애들은 또 영상 보나? 하여간 지우가 복덩이는 복덩이야. 자네 말대로 브라질전 전반 멤버들만 추렸는데, 경험이 부족한 걸 다 메우겠다니까.”

자료의 끝까지를 살핀 박용근이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고생했다, 김 감독. 내일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후회하지 말자.”

“별소리를 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자네까지 와 줬으니까 난 이걸로 충분해. 우리가 개인적인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둘이서 옛날처럼 국가대표팀에서 함께할 기회가 주어진 것만 해도 감사해.”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내가 고맙지. 그나저나 모처럼 한국 와서 좀 쉬다 가야 하는데 미안해.”

“뛰는 선수들도 있는데 우리야, 뭐.”

박용근도, 김문호가 비슷하게 웃었다. 그러나 두 사람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를 조금씩 실감하는 얼굴이었다.

회의실을 빌려서 이제는 외울 지경인 영상을 마지막으로 함께 봤다.

달칵.

불을 켜고 나자 영상을 보기 전보다 좀 더 분위기가 묵직해져 있었다.

신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경기다. 긴장하지 말고 우리 잘하자.”

말을 마친 신준석이 정지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우야, 한마디 해라.”

신준석이 손짓까지 하는 터라 정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라질전을 함께했었던 멤버니까 그냥 편하게 말할게.”

정지우는 선수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객관적으로 브라질보다 강하지는 않지만, 네 골 이상 넣어야 한다면 그날보다 좀 더 어려운 경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몇 명의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지난번에 브라질과의 전반, 좀 아쉬웠었잖아? 그거 다시 할 기회 얻은 거다. 이번엔 후반에 밀려날 염려 없이 우리끼리 끝까지 할 수 있는 브라질전. 그렇지? 오영아?”

당시에 특히 억울해하던 김오영과 이재범이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감췄다.

“대신 경험 많은 선배들이 없다. 공격 쪽은 정렬이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미드필더들은 상민이를 중심으로 뛰어. 수비는 나랑 준석이가 맡을 테니까.”

“예.”

혼자서 답을 했던 주길성이 뻘쭘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리 그날처럼 뛰자. 다들 이 멤버로 후반 정말 뛰고 싶었잖아. 정말 이기고 싶었었고. 후회 없이, 마지막에 주저앉을 만큼 뛰어서.”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우릴 응원해 주신 팬들과 국민들에게 우리가 하는 축구가 얼마나 뜨거운 건지, 그리고 진짜 축구가 어떤 것인지, 누가 진짜 국가대표인지 제대로 보여 주자.”

박상민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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