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
경기가 끝난 다음 날, 병원에 잠시 들른 정지우는 곧바로 공항으로 움직여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데이지가 병실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비록 그녀가 팬의 입장에서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해도 한국에 가기 전에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병실을 나설 때까지 데이지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게 만나지 못한 채 병원을 나섰다.
고작 일주일이다.
그리고 돌아와도 팬과 선수 사이인 거고.
김문호는 앞에 있는 직원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타나기만 해 봐! 내가 왜 동대문 2번 개인지를 방송 카메라 앞에서 제대로 보여 줄 테니까!”
함께 서 있는 송인수조차 거들지 못할 만큼 김문호는 진심으로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와서 누굴 환영한다고 얼굴을 디밀어? 회장? 회장 아니라 회장 할아비라도 환영 행사 어쩌고 해서 얼굴 디밀면! 내가 그 얼굴 제대로 뭉개 줄 테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해!”
허양수의 비서관이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나 송인수에게서 얻을 것은 없었다.
“뭐야? 나더러 지금 허 회장에게 직접 말하라는 거야? 그래! 가자! 어디 있어? 그 인간?”
“아닙니다. 제가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직원이 화들짝 놀라서 얼른 몸을 돌렸다.
달칵.
사무실 문이 닫힌 직후에 송인수가 시계를 보았다.
오전 7시였다.
“적당히 좀 봐주시지 그러십니까? 박 감독님이나 선수들에게 돌아올 것도 생각해 주셔야죠.”
공항에 함께 가고 싶다는 말을 전한 허양수의 뜻을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거절해도 되나 싶어서 건넨 말이었다.
“어차피 지면 제물로 던져질 거 아닙니까? 그걸 알면서 와 준 친구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보기 싫은 인간에게 굽실거리게는 하지 않도록 하는 게 내 일입니다.”
송인수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순간부터 커지기 시작한 일이 이제는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느닷없이 꼬리를 늘어트린 허양수도 그렇고, 눈치만 살피며 목소리를 내지 않는 조동익과 한승관도 지금은 경기의 결과만 기다리는 눈치였다.
모든 건 예선전 결과에 달렸다.
“출근 시간이라 길이 막힐 겁니다. 출발하시죠.”
송인수의 말에 김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55분이었다.
수속을 하려고 비행기에서 내린 정지우는 박용근 내외, 신준석, 박상민, 이정렬, 그리고 신윤희, 유정호와 함께 움직였다.
조짐은 입국 심사대에서부터 있었다.
여권을 내밀자 ‘정지우 선수! 응원하겠습니다!’ 하고 도장을 찍어 주었고, 세관 검사대에서는 ‘긴 비행에 수고 많았습니다. 예선 잘 부탁합니다.’라고 위로의 말까지 건네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저, 죄송한데요,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도 될까요?’ 하며 함께 비행기에 탔던 승객들이 달려들었고, 또 어떤 승객들은 전화기를 들고 정지우의 모습을 연신 담아 댔다.
정지우만 그런 건 당연히 아니었다.
빈도수가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박상민, 박용근, 이정렬, 신준석의 순으로 승객들이 다가섰다.
전은주와 유정호, 신윤희까지 반응에 놀란 얼굴로 돌아볼 정도였다.
마침내 짐이 레일을 타고 도착했다.
카트에 가방을 실은 정지우가 자동문을 나서는 순간,
“꺄아아아!”
입국장에 커다랗게 비명이 들렸고,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으며, 방송용 카메라의 플래시가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정지우 선수! 사랑해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 팬들부터, 정지우를 그린 그림을 높다랗게 든 여성 팬.
<우리는 월드컵 본선을 응원하고 싶다!>
붉은 글씨를 기다랗게 써 놓은 걸개를 든 남자 팬들이 입국장을 가득 메웠고, 경찰들이 그 앞을 겨우 막아선 상태였다.
멍한 상태에서 잠시 서 있는 정지우의 일행 앞으로 김문호가 다가왔다.
“박 감독! 오느라 고생 많았지. 일단 나가자.”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김문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얼굴로 박용근과 정지우를 안내했다.
“감독님! 인터뷰 시간을 조금만 내주시죠!”
그러나 취재 기자들이 앞을 막아서다시피 달려들어서 길이 쉽게 뚫리지 않았다.
“오늘 분명하게 공항 인터뷰는 없다고 밝혔습니다. 수일 내로 공식 기자회견을 준비할 테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많은 축구 팬들과 국민들이 원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질문 몇 개와 사진 찍을 시간이라도 주세요!”
대략 1분쯤을 말리고 막아서는 실랑이가 있었다.
“김 감독, 괜찮으니까 잠시 인터뷰를 하지.”
마침내 박용근이 김문호에게 조용하게 뜻을 전했고, 잠시 뒤에 공항 한쪽에 자리를 마련했다.
촤자자자작! 촤자자작! 촤자자자작!
기자들이 연신 사진을 찍어 댔고, 그 주변으로 포위하는 것처럼 팬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입국 소감을 먼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가장 먼저 박용근에게 질문이 날아왔다.
“부족하나마 도움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국 축구와 우리 축구를 비교하신다면요?”
저런 질문은 도대체 왜 하는 건가 싶었는데, 박용근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영국 프로팀에서 2군 감독으로 일하고 있고, 그나마 몇 게임밖에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가 두 나라의 프로리그를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박용근의 답이 끝난 직후였다.
“정지우 선수, 이번 예선전에서 무실점을 기대해도 됩니까?”
정지우를 향해 질문이 날아들었다.
예상했던 질문이다. 그래서 정지우는 바로 입을 열었다.
“어떤 경기든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무실점이 가능하다는 뜻인가요?”
저 기자는 정말 무실점을 자신한다는 답을 듣고 싶은 걸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지우는 원론적인 답만 하고 입을 닫았다.
이어서 박상민, 신준석, 이정렬에게 돌아가면서 질문이 건너갔지만 별로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짧은 인터뷰가 그렇게 끝났다.
TV와 인터넷 기사에 정지우 일행의 입국 소식이 커다랗게 나왔다.
『오늘 입국한 박용근 유니온 시티 2군 감독과 선수들은 하루를 쉰 뒤, 내일부터 파주 NFC에서 훈련할 예정입니다.』
기자의 보도 뒤에 박용근의 소감, 정지우의 짧은 각오가 이어졌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내일 오전 입국해서 적응 훈련을 시작합니다.』
화면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경기 모습이 잠시 나왔다.
『박용근 감독과 박용근 키즈가 그동안의 졸전에 실망한 우리 축구 팬들을 만족시키고, 한국을 월드컵 본선으로 이끌 수 있을지, 모든 것이 오는 토요일 오후 7시,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결정됩니다.』
TV 보도는 그렇게 끝났다.
전쟁 같은 입국을 끝내고 정지우는 박용근이 살던 부천의 빌라에 들어갔다.
동기들은 모두 집으로 향했고, 신윤희와 유정호는 당연하게 신준석과 움직여서 함께 온 사람은 김문호가 전부였다.
“고생했다, 박 감독.”
“어후! 집이 좋긴 좋네.”
넓은 영국의 집보다 좁은 한국의 빌라가 더 푸근하게 느껴지는 건 정지우도 마찬가지였다.
“지우 너는 여기서 있을 거냐?”
“예.”
“이 녀석이 묻지도 않고?”
“어? 어머니, 저 호텔에서 자요?”
“무슨 소리야? 셋이 자는 게 싫으면 당신이 오늘 호텔에서 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김문호에게 정지우는 ‘저 여기에서 자고 내일 감독님과 함께 파주로 가겠습니다.’ 하고 답을 했다.
“그래! 그럼 되지. 그나저나 언제부터 어머니라고 불렀냐?”
“영국에서요. 감독님, 저 좀 씻고 나올게요.”
정지우는 말을 마치고 화장실로 움직였다.
좁은 빌라다. 욕실에서 수도꼭지를 열자 물 쏟아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저 녀석, 언제부터 넉살이 저렇게 좋아졌어? 확실히 사람은 함께 지내야 하나 봐.”
김문호가 말을 꺼낼 때 전은주가 봉지 커피를 타서 가져왔다.
“피곤하실 텐데. 주신 거니까 요것만 마시고 가겠습니다. 내일부터 훈련이니까 오늘은 자네도 좀 푹 쉬어.”
“그러지 말고, 저녁에 와. 오늘밖에 없을 텐데 편안하게 소주 한잔하게.”
“그럴까?”
뻔뻔한 김문호의 대답에 전은주까지 셋이서 함께 웃었다.
박상민의 모친은 어젯밤부터 소뼈를 사다가 끓여 댔고, 고기를 삶았으며, 김치를 새로 담갔다.
더운 여름에 가스레인지를 연신 켜 놓아서 빌라 안이 후끈했는데, 박상민의 부친도 덥다는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한술 뜨고 점심시간이었다.
그동안에도 스테인리스 들통 아래에 작게 불이 올라와 있어서, 작은 빌라는 후끈한 열기와 눅눅한 곰탕 냄새로 가득했다.
삐이요! 삐비비비비비!
기다리던 벨 소리다.
모친이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움직였고, 부친은 방문으로 상체를 내밀어 빼꼼히 거실 밖의 현관을 보았다.
누군지 묻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었을 때, 밖에 박상민이 있었다.
“어머니.”
보면 할 말이 가득했는데 막상 아들의 얼굴을 보고, 그 아들이 불러 주는 소리를 듣는 순간에 모친은 눈물만 주르륵 흘렸다.
“왜 울어?”
박상민이 가방을 놓고 들어와 모친을 안아 주었다.
“에구, 내 새끼. 얼마나 고생했냐.”
“고생은? 정말 잘 지냈어요.”
박상민이 모친을 다독일 때였다.
“왔냐?”
기다리지 못하고 부친이 목소리를 냈다.
“아버지, 안 주무셨어요?”
훌쩍이는 모친이 몸을 돌려서 박상민은 얼른 방으로 움직였다.
“저 왔습니다.”
박상민이 넙죽 방 앞에서 절을 했다.
평소에 무뚝뚝하던 부친이다.
“힘들 텐데 뭐하냐? 어디 아픈 데는 없고?”
게다가 몸을 다친 이후로는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던 부친이다. 그런 부친이 아픈 기색을 감추고 박상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아버진 좀 어떠세요?”
“나? 나 많이 좋아졌다.”
억지로 건강한 척하는 부친의 얼굴이 우는 모친의 얼굴보다 더 가슴을 울렁여서 박상민은 눈시울을 붉혔다.
“여보! 애 배고플 텐데 어여 점심 먹여.”
“그래요.”
“괜찮아요, 아버지. 아버지 먼저 챙겨 드리고 먹을게요.”
“아니다. 내일 파주 간다면서? 나도 그냥 같이 먹을란다.”
박상민은 고개를 떨궜다.
“왜 그러냐? 아버지 이제 정말 좋아졌다니까. 너 운동 잘하는 거 보니까 없던 힘도 나고, 좋아졌어. 괜찮… 다. 우리는 이렇게 잘… 지내니까, 넌 그냥 운동만 열심히 해.”
부친이 울먹이는 거 처음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져서 박상민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상민아.”
“예, 아버지…….”
“힘들더라도 감독님 말씀 잘 듣고, 지우에게 잘하고. 우리 걱정 때문에 감독님 실망시키는 일 절대 없어야 해.”
“예.”
박상민은 훌쩍이는 소리로 겨우 답을 했다.
모친이 상을 차리는 동안 박상민이 아버지를 덥석 안아서 거실의 소파 앞으로 옮겼다.
세 식구가 거실에서 하는 식사다.
모친이 선풍기를 가져왔는데, 박상민이 한사코 거절해서 그냥 두었다. 사고를 당한 부친이 선풍기 바람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하는 식사다.
그래도 박상민은 씩씩하게 커다란 사발 가득 담긴 곰국에 밥을 잔뜩 말아서 두 그릇이나 비워 냈다.
한사코 말리는 모친 때문에 설거지를 돕지 못한 박상민은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 전했다.
부친에겐 영양제, 모친은 예쁜 겉옷이었다.
“어머니.”
그리고 박상민은 봉투를 꺼내 모친의 앞에 두었다.
“이게 뭐냐?”
봉투를 한 번 본 모친이 박상민에게 시선을 주었다.
“연봉이 엄청 올랐어요. 세금 떼면 1년에 3억 정도 돼요.”
“뭐? 얼마?”
“그래서 계약금 가져왔어요. 아버지 모실 수 있는 편안한 집으로 옮기셨으면 해서요. 어머니도 일 그만하시고, 아버지랑 지내시구요.”
“아니다. 이건 은행에 넣자. 네가 어떻게 번 돈인데.”
모친은 단박에 고개를 저었고, 부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아버지랑 편안하게 지내신다고 생각하면 제가 더 기운이 나서 잘 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집만 그렇게 해 주세요. 더 벌리는 건 정말 은행에 넣을게요.”
“감독님도 알고 계시냐?”
“예, 아버지. 지우한테도 고맙다고 몇 번 인사했어요.”
모친이 슬쩍 돌린 시선 앞에서 박상민의 부친은 웃는 얼굴을 하고 울고 있었다.
더운 것과 별개로 평택의 빌라는 따듯한 기운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