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3)
통상적으로 프리킥을 차라는 휘슬과는 전혀 달랐다.
정지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 카알이 칸테와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선수들이 몰려 있었다.
“우-!”
“잘됐어! 아주 박살을 내 버려!”
흥분한 유니온 시티의 원정 관중들이 야유와 고함을 질러 댔다.
어지간해서는 저런 일이 없는 점잖은 카알이다.
혹시나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을까 싶어서 지켜보던 정지우의 시선에 공을 받을 자리에서 답답한 표정으로 서 있는 레믹이 들어왔다.
혹시? 그런 건가?
박용근과 마틴은 멍청하거나 바보가 아니다. 축구를 모르는 사람들도 아닌 거다. 그런 그들이 박상민을 투입하면 이길 가능성이 높은 경기를 계속 지켜보기만 한다.
그렇다면 이건 이 과정을 통해서 앞으로 좀 더 많은 승리를 거둘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은 거다.
정지우는 두 가지를 보았다.
공수의 연결을 위해 박상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첫 번째였다. 다른 팀들 역시 영상을 통해 빤히 유니온 시티를 연구한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박상민이 출전하면 곧바로 밀착 마크할 거고, 그렇게 된다면 박상민을 투입한 효과는 금방 줄어들 거다.
두 번째는 드리블을 잘하는 선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거야 지금 당장은 레믹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니까.
정지우가 생각을 정리할 때, 신준석이 다 끝나 간다는 손짓을 하며 다가왔다.
“데이빗이 나더러 가 있으라고 했어. 너까지 나서면 공연히 일 커진다. 그냥 있어라.”
“무슨 일이야?”
“프리킥을 하려는데 발을 넣었어. 주심이 휘슬을 불지 않으니까 카알이 화를 내면서 시비 붙었고.”
정지우가 본 중앙선 지역에서 데이빗이 노련하게 양쪽을 정리하고 있었고, 라파엘이 흥분한 스웰던을 끌어안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카알이 나 때문에 화가 난 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주심이 옐로카드를 꺼내더니 카알 앞에 높다랗게 들었다.
“데이빗이 그러는 것 같더라고. 내가 당한 것 때문에 그런 거 같다고. 그래서 나는 가 있어야 한다고.”
“그걸 알아들었어?”
“야! 나 그래도 해외 리그에 있다가 온 선수야!”
둘이서 웃고 났을 때 분위기가 대강 잡혔다.
공을 다시 놓는 카알을 보며 정지우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알려 주기로 했다.
“준석아!”
신준석이 고개를 돌렸다.
“수비 라인 올릴 때, 너랑 스웰던은 좀 더 앞으로 나가잖아!”
신준석이 힐끔 중앙선을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좀 더 적극적으로 길게 찔러! 누구 거칠 생각 말고 네가 저쪽 다섯 명 넘겨서 레믹 앞으로 바로 주라고!”
한국말이다. 그래서 무둔바와 이제는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돌아온 라파엘이 뭐라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퍼어엉!
그때 카알이 공을 앞으로 길게 넘기며 대화가 끝났다.
15분쯤 남은 후반전이었다.
자칫하면 본머스가 구사하는 뻥축구를 유니온 시티도 하게 된다. 그 외에 그동안 미드필드를 거치며 단단하게 이어 가던 패스의 흐름을 한 방에 끊어 버리는 플레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니온 시티가 이런 플레이를 아예 하지 않는다고 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벤치가 원하는 정답이 무엇이든 간에,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벤치가 만들어 준 환경 내에서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다.
왼편에서 공을 받았던 꼼빠니가 앞으로 밀어 준 공을 본머스의 수비수 드라예가 길게 앞으로 걷어 냈다.
투욱!
이번에 공을 받은 것은 워터였다. 길게 찰 줄 알았던 그가 교체 투입된 조셉에게 공을 넘겼다.
지금껏 길게 차고 달려들었던 본머스가 이번에는 중앙에서 공을 돌리며 기회를 노리는 거였다.
투욱!
조셉이 바디에게, 바디가 다시 오카자키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오카자키가 꼼빠니를 앞에 두고 툭툭 치고 들어오다가 다시 약간 뒤에 있던 워터에게 공을 패스했다.
아까 길게 차는 공을 믿고 달려들었다가 정지우의 역습을 보고 놀란 점도 있고, 다음으로는 교체 선수들을 중심으로 공격 전술을 바꾸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본머스가 잘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저런 패스 중간에 가운데로 툭 찔러 주는 패스가 들어와야 하는데, 페널티 에어리어 앞에서 자꾸만 공을 뒤로 돌리거나 아니면 옆으로 빼 주며 시간을 끌었다.
어딘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공을 돌리는 본머스의 선수들은 제대로 된 정교한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다.
저럴 때 박상민은 공 진짜 잘 찔러 준다.
후반이 10분쯤 남은 시간이었다.
유니온 수비가 단단하게 자리 잡은 뒤라 본머스는 더욱더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퍼어엉!
결국 워터가 골대 앞으로 공을 길게 날렸는데 역시나 정지우가 달려 나가 잡았다.
높다랗게 떠서 공을 잡은 정지우는 느긋하게 몸을 돌렸다.
기습은 없다! 마치 그런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밀고 올라왔던 본머스의 선수들과 유니온 시티의 동료들이 천천히 중앙선으로 옮겨 갈 때였다.
정지우는 레믹을 힐끔 보았다.
‘뭐? 왜?’
녀석의 의아한 표정을 본 정지우는 느긋하게 신준석을 향해 공을 굴려 주었다. 공은 페널티 에어리어와 중앙선의 중간쯤, 그리고 오른쪽 터치라인 앞으로 굴렀다. 세게 던진 것도 아니어서 지금까지처럼 후방에서부터 기회를 만들자는 의미의 패스처럼 보였다.
공이 신준석 앞으로 구를 때 본머스의 조셉이 앞을 막기 위해 다가왔고, 근처의 카알, 앞쪽의 맥슨이 공을 받아 주기 위해 움직였다.
툭!
신준석이 카알에게 공을 넘겼고, 카알이 맥슨에게, 맥슨이 다시 데이빗에게 패스했다.
“헤이!”
정지우가 고함을 지르자 데이빗이 수비수 라파엘을 향해 공을 빼 주었다.
지금까지 내내 해 오던 지루한 플레이였다.
“라파엘!”
정지우가 소리 지르자 라파엘이 골대를 향해 공을 넘겨주었다.
후반이 10분도 남지 않았다.
본머스의 선수들이 공격을 위해 밀고 내려오는 것을 확인한 정지우는 오른쪽 터치라인에 있는 신준석에게 공을 밀어 주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던 패스였고, 본머스 선수들이 중앙선을 중심으로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조셉과 킹, 칸테가 신준석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퍼어어어엉!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신준석이 대각선 방향으로 기다랗게 공을 넘겼다. 공을 받기 위해 다가갔던 카알과 데니가 멍하게 볼 정도로 느닷없는 패스였다.
낮고 빠르게 날아간 공이 본머스의 왼쪽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 떨어져 굴렀다.
“와- 아아!”
본머스 포백의 뒤로 넘어간 패스여서 수비수들은 완전히 역동작에 걸렸다.
와라락!
레믹이 달리는 뒷모습이 보였다.
반대편에서 데니가 악착같이 뛰어들었다.
나오려던 본머스의 골키퍼 슈나이켈이 움찔했다가 도로 들어갔고, 수비수 후트와 모건이 레믹을 향해, 슐룹이 데니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투욱!
레믹이 공을 앞으로 툭 차 놓고 뛰었다.
오프사이드 판정이 나려면 지금 나야 한다.
그런데 선심은 기를 들지 않았다.
마틴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고, 벤치의 서브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반쯤 일어나 있었으며, 관중들이 손을 앞으로 맞잡고 상체를 기울이고 있었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 페널티킥 거리쯤이었다.
투욱!
레믹이 오른쪽에서 달려드는 모건의 뒤로 공을 빼냈다.
그 바람에 레믹을 향해 달려들던 모건이 역동작에 걸린 몸을 돌리려다가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휘익!
모건을 빠져나가자 레믹은 완벽하게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이었다.
후트는 넘어진 모건 때문에 다가오지 못했고, 슐룹은 데니와 몸싸움을 벌이는 중이라 레믹을 막아서지 못했다.
“이예-!”
완벽한 찬스에 관중들이 미친 사람들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퍼어엉!
레믹은 본머스의 오른쪽 골대 구석을 향해 슈팅을 날렸다.
화아악!
그 짧은 거리에서, 저렇게나 강력한 슈팅인데도 슈나이켈은 분명하게 몸을 날렸다.
터억! 티이잉!
그리고 그의 손에 걸린 공이 크로스바에 걸려서는 앞으로 튀어나왔다. 바로 레믹의 앞으로.
몸을 날린 레믹이 슈퍼맨과 같은 자세로 허공에서 공을 들이받았다.
터어엉!
공은 정면으로 날아갔다.
그라운드에 떨어진 슈나이켈이 악착같이 손을 뻗었지만, 공은 그의 손을 훌쩍 넘어 골대로 빨려 들어갔다.
철렁! 털썩!
골 그물이 철렁이는 것과 동시에 레믹이 그라운드에 엎어지는 것처럼 떨어졌다.
“예에에에에에에-!”
지금까지 그렇게 지루했던 경기를 모두 보상하는 듯한 골이었다.
벌떡 일어난 레믹이 양팔을 벌리고 원정 관중들을 향해 달렸다.
“레믹! 레믹!”
그러고는 지금껏 응원해 준 관중석을 향해 뛰어들었다.
덩치가 황소만 한 관중들이 레믹을 부둥켜안고 껑충거렸고, 그의 볼에 요란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안전 요원들이 달려들어 레믹을 겨우 끌어냈다.
동료들이 레믹의 등을 두드려 주고, 머리를 끌어안으며 칭찬해 줄 때였다.
선수 교체 사인이 있었다.
박상민이 터치라인 앞에 서 있었다.
마틴이 무언가를 말하며 박상민의 등을 다정하게 다독였다. 저런 제스처는 이 선수만큼은 내가 분명하게 믿는다는 의미를 관중들이나 매스컴에 전하고 싶을 때 주로 보여 주는 거였다.
정지우가 돌린 시선 속에서 박용근이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말씀하신 건가요?
아직은 정확하게 답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대강 알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박상민을 거치지 않은 공격이 살아 있을 때, 박상민은 더욱 빛난다. 그리고 유니온 시티는 새로운 공격 옵션을 하나 더 갖춘 것과 같다.
박상민은 옐로카드를 받은 카알과 교체였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관중들이 주는 박수에 답하는 것처럼 카알이 양손을 높이 들어 손뼉을 치며, 걷는 건지 뛰는 건지 모를 애매한 동작으로 박상민을 향해 움직였다.
“예에-!”
후반 정규 시간이 3분쯤 남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원정 관중들은 박상민의 투입에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삐이익!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추가 시간은 4분이었다.
다급해진 본머스는 다시 길게 지르는 패스를 이용해 공격을 전개했다. 그러나 유니온 시티의 포백은 그런 식의 공격에 쉽게 뚫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무둔바가 걷어 낸 공을 중앙선 부근에서 본머스가 잡아냈다.
박상민은 아예 수비에 치중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데니와 신준석의 중앙에 위치해 본머스의 선수들을 따라다녔다.
한 번 넘어왔던 공이 다시 넘어갈 때마다 1분씩 흘러갔고, 마침내 추가 시간까지가 모두 끝났다.
삐이익! 삐익! 삐이익!
본머스와의 지루하고 힘겨운 경기가 그렇게 끝났다.
박상민의 말마따나 손에 잡힐 것 같은 무언가가 머릿속을 간질이는 느낌이었다.
본머스의 선수들과 인사를 마친 정지우는 벤치를 향해 걸으며 원정 관중들에게 인사했다.
이제 한국으로 간다.
월드컵 예선을 치러야 하는 거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다들 기대하고 허리가 아프도록 좁게 앉아서 응원했는데 정지우의 선방은 없었다.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었던 호프집 사장이 가장 난감했다.
세 번까지는 정지우의 슈퍼세이브가 나와 줘야 몰려 앉은 손님들도 흥이 나지 않겠나.
“사장님! 월드컵 예선에도 이벤트 계속하는 건가요?”
“그럼요!”
사장은 계산도 못하고 바로 답을 했다.
“정말이죠? 알려도 되는 거죠?”
“그렇다니까요!”
이왕 내친걸음이다. 사장이 두 번이나 답을 하자 ‘예선전 날 뵐게요.’ 하고 손님들이 계산을 마쳤다.
호프집을 열고 가장 많은 매상이 들어온 날이었다.
경기가 끝난 시간이 새벽 1시가 넘었다.
그런데도 마주 앉은 부장과 장진모의 눈빛은 분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박용근 감독님이나 정지우 선수나 그들이 한국 축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다. 우리를 믿는다고 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너랑 나는 준비한 걸 제대로 터트릴 거고.”
“예.”
장진모가 단단하게 답을 했다.
“사회부와 정치부가 시끄러워. 중국 쪽 반응도 이상하고. 데스크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박 감독님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는 걸 지켜볼 수는 없는 거잖아.”
부장이 사무실 쪽 창을 슬쩍 본 뒤에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준비한 기사에 혹시 잘못된 점은 없는지 다시 한 번 챙겨.”
“알았습니다.”
답을 하는 장진모는 그동안 헬렐레하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만약 허하수 의장이 건재하게 된다면 너랑 나는 이 기사로 옷 벗게 될 거다. 혹시 데스크가 허락하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박 감독 단독 인터뷰 핑계로 확실하게 칸 비워 놨다.”
“고맙습니다, 형님.”
말을 하는 부장에게 장진모가 공손하게 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