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80화 (180/262)

제1장.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2)

5명의 미드필더가 유니온의 골대 앞까지 밀고 내려왔던 본머스다. 거기에 4명의 수비수들은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중앙선 부근까지 올라와 있는 상황이었다.

4명의 수비수만 뚫으면 단숨에 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앞으로 뛰어가는 정지우를 확인한 맥슨과 레믹, 데니와 꼼빠니가 미친 듯이 본머스의 골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휘이이익!

정지우가 커다랗게 팔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옐로카드를 각오한 것처럼 본머스의 바디가 정지우의 앞으로 어깨를 디밀었다.

분명 공을 먼저 던졌다. 그리고 그 뒤에 달려들었다.

콰악!

공을 던진 탄력에 앞으로 몸이 쏠린 정지우가 바디의 등에 부딪히며 함께 넘어졌다.

“우-!”

삐이이익!

공은 카알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그래서 카알이 앞으로 밀어 주기만 하면 레믹이나 데니에게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이런 건 파울을 줄 게 아니라 어드밴티지를 적용해서 경기를 계속…….

뭐? 뭐야?

고개를 들었던 정지우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주심을 바라보았다. 그는 유니온 시티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앞에서 정지우가 파울을 했다는 의미였다.

“우우-!”

“판정을 어떻게 하는 거야!”

원정 관중들이 야유를 퍼붓는 가운데 몇몇 관중들은 악을 바락바락 써 댔고!

“이게 어떻게 파울이야!”

정지우는 걸어오는 주심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데이빗이 달려왔는데, 그사이 마틴 역시 대기심에게 이쪽을 가리키며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이미 자리 잡은 선수를 밀쳤잖아.”

“내가 먼저 공을 던졌어! 골키퍼가 공을 던지거나 차는 행위를 방해하는 게 파울인 거지!”

데이빗이 달려와 정지우의 앞을 막아섰다.

“Ji! 항의는 내가 할게! 일단 판정을 내린 거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라파엘과 카알까지 달려와 정지우를 끌어안다시피 골대로 움직였다.

웃기는 판정이었다.

정지우가 공을 던진 건 분명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이었다. 그러니 파울이라고 판정했다면 규정대로 페널티킥을 선언했어야 맞다.

그래, 좋다. 던지고 나서 몸이 쏠려서 나가는 과정에 충돌이 있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건 또 바디가 공을 던지는 정지우의 앞을 막아섰다는 증거가 되는 거 아닌가.

“우우우-!”

원정 관중들이 계속해서 야유를 퍼붓는 동안, 홈 관중들은 침묵을 지켰다.

가끔이지만, 영국 리그에서는 터무니없는 오심이 나온다.

세계 최고에 속한다는 리그에서 규정에 어긋나는 판정이 나오는 거다. 그것들을 또 절묘하게 이용해서 주심이 경기를 편파적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정지우는 이를 꽉 깨물고 골대로 움직였다.

골프 선수가 비와 바람을 당연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축구 선수는 심판의 판정을 경기의 일부라고 여겨야 한다. 이번 파울도 마찬가지인 거다. 축구 경기를 하는 도중에 바람이 유니온 시티를 향해서 불고 있는 것뿐이다.

골대 앞에 도착한 정지우는 먼저 양쪽 포스트를 발로 확인하고 골대의 한중간으로 움직여 몸을 띄웠다.

툭 하고 크로스바를 치고 났을 때였다.

“예에!”

불편한 심정 탓인지 원정 관중들의 함성이 평소와 확실히 달랐다.

“Ji! 막아 버려!”

목청이 큰 관중이 계속해서 고함을 질러 주었는데 솔직히 고맙기까지 했다.

정지우는 양손의 손가락 사이를 마주치며 골키퍼 장갑을 좀 더 단단하게 끼웠다.

이건 그저 짐작하지 못했던 슈팅 같은 거다.

막아 낼 거다.

이번 프리킥에 실패하면 기가 꺾이는 건 너희가 될 거니까.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막아 내고 말 거다.

주심이 공을 내려놓은 곳에서 골대를 향해 수비벽의 거리를 정하자 홈 관중들이 조금씩 응원을 펼치기 시작했다.

공 앞을 막아선 데이빗에게 정지우는 손가락 4개를 펼쳐서 보여 주었다. 4명이 막아 달라는 의미였다.

맥슨, 레믹, 데이빗, 데니가 주심이 지정한 자리 앞에서 벽을 만들었다. 페널티 에어리어 중심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친 자리였다.

뒤를 돌아보는 데이빗을 향해 정지우가 오른손 엄지를 오른쪽으로 눕혀서 움직여 보였다.

주춤, 주춤.

데이빗이 동료들의 팔을 붙들어 조금씩 움직였고, 마침내 원하는 위치에 섰다.

손바닥을 커다랗게 펼쳐 보인 정지우는,

“카알! 헤이! 이쪽! 이쪽에!”

카알을 불러 왼편 골포스트 앞쪽에 세웠다.

준비는 다 끝났다.

다리를 구부리며 자세를 낮춘 정지우가 두 팔을 날개처럼 양쪽으로 펼쳤다.

와라! 이것만큼은 무조건 막을 거니까!

일부러 골대 정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섰다.

앞에 서 있는 4명의 벽을 살짝 넘어오면 오른쪽, 그게 아니라면 왼편 구석을 노리고 감아 찰 수 있다.

카알을 왼쪽 포스트 앞에 세운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그가 저렇게 서 있으면 공을 차는 선수는 당연히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번 프리킥은 4명의 벽을 넘어 골대의 오른쪽을 노릴 거다.

그리고 벽을 넘기는 공은 절대로 강하게 차기 어렵다.

워낙 골대와 거리가 가까워서 공이 아래로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부드럽게 각도만 잡아야 하는 거다.

공 앞에 은골로 칸테와 바디가 서 있었고, 워터, 올브라이튼, 마레즈가 골대 앞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라파엘과 신준석, 스웰던이 본머스의 선수들을 껴안다시피 따라붙었고, 무둔바가 위치를 지키기 위해 밀고 들어오는 선수들을 몸으로 버텨 냈다.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그러자 제자리에서 종종거리던 칸테가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세를 낮춘 정지우는 타이밍만 잡았다.

어설펐다. 저런 스텝으로는 절대 슈팅을 날리지 못한다.

그러니 칸테는 페이크로 지나갈 거고!

휘이익!

칸테가 공을 지나친 직후였다.

퍼어엉!

와락 달려든 바디가 공을 분명하게 감아 찼다.

휘이이익!

공은 예상대로 수비벽을 넘어서 날아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꼼짝도 않고 서 있는 정지우의 품으로 그대로 안겼다.

꽈악!

정지우는 양손으로 공을 꽉 안았다.

“예-!”

유니온 시티 원정 관중들이 짧게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 주었다.

이상한 판정에 휘둘린 직후여서 경기 템포를 조금은 늦출 필요가 있었다.

정지우는 공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스웰던을 향해 움직이는 척하다가 다시 신준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 정도면 리듬을 끊기에 적당했다.

게다가 시간을 너무 끌면 주심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정지우는 신준석에게 공을 굴려 주었다.

투욱!

신준석이 카알에게, 카알이 무둔바에게, 무둔바가 정지우에게 공을 돌리며 시간을 벌었다.

전반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본머스도 무리하지 않고 있어서 공은 편안하게 유니온 시티 진영을 돌았다. 일단 전반에 동료들의 집중력이 무너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투우욱!

정지우가 공을 길게 차서 꼼빠니에게 주었을 때였다.

삐이이익! 삐익!

주심이 휘슬을 길게 불어서 전반을 끝냈다.

라커룸에 앉아 물을 마시는 동안 동료들의 분위기 역시 착 가라앉아 있었다.

집중이 안 되는 경기였다.

본머스에 말려들지 않은 반면에 유니온 시티 특유의 리듬도 나오지 않았다.

분명 벤치에서 지시가 있을 것 같으니까 일단 기다려 본다.

정지우가 수건으로 땀을 닦고 나서였다. 문이 열리고 마틴이 들어섰다.

“데이빗, 전반전은 어땠어?”

그는 먹지 못한 점심에 나온 샐러드의 상태를 묻는 것처럼 덤덤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상하게 헛도네요. 저쪽에 빈틈이 보이는 것 같은데 단숨에 찔러 들어가지 못하겠어요.”

카알과 데니, 레믹이 데이빗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후반에도 우리는 이 포메이션을 유지한다. 포백과 미드필더의 간격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꼼빠니와 데니는 공을 받았을 때 레믹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찔러 줘.”

마틴은 변화를 선택하지 않았다. 분명 벤치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여서 함부로 다른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벤치에서 느껴질 정도다. 우리는 분명 본머스의 리듬에 말려들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경기를 지배한 것도 아니다.”

말을 마친 마틴이 늘 하던 대로 선수들을 쭉 둘러보고 라커룸을 나섰다.

데이빗이 궁금함을 풀고 싶다는 것처럼 정지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경기를 풀어 보라는 뜻인 거 같은데?”

“우리끼리? 포메이션의 변화도 안 준다잖아?”

“그게 좀 이상해.”

벤치의 지시다. 그러니 선수들끼리 함부로 포메이션을 바꿔야 한다고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뭐지? 분명 뭔가가 있는데?

정지우는 박용근을 떠올렸다. 벤치에 있는 그가 지금 경기 상황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꼬인 경기를 끝까지 4-5-1로 진행하라고 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다.

장진모는 아이스커피에 담긴 얼음을 입에 물고 오도독거리며 씹었다. TV에서 전반의 주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었는데 뻥뻥 내지른 중거리 슈팅 몇 개와 정지우가 공을 던지는 장면, 그리고 이어진 프리킥이 전부였다.

“오늘은 경기가 지루하네.”

“어떻게 매주 피를 끓게 하겠냐. 지난주 같은 경기가 있으면 이런 경기도 있는 거지.”

부장이 빈 커피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장진모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경기 끝나고 박 감독님과 정지우 선수 입국하는 건 알지?”

“그렇죠.”

“스토리 잘 짜라. 우리가 바라던 대로 시작되긴 했지만, 그 양반과 정지우 선수 어깨에 걸린 짐이 워낙 크다. 벌써부터 클릭 수 늘리려는 기사가 하루에 서너 개씩 올라온다.”

“아! 진짜! 너무들 하는 거야! 아니, 내내 씹어 대다가 느닷없이 본선에 가면 정지우가 막아 내야 할 스트라이커가 어쩌니 하는 기사를 올리는 게 말이 됩니까?”

“어쩌겠냐. 그래야 클릭 수가 올라가고, 또 광고가 팔리는데. 이번에 너 독점 인터뷰 없었으면 난 또 그런 기사 못 쓴다고 데스크랑 악쓰고 싸웠을 거다.”

오도독! 오독! 오도독!

장진모는 고약한 표정으로 얼음을 씹어 댈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기사에는 본선에 진출할 경우, 이번에는 박 감독님이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야 한다고까지 나왔다.”

“하여간 인간들 하고는! 그랬다가 지면 또 역적을 만들 거면서!”

“그래야 또 클릭 수가 많아지니까.”

얼음을 털어 넣으려다가 컵이 빈 것을 확인한 장진모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형! 우리 그냥 맥주 한잔합시다.”

“시끄러워! 네가 지난번에 술 처먹고 아침까지 코를 그렇게 골지만 않았어도, 오늘 우리 시원한 맥주 마시면서 경기 봤어. 벌써 몇 번째냐? 너, 설마 나 감봉당하라고 할 건 아니지!”

장진모의 바람을 부장이 단숨에 밀쳐 냈다.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경기 시작 전에 의지를 불태웠고, 하프 타임에는 라커룸에서 의논도 했다. 그런데도 후반전 역시 시작과 동시에 이상하게 겉돌았다.

오죽하면 질 때 지더라도 치고받으며 승부를 걸어야 하나 싶은 정도였다.

이런 경기는 쉽게 지친다.

그리고 지켜보는 관중들 역시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라운드를 울리는 응원가가 아니었다면, 이게 과연 프리미어리그의 경기인가 싶은 정도였다.

먼저 선수를 교체한 것은 본머스였다.

꼼빠니, 스웰던에 밀려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26번 마레즈를 빼고 20번 오카자키를 투입했다.

다부진 표정으로 오카자키가 그라운드로 들어왔는데, 10분쯤이 흘렀지만 경기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길 수 있는 경기처럼 보인다. 분명 이길 것 같다.

그런데 어딘가에 있을 그 승리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서 뒤를 전혀 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지우는 슬쩍 벤치를 보았다.

이럴 때 박상민이 들어오면 숨통이 확 트일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벤치에 있는 박용근은 물론이고, 테크니컬 지역으로 나와 있는 마틴마저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만 있었다.

박용근이 원하는 게 무언지 정말 궁금했다.

퍼어어엉!

그때 본머스의 4번 워터가 또다시 유니온 시티의 골대를 향해 길게 공을 날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듯이 라파엘이 달려 나가 공을 세게 걷어 냈다.

중앙선으로 날아간 공을 놓고 양 팀 미드필더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지루하디지루한 경기를 펼쳐 냈다.

쓸데없이 거칠기는 왜 그렇게 거친 건지.

게임이 제대로 풀리지 않자 본머스의 선수들이 유독 날카롭게 몸싸움을 벌였다.

투욱!

신준석이 공을 잡은 순간이었다.

콰악! 콰다당!

올브라이튼이 대놓고 신준석을 들이받아 광고판에 처박았다.

“우-!”

거친 모습에 비난과 야유가 터져 나오자 주심도 어쩔 수 없었는지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의료팀이 달려가 신준석을 일으킬 때였다.

본머스가 두 번째로 선수 교체 사인을 냈다.

조금 전 옐로카드를 받은 11번 올브라이튼을 빼고 36번 조셉을 투입했다.

후반전이 20분쯤 남았다.

이쯤이면 유니온 시티도 변화를 줘야 맞다.

정지우가 다시 벤치를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그때 박용근과 시선이 마주쳤다.

‘감독님, 상민이라도 넣어 주세요.’

이런 눈빛은 충분히 알아주지 않을까?

그런데 정지우의 눈을 바라본 박용근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오늘 박상민의 투입은 없다라는 것처럼 말이다.

‘승점이 걸렸는데 도대체 왜요?’

삐익! 삑! 삑!

정지우의 질문을 주심이 휘슬로 뚝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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