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1)
본머스의 경기를 위해 그라운드에 선 정지우를 동료들이 힐끔거렸다. 벤치에 있는 얀센이나 박상민과 같은 서브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스태프조차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이었다.
라파엘의 가벼운 농담에 전혀 대꾸하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이후로 정지우의 눈빛과 표정에 계속해서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동전을 던지고 난 뒤에 데이빗이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물을 때면 정지우는 대개 골대를 먼저 택한다.
정지우가 오른손 엄지로 뒤편의 골대를 가리키자, 데이빗이 주심에게 뒤편에 있는 골대를 선택하겠다고 알려 주었다.
이제 그라운드로 들어서야 할 때였다.
“데이빗! 잠깐 모여도 돼?”
데이빗이 동료들을 바라본 뒤에 고갯짓을 했다.
리그의 결승전도, 그렇다고 엄청나게 시선이 집중된 경기가 아닌데도,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오른쪽 진영 중간에 모여 어깨를 마주 잡고 상체를 숙였다.
“인상 쓴 건 미안하다! 그렇지만 본머스를 가볍게 보지 말자! 우리 이제 겨우 네 번째 경기다! 실력이 안 된다면 몰라도 방심해서 지는 건 정말 화가 날 것 같아서 그랬다!”
정지우가 좌우를 둘러보며 동료들에게 말을 건넬 때, 방송 카메라를 든 남자가 급하게 달려와서 어떡해서든 안쪽을 찍으려고 기웃거렸다.
그러나 선수들을 밀치고 들어올 수는 없는 거였다.
“다들 계약 기간과 주급 협상 중이잖아!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 경기에서 제대로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해!”
데이빗과 라파엘, 카알이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표정으로 웃었고, 무둔바가 굵직한 음성을 흘리며 웃었다.
“레믹! 세 골은 넣어 줘야지!”
“나에게 맡겨 줘!”
단순한 놈 레믹이 사명감에 불타는 눈을 하고 단단하게 답을 한 다음이었다.
“마스코트가 지켜보는 경기다!”
바로 데이빗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방송 카메라에 잡히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음성이었다.
“릴리를 위해서 우리는 계속 승리한다!”
오래 시간을 끈 만큼 모인 이유가 이거라고 알려 주려는 의도도 담긴 것 같았다.
데이빗이 ‘다들 준비됐지!’ 하고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예에-!”
고함을 지르며 몸을 일으킨 정지우와 동료들을 향해 관중들이 ‘우와- 아!’ 하는 엄청난 함성을 전해 주었다.
영국 시간으로 오후 2시였다.
당연하게 병실에서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수술받은 릴리를 위해 평소에 사용하는 것보다 커다란 침대가 방에 있었다. 기계들을 살피기 위해 데이지가 안쪽에, 그리고 그 건너편에 메기가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전에 없이 페널티 에어리어와 중앙선의 딱 중간에 모인 선수들이 어깨를 둘러싸고 무언가를 다짐하는 모습이 나왔다.
방송 카메라가 다가가서 정지우의 등 근처에서 기웃거렸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보기 어려운 장면이 나왔습니다. 주장 데이빗이 동료들을 불렀는데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유니온 시티 선수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경기라는 뜻인데 짐작 가는 게 없네요. 정말 궁금합니다.』
영국인 캐스터와 해설자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카메라는 계속해서 어깨를 감싼 채로 상체를 숙이고 있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보여 주었다.
릴리가 궁금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는데 스포츠 중계 전문 캐스터와 해설자도 모르는 사실을, 메기와 데이지가 설명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데이지가 힐끔 릴리를 살필 때였다.
『마스코트가 지켜보는 경기다!』
TV 화면을 통해 데이빗의 고함이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놀랐다. 지난번에는 릴리의 얼굴을 담은 걸개가 걸려서 놀랐는데 이번엔 이름이 TV에 나온 거였다.
『릴리를 위해서 우리는 계속 승리한다!』
두 번째 고함이 들릴 때 릴리의 심장박동기가 급하게 움직였다.
이런 거? 얼마든지 괜찮다. 어쩌면 회복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상체를 세울 때였다.
『릴리를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레드 블레이트에 걸렸던 대형 그림의 주인공인 모양이네요. 그 주인공의 이름이 릴리라고 들었거든요.』
『유니온 시티는 오늘 마스코트를 위한 경기를 다짐하고 시작합니다.』
관중들의 함성이 울릴 때 화면은 골대로 걸어가 포스트를 확인하는 정지우를 보여 주었다. 정지우가 가운데로 걸어서 높다랗게 뛰어 크로스바를 터치하는 순간이었다.
“예에-!”
관중들이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함성을 질렀다.
호프집은 손님들이 각자 나서서 서로 붙어 앉았다.
큰 의자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둥그런 플라스틱 의자로 바꿔 달라는 손님들도 많았다.
“이리 오세요! 괜찮아요!”
먼저 앉은 손님들이 뒤에 온 손님들을 불러서 함께 앉았다. 심지어 4인용 탁자에 10명이 붙어 앉은 테이블도 있었다.
이게 강요한 거면 욕을 먹을 일인데, 어쩐 일인지 손님들이 들어올 때마다 기존에 자리를 차지한 손님들이 알아서 꾸역꾸역 엉덩이 넣을 틈을 만들어 주는 거였다.
“이건 자신 없네요!”
물론 입을 쩍 벌리고 돌아가는 손님들도 있었는데, 대개 여자 손님들이었고, 남자들의 경우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비집고 들어갔다.
“자! 우리 정지우를 위해서 다 같이 건배합시다!”
단골 한 명이 매상을 도와주겠답시고 건배를 제안했는데, 그 한 번의 건배로 500짜리 생맥주 주문이 120개나 들어왔다.
사장은 울컥했다.
‘고마워, 정지우 선수! 당신은 내 은인이야!’
축구에 대해 알아봤다. 오늘 본머스는 챔피언십에서 125년 만에 올라온 팀인 거다. 정지우가 활약할 기회가 거의 없을 수도 있는 그런 팀이란 의미로 받아들였다.
호프집 사장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들었다.
4-5-1로 나오는 본머스를 상대로 유니온 시티 역시 4-5-1 포메이션을 택했다.
힘과 투지로 달려드는 팀이 본머스다.
거기에 챔피언십에서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했다는 건 그만한 저력을 지닌 팀이란 증명과도 같다.
전반이 시작되었다.
본머스는 대뜸 주먹을 날리며 달려드는 익숙한 동네 깡패처럼 단박에 공을 길게 넘기며 달려들었다.
잘 아는 사이잖아! 사양하지 말고 붙어 보자고!
우리 실점 따위 신경 쓰지 말자! 그저 전에 하던 대로 많이 넣는 팀이 이기는 거로 하자!
본머스가 의도하는 바는 분명했다.
치고받으면서 힘과 힘으로 대결하자는 의미였다.
“우와- 아!”
5명의 미드필더들이 위협적으로 한 줄로 밀고 올라왔다. 게다가 저들은 부상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거칠기까지 하다.
신준석은 눈에 확 띄게 실력이 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비수는 잘난 플레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경기력을 보여 주어야 하는 자리다.
본머스의 11번 올브라이튼이 공을 잡는 순간에 신준석이 바로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데니에게 손짓을 해서 10번 킹을 막으라고까지 지시했다.
툭툭!
본머스의 올브라이튼이 신준석을 제치려는 것처럼 자꾸만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나 페인트 모션이 먹히지 않자 올브라이튼은 속도를 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투욱!
그가 신준석의 옆으로 공을 툭 차고 달렸다.
그러나 시간을 너무 끌었다. 게다가 그는 드리블이 뛰어난 선수도 아니었다.
무둔바와 카알이 단박에 공과 올브라이튼을 향해 달려들었고, 신준석은 기회를 노리는 9번 바디를 마크하러 움직였다.
콰아악!
올브라이튼이 무둔바의 어깨를 있는 힘껏 들이받았다가 오히려 제 놈이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우우-!”
본머스의 홈 경기였다.
올브라이튼이 바닥에 주저앉아 양팔을 들었고,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었으나 당연하게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먼저 어깨를 던진 것이 올브라이튼인 걸 분명하게 봤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세련되게 변신한 유니온 시티와 시종일관 제 색깔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본머스의 대결이었다. 그래서 유니온 시티는 패스를 통해 경기를 지배하려고 하고, 본머스는 무조건 차 놓고 달려든다.
권투 선수와 유도 선수의 싸움을 보는 느낌이었고, 그래서인지 경기는 지루할 만큼 헛돌며 진행되었다.
전반 30분이 지날 때까지 양 팀 모두 골대를 멀찍이 벗어나는 중거리 슈팅을 몇 개씩 주고받았을 뿐, 효과적인 공격을 펼치지는 못했다.
마틴은 팔짱을 낀 자세로 경기를 노려보았다.
잘나가던 4-2-3-1 포메이션을 놔두고 본머스가 좋아하는 4-5-1을 사용하자고 건의한 사람은 박용근이었다.
이유를 묻는 마틴에게 박용근은 이 과정을 못 넘어가면 리그 우승은 없다고 설명했다. 힘도 있고, 정교하기까지 한 팀을 상대하려면 유니온 시티만의 4-5-1이 만들어져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선수들이 들떠 있습니다. 중심이 위로 올라가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선수들이 경기에 집중하지 못할 때 4-2-3-1은 치명적입니다.’
그 마지막 말에 마틴은 4-5-1을 선택했다.
무섭다. 정지우와 박용근의 호흡은.
정지우가 눈빛을 빛내며 분위기를 누르고, 그러고도 모자라 동료들을 경기 전에 불러 모으기까지 하지 않았나.
박용근의 지시가 없었다는 데 10파운드 건다.
저건 분명 즉흥적인 판단에서 결정한 일인 거다.
그라운드의 지배자가 자신의 역할을 점점 깨닫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얼른 기존 선수들의 계약이 끝나야 한다.
그래야 마음 놓고 정지우와 협상할 수 있다.
정지우와 협상을 먼저 해 버리면 그 금액에 따라서 기존 선수들이 계약 조건에 서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박용근이고.
마틴은 공을 따라 시선을 커다랗게 돌렸다.
또다시 본머스가 길게 차 놓고 달려들고 있었다.
유니온 시티의 선수들이 점점 안정을 찾아가는 게 보였다.
조금씩 더 정교한 패스가 이루어지고, 그럴 때면 순간적으로 4-2-3-1의 포메이션을 그려 내기도 했다.
당황스럽겠지.
본머스가 허둥대는 모습이 나올 때마다 마틴은 통쾌했다.
정말 리그 우승을 목표로 시작했었다니!
마틴은 웃음이 픽 하고 나왔다.
6개월짜리 단기 임대 선수와 꽃집 사장님이었던 감독이 영국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노리고 있는 거였다.
“헤이! 데이빗! 맥슨을 불러! 맥슨!”
정지우가 입에 손을 올리고 고함을 버럭버럭 질렀다.
맥슨이 자꾸만 앞으로 나가는 바람에 4-4-1-1의 그림이 나오고 있었다. 공격할 때야 나쁘지 않다. 그러나 수비 시에 본머스의 미드필더 다섯을 상대하려면 맥슨은 반드시 자리를 지켜 줘야 한다.
퍼어어엉!
본머스의 14번 은골로 칸테가 신준석의 앞으로 공을 길게 넘겼다.
콰아악!
노리고 있었던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을 잡기도 전에 본머스의 올브라이튼이 신준석을 저 정도로 거칠게 들이받을 리는 없는 거였다.
옆으로 밀려난 것처럼 터치라인 바깥으로 움직인 신준석이 광고판을 붙들며 겨우 자세를 잡았다.
투욱!
주심이 휘슬을 불지 않아서 경기가 계속되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정지우는 자세를 낮추고 달려드는 본머스 선수들을 빠르게 살폈다.
지난 경기에서 냄새가 풍겼다.
동양인 선수가 날뛰는 팀, 그리고 승격 팀에 대한 프리미어리그 심판진의 길들이기라고 보면 된다.
본머스도 승격 팀이긴 하지만, 그들의 홈경기니까 살짝살짝 도움을 주는 걸 거다.
올브라이튼은 기껏 신준석을 밀어내고도 주춤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그가 선택한 목표는 무둔바였다.
투욱!
무둔바의 옆으로 공을 툭 차 넣은 올브라이튼이 빠르게 달렸다.
“우와- 아!”
솔직히 무둔바는 동작이 굼뜬 면이 있었다. 그래서 올브라이튼은 간발로 그를 제치고 코너킥 지점 바로 앞에서 공을 잡았다.
툭툭!
그사이 달려온 신준석이 올브라이튼을 막아설 때였다.
퍼어어엉!
그가 골라인으로 몸을 트는 척하다가 재빠르게 골대를 향해 공을 날렸다.
거칠다. 그리고 정교함이 부족하다.
정지우는 공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본머스의 은골로 칸테와 9번 바디를 어깨로 밀어내며 떠오른 정지우는 두 손으로 공을 잡았다.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이었다.
“뛰어!”
정지우가 한국말로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