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78화 (178/262)

제8장. 더 발전할 겁니다. (2)

다음 경기는 본머스와의 원정 경기였다.

일요일에 릴리를 만나고 온 정지우는 거실에 앉아서 박상민과 함께 영상을 보았다.

전반 중반이라 아직 특별한 장면이 없을 때였다.

“지우야, 일대일 상황에서 어떤 형태의 공격수가 가장 막기 까다로워?”

영상을 보던 박상민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일대일이야 당연한 건데, 그거보단 예비 동작 없이 슈팅을 날리는 선수가 상대하기 제일 까다로운 거 같은데? 짐작도 못했을 때 날아오는 슈팅을 보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니까.”

박상민에게 도움 되는 답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시스트도 그런 식이면 좀 더 골을 넣을 확률이 높아지는 거겠지?”

“그렇겠지. 예상 못한 순간에 패스가 꽂히는 거니까. 거기에 완벽하게 패스할 타이밍에 느닷없이 날리는 슈팅도 비슷한 느낌이고.”

토트넘전에서 골을 만들지 못한 아쉬움, 그리고 마지막에 알리를 제대로 막아 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박상민의 눈빛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정지우도 그랬었다. 아쉽게 마친 경기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오르며 약을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말이다.

“토트넘은 다음번에 만났을 때 잡아 주면 되는 거니까 지난 경기는 이제 접어 둬. 그리고 지금은 본머스에 충실하자.”

“응.”

답을 한 박상민이 갑갑한 얼굴로 정지우를 다시 바라보았다.

“지우야, 알 듯 알 듯한 뭔가가 계속 머리를 간질이는 느낌인데 뭐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정신! 너 정신을 놓치고 있는 거 같은데?”

정지우의 말에 박상민이 픽 하고 웃으며 시선을 TV로 돌렸다.

일부러 그렇게 답했다. 지금 그런 감정에 휘둘리면 당분간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확실히 박상민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간질이는 것을 깨달으면 정말 무섭게 실력이 뛰어오를 거다.

월요일 오전에 박용근은 유정호와 함께 마틴을 찾았다. 월드컵 예선전 참가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본머스전이 끝나고부터 9월 14일, 애스턴 빌라전까지 프리미어리그도 경기가 없습니다. 다만, 마지막 예선전이라 부상이 염려될 뿐입니다.”

“선수들도 선수이지만, 리저브 팀 훈련장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박용근의 대꾸에 마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선전에서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지난번에 Ji의 인터뷰만큼이나 구단 홍보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땐 Ji가 거절할까 봐 나도 조마조마했습니다.”

유정호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마틴은 박용근을 존중한다는 표정과 눈빛을 잊지 않았다.

“박 감독님, 구단에서 Sang에 관해 요청이 있었습니다.”

“박상민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마틴이 쥬피터와 이사회의 뜻을 알려 주자, 유정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흥분한 얼굴로 박용근에게 말을 전해 주었다.

한국의 화요일 오전 뉴스에 또다시 축구에 관한 보도가 있었다.

『김문호 국가대표 감독은 오늘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할 국가대표팀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기다란 책상의 가운데 앉은 김문호가 손에 든 자료를 들여다보며 발표하는 장면이 화면에 나왔다.

『사우디아라비아전에 대비한 이번 명단에는 최근 영국 유니온 시티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정지우, 박상민, 신준석, 이정렬 선수가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이번엔 브라질과의 친선전에서 정지우가 골을 막아 내는 장면이 화면에 떠올랐다.

『김문호 감독은 유니온 시티에서 활약하는 네 명의 선수 외에도, 박용근 유니온 시티 2군 감독을 코치로 임명했습니다.』

기자의 음성이 전해지는 동안, TV 화면은 유니온 시티의 벤치에 앉아 경기를 바라보는 박용근을 보여 주었다.

『한국의 마지막 예선전은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벌어지며, 대한민국은 4점 이상 골을 넣어야 예선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축구장에 선 기자가 마이크를 앞에 들고서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나라와 비기기만 해도 5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번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고, 기분 좋게 본선에 진출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앵커가 나와 다음 소식을 전했다.

장진모는 뻣뻣한 자세로 달달한 봉지 커피를 홀짝였다.

“야! 거, 목 부러지겠다.”

“어허! 박 감독과의 인터뷰를 또 독점으로 따낸 특종 기자를 이렇게 막 대해도 됩니까?”

“미친놈!”

모니터를 확인한 부장이 책상에서 일어나 빙 돌아서 소파로 다가왔다.

“하여간 너는 달라붙는 재주 하나는 끝내주는 거야! 네가 이런 인터뷰 기사를 또 따낼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

장진모가 밖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형, 알고 보면 박 감독님도 한 우물 스타일인 거지. 한 번 믿으면 왜 끝까지 가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러게. 너한테 먼저 전화해서 기사 부탁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덕분에 위쪽에서 입이 귀에 걸리기는 했다만.”

부장이 위를 가리키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장진모를 보았다.

“기사 말이다. 아무래도 실패했을 때, 김문호 감독을 감싸려고 한 거 같지?”

“그런 거죠. 김문호 감독이 전술과 선수 선발에 관해 거의 모든 의견을 수용해 주었다고 했으니까, 경기를 망치면 그 책임이 박 감독에게 넘어가지 않겠어요? 감독님도 그걸 노린 거 같고.”

“후우! 하여간 멋진 양반이다.”

“스승이 그러니까, 그 밑에 정지우에 박상민 같은 제자들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네가 이런 인터뷰 기사 가져오는 것도 모두 내 단단한 가르침 덕분이 아니겠냐. 야! 너는 사람이 말을 하는데!”

장진모는 대꾸할 이유도 없다는 것처럼 전화기를 들고서 번호를 뒤지고 있었다.

화요일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다음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기다리다가 박용근이 돌아오면 함께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유정호가 박용근과 함께 들어섰다.

리저브 팀의 훈련이 있는 날이면 종일 얼굴 볼 틈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집에서 따로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형, 저녁 먹고 가.”

“가야지. 기다리는 사람 있는데.”

신윤희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가겠다는 것은 이해한다. 그렇다면 굳이 가야 하는데 왜 들른 거지?

“상민아, 잠깐만 이리 와 봐라.”

박상민을 부른 박용근이 소파로 걸어서 자리에 앉았다.

정지우가 박상민의 곁에 앉았고, 유정호는 박용근의 옆에 자리했다.

“상민아.”

“예, 감독님.”

평소와 다른 분위기였다. 그래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있던 박상민이 냉큼 답을 했다.

“오늘 구단이 계약 기간을 3년 연장하자는 오퍼를 해 왔다.”

“저를요?”

박용근이 고개를 끄덕일 때 전은주가 슬그머니 소파로 다가왔다. 좋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3년에 20억이라고 하던데, 네 생각은 어떠냐?”

박상민이 얼른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잘못 들은 거 아닌가 하는 얼굴이었다.

“괜찮다면 여기 유 대표에게 계약을 위임하고, 아니면 시간을 줄 테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고 답을 주면 된다.”

“감독님, 제가…….”

박상민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한국에서도 안 써 주던 나를 누가 20억이나 주겠어. 아버지가 지내기 좋은 집, 어머니가 좀 더 편하게 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집을 너무 사고 싶어서 헛소리를 들은 걸 거야.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제가 금액을 잘못 들은 거 같습니다. 그래서 바로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뭐라는 거야?

정지우가 시선을 돌렸을 때 유정호도 비슷한 느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3년에 2억, 그리고 감독님 밑에 계속 있을 수 있는 거라면 저는 좋습니다.”

이번엔 전은주가 멍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아까 들은 것과 달라서 확인하고 싶은 데다, 그녀 역시 20억이란 금액을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상민아.”

“예, 감독님.”

꿈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헛된 생각을 안 하려는 것처럼 박상민은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3년에 20억이라고 말했는데?”

“세상에……!”

전은주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뒤에 상체를 불쑥 디밀었다.

“여보? 맞지?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는 거지?”

“당신까지 왜 그래? 맞아.”

전은주는 너무 기뻐도 눈물을 보인다. 지금처럼.

“상민아! 잘됐다……!”

그녀가 축하 인사를 건넬 때였다. 고개를 떨군 박상민은 바보처럼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답을 하기 어려우면…….”

“아닙니다! 감독님! 아버지께서 지내시기 편한 집을 꼭 사 드리고 싶었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까……. 하아! 하!”

말을 하던 박상민이 울음을 참기 위해 숨을 서너 번 내쉬었다. 그리고 녀석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이 은혜 절대 안 잊겠습니다!”

박용근에게 인사한 다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소파 뒤에 있는 전은주에게 깊게 고개 숙여 인사한 박상민이 느닷없이 정지우에게도 몸을 돌렸다.

감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동기끼리 이런 건 정말 아니다.

빠르게 일어난 정지우가 박상민의 목을 끌어안았다.

“축하해! 잘됐다, 상민아. 정말 잘됐어.”

“흐으으! 으아아!”

박상민이 정지우의 등을 꽉 움켜쥐었다.

“고마워, 지우야!”

그러고는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가 정말 고생 많으셨거든! 문턱 없는 집 꼭 하나 해 드리고 싶었었어!”

전은주가 훌쩍였고, 유정호가 눈가를 훔치는 앞이었다.

“그게 너무 좋아!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내가 정말 안 잊을게! 고마워, 지우야!”

전은주가 몇 번이나 손바닥 안쪽으로 눈물을 닦아 낸 뒤에야 박상민은 유정호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수요일과 목요일까지 훈련이 이어졌다.

그리고 목요일 오후에는 박상민의 새로운 계약이 있었다.

동료들이 다 같이 달려들어서 거칠게 박상민을 두들겼는데, 특히나 레믹의 손이 매서워 보였다.

시샘하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레믹을 시작으로 이미 재계약 논의가 진행 중이어서 그렇다. 박상민이 서툰 영어로 그때 보자고 해서 라커룸에 한바탕 웃음이 지나갔다.

그 외에도 데이빗, 라파엘, 꼼빠니, 카알, 스웰던, 무둔바의 순으로 계약 기간 연장과 주급 변경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유니온 시티의 재정이 어느 정도는 풍족해졌다는 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목요일, 신준석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온 이정렬은 소파에 몸을 던졌다.

본머스전에서 기회가 있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역시 기대는 기대로 끝났다.

“하아.”

아쉬웠다. 최근에 리저브 팀에서 훈련하며 다시 몸이 탄탄하게 잡혔고, 감각이 올라와서 발끝이 근질근질한데 쉬어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스트라이커는 감각으로 안다.

이럴 때는 차는 족족 무조건 골이 된다. 막말로 골키퍼와 골포스트 사이가 남대문만 하게 보이는데 어떤 패스인들 그 안에 못 넣겠나.

월드컵 예선에서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야지!

이정렬은 눈빛을 빛냈다.

영국 선수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온 체격 좋은 선수들과 훈련하다 보니 그동안 부족했던 점이 무엇인지를 익혔고, 그들의 장점도 대충 눈여겨보았다.

부럽다, 박상민이.

엉뚱한 짓만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문제를 키우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정렬도 그 정도는 되었을 텐데.

‘월드컵 예선이니까.’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 스포츠 매체들이 눈여겨보는 경기다.

그 경기에서 다시 일어난 이정렬을 보여서 당당하게 유니온 시티 1군으로 복귀한다.

이정렬은 양손을 머리 뒤에 깔고 누워 예선전에서 활약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해낸다. 해낼 거다.

***

8월 29일 프리미어리그 4라운드 본머스전은 잉글랜드 도싯 주 본머스에 있는 바이탈리티 스타디움, 딘 코트에서 열렸다.

본머스는 챔피언십에서 유니온 시티와 함께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팀이다.

1890년 창단 이후, 125년 만에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했다. 그러니 매 경기에 선수들과 홈 관중들이 퍼붓는 열기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챔피언십에서 10년 가까이 함께 뛰던 팀답게 양 팀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더 껄끄럽기도 했다.

개막전에서 애스턴 빌라에 0 대 1로 졌고, 2라운드 역시 리버풀에게 0 대 1 패, 그리고 3라운드에서 웨스트햄과 4 대 3이란 난타전 끝에 처음으로 귀중한 승점 3점을 얻은 본머스다.

125년 만에 프리미어리그에서 첫 승을 거두었을 때, 본머스 관중들이 얼마나 열광하는지가 뉴스에 나왔을 정도였다.

“모처럼 옛 친구와 한판 하는 거다. 우리가 원래는 얼마나 거친 팀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의 수준이 어디까지 높아졌는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자!”

영국 축구는 몸싸움으로 시작해서 몸싸움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거칠게 나오는 상대는 그만큼 투박하게 상대할 필요가 있었다.

정지우는 라커룸에서 장갑을 만지며 동료들을 살폈다.

박상민의 재계약에 이어 다들 계약 기간과 주급에 관해 계약을 진행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거기에 본머스쯤 그렇게 어려운 상대가 아닐 거라는 안일한 느낌마저 라커룸을 떠돌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정지우가 시선을 장갑에 두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편안하게 하자고!”

라파엘이 정지우를 향해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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