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더 발전할 겁니다. (1)
『우리 선수들이 네 명이나 속해 있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유니온 시티가 토트넘과의 3라운드 경기를 0 대 0 무승부로 마쳤습니다.』
한국의 일요일 오전 TV 뉴스에 유니온 시티의 소식이 담겼다.
『유니온 시티는 교대로 들어간 박상민 선수의 활약과 골키퍼 정지우의 선방에도 불구하고, 골대 불운과 선심의 석연치 않은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아쉽게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박상민이 슈팅을 날리는 장면과 정지우의 선방이 화면에 나올 때마다 효과음처럼 ‘예에에에에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승격팀 유니온 시티는 3라운드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승점 7점으로 프리미어리그 반짝 선두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벤치를 향해 양손을 들어 박수를 치는 정지우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박용근은 김문호와 전화기를 붙들고 제법 오래 통화하고 있었다.
[선수 명단을 제출해야 하니까 내일쯤 발표하지? 어때? 박 감독?]
“그렇게 하자구.”
[그쪽에 네 명 다 넣어? 정렬이는 이번에 빼지?]
“왜 그래? 그 녀석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하여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으르렁거리다가도 제자들이라면 꼼짝을 못해! 나한테도 좀 그래 봐라.]
박용근은 그냥 웃기만 했다.
[박 감독.]
“왜?”
[일 이렇게 벌여 놓고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거랑 그렇게 자리 잡았으면서 이번에 나서 준 거, 정말 고맙다.]
김문호가 그답지 않게 먹먹한 음성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다음이었다.
“지우가 원했던 일이기도 해. 그냥 우리 축구 발전을 위해 좋은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 보자. 이래 놓고 결과가 엉망이면 한동안 지내기 힘들기도 할 거고.”
[흥! 어디 축구 교실 쫓겨날 때만 하겠어? 그런 건 걱정도 하지 마. 하여간, 지금 의논했던 대로 발표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고.]
김문호의 다부진 대꾸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선수들의 회복 훈련을 마친 마틴은 오랜만에 쥬피터의 사무실에 들렀다.
“오! 마틴! 어서 이리로!”
쥬피터가 얼굴은 물론이고, 손가락 동작 하나에까지 만족함을 가득 담은 채 자리를 권했다.
벽난로 앞에 있는 탁자였다.
“홍차를 하나 구했지. 맛을 보겠나?”
“고맙습니다.”
준비해 두었던 것이 분명했다. 마틴이 인사를 전하자마자 쥬피터가 뜨거운 홍차를 바로 잔에 따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달칵.
“자! 맛을 한번 보게.”
마틴은 쥬피터가 놓아 준 잔을 들어 느긋하게 한 모금을 마셨다.
좋았다. 빛깔만큼이나 홍차의 맛은 정말 좋았다.
“어떤가? 괜찮지? 저쪽에 준비해 두었으니 갈 때 가져가게. 훈련이나 경기가 끝났을 때 자네가 저걸 즐겨 주면 좋겠어.”
“고맙습니다.”
무언가를 바라는 얼굴인데 오늘은 또 뭘 요구하려고 이러나 싶어서, 마틴은 아무런 말 없이 쥬피터에게 시선을 주었다.
“흠! 박 감독이 데려온 선수 중에 Sang 말이지.”
설마 박상민을 이적시키려고?
마틴의 의심스러운 표정을 읽었는지 쥬피터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의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해서 그걸 의논하려고 그러네. 계약이 너무 단기인 것도 걸리고. 우리 스카우트 팀에서도 비슷한 의견이 올라와서 그 점을 의논하려는 걸세.”
“그에게 계약 연장을 제시하려는 겁니까?”
“그렇지!”
쥬피터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힐끔 마틴을 바라보았다.
“박 감독에 대한 대우도 좀 바꾸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요. 일단 박상민에게 어느 정도의 조건을 제시할 계획입니까?”
“그게 말일세…….”
돈에 관한 한 쥬피터는 쉽게 양보하는 사람이 아니다.
“3년에 57만 파운드(한화 10억 상당)면 어떤가?”
마틴은 일단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에서 온 스태프와 선수들 관련한 일을 논의하려면 항상 정지우가 떠오른다. 그가 박용근을 소개했고, 그 때문에 박상민과 신준석, 이정렬이 온 거다.
정지우가 납득할 만한 계약 조건이 아니라면 어설프게 꺼내지 않는 게 좋다. 그가 아는 정지우는 그런 선수다.
“저도 비슷한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 박상민은 앞으로 더 발전할 겁니다.”
“더? 더 발전한다고? 도대체 근거가 뭔가?”
쥬피터의 상체가 슬쩍 넘어왔다. 그가 이 대화에 정신을 팔렸다는 의미였다.
“어제 경기가 끝난 후, 박용근 감독에게 박상민을 선발로 내보내는 건 어떻겠냐고 질문을 던졌었습니다.”
“호오! 그건 나도 궁금하던 일이었지! 그래서? 그래서 그는 뭐라고 답을 했나?”
쥬피터가 둥그레진 눈으로 마틴을 재촉했다.
“박상민은 아직 처음부터 경기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반을 계속 지켜보게 하다가, 그가 경기를 완전히 이해한 것 같으면 내보낸다고요.”
“그걸 어떻게 알지?”
“박용근 감독의 능력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하아!”
쥬피터가 감탄 반, 의아한 심정 반을 한숨과 표정에 절묘하게 섞어서 표현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교체 명단으로만 쓰일 수도 있다는 게 아닌가?”
정말 지금의 쥬피터와 똑같은 질문을 박용근에게 건넸었다. 그래서 마틴은 입가에 미소를 그린 후에 입을 열었다.
“저 역시 같은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박용근 감독이 그러더군요.”
쥬피터의 몸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상태로 봐서 조만간 선발로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니 서너 게임만 지켜봐 달라고 했었습니다.”
“오오-!”
마틴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나쁘게 보면 욕심 많아 보이지만, 또 좋게 생각하면 감정에 솔직한 구단주인 거다.
“그래서, 자네 생각에는 Sang에게 어느 정도의 선을 제시하는 게 좋겠나?”
“흠, 그가 이대로 성장을 멈춰도 그를 이적시킬 때 얻을 금액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거기에 프리미어리그에 안착한 선수의 몸값이 급등한다는 점도 고려해야겠지요.”
돈이 더 들어간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정신을 차린 것처럼 쥬피터가 상체를 가져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3년이라면 그를 이적시킬 생각도 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마틴의 질문에 쥬피터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게 나쁜 일은 아니다. 선수를 발굴하고, 그가 충분히 활약할 수 있게 배려한 뒤에, 이익을 남기고 이적시키는 것은 현대 구단의 가장 주요한 수익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두 배쯤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용근 감독과 Ji가 지켜보고 있고, 세금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쥬피터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 서브로 나서는 박상민에게 제시하기에는 큰 금액이기도 했다.
“Ji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게 좋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챔피언스리그에 나갈 수 있습니다.”
쥬피터의 고개가 불쑥 들렸다.
“만약 챔피언스리그에 나가서 Ji와 Sang, 레믹, 꼼빠니, 데니까지 활약한다고 생각하면…….”
“성적은! 성적이 형편없을 수도 있지 않은가?”
“리그에서 1년을 함께 경기한 뒤에 나가는 챔피언스리그입니다. 지금보다 손발이 완벽하게 맞는 상황일 거고, 프리미어리그의 4강에 들 실력을 갖추어서 나가는 챔피언스리그입니다.”
쥬피터의 눈빛이 흔들렸다.
32강? 16강? 8강?
승리가 거듭될수록 들어오는 수입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FA컵 우승, 커뮤니티실드 우승을 통해 들어온 광고 수익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시겠지만, Ji는 박 감독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Sang을 형제처럼 생각합니다.”
그런가? 그렇지!
쥬피터의 생각이 마치 글자로 읽는 것처럼 마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지금 Ji에게 새로운 계약 조건을 제시하려면 이제는 570만 파운드(한화 100억 상당)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Sang을 가볍게 대하는 금액을 제시한다면 Ji의 다음 계약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마침내 쥬피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틴, 정직하게 답해 주게.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어느 정도라고 보나?”
“부상이 없고, 우리 구단이 Ji와 박 감독, Sang과 Jun을 지킨다면…….”
쥬피터가 눈빛을 반짝이며 상체를 살짝 기울인 다음이었다.
“우리는 분명 챔피언스리그를 위해 선수를 보강해야 할 겁니다.”
“호오.”
쥬피터가 나직하게 신음을 뱉으며 상체를 세웠다.
“솔직히 말하지. 우리 구단에 투자하겠다는 곳이 몇 곳 있네. 투자 금액도 상상을 초월해. 지분 참여라 경영에 간섭할 일도 없고.”
“그거야 회장님과 이사진이 판단할 부분이라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자네가 말한 대로 Ji가 계속 우리 구단에 남아 있겠느냐는 거지. 챔피언스리그 진출 가능성을 담보한 상태에서 말일세.”
마틴은 쥬피터가 염려하는 점을 분명하게 알 것 같았다. 투자자들이 분명 정지우의 권한을 좀 더 확보하길 바랐다는 것을 말이다.
“투자받기 전에 Ji와의 계약을 바꾸지요. 주급을 인상하는 거면 충분할 겁니다. 그전에 Sang을 비롯한 단기 계약을 장기로 바꾸는 것이 먼저겠구요.”
“그렇지! 그렇게 할 수 있겠나?”
쥬피터는 정지우가 3배의 금액을 지불하고 훌쩍 날아갈 것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이사회의 방침이 정해지면 Ji를 만나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쥬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마틴. 내일 오전에 이사회가 있으니 Sang에 관한 자네의 의견을 말하고, 답을 알려 주겠네.”
그러면서 그는 굳은 얼굴로 말을 꺼내 들었다.
병원으로 들어선 정지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릴리의 병실로 올라갔다.
작은 몸으로 워낙 큰 수술을 견뎠기 때문에 안심하기는 이르다. 그래서 아직은 병원에 올라갈 때 걱정이 앞섰다.
때앵.
엘리베이터를 내린 정지우가 병실로 돌아섰을 때였다.
릴리의 병실에서 데이지가 나오고 있었다.
보고 싶었었다. 이렇게 불쑥 나오는 것이 당황스러울 만큼.
뒤로 묶은 머리, 하얀 가운, 초록색 블라우스, 그리고 검은 바지.
“Ji!”
데이지가 웃으며 병실 안을 힐끔 보고는 다가왔다.
이전처럼 맑고 밝은 미소였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서운했다.
그냥 수술을 앞두고 힘겨워서 잠깐 의지했었던 건가?
공연히 나만 이렇게 설레고 있는 거였나?
겉으로 표현하기는 유치하고 치사한 생각이었다.
정지우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데이지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시렸다.
“릴리는요?”
“지금 들어가면 정말 행복한 릴리를 보게 될 거예요.”
데이지가 정지우를 똑바로 보며 건넨 답이었다.
당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정지우가 태연한 척 답을 한 다음이었다.
“어제 경기 정말 대단했어요! 당신의 플레이는 보는 사람을 감동시켜요! 정말 멋졌어요.”
그래. 그렇구나.
당신은 축구 선수를 좋아하는 팬이었구나.
서운했다. 그래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팬의 자리에서 저런 말을 건네면 전해 주던 웃음이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데이지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거였다.
좋아해 주는 팬에게 혼자 감정을 느낀 건 정지우인 거다.
“고마워요. 열심히 할게요.”
정지우는 팬들을 대하는 자세로 말을 하고는 릴리의 병실로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감정을 털어 내려 애썼다.
혼자서 더 깊어지지 않아서, 지금이라도 단순한 팬이었음을 알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후.”
정지우는 릴리의 병실 앞에 도착하기 전에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릴리의 건강한 얼굴을 볼 시간이었다. 축구 선수 정지우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두지 못했다.
그래서 정지우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도 아직 데이지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몰랐다.
“Ji!”
릴리의 음성에 좀 더 힘이 담겨 있었다.
“좀 어때?”
“아직 아파.”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놓칠 뻔한 웃음이 나왔다.
“어제 경기 때문에 릴리가 화가 많이 났었어.”
메기가 이르는 것처럼 말을 건넬 때, 릴리가 입을 삐죽였다.
“일방적이었어. 우리 유니온 시티를 시기한 거야.”
릴리가 불평처럼 쏟아 낸 말에 정지우는 웃음이 터졌다.
가끔 저렇게 어린아이가 쓰지 않는 말을 쓸 때면 억지로 화장한 릴리를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미안. 릴리가 말하는 모습이 예뻐서 그만 웃음이 나왔어.”
릴리가 환하게 미소 지어 주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상처가 아팠던 모양이었다.
“Ji, 닥터 데이지가 그러는데 나, 이대로 상태가 좋아지면 6개월쯤 뒤에 한국에 갈 수도 있대.”
“와, 굉장한데!”
자랑스러운 얼굴로 릴리가 메기를 바라보았다.
“얼른 일어나. 지난번에 한복 선물해 주신 분이 릴리를 초대하고 싶어 하셔.”
“와- 앗!”
이번엔 릴리가 감탄사를 뱉어 내다가 온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많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정지우가 이마를 만져 주었고, 메기가 얼른 다가와 릴리를 살폈다.
좋았다. 정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