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73화 (173/262)

제6장. 자신 있다는 뜻입니까? (3)

달려드는 수비수, 움츠린 골키퍼, 하얀 골대와 그물,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관중들.

레믹은 골대 위로 상반신이 올라가 있을 정도로 높다랗게 떠서 공을 향해 머리를 휘둘렀다.

터어엉!

“예-!”

비명 같은 함성이 터진 뒤로 관중들이 이마를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멋지게 날린 헤더가 토트넘의 골키퍼 요리스의 품으로 안기듯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혀를 턱까지 쭉 내민 레믹이 인상을 찌푸리며 요리스를 멍하니 보았다.

벌떡 일어났던 스태프들이 멋쩍은 얼굴로 자리로 돌아갔고, 상체를 기울여 골대를 바라보던 마틴이 허리를 쭉 펴고는 공연히 넥타이를 쓸어내렸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게 축구인 거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에서 골이 터지기도 하고, 반대로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찬스를 날리는 게 말이다.

중앙선으로 물러나는 레믹이 데니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확실히 꾸준한 출전만큼 실력을 늘게 하는 건 없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에 데니가 발등으로 넘긴 패스가 그런 느낌이었다.

마치 축구는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면 이상스럽게 위기가 곧바로 닥친다.

토트넘의 골키퍼 요리스가 미드필더 뎀벨레에게 힘차게 공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뎀벨레는 바닥에 한 번 튕긴 공을 그대로 발 안쪽으로 높다랗게 차서 안으로 넘겨주었다.

화악!

데이빗이 높다랗게 떴는데 우습게도 공은 그의 머리를 스치듯 맞고 골대 앞으로 좀 더 높게 날아 들어왔다.

정지우가 몸을 오른쪽으로 두 걸음 움직인 직후였다.

무둔바와 라멜라가 동시에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터어억! 터덕!

라멜라가 먼저 밀어 넣은 공이 무둔바의 발에 맞고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으로 흘렀다.

천천히 흘러가는 공을 향해 토트넘의 케인이 달려들었다.

고작 두 번의 터치만에 슈팅으로 연결되어서 수비수들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휘이이익!

라파엘이 급하게 몸을 던질 때, 케인이 있는 힘껏 슈팅을 날렸다.

움찔!

정지우가 왼쪽으로 몸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퍼어어엉! 터억! 휘익!

라파엘의 발목에 걸린 공이 불쑥 튀어 올랐다가 꽂히는 것처럼 오른쪽을 파고들었다.

역동작에 걸리면 대개 멍해진다.

그리고 왼쪽으로 쏠려 버린 몸의 중심을 되돌리는 틈에 공은 이미 눈앞에 있는 거다.

‘이익!’

정지우는 왼쪽 허리와 허벅지, 무릎과 발목을 이용해 몸을 날렸다.

화아아악!

궤적을 놓치는 순간, 공은 손을 피하는 것처럼 골대로 처박힌다.

가슴을 최대한 늘리고, 손을 쭉 뻗으며 정지우는 엉뚱하게 수술실에서 보았던 김지훈의 눈빛을 떠올렸다.

피가 튈 때, 동료 의사들과 스태프들을 지휘하고, 2층을 힐끔 보던 그의 눈빛을 말이다.

당신이 릴리를 지켰던 것처럼, 나는 골대를 지킵니다!

이게 내 임무니까요!

이제 겨우 행복해졌거든요!

다시는 이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겁니다!

공이 오른쪽 골포스트와 일직선에 놓여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 정지우는 상체를 있는 대로 뒤로 넘겼다.

터어억! 털썩!

“예에에에에에에-!”

『말도 안 되는 선방! 슈퍼세이브 정지우!』

『이건 뭐! 그냥 반사적으로 막아 냈다고밖에 안 보이네요! 왼쪽으로 완전히 몸이 쏠렸었는데요! 와! 이건 정말!』

『정지우! 완벽한 한 골을 지켜 냅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는 뛰어난 골키퍼가 한 시즌에 9점에서 12점의 승점을 만들어 낸다고 보거든요! 이대로라면 정지우 선수! 도대체 어떤 기록을 세울지 모르겠습니다!』

앵커와 해설자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말을 주고받았다.

느린 그림이 나오는 동안, 호프집은 아예 광란의 도가니였다. 그림 같은 선방도 있었지만, 호프집 사장이 내건 이벤트 ‘정지우 타임’ 덕분이기도 했다.

“사장님! 이거 이벤트에 해당하는 거 맞죠!”

“물론입니다! 정지우 타임입니다! 500cc 한 잔씩 나갑니다! 종 울려! 정지우 타임!”

땡땡땡땡!

직원이 카운터에 걸린 종을 요란하게 울리자,

“우와-!”

정지우의 선방 이후로, 또 다른 의미의 함성이 호프집을 가득 메웠다.

호프집 사장은 좋았다. 입이 찢어질 만큼.

이런 이벤트, 한 경기에 10개는……. 좀 그렇고, 3개까지 아무 상관 없다. 장사하면서 요즘처럼 수입이 좋은 적이 없었으니까.

‘고마워요! 정지우 선수! 내가 평생 응원할게! 절대 다치지 말고 매주 부탁해!’

엉뚱한 곳에서 간절한 응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꽈악!

라파엘이 다가와 정지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마터면 미안할 뻔했는데 이런 게 수비수와 골키퍼의 숙명 같은 거니까, 원망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투욱!

달려온 무둔바와 손을 마주친 정지우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꼼빠니!”

정지우는 뒤쪽 골포스트에 꼼빠니를 서게 하고 오른쪽 코너를 노려보았다.

토트넘의 코너킥에 대비해야 할 때였다.

라파엘이 케인의 겨드랑이에 양팔을 뻗어 가슴에 담다시피 쫓아다녔다. 카알이 라멜라를 따라붙었고, 데이빗은 메이슨을, 신준석이 샤들리를 마크한다.

토트넘 선수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심지어 케인은 팀 동료인 라멜라의 뒤로 숨기까지 했다.

정지우는 앞으로 끼어들려는 뎀벨레의 등을 밀어내고 페널티 에어리어를 보았다.

2선에서 서 있다가 공을 향해 달려오는 선수가 제일 무섭다. 그래서 무둔바가 골대 중앙에 버티고 있는 거고, 데니와 맥슨이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을 따라 선수들을 막아 내고 있는 거다.

와라!

다이어가 양손을 높게 들었다가 내리고는 공을 향해 움직였다.

퍼어어엉!

멋진 코너킥이었다.

달려 나가기 애매한 각도인데, 이런 건 뛰어나가면 무조건 선수들과 엉켜서 골을 먹기 쉬웠다.

공이 날아오는 시선을 따라 정지우가 몸을 돌리는 순간,

휘이이익!

토트넘의 수비수 워커가 하늘을 걸어오는 것처럼 높다랗게 떠서 날아왔다.

터어엉!

봤다!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화아아악!

새를 낚아채는 고양이처럼!

정지우는 왼편으로 몸을 날렸다.

꽈아악! 털썩!

“예에에에에-!”

아예 두 손으로 공을 잡은 채 떨어진 정지우가 바닥에 떨어진 직후에 공을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됐다! 위기를 넘겼다!

이제부터 리듬을 다시 가져오면 레믹이든, 데니든, 맥슨이든 골을 넣어 줄 거다. 최선을 다한 다음, 동료를 믿는다.

정지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 스웰던과 무둔바, 라파엘이 정지우를 지키는 것처럼 주변에 서 있었다.

전은주는 입 앞에 올린 손으로 물개 박수를 계속 쳤다.

자랑스럽다.

이 경기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붙잡고, 저 선수가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 준다고, 우리 남편과 함께 훈련했던 아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최근에 정지우의 웃는 모습이 바뀐 거, 안다. 알아봤다.

언젠가 김밥을 입에 넣고 돌아서서 울던 저 아이가, 이제는 주방으로 다가와 어깨를 만져 주며 ‘어머니, 오늘 저녁은 뭐예요?’ 해 줄 때도 있다. 그때 정지우의 얼굴을 봤다면 지금 전은주의 마음을 이해할 거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지우야!’

전은주는 박수를 멈출 수 없었다.

“우리도 일어나요!”

신윤희가 상기된 얼굴로 전은주에게 말을 전했다. 관중들의 함성 때문에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일어서야지! 그래야지! 그래서 지우를 응원해 줘야지!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부르는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하는 정지우의 응원가를 아직은 부르지 못하지만, 그래도 정지우를 위해 일어서는 것은 할 수 있는 거다.

전은주는 박수를 멈출 수 없었다.

고마워, 지우야!

네 덕분에 정말 행복해!

너도 지금보다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호프집 사장을 바라보는 손님들의 시선에 궁금함과 미안함이 담겼다.

“이거! 무조건 정지우 타임입니다! 종 울려! 정지우 타임!”

“우와아-!”

직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종을 울렸다.

괜찮다! 오늘 이렇게 먹고 마신 손님들의 절반 이상이 내일과 다음 경기가 있을 토요일 전에 한 번에서 두 번씩 꼭 들러 주니까!

그리고 저런 슈퍼세이브를 보았는데 어떻게 가만있겠나.

피가 이렇게 바글바글 끓는데!

설마 선방이 두 개 이상 더 나오지는 않겠지? 그렇지?

정지우는 공을 허리에 끼우고 천천히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걸었다. 기습적인 공격을 하기는 어려우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빠르게 치고받으면 토트넘의 리듬에 끌려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시간을 벌어 줘야 한다.

정지우는 레믹과 데니, 그리고 맥슨에게 시선을 주었다.

‘걱정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 줘! 수비 도와주고!’

이미 팀의 중심에 선 정지우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훈련을 주 중에 따로 하고 있다는 것을 동료들 모두 안다. 심지어 얀센과 기예르모가 골키퍼 코치에게 훈련 계획을 짜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니까.

정지우는 공을 굴려서 무둔바에게 주었다.

툭툭.

무둔바가 공을 앞으로 두 번쯤 차고 나가다가 카알에게 건네주었다.

투욱!

토트넘은 속도 빠른 경기를 원한다. 강한 전방 압박을 통해 허둥대는 상대에게서 공을 빼앗고, 그것을 골로 연결하는 팀이다.

그러니 지금은 유니온 시티가 천천히 공을 돌리며, 토트넘의 젊은 선수들을 약 올려야 할 때였다.

상대를 알고 나서는 경기다.

이전의 경기 영상, 그동안의 기록, 버릇, 일반인이 볼 때 사소해 보이는 모든 것이 상대 팀에게 전해진다.

그렇게 거의 모든 것을 아는 팀끼리 만나지만, 그래도 대개 승부는 난다.

스물이 갓 넘은 선수들은 이렇게 공을 돌리는 것을 잘 참지 못한다. 뺏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달려든다. 그렇게 달려들어서 라인이 무너지는 게 얼마나 팀을 위태롭게 하는지를 철저하게 계산하지 못한다.

투우욱!

데니가 다시 공을 뒤로 돌렸다.

레믹이 골대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지만, 녀석은 공을 뒤로 넘겼다. 완벽한 한 번의 기회를 위해 참는 거다. 지금은 아직 0 대 0이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도 없다.

케인이 좌우로 뛰어다녔고, 라멜라와 다이어가 공을 향해 뛰어나왔다가 벤치에서 지른 고함을 듣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퍼어어엉!

왼편에 있던 꼼빠니가 반대쪽에 있는 카알에게 길게 공을 돌려주었다.

와라락!

달려드는 케인을 보며 카알은 정지우에게 공을 주었다.

절대 골대 앞에서는 시간 끌 필요 없는 거다.

투우욱!

정지우는 바로 신준석에게 공을 차 주었다.

신준석은 이제 완전히 적응한 얼굴이었다.

슬슬 라인을 타고 앞으로 가다가, 샤들리가 앞을 막자 무둔바에게 공을 빼 주었다.

토트넘 선수들이 점점 중앙선을 넘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미드필더 5명이 모두.

지루해 보이지만 승부가 걸리기 직전이었다.

5명이 공을 먼저 뺏느냐, 아니면 저 5명의 뒤로 공을 넘겨서 유니온 시티가 골을 만드느냐의 싸움이다.

투우욱!

데이빗이 카알에게 공을 주고, 바로 되받았다.

짧게 짧게 공이 오가자 토트넘 선수들이 좀 더 바싹 다가왔다. 심지어 케인은 동료들을 향해 달려들라고 손짓까지 한다.

투욱!

카알이 공을 받는 순간이었다.

케인의 손짓을 받은 라멜라가 카알에게 달려들었고, 주변에 있는 맥슨, 데니, 데이빗의 앞을 막기 위해 토트넘의 미드필더들이 일제히 압박을 가해 왔다.

투욱!

카알이 신준석에게 공을 빼 준 직후였다.

퍼어어엉!

신준석이 오른쪽 라인을 따라 일직선으로 날아가도록 공을 길게 차 주었다.

“와아아- 아!”

『신준석! 토트넘의 오른쪽 빈 곳에 공을 넘겼습니다. 데니! 따라붙는 데니! 공을 잡은 데니! 어디로? 데니! 카알에게!』

카알이 공을 받아서 발 안쪽으로 다시 옆으로 굴렸다.

『열렸어요! 쏴야죠! 지금이에요!』

해설자가 고함을 지르는 화면에서,

와라락!

레믹이 공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퍼어어엉!

빨랫줄처럼 날아가지만, 마주 선 골키퍼와 그 뒤에 있는 관중들은 공이 얼마나 무섭게 휘는지 제대로 알 수 있다.

골키퍼들이 몸을 날려 손을 뻗었는데, 그 아래나 위로 살짝 들어가는 공? 다 잡았던 그걸 어떻게 놓치냐고? 날아오던 공이 2미터쯤 앞에서 확 휘어들어 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화아아악!

토트넘의 요리스가 기다란 몸을 쭉 날렸다.

꿈틀!

정지우와 동료들이 모두 보았다. 요리스가 뻗은 손 앞에서 공이 비틀리는 것을 말이다.

터어억! 털썩!

다 좋았다! 기가 막혔다.

“우우-!”

그러나 하필이면 공이 아래로 휘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요리스의 손에 맞고 튀어나왔다.

퍼어엉!

골대 앞으로 달려온 수비수 베르통언이 공을 바깥으로 길게 차는 것으로 결정적인 기회가 날아갔다.

또다시 이마를 감싸며 뒤로 주저앉는 관중들 앞에서 레믹은 거꾸로 뒤집은 상의의 끝을 입에 물고 아쉬움을 삼켰다.

“기운 내! 레믹! 다음번엔 짓이겨 버리라구!”

멋진 슈팅이었다. 그래서인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을 것 같은 관중이 레믹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응원해 주었다.

레믹이 미안한 얼굴로 돌아보았을 때였다.

‘멋졌다! 최고였어!’

정지우는 오른손 엄지를 높게 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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