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자신 있다는 뜻입니까? (2)
음악을 듣거나, 기도로 시간을 보내던 동료들이 전부 데이빗에게 시선을 주었다.
“병원에서 지켜볼 경기잖아! 엄청난 수술을 견디고, 돌아온 릴리에게 반드시 승리를 선사하자!”
그가 굳건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 직후에 문이 열리고 마틴이 들어왔다. 축구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라커룸의 분위기를 모를 리는 없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하라는 의미로 데이빗을 향해 두 손을 내밀어 보였다.
“우리 모두 Ji를 믿는 것은 다를 게 없는 거, 맞지?”
데이빗이 정지우를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여기 있는 우리 동료, Ji가 골대를 지킨다. 그러니 우리는 그를 믿고, 젊은 토트넘에게 챔피언십에서부터 올라온 우리의 축구를 알려 주자! 수비를 지원하고, 최선을 다해 공을 소유하며, 골을 넣는다! 그게 우리 축구다!”
“예에-!”
전쟁을 앞둔 지휘관처럼 말을 마친 데이빗이 손을 내밀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레믹과 거친 성격의 스웰던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마틴은 몹시 만족한 얼굴이었다.
“기억해! 저들이 미드필드에 다섯 명을 배치한 이유를! 우리의 미드필더들이 그만큼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힘과 힘! 속도와 속도의 대결이다! 그리고 승리는 우리 몫이 될 거다!”
데이빗이 불에 기름을 부었다면, 마틴은 부채질을 하는 모양새였다. 아무튼 릴리의 일로 그 어느 때보다 라커룸의 분위기는 죽여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경기를 마칠 때마다 기록이라는 괴물이 정지우의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어서 더 그랬다.
이제는 경기를 준비할 시간이었다.
정지우는 손에 들고 있던 골키퍼 장갑을 들었다.
먼저 왼손을 끼웠고, 손목의 벨트를 단단하게 걸었다.
지킨다. 지켜 낸다. 내 뒤에 있는 골대를, 오늘의 경기를!
다음은 당연하게 오른손이다. 이어서 엄지와 검지, 검지와 중지 사이를 끼워 손과 장갑의 유격을 완전히 없앴다.
오늘 경기도 해낼 거다.
어떤 슈팅이 오더라도 막아 낼 거다.
정지우가 다짐을 곱씹는 동안, 출전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시작이다. 3라운드 토트넘전이.
동료들과 일어선 정지우는 라커룸의 문을 향해 움직였다.
자가락, 자가락.
제자리에서 선수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서 선수용 터널에 스파이크 소리가 가득했다.
“하이!”
에스코트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아이와 인사를 나누고 손을 잡은 직후였다.
방송 카메라가 자리를 잡은 것이 보였고, 곧바로 진행 요원이 움직이라는 의미로 두 손을 어깨 뒤로 넘기는 동작을 보였다.
자가락, 자가락.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오고 있습니다. 정지우 선수가 두 번째로 입장합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중년, 청년, 청소년, 여자아이, 노부부, 각양각색의 홈 관중들이 응원가를 부르며 선수들을 격려해 주었다.
둘러보면 역시나 남자 관중들이 대부분이어서 함성은 늘 남자들의 거센 외침으로 들린다.
정지우는 에스코트 아이를 앞에 세우고 관중석을 향해 섰다. 박용근을 보았고, 박상민과 눈을 마주친 후에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전은주, 신윤희가 정지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신 정지우는 오른쪽 통로를 힐끔 보았다.
역시! 오늘은 오기 힘들었을 거다.
한국의 의료진이 모두 돌아가서 병실을 지켜야 하고, 그것이 경기를 보러 오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행사가 끝나고 주심이 양 팀 주장을 불러 동전을 던졌다.
유니온 시티의 선공이었다.
토트넘 선수들이 유니온 시티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며 빠르게 지나갔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멋진 경기를 기대하는 관중들이 박수를 치는 동안, 정지우는 골대를 향해 움직였다.
이제 골포스트를 한 번씩 확인한 다음…….
정지우가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을 지날 때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에는 두 사람이 살지!”
홈 관중들이 타이밍에 맞지 않게 승리의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와아-!”
관례처럼 홈 관중들이 응원가를 부르면 원정 관중들은 침묵을 유지한다. 그런데 지금 함성은 토트넘 관중들이 터트린 것이었다.
정지우가 힐끔 돌아보았을 때, 2층 관중석 난간에 기다란 걸개가 가로로 걸렸다.
쿵. 쿵. 쿵. 쿵. 쿵. 쿵.
“릴리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응원가의 중간 가사를 커다랗게 써 놓은 걸개였다.
내용을 알고 있는 토트넘 관중들이 릴리를 응원하기 위해 함성을 질러 주었던 모양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Ji가 경기에 나가면 릴리는 이렇게 말했어!”
정지우는 골대로 걸어가 포스트를 툭 걷어차고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반대편 골포스트를 발 안쪽으로 툭 찬 정지우는 중앙으로 걸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멋진 응원이었다.
이 모습을 릴리가 보고 있었으면 싶었다.
훌쩍! 터억!
정지우가 크로스바를 건드리는 순간,
“예에에에에-!”
엄청난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를 뒤덮었다.
『정지우 선수의 배려로 수술을 받았다는 릴리란 소녀를 응원하는 응원가인 것 같습니다.』
『그렇네요. 우리나라 수술팀이 수술을 맡아서 화제가 되었는데요, 결과가 희망적이라니까 더 기쁘고 반갑습니다.』
『우리 정지우 선수가 영국 프리미어리그 소속 팀의 중심 선수로 서 있는 것 같아서 정말 반갑습니다. 앞으로 이런 선수들이 많이 나와서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화면은 2층 난간에 걸린 걸개를 천천히 다시 보여 주었다.
데이지가 작은 모니터에 나온 릴리의 심장박동을 살핀 후 시선을 가져왔다. 수치상으로 릴리는 지금 분명하게 흥분한 상태였다.
“마미! 마미!”
릴리가 TV 화면을 보며 메기를 불렀다.
왜 그랬을까?
경기가 시작하기 전인데도 정지우는 하늘을 향해 양손 검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데이지는 미소를 그려 내며 다시 심장박동을 살폈다.
이 정도 흥분은 나쁘지 않다.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든 정지우를 보는 순간, 데이지의 심장도 비슷하게 뛰고 있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삐이이익!
유니온 시티의 선공이었다.
맥슨이 데니에게 공을 넘기고, 데니가 카알, 카알이 데이빗에게 짧게 패스하며 시간을 벌었다.
와락! 와라락!
경기 시작과 동시에 토트넘 선수들이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뛰는 것만큼은 자신 있다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런 얼굴로 뛰어다닌다.
투욱! 툭!
아무리 그래도 공보다 빠른 선수는 없는 거다. 다만 패스를 하는 입장에서 마음이 급한 건 사실이었는데, 이 정도 압박에 당황할 유니온 시티는 아니었다.
투욱!
한순간 데이빗이 꼼빠니에게 공을 넘겼고,
투우욱!
꼼빠니가 밀고 올라온 토트넘의 오른쪽 포백 사이로 공을 찔러 넣었다.
“우와아- 아!”
레믹이 달려들었고, 그 뒤를 따라 맥슨과 데니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퍼어엉!
그러나 공은 토트넘의 수비수 베르통언이 먼저 걷어 냈다.
중앙선 부근에 떨어지는 공을 향해 3명의 선수가 몸을 띄웠다.
휘이익! 터엉!
토트넘의 메이슨이 머리로 공을 따냈다. 그리고 그 공을 받은 것은 역시나 토트넘의 다이어였다.
그가 툭 찔러 준 공을 향해 케인이 빠르게 달려왔다.
“우와-!”
퍼어엉!
그러나 이번엔 정지우의 앞을 막아선 라파엘이 공을 걷어 냈다.
카알이 받았고, 공은 곧바로 데니에게 넘어갔는데, 데니는 받는 즉시 레믹의 앞으로 찔러 주었다.
삐이이익!
그 순간 주심이 휘슬을 불었고, 선심이 높다랗게 들었던 기를 그라운드를 가리키는 것처럼 아래를 향해 들었다.
선심 가까운 곳에서 오프사이드 파울이라는 의미였다.
농구 경기도 아니고 공을 잡으면 일단 돌격했고, 다음으로 원톱 스트라이커를 향해 찔러 놓고 본다.
어쩌면 양 팀의 공격 방식이 비슷해서인지 모른다.
투우우욱!
레믹이 오프사이드 파울을 범한 자리에서 토트넘의 데이비스가 공을 빠르게 차 주었다.
유니온의 오른편에 있던 메이슨이 받았고, 그는 반대편에 있는 뎀벨레를 향해 기다랗게 공을 넘겨주었다.
『유니온 시티의 왼편을 뎀벨레가 달립니다! 뎀벨레! 주변을 한 번 확인하고! 꼼빠니를 뿌리친 뎀벨레!』
뎀벨레가 손으로 밀쳐 내는 것처럼 꼼빠니를 제치고 앞으로 달렸다.
투우욱!
그리고 그는 스웰던과 라파엘을 피해 유니온 시티의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공을 넘겨주었다.
이번엔 무둔바가 달려들어 공을 걷어 냈다.
『양 팀, 정말 숨 가쁘게 공수를 오가고 있습니다.』
『유니온 시티가 호흡을 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양보하질 않네요.』
『농구나 핸드볼을 보는 느낌입니다.』
공은 그사이 중앙선을 넘어 맥슨이 받았다.
투우욱!
그는 페널티 에어리어 정면에 있는 레믹에게 공을 건네주었다.
『공을 받은 레믹! 라멜라를 제치고 들어갑니다! 레믹! 왼쪽으로 치고 들어가는 레믹!』
『레믹이에요! 레믹! 열렸어요!』
레믹이 정말 환상적인 동작으로 페널티 에어리어를 파고들었고, 알데르베이렐드를 피해 왼쪽으로 빠져나갔다.
『레믹! 슈웃!』
퍼어어엉!
“우우-!”
그러나 레믹의 슈팅은 크로스바를 살짝 벗어나 위로 날아갔다.
『지금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두 명을 제치고 슈팅을 날렸거든요. 각이 별로 없었는데 정말 멋진 슈팅이었습니다.』
『볼 잡고 있을 때의 스피드라든지, 순간적인 판단을 보면 정말 굉장한 선수예요. 최근에 슈팅 감각까지 올라와서 흠 잡을 데가 없어요!』
『두 팀의 3라운드 경기입니다. 아쉬운 찬스를 놓친 유니온 시티! 경기가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토트넘의 골키퍼 요리스가 공을 길게 내질렀다.
퍼어어엉!
공은 길게 날아와 중앙선을 훌쩍 넘으며 떨어졌다.
터엉!
라멜라가 높다랗게 떠서 공을 앞쪽으로 흘려주었고, 그 공을 케인이 잡았다.
투욱!
케인이 다이어에게 공을 주고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달렸다.
『다이어 공을 잡았습니다! 다이어! 데이빗을 따돌립니다!』
『줘야죠!』
케인이 골대 앞으로 달려들었는데, 다이어는 레믹을 흉내 내는 것처럼 데이빗과 라파엘을 제치며 달려들었다.
『카알과 무둔바의 협력 수비! 다이어 슛!』
퍼어엉!
정지우는 이미 위치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이어의 슈팅은 손을 내밀 필요도 없이 왼쪽 포스트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다.
『지금 페널티 에어리어부터 치고 들어왔거든요! 마치 레믹의 플레이를 따라 한 것 같은데 이번은 케인에게 주었으면 어떨까 싶네요!』
『다이어가 손을 들어서 미안하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지우는 뒤에서 던져 주는 공을 잡아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동료들을 향해 양손으로 그라운드로 누르는 시늉을 펼쳐 보였다.
『정지우 선수가 호흡을 조절하네요.』
『토트넘을 상대로 속도를 조절하라는 의미겠지요? 확실히 경기를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동료들이 정지우의 지시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계속 빠른 흐름이 사실 토트넘에게 유리하거든요. 유니온 시티는 정지우 선수의 판단대로 조금 천천히 리듬을 살릴 필요가 있어요.』
투우욱!
정지우는 신준석에게 공을 차 주었다.
투욱!
신준석은 바로 무둔바에게 공을 넘겼고, 무둔바는 반대편 앞쪽에 있는 꼼빠니에게 공을 차 주었다.
공을 가로채기 위해 토트넘 선수들이 바쁘게 들어왔다가 뒤로 물러났다.
투욱!
정지우의 사인을 알아챈 꼼빠니가 데이빗에게 공을 주었고, 데이빗은 골대 앞에 있는 정지우에게 기다랗게 패스했다.
투욱!
골대 앞에서 시간 끄는 건 미련한 짓이다.
정지우는 바로 스웰던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토트넘의 미드필더 5명이 공을 따라 움직이며 라인이 흔들렸다.
뒤에서 돌리는 패스는 이런 효과를 노리는 거다.
거기에 아직 리듬을 만들어 내지 못한 토트넘은 오로지 힘과 체력을 믿고 자꾸만 달려들고 있어서, 중앙 미드필더 5명의 라인이 눈에 띄게 무너지고 있었다.
투욱!
스웰던이 대각선 앞쪽에 있는 카알을 향해 공을 넘겨주었다.
『카알, 상대 등지고 있습니다.』
『데니가 비었어요!』
『카알! 데니에게! 데니! 치고 들어갑니다! 데니! 토트넘의 오른쪽을 파고듭니다! 데니! 뒤로!』
투우욱!
그때 데니가 멋지게 공을 굴렸다.
토트넘의 오른쪽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공을 보냈는데 골대가 훤히 보이는 지역이었다.
『카알이에요! 걸렸어요! 쏴야죠!』
카알이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편에서 골대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우와- 아!”
관중들이 엉덩이를 들며 골을 기대하는 순간이었다.
투욱!
그러나 카알은 너무 소심했다.
수비수 사이를 달리는 레믹에게 패스한다고 공을 찔러 주었는데, 다이어의 발에 걸린 거였다.
『유니온 시티, 찬스를 또 한 번 놓칩니다!』
『네! 아쉽네요! 이건 슈팅을 날려 볼 만했는데요.』
『공 잡은 맥슨, 줄 곳을 찾습니다. 맥슨! 다시 데니에게!』
『오늘 데니 선수가 몸이 가벼워 보여요. 계속해서 오른쪽 공격이 살아나는데요, 샤들리와 데이비스가 데니를 제대로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데니가 또다시 툭툭 치면서 토트넘의 오른쪽 진영에서 골대를 향해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수비수들이 오프사이드 라인을 위로 올리는 순간이었다.
투우욱!
데니가 오른발 발등에 공을 얹어서 수비수를 슬쩍 넘기는 패스를 골대 앞으로 넣어 주었다.
“와- 아아아아아!”
삽시간에 오프사이드 라인이 무너졌다.
그리고 공을 향해 달려간 레믹이 골대 앞에 높다랗게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