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자신 있다는 뜻입니까? (1)
인터뷰는 벤치 위쪽의 관중석에서 진행됐다.
정지우의 옆에 앉은 진행자가 질문을 던지면 그에 맞는 답을 하면 되는 거였다.
FA컵 경기부터 챔피언십, 그리고 프리미어리그에서 무실점을 기록하고 있는 골키퍼란 소개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무실점 기록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요?”
“희망은 이번 시즌이 끝날 때까지입니다.”
진행자가 놀란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는데, 주변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이 ‘오-!’ 하면서 감탄사를 터트려 주었다.
“어떻습니까? 유니온 시티에서의 생활은?”
“정말 행복합니다. 존경할 만한 코치와 스태프,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어서 이곳 생활에 더할 수 없이 만족합니다.”
진행자가 고개를 끄덕인 뒤에 릴리의 일을 꺼냈다.
몇 가지 질문이 이어진 다음이었다.
“Ji, 한국의 국가대표를 은퇴했었습니다. 이번에 협회의 임원진이 전부 사표를 제출했을 정도로 한국의 월드컵 예선 성적의 후폭풍이 거센데, 혹시 요청에 응할 생각이 있습니까?”
정지우는 잠시 그라운드를 바라본 뒤에 다시 시선을 진행자에게 가져왔다.
“박용근 감독님은 내게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분이 축구를 알려 주셨고, 지금 제가 보이는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나를 지도해 주셨습니다.”
“잠시만요, 박용근 감독이라면 지금 유니온 시티의 리저브 팀 감독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진행자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대한민국의 국가대표팀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박 감독님께서 국가대표팀에 관련되고, 저를 불러 주신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예선전에 참석할 것입니다.”
“오! Ji, 굉장한 발언인데요, 그렇다면 마지막 예선전에서도 무실점을 기록할 수 있을까요?”
정지우는 진행자를 보며 씨익 웃었다.
“자신 있다는 뜻입니까? 무실점?”
진행자가 확인처럼 다시 물었는데, 정지우는 ‘글쎄요.’ 하며 웃기만 했다.
버스로 다 함께 움직였다.
구단의 기념품점을 털어 온 것처럼 푸짐한 선물을 준비했고, 스태프 중 한 명이 함께 움직였다.
이게 어째서 일이 너무 커진 느낌이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갑자기 중단하기도 어려웠다.
병원으로 들어서자 정지우를 발견한 병원 관계자, 혹은 내원한 이들이 한쪽으로 물러서며 박수를 쳐 주었다.
보도가 벌써 된 건가? 아니면 병원에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걸까?
“나는 영원히 Ji를 응원할 거야!”
10대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다부지게 외치며 다가와 하이파이브를 건네기도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릴리의 병실로 걸어가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때앵.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병실 복도를 걸어간 다음이었다.
병실 반을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침대가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머리 쪽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누워 있던 릴리가 창으로 시선을 주었다.
여러 개의 기계가 릴리를 지키고 있어서인지 팔을 들지 못했지만, 작은 눈이 팔을 뻗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정지우를 반기는 느낌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정지우는 김지훈, 데이지와 메기에게 짧게 눈인사를 한 후에 침대로 다가섰다.
“Ji.”
고맙다.
그 힘든 수술을 견디고, 이렇게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
“어때?”
“아파.”
수술을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답인 거다.
그런데 듣는 순간에 웃음이 나왔다.
정지우가 잠시 돌아보았을 때 김지훈과 데이지, 메기의 얼굴에 올라와 있는 것은 희망이었다.
“잘 견뎠어. 잘 견뎌 줘서 정말 고마워.”
릴리의 입 끝이 살짝 움직여 미소를 그려 냈다.
“참, 밖에 유니온 시티의 동료들이 와 있어!”
정지우를 따라 릴리가 창으로 시선을 돌린 직후였다.
“우리는 릴리를 사랑해! 얼른 일어나서 우리를 지켜 줘!”
동료들이 양손 엄지를 위로 들어 보이며, 다 함께 약속했던 말을 건넸다.
릴리가 행복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일어난 첫날이니까 이만 갈게. 엄마한테 동료들이 준비해 온 선물 전해 줄 테니까 나중에 열어 봐. 유니온 시티 기념품점에 있는 상품들인 거 같던데.”
“Ji.”
침대에서 몸을 드는 정지우를 릴리가 불렀다.
“또 와 줄 거지?”
“당연하죠, 공주님!”
정지우는 릴리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닦아 준 후에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그런 다음, 김지훈에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내일 오전에 출발합니다.”
김지훈이 손을 내밀어 정지우와 악수를 나눴다.
“좋은 결과를 얻어서 기쁜 마음으로 갑니다.”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눈 정지우는 데이지, 메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휴게실로 잠시 가죠.”
자리를 옮겨 우선 동료들에게, 다음으로 마틴 감독과 메기를 개인적으로 소개했다.
마틴은 먼저 구단의 직원을 불렀다. 그런 다음에 입을 열었다.
“유니온 시티 구단은 릴리를 정식 마스코트로 임명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릴리의 법적 보호자인 메기가 허락한다면 말입니다.”
메기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정지우와 마틴, 데이지를 번갈아 보았다.
“릴리와 관련된 상품을 만들 계획입니다.”
“릴리와 관련된 상품이요?”
“그렇습니다. 유니폼부터, 우리 구단이 만드는 모든 상품에 릴리를 담을 예정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이 직원과 함께 구단 변호사를 보내겠습니다. 아! 제작에 동의하시면 판매액과는 별도로, 매년 소정의 금액을 지급하게 됩니다.”
메기가 입을 삐죽이며 정지우에게 팔을 벌렸다.
“Ji! 우린 너무 많이 받았어! 고맙다는 말밖에…….”
“릴리가 행운을 주어서 가능했던 일이에요. 나와 우리 팀은 앞으로도 릴리가 주는 행운이 필요하구요.”
메기의 뒤에서 데이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금요일은 훈련이 없다.
릴리를 만나고 온 것 외에는 일이 없었는데, 영국과 한국의 스포츠 매체들이 정지우의 인터뷰로 시끌시끌했다.
그뿐이면 좀 나았을 텐데, 한국 의료진에 대한 놀라움이 덧붙여져서 기사는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박용근은 전화기를 들었다.
[이봐, 박 감독! 어쩌면 이 타이밍에 어린 소녀를 구한 정지우 기사가 터지냔 말이야! 그 덕분에 자네나 지우를 씹으려던 댓글들이 싹 자취를 감춰 버렸다니까!]
“의료진에 대한 취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됐어! 된 거야! 조 부회장부터 한승관까지 전부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기사까지 냈는데, 뭘! 푸하하! 허 회장이 인터뷰한 거 봤어?]
“인터뷰? 아니!”
박용근이 컴퓨터를 힐끔 보았는데 굳이 찾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예선을 통과하게 되면 그동안 잘못된 관행을 청산하는 의미에서라도 반드시 사직서를 수리하겠다고 했다니까!]
김문호가 얼마나 속 시원해하는지 전화기를 통해 생생하게 들렸다.
“이렇게까지 해 놓고 경기를 망치면 그 책임을 전부 자네가 감당해야 해. 더구나 나는 영국에 있을 거 아닌가.”
[이봐, 박 감독.]
김문호는 각오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나직한 음성을 듣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 그동안 참 못나게 살았잖아. 동대문 1번, 2번 개답게 한 번쯤은 물기라도 해 보자. 그리고 어떤 책임을 지게 되든, 나 자네 원망 절대 안 한다. 대신…….]
김문호가 잠시 뜸을 들였다.
[축구 용품은 내가 할 가게에서 좀 사 주라.]
박용근은 흐느끼는 것처럼 웃고 말았다.
[지우 녀석, 잘 컸다. 잘 키웠어. 그러니 이번엔 우리 세대가 맡아서 치울 건 치워 주자고.]
“알았어. 건강 챙기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박용근은 한숨을 내쉰 후에 책상에 놓인 자료를 집어 들었다.
내일 있을 토트넘과의 3라운드 경기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영국 오후 2시, 한국은 밤 11시에 레드 블레이트에서 열리는 토트넘과의 홈 경기였다.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토트넘은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바탕으로 그 어떤 팀보다 빠르고, 도전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팀이다.
2라운드까지 무실점 승리를 거머쥔 유니온 시티와 개막전에서 맨유에게 0 대 1, 2라운드에서 스토크시티와 2 대 2로 비긴 토트넘의 대결이었다.
성적만 놓고 보면 유니온 시티가 훨씬 강해 보이지만, 토트넘이 상대해 왔던 팀들이 강팀인 것을 고려하면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개막전과 2라운드 경기에서 상처받은 토트넘은, 오늘 유니온 시티전에서 반드시 승리를 거머쥐겠다고 인터뷰했을 정도로 독한 각오였다.
지난 경기와 마찬가지로 신준석은 선발, 박상민은 서브로 이름을 올려놓았다.
정지우가 몸을 풀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나섰을 때, 토트넘 원정 팬들이 부르는 열광적인 응원가가 레드 블레이트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이라는 귀에 익은 노래에서 중간을 바꾼 ‘When the spurs go marching in’이라는 응원가였다.
맨유와 리버풀은 ‘the saints’대신에 ‘the reds’를 넣어 부르기도 해서 영국 축구 팀들이 애용하는 응원가이기도 했다.
신준석은 그럭저럭 나았는데 박상민은 아직도 엄청난 응원가와 함성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박용근이 오늘 같은 경기에 박상민을 선발로 내세우지 않은 이유가 혹시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정지우는 얀센과 함께 골대를 향해 걸었다.
그동안 토트넘의 원정 팬들이 부르는 응원가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서 지금은 걷는 속도와 거의 비슷했다. 조금 지나면 아마 달리는 속도만큼이나 빠른 응원가로 변할 거다.
박용근이 벤치에, 전은주는 그 바로 위 관중석에서 신윤희와 함께 있다.
릴리가 깨어났고, 결과도 희망적이다.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감사한 날이었다.
얀센과 골대에 도착한 정지우는 좌우로 몸을 비틀며 레드 블레이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행복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저 어딘가에 있을 어머니에게.
그래서 저 하늘에서라도 이제는 미소 지으며 안심할 수 있었으면 싶었고, 정지우에게 미안해하던 마음을 내려놓았으면 하고 바랐다.
“후!”
이제는 공을 주고받을 시간이었다.
얀센이 공을 집어서 정지우의 왼편으로 가볍게 던져 주었다.
무실점 우승을 위한 세 번째 경기다.
해낼 거다.
상대가 아무리 빠르고 강한 팀이라도, 내가 맡은 골대를 지켜 낼 거다.
정지우는 각오를 다지며 얀센이 던져 주는 공을 받았다.
협회의 부회장부터 이사진 전원 사직서 제출, 정지우의 선행에 관한 기사, 박용근이 나선다면 다시 국가대표를 하겠다는 인터뷰까지. 거기에 박용근과 한국인 선수 4명이 있는 팀이 프리미어리그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거였다.
한국에서 중계하는 유니온 시티의 3라운드 경기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유니온 시티와 토트넘, 토트넘과 유니온 시티의 영국 프리미어리그 3라운드 경기입니다. 먼저 선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캐스터의 말이 나오는 도중에 화면에 유니온 시티의 포메이션과 선수 명단이 올라왔다.
『유니온 시티는 익숙한 4-2-3-1의 포메이션입니다. 가장 앞에 레믹, 그 뒤로 꼼빠니, 맥슨, 데니.』
앵커가 선수를 소개할 때마다 화면에 해당 선수들이 돌아서며 뒷짐을 지는 모습이 나왔다.
『이어서 데이빗, 카알이 섰고, 그 뒤 포백으로 스웰던, 라파엘, 무둔바, 그리고 우리 신준석 선수, 마지막으로 골키퍼에 정지우 선수입니다.』
정지우가 돌아서서 뒷짐을 지는 장면이 이어졌다.
『토트넘은 오늘 4-5-1의 포메이션입니다.』
『유니온 시티의 허리가 굉장히 강하거든요. 오늘 토트넘은 미드필드에 다섯 명의 선수를 배치해서 중원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이네요.』
『토트넘, 최전방에 케인, 그 뒤로 뎀벨레, 다이어, 라멜라, 메이슨, 샤들리의 다섯 선수를 배치했습니다. 이어서 포백에 워커, 알데르베이렐드, 베르통언, 데이비스, 골키퍼 장갑은 1번 요리스가 끼었습니다.』
선수를 소개할 때마다 해당 선수들이 돌아선 뒤에 뒷짐을 지는 모습이 이어졌다.
『토트넘은 오늘 경기에서 반드시 승점 3점을 가져가고 싶을 겁니다. 양 팀 모두 허리가 무척 강하고, 역습을 이용한 득점이 많다는 점에서 오늘 경기는 허리에서 승부가 날 확률이 높아요.』
『정지우 선수가 현재까지 무실점으로 선방하고 있습니다. 지난 영국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시즌을 무실점으로 막아 내고 싶다고 했는데, 오늘 과연 토트넘의 젊은 선수들을 상대로도 무실점을 기록할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이번 시즌 토트넘은 무척 강합니다. 유니온 시티가 이번 시즌에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오늘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할 겁니다.』
화면이 벤치에 있는 마틴과 박용근을 보여 주었다.
『박용근 감독, 오늘도 벤치에서 마틴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저희는 잠시 후에 다시 경기를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프리미어리그의 로고가 나온 뒤에 광고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