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거야. (3)
규정에 맞게 모자와 소독복,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한 정지우와 메기는 데이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지금부터 이틀간은 그레이트 써전 팀이 직접 릴리를 지킬 거예요.”
의사란 참으로 힘겹고 존경스러운 직업인 게 분명했다.
13시간의 수술을 마쳤음에도 릴리의 침대 곁에 김지훈과 이경석이 서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저들은 릴리와 알던 사이가 아니다.
르완다의 그 힘겨웠을 아이들 역시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을 거다. 그런데도 의사라는 직업이 가진 무게를 이겨 내기 위해 전쟁터 한가운데로 달려갔었고, 지금은 이렇게 릴리 옆을 지키고 있는 거다.
혈액과 링거액, 그리고 알기 어려운 장치들이 릴리의 가냘픈 몸에 주렁주렁 달려서 아직은 방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메기가 입을 틀어막으며 릴리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손을 매만졌다.
“혈압, 소변량, 심장박동, 호흡, 전부 기대치 이상입니다. 출혈이 멈추는 것은 이틀 정도 걸리기 때문에 지켜봐야 합니다. 의식이 돌아오는 것은 내일쯤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생명을 지키는 남자, 무한한 삶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메기의 남은 생을 저주와 좌절에 빠지지 않게 지켜 주는 남자.
이 남자가 어머니를 돌봐 주었다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메기, 미안하지만 이제는 의료진에게 맡기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에요.”
13시간을 수술방에서 함께 움직였던 데이지 역시 완전히 지친 얼굴이었다.
“나도 릴리 옆에 있을 거예요. 최선을 다할게요. 그러니 지금은 우릴 믿어요.”
메기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리기 전이었다.
정지우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김지훈이 웃으며 비슷하게 답례를 건네 왔다.
중환자실을 나온 다음이었다.
데이지를 메기가 힘껏 안았다.
“고마워, 닥터 데이지.”
메기를 커다랗게 안아 준 데이지의 눈이 맑게 웃고 있었다.
이 의사는 참 많이 사람을 설레게 한다.
힘겨운 상황에서 그려 내는 저 맑은 미소와 릴리를 위해 흘리던 눈물, 그리고 경기장에서 보여 주었던 환한 웃음으로 말이다.
메기와 인사를 마친 데이지가 정지우에게 손을 뻗었다.
위로해 주고 싶었고, 그녀의 수고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좀 더 꼭 안았다.
약품 냄새, 메마른 수술복의 건조한 냄새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수고했어요. 오늘 당신 정말 굉장했어요. 고마워요.”
괜찮다. 레몬처럼 상큼한 향이 아니어도, 광고에서 나는 장미꽃 같은 향내가 아니어도.
릴리를, 한 생명을, 그리고 메기의 남은 삶을 구하기 위해 이런 냄새를 풍겨야 하는 거라면.
“오늘 함께해 줘서 고마웠어요.”
그녀는 왜 이렇게 안아 주는지를 아는 사람처럼, 위로받고 싶었던 사람처럼 정지우의 등을 안았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힘겨웠던 오늘을 기대 왔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내일 올게요.”
데이지가 고개를 들어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병원 천장의 조명이 그녀의 눈빛 속에서 별보다 더 반짝였다.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온전히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감정을 말로 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지우를 올려다보는 데이지의 눈빛이 가슴에 담겼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데이지 꽃, 향기처럼.
***
아무래도 잔디 상태가 부족하고, 선수들의 플레이 역시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이정렬! 동료가 어디 있는지를 먼저 봐!”
박용근의 고함이 이정렬의 귀를 파고들었다.
“헉헉! 헉헉!”
“뛰어! 돌아서 수비해야지! 네가 놓친 공이 실점을 만들게 그냥 둘 참이냐!”
박용근이 꽁해서 저럴 사람은 아니다. 그것만은 분명하게 믿는다. 그래서 남았다. 그러나 리저브 팀에서의 훈련이 시작된 이후로, 박용근은 이정렬을 아예 미운 오리 대하듯 꾸짖고 있었다.
“매티! 왼쪽으로!”
박용근은 이제 짧은 지시쯤은 영어로 외친다.
삐이이익!
그는 15분에 한 번씩 선수들을 소집해서 전술판을 이용해 움직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코치! 그때 동료가 골대 앞에 없었습니다.”
서양 선수들은 자유롭게 질문을 던졌는데 박용근은 그때마다 막히는 법도 없었다.
“시간을 벌지, 바로 슈팅을 할지는 공을 잡은 너의 판단에 따른다. 그렇지만 조금 전처럼 그 두 가지 선택을 놓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프로 선수로 실격이다.”
유정호가 박용근의 답을 빠르게 영어로 전달해 주었다.
“반대편에서 이정렬이 달릴 때, 페널티 라인을 타고 공을 넘겨줬어야 했다. 그 뒤로 두 명이 더 뛰고 있었지.”
무섭다. 박용근은.
지난 15분간을 모두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상황을 하나씩, 그리고 선수 한명 한명의 움직임과 위치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이러니 리저브 팀 선수들이 박용근을 떠받드는 것은 물론이고, 존경한다는 말을 대놓고 꺼내 드는 게 아니겠나.
물론 박용근의 가르침에 대한 존경이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 리저브 팀의 훈련장에 다른 팀의 스카우터들이 수시로 나타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주목받는 선수가 된다는 것.
오전에는 지겨울 정도로 기본기를 익히게 하고, 그때 부족한 점들에 대한 족집게 훈련을 병행한다.
점심을 먹고 나서 잠시 쉰 뒤에, 오후에는 양 팀으로 나뉘어 연습 경기를 가졌다.
“리듬을 가져. 빠르게 달리기만 해서는 너희가 가진 재능을 완전하게 뿜어내기 어렵다. 매티!”
“얍, 코치!”
“직선으로 달릴 때 너는 강하다. 거기에 낮은 중거리 슈팅을 날릴 수만 있다면, 넌 당장 1군에 올라가도 최고의 선수가 될 거다.”
매티가 칭찬의 두 배쯤 되는 기쁨을 눈에 담았다.
“휴드! 골대를 파고들어! 슈팅에 실패해도 괜찮아. 자신을 가져. 제대로 걸렸을 때 너의 슈팅은 최고다. 자신 있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팀과 우리를 응원해 주는 관중을 위해.”
휴드는 다부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 축구라고 다 이기적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각진 턱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선수가 소심해서, 혹은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두려워해서 슈팅을 주저한다.
“움직여!”
박용근이 손뼉을 치며 선수들을 일으키자 관중석이 바빠졌다.
유니온 시티와 마틴 감독의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5명의 비디오 촬영 기사, 그리고 3명의 데이터 기록원, 마지막으로 2명의 기술위원까지.
저들이 오늘 연습 경기가 끝나면, 심지어 경기 중에 침을 몇 번 뱉었는지 알 정도로 꼼꼼한 데이터를 넘겨준다.
“라잇 나우! 런! 런! 파이브 세컨드! 포! 쓰리! 투!”
박용근이 뚝딱거리는 영어로 고함을 지르고, 초를 거꾸로 세었다.
매티가 중앙선에서 직선으로 달린 다음, 반대편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함께 뛰고 있는 이정렬을 향해 공을 찔러 주었다.
투욱!
공을 잡은 이정렬이 슈팅을 할 것처럼 모션을 취한 다음이었다.
달려드는 수비수를 살짝 제친 그는 페널티 라인 바깥으로 공을 흘렸다.
와라락! 퍼어어엉!
휴드가 뛰어들면서 강력하게 슈팅을 날렸다.
철렁!
짝짝짝짝짝짝!
리저브 팀의 훈련이었다. 그런데도 워낙 환상적인 플레이여서, 관중석의 스태프들과 뜨문뜨문 앉아 구경하던 관중들이 일제히 박수로 선수들을 격려했다. 몇 명은 ‘굉장해!’라고 고함까지 질렀다.
“Lee! 멋진 어시스트였어!”
휴드가 이정렬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면서 환하게 웃어 주었다.
훈련이라도 골은 골이다.
천천히 뛰어가 휴드의 머리를 툭 쳐 준 이정렬의 눈에 매티가 들어왔다.
이정렬은 매티의 뒤통수를 툭 쳐 주었다.
보상받은 듯한 표정으로 뛰어가는 녀석을 보며 이정렬은 모처럼 축구가 재미있었다.
프리미어리그 3라운드는 토트넘과의 홈 경기였다.
두 경기를 마친 현재 유니온 시티가 골 득실로 프리미어리그 1위였다.
물론 일회성일 수 있지만, 전에 없이 방송과 스포츠 매체들의 취재가 집중되어서 에이미와 구단 관계자들이 행복한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박용근과 그의 제자 4명이 한 팀에 있는 거였다.
한국에서 온 방송과 신문사들의 인터뷰 요청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목요일 오전 훈련을 마친 정지우는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갔다.
금요일은 휴식을 주는 관례에 따라서 선발 명단이 붙었다.
이정렬이 아예 명단에서 빠진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오늘도 병원에 갈 거지?”
“응.”
앞에 앉은 신준석의 질문에 정지우가 짧게 답을 했다.
김지훈과 동료 의사들, 그리고 데이지가 잠을 포기한 사람처럼 지켜보고 있었는데 릴리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꾸만 어머니를 찾게 된다.
도와달라고, 혹시 릴리가 그 근처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면 어머니가 돌려보내 달라고.
정지우가 음식을 입에 넣은 직후였다.
“Ji!”
데이빗과 라파엘, 무둔바가 식판을 들고 다가와 정지우를 둘러싸듯 앉았다.
“오늘 병원에 갈 때 함께 가도 될까?”
“아직 의식이 없어.”
“그러니까 가서 기운을 줘야지.”
릴리를 찾는 일은 정지우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이걸 굳이 그러지 말라고 말릴 권한은 없다.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일 때, 이번에는 클락과 에이미가 함께 식당으로 들어왔다.
설마 인터뷰 요청을 하려고?
정지우의 시선을 받은 에이미가 피하는 것처럼 뒤를 돌아본 곳에서 마틴 감독까지 들어서고 있었다.
세 사람은 곧바로 정지우를 향해 다가왔다.
“식사 중에 미안한데, 곤란한 일이 생겼어.”
이야기는 마틴이 꺼냈다.
정지우와 한 식탁에 있는 동료들은 물론이고, 식당 안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한국에서 온 의사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자네가 릴리의 병원비를 모두 부담한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졌다. 릴리의 모친이 방송 인터뷰에서 말했고, 병원 측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감출 수도 없게 됐다.”
병원비 때문인지 동료들이 놀라는 눈으로 정지우를 바라보는 앞이었다.
“기쁜 소식, 반가운 소식, 언짢은 소식 중 어느 것을 먼저 듣겠나?”
어지간하면 식사 중에는 절대 이러지 않을 마틴이다. 그리고 이적을 하겠다고까지 말했는데 곤란한 표정으로 에이미가 온 것도 그렇고.
“인터뷰를 하란 말입니까?”
“언짢은 소식을 선택하는군.”
마틴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에 바로 말을 이었다.
“영국의 메이저 방송국이라 쥬피터 회장도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이번만 협조해 주면 안 될까? 아! 에이미는 분명하게 자네의 뜻을 나와 쥬피터 회장에게 말해 줬었네.”
“반가운 소식은 뭡니까?”
냅킨으로 입을 닦은 정지우가 의자에서 몸을 돌려 마틴을 보았는데, 다른 동료들도 비슷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릴리의 수술비와 앞으로 들어가는 치료비를 모두 구단이 지급하기로 했네.”
“예에-!”
짝짝짝짝! 휘이익!
하여간 여기 놈들은 이런 거 정말 잘한다.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
“구단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잖나. 우리 팀의 공식적인 마스코트가 될 수도 있으니 이런 건 못 이기는 척 넘어가!”
마틴이 전에 없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과 말로 제안을 권하고 나섰다.
“혹시 알아? 자네가 언젠가 우리 팀의 레전드가 되어서 내 자리에 섰을 때, 주름이 자글자글한 릴리가 마스코트로 관중석에 있을지.”
정지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릴리가 떠올라서였다.
“이런!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해 주어야겠군.”
마틴이 산타클로스를 흉내 내는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병원에서 연락이 왔었다. 우리의 마스코트 릴리가 깨어났다고 하더군!”
뭐? 뭐라고?
정지우가 순간 멍해서 마틴을 바라본 다음이었다.
“예에에에에에-!”
휘이익! 휘익!
함성과 휘파람 소리가 식당을 메웠고, 여기저기서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Ji! 정말 잘됐다! 우리 마스코트가 돌아온 모양이야!”
데이빗이 내민 손을 맞잡은 정지우가 그와 오른쪽 어깨를 부딪치자, 동료들이 일제히 다가와서 마치 골 세레머니를 하듯 정지우를 둘러쌌다.
“어때? 우리 모두 마스코트를 위로해 주러 움직여 볼까?”
“감독님! 오늘 너무 멋있는 거 아닙니까?”
“데이빗! 이런 날도 있어야 나에 대한 평가가 좀 긍정적으로 바뀌지 않겠나? 이래 봬도 내가 프리미어리그 1위 팀의 감독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정지우에게 다가온 마틴이 손을 내밀었다.
꽈악!
그의 손을 잡고 오른쪽 어깨를 다독일 때 이상하게 한숨이 커다랗게 나왔다.
잘됐다. 정말 잘된 거다.
고마워요,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자! 그러니 인터뷰를 해 주자고! 와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식사를 할 10분 정도 내가 그들을 상대하지. 어때?”
마틴이 선수들 앞에서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것을 함부로 거절하기는 어렵다.
정지우가 픽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켜보던 에이미가 직장을 다시 얻은 얼굴을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