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69화 (169/262)

제5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거야. (2)

릴리가 긴장을 풀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정지우 선수랑 친하다고 들었는데 맞아?”

김지훈이 뜻밖에도 정지우의 이름을 들고 나왔다.

“Ji는 늘 내게 용기를 줘요. 그리고 내가 유니온 시티의 마스코트라고 했어요.”

정지우의 이야기가 나오자 릴리의 말문이 열렸다.

방 안에 있는 의사와 스태프, 릴리,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메기까지 모두 정지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렇구나. 우리는 영국 축구를 볼 기회가 없었어. 대신 정지우 선수가 브라질과 하는 경기를 짧게 본 적은 있지.”

“Ji가 그때도 대단했나요?”

김지훈이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정지우 선수가 하늘을 날아서 공을 막는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었지.”

“맞아요! 다들 그래요! Ji의 플레이에는 감동이 있어요!”

“멋진 말이네. 릴리는 정지우 선수의 경기를 매주 볼 수 있는 거지? 이렇게 만날 수도 있고.”

김지훈이 부럽다는 투로 말을 건넨 다음이었다.

“오늘 수술을 잘 견뎌 내고 나면 유니온 시티의 모든 경기에 릴리가 갈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우리가 잘할 수 있도록 행운을 좀 나누어 줄래?”

“내가요?”

“그럼. 유니온 시티에 주었던 행운이라면 우리에게도 커다란 도움이 될 거야.”

릴리가 메기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해야 행운을 나눠 줄 수 있을지를 묻는 얼굴이었다.

“선생님께 물어볼까?”

메기의 답을 들은 릴리가 당연하게 김지훈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천사가 안아 주면 되지.”

“그거면 돼요?”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작은 몸이다.

작은 릴리가 생명을 원하는 것처럼 의사 가운을 입은 김지훈의 목을 안았다.

“고마워. 최선을 다할게.”

정지우는 김지훈과 뒤에 있는 의사들을 살펴보았다.

긴장해 있던 릴리가 지금은 오히려 김지훈의 등을 손바닥으로 다독여 주고 있었다.

마치 기운을 전해 주겠다는 것처럼.

릴리가 시선을 힐끔 들었을 때였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애교 부리는 딸을 이기지 못해 억지로 안는 것처럼 신현수가 움직여 릴리와 허그를 나누었다.

이어서 손일석, 이경석, 윤서연, 고경아의 순서로 릴리를 안았고, 체온을 느꼈다.

“고마워. 덕분에 오늘 수술은 정말 잘될 것 같아. 그럼 잠시 뒤에 보자.”

김지훈이 몸을 일으켰고, 데이지를 포함한 의료진들이 그를 따라 병실을 나섰다.

“Ji!”

릴리가 정지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지우가 다가가자, 와락 릴리가 달려들었다.

메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정지우는 릴리를 들어 올려 가슴에 안았다.

릴리의 팔에 연결된 링거줄이 아직은 병실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듯이 흔들렸다.

“Ji, 마미에게 들었어.”

“뭘?”

정지우의 목을 꼭 끌어안은 자세라서 릴리의 턱이 왼쪽 어깨에 걸려 있었다.

“이 수술 받을 수 있는 거, 굉장히 많은 돈이 드는데 그거, 전부 Ji가 내준 거라고.”

메기가 울컥한 감정을 감추려는 것처럼 침대 벽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확실히 정서가 한국과는 다르다. 어린아이에게도 자신이 받은 도움의 크기나 종류가 어떤 것인지를 이 정도까지 알려 준다.

정지우는 릴리의 작은 등을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릴리가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서브 선수로 있든가, 아니면 지금쯤 한국에 가서 응원단들을 상대로 팝콘을 팔고 있었을 거야.”

“Ji가?”

릴리가 고개를 들어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릴리는 행운의 마스코트인 거야. 원래는 나만 독차지하려고 했었는데, 동료들이 워낙 원해서 어쩔 수 없이 나눠 준 거지. 그리고 우리 팀은 이번 리그에서 무패를 기록하고 있고.”

“오늘 닥터들에게도 나눠 줬는데?”

“건강해지면 행운이 점점 강해지니까 걱정하지 마. 잘 견디고 다시 나를 지켜 줄 수 있지?”

“내가 Ji를 지켜 준다고?”

“릴리의 행운이 없으면 나는 하늘을 날 수 없어.”

잠시 정지우의 눈을 바라보던 릴리가 다시 목을 끌어안았다.

“기다려 줄 거지?”

“물론이지.”

“우리 마미를…….”

정지우는 가슴에 안겨 있던 릴리를 들어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엄마와 함께 기다릴 거야. 수술실을 분명하게 지켜 낼 거고. 릴리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지키는 동안, 릴리를 나쁘게 할 것들은 그 어떤 것도 못 들어가.”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았었나?

릴리가 정지우의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니 약속해 줘. 용기 잃지 않고 건강한 얼굴로 돌아와서 내게 행운을 주겠다고.”

“응.”

정지우의 목을 안아 준 릴리가 고개를 돌렸다.

메기가 다가와 릴리와 정지우를 함께 안았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랐다.

이번만큼은.

이 작은 몸이 전해 주는 체온이 제발 식지 않았으면 싶었다.

릴리를 눕힌 침대가 수술실로 움직였다.

정지우가 왼편, 메기가 오른편을 잡고 함께 걸었는데 뜻밖에도 릴리는 병실에서보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수술실의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여기 있을게.”

정지우가 릴리에게 인사를 건넸고,

“릴리! 엄마가 기다릴 거야!”

메기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릴리를 덮은 모포를 자꾸만 다독였다.

“들어갈게요.”

수술복을 입은 데이지가 단단한 얼굴로 정지우와 메기에게 말을 건넸다.

“마미! 건강하게 올게요.”

“그래! 그래, 우리 릴리!”

“Ji, 이제부터 나 Ji가 나서는 모든 경기를 보러 갈 거야.”

“마스코트가 지켜 주는 경기라면 올해 유니온 시티는 리그 우승이지!”

드르르르.

침대가 움직였다. 떨어지지 않는 릴리의 작은 눈망울을 담은 채로 말이다.

메기를 안고 다독일 때였다.

이번엔 수술복을 입은 김지훈이 복도를 걸어 수술실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정지우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주었다.

“림프샘을 타고 간과 대장, 위, 폐에 암세포들이 퍼져 있습니다. 그중 몇몇 부분은 혈관까지 침범을 해 혈관 우회술을 시행해야 합니다.”

한국말이었다.

“예상 수술 시간은 대략 13시간 정도 됩니다. 아이에게는 정말 힘든 시간일 겁니다. 릴리가 버틸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며 수술을 진행하겠습니다.”

병실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김지훈은 결승전에 나서는 선수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허드슨 박사에게 충분히 들었습니다.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몸을 돌린 김지훈이 메기에게 수술 예정 시간과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영어로 전했다.

수술실로 김지훈이 다가서자 문이 열렸다.

터널을 걸어서 그라운드로 나서는 동료의 어깨를 보는 느낌이었다.

정지우는 수술실이 내려다보이는 2층에 있었다.

도저히 지켜볼 자신이 없다던 메기는 문 바깥에서 기도로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신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릴리의 작은 몸에 많은 기계가 연결되었다.

윤서연이 릴리와 무언가 대화를 나눈 다음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잠에 빠진 것처럼 릴리가 눈을 감았다.

양손을 가슴 앞에 든 김지훈과 신현수가 들어와서 스태프가 끼워 주는 장갑을 착용하고 릴리의 좌우에 섰다.

의사들이 착용한 안경 사이에서 검고 작은 기계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성 마테오의 의사들이 가득한 2층의 방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벽 한쪽에 걸린 모니터가 릴리의 작은 가슴과 배를 보여 주었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정지우가 보기에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릴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어서 피할 길은 없었다. 그저 저 과정을 통해 릴리가 더는 병마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작은 몸이다.

그녀의 가슴과 배를 연 뒤, 김지훈과 신현수가 메스나 가위 같은 도구를 가져다가 연신 손을 움직였다.

“오우!”

지켜보던 의사들 사이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창을 통해서는 작은 릴리를 둘러싼 의사들과 스태프만 보인다.

정지우가 시선을 돌린 곳에서 의사들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손이 4개 달린 사람이거나, 아니라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로봇이 수술하는 것처럼, 모니터에 담긴 손은 단 한 번도 망설이거나 부딪치는 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팀, 그레이트 써전!”

누군가 감동한 것처럼 처음 듣는 명칭을 뱉어 냈는데, 의료계에서 저들을 가리킬 때 쓰는 명칭 같았다.

잘되고 있는 건가? 그런 거겠지?

감탄사와 저들을 부르는 명칭이 튀어나올 정도라면 분명 그런 의미일 거였다.

정지우가 안도의 숨을 내쉴 때였다.

“우-!”

결정적인 득점 기회를 놓친 경기장처럼 놀라움과 아쉬움이 한순간에 2층의 방을 가득 메웠다.

뭐지?

시선을 돌린 모니터에 피가 흥건했다.

정지우는 수술대를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김지훈이 다른 의사들을 향해 무언가를 지시한 뒤에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의학을 몰라도 위기 상황이었다.

수술대 주변의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피를 빨아들이는 관이 릴리의 몸으로 향했다.

신현수가 물러나고, 손일석이 김지훈의 맞은편에 섰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홈팀이 위기에 몰렸을 때 관중들의 느낌이 이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지켜 달라는 외침을! 물러서면 안 된다는 고함을 질러야 할 것만 같았다.

의사들이 반은 모니터로, 나머지 반은 수술 장면이 내려다보이는 창으로 모여 있었다.

“그레이트(굉장해)!”

정지우의 옆에 있던 의사 한 명이 혼잣말을 꺼내 든 다음이었다.

손일석이 물러나고 다시 신현수가 수술대에 붙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김지훈은 수술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태프가 이마에 난 땀을 닦아 주는 것조차 그의 눈빛과 행동에 맞춘 것처럼 보였다.

윤서연이 무언가를 알려 주자 김지훈이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벌써 2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저토록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오!”

짝짝짝짝짝짝짝짝!

그때 정지우가 있는 방에서 박수가 울려 나왔다.

의사들은 알아본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곧바로 김지훈이 뒤로 물러나고, 이번에는 그 자리에 이경석이 들어섰다.

궁금해하는 정지우의 시선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설명을 들어 봐야 하겠지만 간, 담도의 수술이 완벽하게 끝났어요. 저 정도의 수술을 이렇게 빠르게 끝낼 수 있다니.”

옆에 있던 의사 한 명이 상황을 설명해 주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수술에 걸리는 시간이 짧을수록 살아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집니다. 혈관에 있는 암세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내에 수습했어요.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요.”

뒤로 물러난 김지훈이 시선을 들었다.

마치 정지우를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맡은 수술에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암으로부터 생명을 지켜 내겠다는 각오가 그의 시선에 가득 담겨 있었다.

12시간이 지루한 일주일처럼 흘렀다.

지켜보는 정지우마저 진이 빠질 정도인데 수술을 진행하는 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긴, 샌드위치와 주스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며 지켜보는 의사들도 대단한 건 마찬가지였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몸을 풀었다.

좁은 공간에서 한자리에 꼬박 앉아 있는 것이 위험할 수 있어서였다.

정지우는 메기에게 움직였다.

그녀는 떨치지 못한 불안을 눈에 가득 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함부로 하기는 어려웠다.

“시간이…….”

“13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까 얼마 남지 않았어요.”

“잘되겠지?”

“나를 깨워 주었을 만큼 강한 아이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메기를 위로하고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복도 저 멀리에서 수술실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메기!”

정지우는 메기를 부른 뒤에 빠르게 수술실 앞으로 움직였다.

김지훈이었다.

허름한 수술복을 입은 그가 마스크를 벗으며 정지우와 메기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상태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 정도라면 수술로 기대했던 것들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에!”

다리가 풀린 것처럼 기울어지는 메기의 어깨를 정지우가 얼른 안아 주었다.

“강한 아이였습니다. 오래 기억에 남을 정도로요.”

메기에게 말을 건넨 김지훈이 시선을 들어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축구를 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삽니다. 대신 병실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는 듣습니다. 월드컵에서 승리하고 나서 환자들의 상태가 좋아진다면 믿겠습니까?”

“그런 생각은 못해 봤습니다. 그리고 오늘 모습을 보며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을 하고서도 김지훈은 보기 좋은 미소를 눈가에 달았다.

“릴리는 내일쯤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김지훈이 말을 마칠 때 수술실에서 다른 의사들과 스태프들이 걸어 나왔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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