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거야. (1)
날짜가 번쩍번쩍 지나갔다.
화요일이었다.
골키퍼 코치와 예정된 훈련을 소화한 정지우가 샤워를 마쳤을 때였다.
클락이 들어와 성 마테오 병원에서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연락 바람. 닥터 데이지.]
릴리와 관련된 연락이 분명했다.
수술은 준비할 것들이 많았고, 수술팀의 일정을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2주 안에나 가능하다고 했었다.
릴리의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진 걸까?
정지우는 클락과 함께 스태프 사무실로 들어가 메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닥터 데이지, 부탁합니다. 유니온 시티의 정지우라고 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대기음이 울리는 동안, 커다란 경기를 앞둔 것처럼 조금씩 긴장감이 올라왔다.
잠시 뒤였다.
[여보세요?]
“데이지, 나예요, 정지우. 무슨 일이에요?”
[Ji, 수술팀이 오늘 밤 늦게 도착해요. 국경없는 의사회의 닥터 허드슨이 간곡하게 매달려서 중간 일정을 완전히 뺄 수 있었어요!]
데이지는 전에 없이 흥분한 음성이었다.
[내일 새벽에 프레젠테이션을 끝내고, 오전 8시에 릴리를 만난 후에 바로 수술하기로 했어요! 이렇게 빨리 될 줄 몰랐어요!]
“잘됐네요. 그럼 내일 오전에 병원으로 가면 되나요?”
[그래 줄 수 있어요? 릴리를 만나서 당신이 가진 용기를 나누어 주었으면 싶어요. 힘들겠지만, 부탁해요.]
“알았어요. 내일 보죠.”
[고마워요! 고마워요, Ji.]
전화를 끊자 사무실에 있던 스태프들이 눈치를 살폈다.
이런 걸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우리 마스코트가 내일 수술한답니다.”
대강의 내용을 알고 있던 스태프들이 정지우에게 양손 엄지를 들어 보였다.
“행운을 빈다고 전해 줘요!”
“오늘 밤과 내일 아침에 우리의 마스코트를 위해 기도할게요!”
그들이 건네는 반가움과 바람을 받아 들고 정지우는 클락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통화 내용을 박상민, 신준석에게 전해 주었다.
“우리도 같이 갈까?”
“말도 안 통하는데 괜찮겠냐?”
“그렇긴 한데, 그때 날 보던 그 착한 눈이 자꾸 눈에 밟힌다.”
“급하게 잡힌 거라, 릴리가 안정을 취하기 어려울 테니까 일단 내일 아침은 나 혼자 가 볼게. 상황 봐서 수술 끝나면 함께 가자.”
박상민과 신준석이 순순히 정지우의 뜻을 받아들였다.
“장 기자란 양반, 대단하더라. 인터뷰 기사 뒤에 연달아 기사를 세 개나 올렸어. 어제 올린 거 봤어?”
아직 집에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정지우는 신준석에게 시선을 주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바로 기사를 올렸나 봐. 마지막 건 아예 사퇴서를 축구 팬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써 놨던데, 댓글들 반응이 어마어마해. 내가 조동익 부회장이었으면 살맛이 안 날 것 같더라구.”
정지우는 장진모를 떠올렸다.
올 때도 황당하게 날아오더니, 가는 것도 아침에 잠깐 옆 동네 가듯 짧은 인사 한마디 전한 것이 전부였다.
“괜찮은 사람 같지?”
“응.”
신준석의 질문에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웠다. 그에 대한 평가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
장진모는 피로에 찌든 얼굴로 부장의 방으로 들어왔다.
“야! 오면 온다고 말을 해야지!”
“아, 피곤해요!”
그는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요란하게 1인용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소파의 팔걸이에 등의 중간을 거쳐서 머리를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야! 너, 이번 기사 정말 최고다!”
“반응은요?”
“워낙 좋았어!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날 만큼.”
부장이 무언가를 감춘 얼굴로 장진모의 맞은편으로 움직였다.
“뭔데요?”
바닥을 향해 몸이 휘어 있던 장진모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네가 쓴 기사 때문에 독자들 반응이 죽여주거든! 그러니까 데스크에서 이번 협회 건은 아예 원하는 대로 진행해 보란다.”
“난 또 뭐라고. 그래 놓고 또 허양수 건드리면 내리랄 거 아녜요?”
부장이 씨익 웃는 것을 본 장진모가 혹시 하는 얼굴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래, 인마! 허양수까지 해 보라는 오더다.”
“우와!”
장진모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 허하수 의장이나 허상수 쪽이 무언가 쫓기는 느낌이거든. 정치부가 팽팽 돌아간다. 아무래도 그쪽에 뭔 일이 있는 것 같다.”
“그 두 사람이?”
부장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동익을 좀 더 밀어붙여도 된다는 거지요?”
“기사는 잠깐 기다려 봐. 뉴스에서 까기 시작했거든.”
“뉴스에서요?”
“그렇다니까. 너 영국에 있는 동안 저녁 뉴스에 두 번이나 나왔어. 이제부터 한번 지켜보자고.”
장진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뭐야? 영국에서 나 모르게 또 해 온 게 있어? 너는 역시 타고난 기자인 거야!”
“형, 이거 비행기 표 끊은 건데 얼른 결재나 좀 해 줘요.”
그는 꾸깃꾸깃해진 카드 영수증을 꺼내 부장에게 디밀었다.
***
허양수의 날카로운 눈빛에 조동익의 어깨가 서열에서 밀린 길거리 고양이의 머리처럼 아래로 늘어졌다.
“초빙하려던 요하네스 감독까지 취소해 놓고 나더러 방법을 찾으란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전 같으면 벌써 화를 터트렸을 허양수가 어쩐 일인지 이를 악물어 가며 분을 누르고 있었다.
“도대체 한승관이란 인간은 역할이 뭡니까? 외국인 감독을 초빙해서 한국 축구에 대해 조언해 달라고 한다더니, 뭐요? 그 조언 내용이 박용근 감독과 정지우 같은 선수를 국가대표로 써야 한다는 거라구요?”
“면목 없습니다.”
“흥.”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허양수의 코웃음이 바로 튀어나왔다.
“그거 막았으니까 망정이지, 방송이나 기자회견에 나가서 그대로 떠들었으면 우리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며칠 내로 그 내용이 보도될 수도 있습니다.”
말을 하다가 갑자기 분통이 터져 나온 모양이었다.
허양수가 이를 악문 채 솟구치는 분노를 참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번쩍 허양수가 고개를 들었는데, 그의 눈에 새파랗게 독이 올라 있었다.
“도대체 당신이 하는 일이 뭐야! 가뜩이나 어른들 문제로 속이 뒤집히는데! 외국인 감독을 초빙한다고 돈을 가져다가! 뭐! 박용근, 정지우가 필요하다고! 그럼 그 돈을 주기 전에 무슨 말을 할지 확인도 안 했었다는 거야!”
비웃을 때는 차라리 화를 냈으면 싶었는데, 막상 불 뿜는 용가리처럼 악을 써 대는 허양수를 보자 조동익은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건 무슨! 일만 생기면 돈을 가져다가! 돈 쓸 일을 만드는 기계야! 기계! 또 중간에서 얼마나 처잡순 거야!”
“이번엔 그런 일 없었습니다.”
“그럼 그전엔 처먹었다는 거 아냐!”
아차 했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다.
“후우.”
그나마 허양수가 분을 누르려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 것이 조동익에게 유일한 위로였다.
“다른 말 하지 맙시다. 내용을 말할 수는 없는데, 지금 윗분들이 아주 난처한 상황에 놓였거든. 그러니 군말 말고 내일 당신부터 그 한승관이라는 인간, 그리고 나머지 떨거지들, 다 사직서 제출하세요.”
번쩍!
무어라 입도 떼지 못하게 허양수가 조동익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사직서 제출한 직후에 기자들에게 내용 알려 주세요. 월드컵 예선 통과하면 물러난다는 의지로 이미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렇게요.”
답을 못하는 조동익을 보며 허양수는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4점 차로 이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 만약 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사표를 수리하는 게 나요! 나! 내가 아무렴 그걸 수리하겠습니까?”
수리할 거면서!
만약 내기를 하라면 조동익은 허양수가 사표를 수리하는 데 무조건 백만 원 건다.
“대답 안 할 겁니까? 내 손으로 해고시켜 드려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동익이 서글프게 답을 했다.
***
병원에 올라간 정지우는 곧바로 릴리의 병실로 향했다.
오전 8시였다.
예전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나면서 간호사들과 함께 수술실로 침대를 끌고 갈 때의 그 두려움이 새삼 떠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몸을 돌렸을 때였다.
뜻밖에도 수술복 차림의 스태프들,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릴리의 병실 앞에 엄청나게 서 있어서 창으로 다가가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릴리를 만나야 했다.
정지우를 알아본 성 마테오 병원의 스태프들이 몸을 움직여 지나갈 길을 만들어 주었다.
먼저 병실 창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릴리의 침대 주변에 동양인 의사 5명과 동양인 스태프 3명, 그리고 데이지와 처음 보는 나이 든 서양인 의사까지, 병실 역시 의사와 스태프들로 꽉 차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릴리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메기가 마주 앉은 의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투박하게 생긴 의사가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메기와 릴리가 비슷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을 등지고 있어서 메기와 릴리는 정지우를 보지 못했다.
대신 데이지가 얼핏 시선을 들었다가 정지우를 보았다.
그녀는 옆에 있던 나이 든 서양 의사에게 귓속말을 건넨 뒤에 함께 밖으로 나왔다.
“Ji! 어서 와요. 이분이 오늘 수술팀을 초대해 준 닥터 허드슨이에요. 닥터 허드슨, 이 수술을 가능하게 해 준 유니온 시티의 정지우 선수예요.”
“만나서 반갑소. 허드슨이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정지우입니다. 오늘 애써 주신 점 감사합니다.”
허드슨이 안을 힐끔 돌아본 뒤에 정지우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국경없는 의사회로 봉사할 때 뵈었던 분들입니다. 저분들은 지금도 르완다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엄청난 수술들을 감당했고, 그때의 인연으로 이번 초대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의사의 실력이나 명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정지우였다. 그래서 그저 실력이 뛰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전부였다.
“솔직히 저분들이 시간을 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못했었어요! 그런데 닥터 허드슨이 부탁해서 특별히 시간을 맞출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데이지는 정지우와 조금은 달라 보였다.
“우리 병원 모든 의사들이 참관할 정도예요. 릴리를 저분들에게 맡길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얼굴이었다.
“미스터 정, 괜찮다면 안에 들어가서 대화를 들어도 됩니다. 그래서 릴리가 불안을 떨쳐 내고 안정을 취할 수 있다면 수술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서 정지우는 순순히 병실로 들어갔다.
메기와 릴리가 손을 흔들었고, 의사들과 스태프들이 시선을 주었는데, ‘인사는 대화가 끝난 다음에 하시죠.’ 하는 허드슨의 말에 시선들이 다시 릴리를 향했다.
“그래서 우리는 릴리의 도움이 필요해. 우리를 믿고 용기를 잃지 않아야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거든. 최선을 다할게.”
투박하게 생긴 의사가 편안한 표정으로 릴리에게 말을 건넸다.
진심은 통한다.
옆에서 지켜보는 정지우에게도 침대 맞은편에서 릴리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의사의 진심이 전해졌다.
저 진심이 제발 릴리에게도 전해졌으면 싶었다.
“우리 팀을 소개해도 될까?”
정지우를 힐끔 본 릴리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 있는 분이 닥터 신현수, 위라고 여기 이 부분에 있는 장기 수술에서 세계 최고인 분이야.”
신현수라고 불린 의사는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그가 릴리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온몸에 자부심이 넘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그것들이 그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지우는 병실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전부 한국에서 온 의사들인가? 그렇다고 치기엔 영어가 능숙한데?
“이분은 대장 파트의 세계적인 써전, 닥터 이경석.”
“최선을 다할게, 릴리.”
“고맙습니다.”
침대 맞은편에서 두 명을 소개한 의사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이분은 릴리의 몸에 있는 혈관들을 책임질 닥터, 손일석. 미국 대통령의 혈관 수술에 참여한 분이기도 하지.”
“하이!”
손일석이라는 의사는 어딘가 장난기가 있었다.
“저분은 릴리를 잠들게 할 마법사, 닥터 윤서연.”
“함께 잘 이겨 내자!”
윤서연이라는 여의사가 맑은 미소로 릴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술을 도와줄 간호사 파트 책임자, 고경아.”
“안녕?”
고경아란 간호사가 부드러운 미소로 릴리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나는 이분들과 릴리의 수술을 함께할 닥터 김지훈이야. 약속할게. 최선을 다할 거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거야. 릴리가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김지훈이 나직한 음성에 진심을 담아 릴리에게 뜻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