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67화 (167/262)

제4장. 마틴의 권한이어서. (3)

이정렬과 그의 부친, 모친이 소파에 앉았다.

곤란한 건 신준석과 그의 가족들이었다.

집에 가겠다고 일어서자니 이정렬 가족을 따돌리는 것 같고, 앉아 있자니 망신스러운 꼴을 지켜봐야 해서 그렇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아 왔고, 어차피 내일 함께 한국으로 출발해야 하는 사이다.

눈빛만 봐도 바라는 것들을 대강 알아보는 사이란 뜻이다.

신준석의 부친이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버님, 저는 조금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그러게.”

유정호가 남기로 했고,

“그럼 조심해서 가시고, 나중에 뵙겠습니다.”

박용근, 전은주와 인사를 나눈 신준석의 가족들이 집을 나섰다.

어떻게 하지? 밖으로 나갈까?

정지우의 생각을 알 법도 한데, 박용근은 이정렬의 부친에게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했다. 그래서 정지우와 박상민의 맞은편에 이정렬과 그의 부친, 모친이 앉았다.

“감독님, 저 2군에 가겠습니다.”

고개를 떨군 채 말을 건넨 이정렬을 박용근이 무거운 얼굴로 보았다.

“너를 2군에 보낸 것은 마틴 감독의 지시다.”

이정렬의 부친이 볼을 씰룩했는데, 박용근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투로 이정렬을 향해 말을 이었다.

“유니온 시티 소속이라면 당연하게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다. 설마 네가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닐 테고, 이런 말을 내게 하는 게 바라는 게 있어서냐?”

“그게 아니라, 감독님! 원하면 저희 이적할 수 있는데, 이 아이가 감독님 밑에 남아 있겠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 정렬이가요.”

결국, 참을 수 없었다는 것처럼 이정렬의 부친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면서 박용근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버님, 정렬이가 그렇게 해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적시키세요.”

정말이지 뜻밖의 대꾸였고, 그래서 이정렬의 부친도 조금은 놀라는 눈치였다.

“제가 한국에서 데려온 제자이기 때문에 정렬이만 챙겨 줄 거란 기대를 하시는 거라면, 차라리 계속 경기에서 뛸 수 있는 팀으로 이적하는 게 정렬이에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화가 난 건가?

정지우가 보기에 박용근은 화가 났거나 서운한 감정으로 이정렬의 부친을 대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감독님 믿고 먼 영국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말이 됩니까!”

“테스트를 거쳐서 1군에 뽑혔던 정렬이가 왜 리저브 팀으로 가게 되었는지 정말 모르십니까?”

박용근의 음성이 착 가라앉자 이정렬의 부친도 주춤하는 눈치였다.

“어릴 때부터 지켜보셨을 테니까 잘 아시겠지만, 정렬이는 밸런스가 무너졌습니다.”

“그러니까 더 경기에 나가게 해 주셔야지요.”

“저 상태에서 계속 선발로 경기에 내보내는 건 정렬이를 아예 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여름이 올 때까지 내내 뛰면서 잡아 놓았던 리듬을 전부 잃어버렸으니까요.”

“고작 한 게임으로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박용근이 입가를 움직이며 쓰게 웃었다. 그런 다음,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마틴 감독을 비롯한 유니온 팀의 1군 스태프 전체가 결정한 일을 제가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정 억울하다면 정렬이가 감독 면담을 요청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감독님께선 우리 정렬이의 앞길을 보장해 주시지 못하겠다는 말씀이시죠?”

“그걸 장담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허허허.”

이정렬의 부친이 웃는 것으로 대화가 끝났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이적하겠습니다.”

이건 정말 막가자는 거였다.

그때 이정렬이 얼굴을 들었는데, 보고 있던 정지우의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독한 눈을 하고 있었다.

“봐, 이놈아! 평생 2군에 있을래! 감독님도 어쩌지 못하신다잖아! 그러니 이럴 때는 차라리 이적해서, 그 팀에서 제대로 이름값 얻은 다음에 다시 유니온으로 오더라도 와!”

숨이 턱턱 막히는 모습이었다.

“아버지! 가세요!”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가시라구요! 그냥 나 하고 싶은 축구하게 두시라구요- 오!”

‘어?’ 하는 순간이었다. 고함을 지른 이정렬이 그대로 탁자에 머리를 내리찍었다.

휘익!

이정렬을 향해 정지우가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콰자작!

정지우의 손에 머리가 걸려서 속도가 줄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크게 다쳤을 정도로 섬뜩한 순간이기도 했다.

탁자를 덮었던 유리를 깨트린 이정렬이 자잘한 유리 조각이 박힌 이마를 들었다.

주르륵!

녀석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단박에 코와 입, 턱을 적셨고, 앞가슴과 다리로 줄줄 흘러내렸다.

정지우와 박상민이 움직였고, 전은주와 유정호가 빠르게 주방으로 움직였다.

“아버지, 저 감독님 밑이 아니면 축구 안 해요. 지우가 아니었으면 지난번 유니온 시티 선수들과 싸웠을 때 벌써 왕따 되었을 거구요.”

말을 할 때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입 앞에서 튀었다.

“정렬아, 잠깐만 말하지 말고 있어. 조금만 있어 봐.”

정지우가 내민 손목을 이정렬이 꽉 쥐었다.

“지우야, 미안하다. 정말 잘못했다. 나 기회 한 번만 더 주라.”

“알았으니까 상처부터 닦자.”

“너, 골키퍼잖아. 유리 때문에 손 다치면 안 되는 거잖아.”

이정렬은 울고 있었다.

“내가 미쳤었나 봐. 우리 늘 말하던 첼시에 골 넣고, 연예인 달려와서 전화번호 주고 하니까 눈이 뒤집혔었나 봐. 미안하다. 경기 망쳐서 미안하고, 나 대신 싸움까지 했는데 너 망신 준 것도 미안하고.”

“너 이놈 자식! 지금 애비 앞에서 뭐하는 짓이냐!”

“이제 좀 제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두세요! 축구 제가 하는 거잖아요! 아버지가 키워 주셨다고 아버지가 축구하는 건 아니잖아요! 제발 좀요!”

전은주와 유정호가 물 적신 수건으로 유리를 닦아 주었고, 박상민이 뒤에서 안는 것처럼 이정렬의 이마를 꼭 눌러 주었다.

털썩.

이정렬의 부친이 멍한 얼굴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미안해, 지우야.”

눈에 벌겋게 눈물이 올라온 동기가 건넨 반성이다.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유리가 박혔던 자리에 두꺼운 거즈를 붙인 이정렬의 뒤통수를 정지우가 툭 하고 때렸다.

“야! 환자야, 나!”

“확!”

이정렬이 웃다가 버럭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미친놈. 피 흘릴 땐 당당하더니 이젠 아프냐?”

“아깐 정말 미쳐 버리겠더라구. 감독님께 사과드리기로 하고 와서 엉뚱한 소리 하시니까.”

“너,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이정렬이 쑥스럽게 웃었다.

“오늘 자고 갈 거다. 어휴! 아까 불쑥 내지르긴 했는데 집에 가기 무섭다.”

“하여간 같이 있게 돼서 다행이다, 인마!”

박상민이 커다란 팔로 이정렬의 목을 꽉 안았을 때였다.

“나 또 설치면 그땐 정말 두들겨서라도 좀 말려 주라.”

이정렬이 정지우를 향해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딴소리하려고?”

“아냐. 몰랐으니까 들이받았지, 두 번 하라면 절대 못하겠더라. 또 이러느니 너한테 얻어맞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나저나 너, 진짜 빠르다.”

“골키퍼는 아무나 하냐?”

모처럼 이정렬과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정렬의 부친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독님,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내일 들어가십니까?”

“그래야지요. 당분간 저놈 꼴도 보기 싫을 것 같습니다.”

구두를 신은 이정렬의 부친이 현관까지 따라나선 박용근을 힘겹게 보았다. 그러나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인 뒤에 현관문을 나섰다.

부친과 모친이 나선 다음이었다.

“당신 괜찮아?”

“뭐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박용근을 전은주가 걱정스럽게 보았다.

“마음 무거운 얼굴이니까 그렇지.”

“이건 가족들 문제야. 정렬이가 저렇게 나오는 것도, 또 아버님이 욕심 부리는 것도. 나는 지켜보면서 배우겠다는 녀석들과 내 축구를 펼치는 게 내 할 일이고.”

“기운 내, 여보.”

박용근이 팔을 뻗어서 전은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우 녀석은 우리에게 불만 없을까?”

“당신은? 우리 지우는 그럴 리가 없어요.”

“자신하지 말자. 아까 정렬이도 그렇고. 녀석들이 훌쩍 컸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만큼 우리도 나이 들었고.”

전은주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화들짝 박용근의 팔에서 몸을 뺐다.

화장실에서 나온 유정호가 뻘쭘한 얼굴로 뒤쪽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

김문호 국가대표 감독과 송인수 기술위원은 아침부터 혼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친구가 영국에 가더니 머리를 다 쓰네!”

무음으로 만들어 놓은 전화기를 슬쩍 들여다본 김문호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가 이렇게 웃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고소하기는 합니다.”

“기술위원이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됩니까?”

“국가대표 감독님과 다를 게 없지요.”

이번엔 두 사람이 껄껄거리며 웃어 댔다.

아침에 보도된 인터뷰 덕분에 오늘 인터넷 포털 검색어 순위의 가장 위를 박용근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영국 생활에 관한 질문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장진모 기자의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이 기가 막혔다.

장진모 : 협회에서 부회장 이하 사퇴까지 걸고 마지막 예선전을 치러 달라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용근 : 월드컵 예선까지 김문호 감독이 맡았습니다. 그런데도 고작 한 경기를 마친 그를 대신해 감독이 바뀐다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망신스러운 모습이 됩니다.

장진모 : 그렇다면 협회의 제안을 거절하시는 건가요?

박용근 : 모든 것을 걸고 내놓은 제안을 일방적으로 외면하기는 어렵습니다. 김문호 감독이 치르는 경기에 제가 협조하는 형태로 의논해 보겠습니다.

장진모 : 김문호 감독님과 친분이 두터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용근 : 이전부터 안부를 전하던 사이였습니다.

장진모 : 그렇다면 협회의 제안에 대해서 의논이 있으셨습니까?

박용근 : 그렇습니다. 다만, 제가 축구 팬들에게 실망을 끼쳐 드릴까 두렵고, 혹시나 협회 부회장님 이하 임원진의 사퇴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일까 봐 그것도 걸립니다.

장진모 : 협회의 결단은 단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대로 예선에 탈락해도 후폭풍이 클 텐데요, 그럴 바엔 최선을 다해서 예선을 통과한 뒤에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박용근 : 굳이 그분들이 사퇴하셔야 하는 건가요?

장진모 : 협회의 이름을 걸고 발표했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분들도 예선을 통과한 뒤에 명예롭게 사퇴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을 겁니다.

박용근 : 그 정도야 번복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장진모 : 그렇게 된다면 협회에서 사퇴라는 말을 꺼낸 것 자체가 예선 탈락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수로 보이게 됩니다. 국민들과 축구 팬들을 기만하는 행동이 될 텐데요.

박용근 : 그렇군요. 예선을 통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분들이 절대 사퇴를 번복할 분들이 아니라서 그 점이 더 마음에 걸립니다.

장진모 : 오늘 인터뷰 감사합니다. 성원해 주시는 국민들께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 주시죠.

박용근 : 늦은 시간까지 응원해 주신 축구 팬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경기를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터뷰 끝에 장진모는 박용근 감독이 굳이 독이 든 성배를 김문호와 나눠 마실 이유가 없다고 적었다. 그리고 협회가 좀 더 분명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도 했다.

댓글 반응은 협회가 사퇴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쪽과 왜 구정물에 손을 담그려 하느냐, 그냥 영국에서 활약하라는 쪽으로 나뉘었다.

***

일요일 오전은 회복 훈련이었다.

정지우는 스태프의 지시대로 몸을 풀었다.

이정렬이 리저브 팀으로 옮겼는데 동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훈련을 마친 정지우는 박상민, 신준석과 함께 식당으로 움직였다.

“아버지랑 어머니 가셨냐?”

“응. 그런데 어제 장 기자님 집에 안 들어왔지?”

“어떻게 알았어? 너한테 갔었냐?”

“밤늦게 매형한테 전화했더라. 이거저거 묻고 하던데 밖인 것 같더라구?”

신준석은 아예 대놓고 유정호를 매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렬이는 훈련 잘하고 있겠지?”

“그래야지. 그런데 그놈 오늘부터 혼자잖아.”

정지우가 시선을 들었을 때, ‘식사는 우리 집에서 하기로 했어.’ 하고 신준석이 답을 했다.

“참, 상민아. 다음 경기 영상, 저녁 먹고 볼 거냐?”

“응. 왜?”

“심심해서 그런데, 오늘은 우리 집에서 보자.”

“그럴 거면 네가 와. 지우랑 같이 보면 되지.”

“그래?”

눈치를 살피는 신준석을 향해 정지우가 픽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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