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66화 (166/262)

제4장. 마틴의 권한이어서. (2)

경기가 끝났다.

레드 블레이트로 돌아오는 길에서 앤디 킴은 마틴의 잔인한 통보를 이정렬에게 전했다.

회복 훈련에 참석할 것 없이 다음 날부터 리저브 팀으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영국 사람들이라고 왜 인정이 없겠느냐마는, 실력이 모든 것을 증명하는 프로 세계에서 이정렬은 오늘 너무 큰 실망을 안겨 주었고, 그에 대해 분명한 조치를 내린 것.

단지 그것뿐이었고, 또 그게 전부였다.

레드 블레이트에서 내린 정지우와 동기들은 함께 밴을 타고 움직였다.

내일부터 이정렬은 이 차를 타지 못한다.

움직이는 방향이 다르고, 일정 또한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일 가족들이 서울로 출발한다.

원래는 차 안에서 동기들끼리 떠들기 딱 좋았고,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서 얼굴도 봐야 했는데, 이 분위기로 모여 봐야 우중충할 게 뻔해서 약속을 정하기도 어려웠다.

아무튼, 침묵 속에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기 5분쯤 전이었다.

“지우야.”

가장 뒤에 앉아 있던 이정렬이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지우를 찾았다.

“오늘 내 경기에 점수를 매기면 얼마나 줄 수 있냐?”

정지우를 따라 박상민과 신준석까지 이정렬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줘? 아니면 듣기 좋게 말해 줘?”

“솔직히 말해 주라.”

“내가 보기엔 30점.”

박상민과 신준석이 놀란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는데, 그런다고 평가가 달라질 건 없었다.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어?”

“나중에 영상을 봐. 공은 죄다 놓치고, 위치, 순간적인 판단,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고, 마지막에 비겁한 짓까지. 솔직히 레믹이 그렇게 뛰었으면 라커룸에서 벌써 구석에 처박았을 거다.”

이정렬은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여긴 낙인찍히면 끝이다. 내가 너라면 이적 알아보겠다.”

“야! 그건 좀 심하다.”

신준석이 이정렬을 감싸 달라는 투로 건넨 말에도 정지우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마틴은 쉽게 결정을 바꾸지 않아. 아마 이번 시즌에 어지간한 부상자가 아니라면 넌 1군으로 못 올라올 거다. 그러니까 전에 말한 곳으로 이적을 알아봐.”

정지우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정렬이 좀 더 이를 단단하게 깨물었다.

그때 밴이 신준석과 이정렬의 집 앞에 멈췄다.

“들어가라.”

“너는 내가 이적하길 바라는 거지?”

이정렬의 질문에 정지우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놈이 어쩌다가 한순간에 이렇게까지 돼 버린 거지?

“이정렬, 내가 너를 너무 믿었었나 보다. 그래서 네가 전화기 끌어안고 있을 때, 훈련 설렁설렁할 때 말 안 했었는데, 그게 지금은 너한테 미안하다.”

묵묵하게 듣고 있는 이정렬을 향해 정지우는 말을 이었다.

“프로 선수고, 스물여섯씩 먹어서 내가 너한테 욕하고 인상 쓰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차라리 이건 아닌데 싶었을 때 너를 데려가서 두들겨 버릴 걸 그랬다.”

다독여 줄 거라고 기대했었을까?

“그래도 네놈이 걱정돼서, 자존심 안 상하게 하려고, 그래서 겨우 했던 말이 너, 밤에 스마트폰 보지 말라고 했던 거다.”

“그거야…….”

정지우의 눈을 본 이정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넌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가졌잖아.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축구 선수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

이런 경기를 할 줄 알았다면, 이놈을 정말 아끼던 마음이었다면 미리 욕이라도 한마디 해 줄걸.

“커뮤니티 실드에서 골 넣던 이정렬이 오늘은 어디 갔어? 예능 프로 나가서 헬렐레하며 여자 연예인에 정신 팔린 멍청이 말고, 내 동기 이정렬!”

밴이 멈춰 선 뒤부터 앤디 킴은 핸들을 꼭 잡은 채로 앞만 보고 있었다. 그는 정지우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봐서인지 아예 동상처럼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전국대회에서 골 넣던 내 동기! 골을 놓치면 분해서 펄쩍펄쩍 뛰던 이정렬!”

이정렬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부천의 미친개가 눈이 뒤집히면 어떤 모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렬아, 부탁이다. 이적을 하든, 리저브를 가든, 그건 네 맘대로 하는데, 축구를 하려면 너다운 축구를 해. 내가 아는 이정렬처럼. 그리고 미리 말해 주지 못했던 건 미안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 다음 이정렬이 시선을 떨구었고,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몸을 일으켰다.

신준석이 먼저 내려야 의자를 접고 이정렬이 내린다.

“나도 들어갈게.”

앞서 내린 신준석을 따라 밴에서 내릴 때까지 이정렬은 입을 열지 않았다.

밴의 문이 닫히자, 뒤를 돌아보았던 앤디 킴이 정지우의 집을 향해 차를 움직였다.

신준석과 이정렬은 멀어져 가는 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팀에서 나한테 기회가 또 있을까?”

“미친놈! 너 지우 모르냐? 저렇게 몰아붙여도 네가 하겠다고만 하면 끝까지 감싸 주는 게 지우 아니냐! 지난번에 데니랑 싸웠을 때 기억 안 나?”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하겠냐?”

아직도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는 이정렬을 신준석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렬아, 너 축구는 계속하고 싶냐?”

너무 자존심 상하는 질문이었을까?

이정렬의 볼이 움찔했다.

“포르투갈에서 흔들릴 때 내가 꼭 지금 너 같았다. 난 운이 좋아서 바로 이곳으로 온 거고. 나라면 리저브 간다. 네가 감독님과 지우, 상민이, 나와 축구하고 싶은 거라면.”

“감독님이 나, 받아 주실까?”

“너 왜 그래? 아무렴 감독님이 뒷생각 없이 너나 나를 그냥 오라고 하셨겠냐고?”

신준석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을 쏟아 냈다.

“상민이 발전한 것 봤냐? 나도 내일부터는 저녁마다 상민이 붙들고 영상 볼 거다. 그렇게 해도 나는 너나 상민이처럼 관중들을 뜨겁게 만들기 어려워. 수비수니까. 그런데 넌 아니잖아.”

말을 듣고 있던 이정렬이 커다랗게 숨을 토해 냈다.

무언가 후련한 얼굴이었다.

“골 넣고 나서 들리던 이곳 관중들의 그 엄청난 함성을 기억해 봐. 넌 공격수니까 관중들이 주는 함성의 주인공이 될 수 있잖아! 커뮤니티 실드처럼.”

신준석의 말이 끝났을 때, 이정렬은 쓰다 달다 말없이 몸을 돌렸다.

집으로 향해서 걷고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동안, 이정렬의 귓가에 계속해서 ‘내 동기 이정렬!’ 하는 정지우의 말이 맴돌았다.

이정렬의 부친과 모친은 이미 돌아와서 거실에 있었다.

“얼굴이 왜 그러냐?”

“내일부터 리저브 팀으로 가래요.”

이정렬의 부친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이적하자.”

“아버지.”

방 앞에 가방을 내려놓은 이정렬이 소파에 앉은 부친을 바라보았다.

“저 2군으로 갈 거예요.”

“뭐?”

“리저브 팀으로 내려갈 거라구요.”

“미쳤냐? 미쳤어? 영국까지 와서! 오라는 팀이 있는데! 네가 왜 리저브 팀에 가!”

“축구, 아버지가 하시는 거예요? 제가 해요! 제가 하는 거니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좀 하게 두세요!”

“이놈이! 병신같이 공 차 놓고 어디서 말대꾸야!”

이정렬의 부친이 벌떡 일어나는 것을 모친이 ‘왜 이래요!’ 하며 붙들었다.

“내가 어디 나 잘되자고 이러는 거냐! 그저 너 잘되는 거 보겠다고 영국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는데! 뭐? 뭐가 어쩌고 어째?”

“여보! 그만 좀 해! 정렬이, 넌 일단 들어가! 얼른!”

이정렬이 방으로 들어가고도 부친은 쉽게 소파에 앉지 못했다.

“에이! 이놈아! 대가리가 큰 거 같으니까 세상이 만만하지! 넌 아직 아무것도 몰라! 축구란 게 그냥 공만 잘 찬다고 되는 세상이 아니란 말이다!”

“여보! 그만 좀 하라니까!”

“TV에도 나가고, 상황 봐서 이적도 하고! 연봉 6천 받던 네가 커뮤니티 실드에서 골 넣고, 몇억 받는 선수가 된 게 누구 덕이냐!”

이정렬의 부친이 고래고래 악을 쓸 때였다.

이정렬이 방문을 확 열고 나섰다.

“아버지! 영국 온 거! 연봉 늘어난 거! 감독님 덕분이잖아요!”

“뭐?”

“그러니까 리저브 팀에 가서 감독님 밑에서 있고 싶다구요! 저도 지우나 상민이처럼 제대로 해 보고 싶다구요!”

“오늘 네놈이 병신처럼 공 찬 게 나 때문이냐? 내가 있었어도 그건 넣었다!”

악을 쓰던 이정렬의 부친이 입을 다물었다.

이정렬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어서였다.

“알아요. 오늘 병신처럼 공 찼어요. 그러니까 다음번엔 좀 잘해 보고 싶어요. 전국대회에서 골 넣을 때처럼요.”

이정렬은 정말 바보처럼 울고 있었다.

“감독님이랑, 지우랑, 상민이랑, 준석이랑 공 차는 게 좋아서, 모처럼 재미있어서, 큰 경기에서 골도 넣고! 그게 좋았는데, 그럼 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바보처럼 엉뚱한 짓 했어요! 흐으! 흐아아!”

스물여섯이나 먹은 아들이 입을 쩍 벌리고 울고 있는 거였다.

“축구하면서 인터뷰도 하고! 연예인이 문자도 보내 주고! 그거에 홀려서 오늘 이랬다구요! 그러니까 아버지! 흐으! 나! 한 번만 더 감독님 밑에서! 지우랑, 상민이랑, 준석이랑 축구해 보고 싶어요! 흐아아!”

이정렬의 부친은 멍한 얼굴로 있었다.

“잘해 보고 싶어요! 아버지! 나 정말 잘해 보고 싶어요! 흐으으! 그러니까! 나! 그냥 좀 두세요! 1년만,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축구할게요! 제발요! 흐으으!”

털썩!

이정렬의 부친은 널브러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박용근은 저녁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왔다. 그는 평소처럼 그저 덤덤한 얼굴이었다.

“오셨어요?”

“그래. 오늘 수고들 많았다. 얼른 손만 씻고 나올게.”

“여보? 장 기자님은?”

“약속이 있다고 하던데?”

전은주가 준비한 저녁을 위해 박용근은 정말 겉옷만 벗고 식탁으로 나왔다.

이정렬이 경기를 엉망으로 치러서 리저브 팀으로 가게 된 일과, 영국 시간으로 자정이 넘어서 나갈 박용근의 인터뷰까지 있어서 식탁에 앉기가 뻑뻑한 느낌이었다.

“얼른 먹자.”

“예.”

식사가 시작되었다.

“상민이 너는 집에 전화드렸냐?”

“예. 어머니랑 통화했어요.”

같이 산다는 건 이런 거 아닐까?

함께 밥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이렇게 마주하고 삶의 무게를 함께 이겨 내는 것이 말이다.

“지우야.”

“예, 감독님.”

밥을 떠서 입에 넣은 정지우가 박용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까 관중석에 있던 아가씨, 누구냐?”

“예?”

전은주가 박용근과 정지우를 번갈아 보았는데, 이미 데이지를 눈여겨보았던 눈치였다.

“릴리가 입원해 있는 병원 의사예요.”

이번엔 박상민이 정지우의 표정을 살폈다.

“너만 괜찮다면 저녁 초대 한번 하면 어떠냐? 그때 릴리하고 인사도 하고?”

“그래! 나도 릴리랑 옆에 앉았을 때 인사하고 싶었었어.”

박용근의 말에 전은주가 맞장구를 치며 나섰다.

“아직 특별한 관계 아니에요.”

정지우의 표정을 본 전은주가 분위기에 맞지 않을 정도로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박용근을 보았다.

“릴리라는 우리 팀 마스코트 담당 의사라면서?”

“예.”

“그럼 우리가 식사에 초대하겠다는 게 무리는 아닌 거 같은데? 난 리저브 팀 감독에다가…….”

“감독님, 저는 병원에 가서 직접 한 번 봤어요. 지우랑 포옹도 하고 그러던데요?”

“야! 여기에선 그거 그냥 인사라니까!”

“여보! 지우 얼굴 빨개진 거지?”

“어머니까지 왜 그러세요?”

전은주의 농담에 넷이서 웃었다.

저녁을 그럭저럭 먹었고, 보약을 먹었으며, 이어서 홍삼을 입에 물었다.

축구로 사는 사람들이다.

한 번만 지면 기회를 잃는 토너먼트 경기가 아닌 리그를 뛰고 있는 데다, 승리를 이뤄 낸 날이었다.

이정렬의 일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건 또 녀석이 어떻게 대처하느냐를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지금은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정지우는 박상민과 소파에 앉아서 일요일에 있는 다른 팀들의 2라운드 경기 일정을 챙겼다.

앞으로 마주쳐야 할 팀들을 보는 일이다.

오전에 회복 훈련을 마치고 나서 집에 돌아와 그들의 경기를 보는 것은 반나절 훈련을 더 하는 것보다 도움 되는 중요한 일정이기도 했다.

방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박용근이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벨이 울렸고, 신준석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부록처럼 유정호가 들어왔다.

“감독님,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 일인데요. 어떻게? 내일 출발하십니까?”

“예. 그래서 이렇게 저녁 늦게 찾아뵈었습니다.”

이정렬의 일로 편치 않은 얼굴이었는데, 워낙에 유쾌함이 있는 가족이라서 그런지 그럭저럭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지우야, 아버지 너 믿고 간다?”

신준석의 부친이 정지우를 향해 다짐하듯 건넨 질문이었다.

“이 녀석이 엉뚱한 짓 하는 거 보면 나랑 여기 와서 고생하는 누나 생각해서 구석에 데려가 아예 패서 죽여 버려라.”

말투가 얼마나 과격하던지 듣고 있던 이들이 다들 웃었는데 신준석의 부친만은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믿고 가도 되지?”

“때리는 건 자신 없구요, 대신 제가 전화드릴게요. 그리고 누나랑 의논하구요.”

“그래! 그렇게 해 다오. 그럼 아버지가 날아와서 이놈을 아주……!”

“아버지는!”

“뭐, 이놈아!”

신준석 부친이 짐짓 신준석을 나무랄 때였다.

또다시 벨이 울렸다.

다들 들어올 이가 누군지 짐작한다.

그리고 유정호가 문을 열었을 때, 실제로 고개를 떨군 이정렬과 참담한 표정의 부친과 모친이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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