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65화 (165/262)

제4장. 마틴의 권한이어서. (1)

공은 이정렬의 머리끝을 스치듯 맞았다.

그래서 카알이 날린 높이보다 오히려 좀 더 튀어 오르다시피 해서 웨스트햄의 왼편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그 바람에 이정렬의 뒤쪽에서 높다랗게 솟구쳤던 레믹의 앞을 지나친 공은 웨스트햄의 골키퍼 아드리안의 품에 그대로 안기고 말았다.

바닥에 내려선 레믹이 달리던 탄력을 이기지 못해 아드리안의 앞까지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듯 멈춰 섰다.

『아드리안, 레믹의 어깨를 두드려 줍니다.』

『이정렬 선수, 오늘 골 운이 따르지 않네요. 점프는 나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공을 제대로 맞추질 못하네요.』

『유니온 시티! 결정적인 기회를 또 한 번 놓칩니다. 카메라가 이번엔 박용근 감독과 이정렬 선수를 자꾸 보여 주는데, 이것도 의미가 있을까요?』

『이정렬을 기용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박상민 선수가 몸을 풀고 있는데요?』

『필드 선수들은 대략 15분에서 20분 사이에 알아서 몸을 풉니다. 혼자 나와서 뛰는 게 아닌 것을 보면 교체 사인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웨스트햄의 골키퍼 아드리안이 길게 차 준 공이 중앙선 부근에 떨어졌고, 양 팀 선수들이 번갈아 머리로 받아서 배구처럼 상대 진영을 향해 보내고 있었다.

“나나나- 나! 나나나- 나! 헤이! 헤이! 헤이! 굿바이!”

정규 시간은 5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유니온 시티의 원정 응원단이 웨스트햄의 홈 관중들을 향해 자존심 상하는 응원가를 부르는 것이 그에 대한 명백한 증거였다.

중앙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골대 근처로 급하게 공이 날아오곤 했는데 정확도가 부족해서 라파엘과 무둔바를 뚫지는 못했다.

데니가 공을 잡아서 웨스트햄의 오른쪽을 파고드는 척하다가 다시 길게 뒤로 돌렸다.

카알이 공을 받아서 데이빗에게 넘겼고, 데이빗은 곧바로 꼼빠니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이럴 때 이정렬이 중심에 서서 레믹에게 공을 뿌려 주거나, 아니라면 왼쪽의 꼼빠니, 오른쪽의 데니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맞다.

게다가 이정렬은 스트라이커여서, 타이밍만 맞는다면 얼마든지 슈팅을 날려도 무방한 포지션이었다.

그런데도 동료들은 아예 이정렬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공을 돌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정렬을 중심으로 오가야 할 공이 오히려 중앙선을 빙 돌아 데이빗을 거쳐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지우는 굳은 얼굴로 중앙선 부근을 바라보았다.

이건 정말 위험한 거였다.

상대 팀이 이정렬을 마크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 주는 것과 같으니까.

실제로도 웨스트햄 선수들은 라인을 좀 더 올리며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는데, 이정렬은 그저 멀찍이 두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투우욱!

공은 뒤로 돌아 정지우에게까지 왔다.

웨스트햄 선수들이 숨 가쁘게 달려들고 있어서, 골대 앞에서 시간을 끄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정지우는 신준석에게 빠르게 공을 넘겨주었다.

『유니온 시티는 이렇게 경기를 마치려는 모양입니다! 신준석! 이정렬에게 공을 넘겨주었습니다!』

『중앙이 비었어요! 좀 더 들어가야죠! 가도 돼요!』

『이정렬! 드리블! 수비 셋! 공격 넷!』

『왼쪽을 봐야죠! 지금 줘야죠!』

『이정렬! 공을 한 번 툭 차고 달립니다! 이정렬!』

삐이이익!

이정렬이 커다랗게 떴다가 바닥에 엎어졌고, 주심이 곧바로 휘슬을 불었다.

삑! 삐이익! 삑!

일이 벌어졌다.

골키퍼 아드리안이 달려와 몸을 일으키는 이정렬의 가슴을 밀었고, 웨스트햄의 수비수들이 놈을 둘러싸고 어깨를 밀치거나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키며 뭐라고 지껄여 댔다.

멍청하고 비겁한 짓이었다.

솔직히 2점 차로 앞선 상황에서, 그것도 웨스트햄의 홈구장에서, 정규 시간을 거의 마친 상태에서 페널티킥을 얻기 위해 할리우드 액션을 취했다면 이건 뭐, 변명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문제는 동료들의 움직임이었다.

이 정도라면 이정렬을 감싸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유일하게 데니가 달려가서 이정렬의 앞을 막아서는 게 전부였다.

주심이 이정렬을 등 뒤에 놓고 서서 흥분한 웨스트햄 선수들을 향해 손바닥을 밖으로 밀어냈다.

『조금 무리한 것 같습니다. 느린 그림으로 봐서는 아예 접촉이 없었는데요.』

『웨스트햄의 리드 선수가 아예 손과 발을 뒤로 뺐는데요. 저 상태라면 그냥 치고 들어가는 게 훨씬 좋았을 텐데,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네요.』

웨스트햄의 선수들을 밀어낸 주심이 몸을 돌려 이정렬에게 옐로카드를 높게 들었다.

『이정렬 후반 44분에 경고를 받습니다.』

『경기가 끝나면 벤치에서 말이 있을 텐데요, 이정렬 선수는 좀 더 차분하게 플레이를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대기심이 추가 시간이 7분이라는 의미로 파란색 ‘7’ 자가 떠오른 보드를 높다랗게 들고 좌우로 보여 주었다.

『추가 시간이 7분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두 골,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유니온 시티 좀 더 집중해야 하구요, 이정렬 선수, 후반에 들어간 만큼 보다 많이 뛰어야 합니다.』

퍼어엉!

웨스트햄의 골키퍼가 기다랗게 찬 공이 중앙선을 훨씬 넘어와 무둔바가 서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터어엉!

무둔바가 머리로 공을 멀리 날려 보냈다.

데니가 공을 잡자 웨스트햄 선수 두 명이 곧바로 달려들었는데, 발에 걸린 공은 터치라인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삐이이익!

그리고 주심이 다시 휘슬을 불었다.

『유니온 시티! 선수 교체가 있습니다.』

『꼼빠니를 빼고 박상민 선수가 들어옵니다.』

『수비를 단단히 하겠다는 의도로 보이네요! 중앙에서 공을 간수하고 가능하다면 앞으로 뿌려 주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손을 위로 들어 손뼉을 쳐 가며 나가는 꼼빠니를 원정 관중들이 기립 박수로 응원해 주었다.

『오늘 활약이 좋았던 꼼빠니가 박상민과 교체합니다.』

박상민이 내민 손을 기분 좋게 쳐 준 꼼빠니가 터치라인을 빠져나갔다.

박상민이 달려들어 가는 동안, 마틴이 벤치로 움직인 꼼빠니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데니가 카알에게 공을 던져 준 다음 다시 받았다.

역시나 웨스트햄 선수들이 달려들었다.

이정렬이 달려가며 공을 달라고 신호했는데, 데니는 데이빗의 손짓에 따라 카알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카알이 데이빗에게, 데이빗은 바로 박상민에게 공을 주었다.

웨스트햄의 선수들이 단번에 박상민에게 달려들었다.

공을 받아 주기 위해 데이빗과 스웰던이 박상민에게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우와아- 아!”

원정 관중들이 느닷없이 함성을 질러 댔다.

『박상민! 웨스트햄의 텅 빈 왼쪽을 파고듭니다!』

라인을 올려서 중앙선 부근에 몰려 있던 웨스트햄 선수들 사이를 박상민이 달리고 있었다.

지금 막 들어온 선수답게 빠르고 강하게 달리는 박상민을 웨스트햄의 수비수들은 제대로 따라잡지 못했다.

저놈이 저 정도였나 할 정도로 기가 막힌 타이밍에 웨스트햄의 허를 찌르는 돌파였다.

“우와- 아!”

통쾌하다 못해 속이 후련한 박상민의 질주에 원정 관중들이 미친 사람들처럼 함성을 질러 댔다.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 라인을 따라 달리던 박상민이 슈팅을 날릴 것처럼 동작을 크게 잡았다.

와라락!

웨스트햄의 수비수 리드가 공이 날아올 방향으로 슬라이딩을 한 직후였다.

투욱!

박상민은 공을 발바닥으로 잡으며 그의 앞을 벗어났다.

“우와아아-!”

골키퍼와 일대일의 상황이었다.

슈팅 각이 좋지 않았지만 완벽한 슈팅 찬스여서, 지금 박상민이 슈팅을 날리는 것을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투우우욱!

그런데 박상민은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으로 공을 보내 주었다.

아드리안이 달려 나오기는 애매한 지점이어서, 그가 빠르게 골대 중앙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달려들던 레믹이 오른발 안쪽으로 공을 가볍게 밀었다.

투우욱!

아드리안이 오른손을 뻗어 봤으나 레믹이 워낙 가까이 있었고, 슈팅의 각도 역시 절묘해서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철렁!

“예에에에에에에-!”

레믹이 박상민을 검지로 가리키면서 달려와 목을 끌어안고는 오른팔을 높게 들었다.

『박상민! 교체돼서 들어와 첫 번째 터치를 어시스트로 만들어 냅니다! 두 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 박상민! 사실 조금 전의 장면에서는 직접 슈팅을 날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요!』

『각도가 좁았으니까요. 추가 시간에 나온 이번 추가 골은 웨스트햄의 추격 의지를 확실하게 꺾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팀들의 경기 결과를 봐야 하겠지만, 유니온 시티가 분명하게 프리미어리그 선두로 올라오겠는데요!』

TV 화면에서 박상민이 치고 들어가 리드를 제치고 공을 밀어 주는 장면과 레믹이 뛰어들어 골을 성공시키는 장면이 여러 각도에서 나왔다.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는 유니온 시티! 이번에 승격된 팀이라고 보기에는 엄청난 능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강팀들과의 경기가 남아 있어서 아직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오늘처럼 허리와 수비가 단단하면 이번 시즌에 충분히 좋은 성과를 기록하지 않을까 싶네요.』

『느린 그림을 보시면 레믹의 오른쪽에 이정렬이 있었거든요. 레믹이 공을 그냥 지나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해설자는 웃으며 답을 하지 않았다.

박상민의 어시스트에 이은 레믹의 골로 사실상 경기가 끝났다. 남은 시간 동안 웨스트햄이 계속해서 뻥뻥 공을 내지르며 달려들었지만, 역시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삐이이익! 삐익! 삐이익!

그리고 주심은 추가 시간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유니온 시티와 웨스트햄의 2라운드 경기를 종료시켰다.

“예에에에에-!”

원정 관중들이 커다랗게 함성을 질러 댔고,

쿵. 쿵. 쿵. 쿵. 쿵. 쿵.

“오오- 오! 오오- 오!”

자리에서 뛰어가며 승리를 축하했다.

정지우는 앞으로 걸어 나가며 라파엘, 무둔바, 신준석, 스웰던과 손을 맞잡고 등을 다독여 주었고, 이어서 웨스트햄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일부러 그랬던 건 아냐!”

웨스트햄의 파예가 다가와 멋쩍은 듯한 인사도 나눴다.

“알아! 다음번에는 좀 살살 다뤄 줘.”

파예가 웃으며 정지우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아드리안이 다가와 ‘멋진 경기였어!’라고 하며 손을 내밀었고, 이어서 거의 모든 웨스트햄 선수들이 유독 정지우를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웨스트햄 선수들에게서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인사를 마친 정지우는 머리 위로 손을 들어 박수를 치며 관중들 앞으로 나섰다.

어깨동무를 한 관중들이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로 자리에서 뛰며 함성을 지르고, 스태프와 선수들이 모두 모여서 박수를 치거나 비슷한 동작으로 관중들의 응원에 보답한다.

마틴과 박용근, 그 외의 스태프들과 서브 선수들까지 모두 나와 지금껏 그라운드를 지켰던 선수들과 함께 서 있었다.

정지우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 있을까?

어쩌면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선을 돌린 곳에서 데이지가 옆자리의 관중들과 어깨를 걸고서 뛰고 있었다.

데이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환하게 웃어 주었다.

잘했어요! 당신 정말 굉장했어요!

맑고 파란 바다에서 나온 해초처럼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그녀의 웃음을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고, 그래서 비슷하게 웃었다.

박용근과 전은주가 주는 칭찬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는데, 가슴을 꽉 차게 들어오는 그녀의 미소를 보자 더할 수 없는 보상을 받은 느낌이기도 했다.

“그 의사 아냐?”

신준석이 정지우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말 궁금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씨익.

이런 걸 일일이 답하고 싶지 않았다.

입을 열면 어쩐지 가슴을 가득 메운,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이 감정이 입구를 놓친 풍선에서 나오는 바람처럼 빠져나가 버릴 것 같아서였다.

시선을 들었을 때 전은주가 박수를 치는 모습도 들어왔다.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분!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박용근이 관중석의 저쪽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 몸을 돌려 가며 손을 들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정지우는 시선을 돌려 이정렬을 보았다.

저 멍청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마틴과 박용근이 정지우의 앞에서 관중석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판단은 저 두 사람의 몫이고, 결정은 마틴의 권한이어서 정지우가 끼어들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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