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63화 (163/262)

제3장. 급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2)

이정렬의 돌파는 동료들에게도 뜻밖이었다.

놀란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이정렬이 5미터쯤 달려 나간 다음이었다.

웨스트햄의 교체 선수 오비앙이 가로막았고, 8번 쿠야테가 달려들었다.

왼편에서 레믹이 공을 달라는 의미로 양손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달리고 있었는데, 이정렬은 주춤거리며 헛다리를 짚었다.

콰악!

웨스트햄의 쿠야테가 거칠게 이정렬의 어깨를 들이받으며 밀어내고는 공을 낚아챘다.

퍼어엉!

그러고는 대각선으로 빠져 있는 10번 자라테에게 빠르게 공을 찔러 주었다.

툭툭!

자라테는 정지우의 왼편을 타고 달려오다가 꼼빠니를 피해 오른쪽을 달리던 사코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퍼어엉!

사코가 공을 받자마자 정지우와 페널티 에어리어 중간을 향해 공을 띄웠다.

노블, 파예, 오비앙, 쿠야테가 골대 앞으로 달려들었고, 그들을 맞아 데이빗과 카알, 라파엘과 무둔바가 빠르게 움직였다.

휘이이익!

웨스트햄의 8번 쿠야테가 달려드는 탄력을 이용해 높다랗게 몸을 날렸다.

무둔바가 뒤늦게 따라붙었지만, 쿠야테의 머리가 골포스트보다 위로 올라가 있을 정도로 섬뜩한 점프였다.

“뒤편을 막아!”

데이빗의 고함 속에서 정지우는 자세를 낮추며 공을 노려보았다.

골키퍼는 어떤 순간에도 공의 궤적을 놓치면 안 된다.

막말로 공이 쿠야테의 어디에 맞느냐만 봐도 반은 막은 거다.

신준석이 달려드는 자라테를 따라붙고 있었다.

누군가가 쿠야테를 향해 날아오는 공을 잘라 들어와 헤더를 날리면 그건 답이 없다.

데이빗과 신준석, 카알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렇게 수비수들에게 위치를 잡으라고 악을 써 댔던 거였다.

터어엉!

쿠야테의 머리에 걸린 공이 정지우의 오른쪽을 파고들었다.

화아악!

정지우는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이아아!’

최선을 다해 오른쪽 어깨를 틀었고, 더할 수 없이 길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도 공은 정지우의 손끝을 한 뼘 이상 벗어나 있었다.

아닐 거야! 이건 너무 벗어났어!

털썩!

몸을 날린 정지우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우-!”

관중들의 탄식이 커다랗게 들렸고, 쿠야테가 상의를 뒤집어서 끝을 입에 물고 아쉬움을 씹고 있었다.

웨스트햄 선수들에게 밀려 바닥에 엎어졌던 신준석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몸싸움을 벌였던 무둔바는 귀와 목덜미가 벌겋게 올라온 채 정지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타악!

무둔바와 하이파이브를 나눈 정지우는 골대 바깥에서 던져 준 공을 받았다.

『유니온 시티, 위기를 넘겼습니다.』

『수비가 정말 단단하네요. 지금 보이시죠? 쿠야테를 따라서 무둔바 선수가 끝까지 몸을 날렸어요! 마지막 순간에 헤더를 정확하게 할 수 없었던 이유로 보입니다.』

『사실 무둔바 선수는 이전에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 아닙니까?』

『그렇죠! 하지만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했다는 건, 선수들의 기본적인 실력이 어느 정도는 있다는 의미도 되거든요.』

TV에서 느린 그림이 반복해서 나왔다.

데이빗이 공을 받은 뒤에 카알에게 넘겨주었다.

카알이 라파엘에게, 라파엘이 무둔바에게, 무둔바가 신준석, 신준석이 다시 카알에게 공을 돌리며 시간을 끌었다.

2 대 0이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유니온 시티의 편이었고, 이대로 뒤에서 공을 돌리면 마음 급한 건 당연하게 웨스트햄이 되는 거다.

“우우-!”

홈 관중들이 야유를 질러 댔다.

그러나 저 야유에 흔들려서 엉뚱한 짓을 했다간 이곳까지 원정 온 홈 관중들에게 패배를 안겨 줄 수도 있다.

투욱! 툭!

공은 데니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카알에게, 카알이 데이빗에게, 데이빗에서 라파엘로 돌아왔다.

4-4-2에서 2를 담당하는 10번 자라테와 15번 사코가 아무리 뛰어다녀도, 고작 둘이서 유니온 시티의 패스를 가로채는 건 확실히 무리인 거였다.

그래서 웨스트햄 선수들은 확실히 중앙선을 넘어와 있었다.

정지우는 공을 따라 언제고 패스를 받을 수 있는 위치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골키퍼의 능력 평가에 패스 능력, 킥의 정확도 항목이 있는 이유는 이렇게 상대 팀의 선수들을 끌어낼 때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기 때문인 거다.

웨스트햄의 전체 라인이 중앙선을 향해 좀 더 올라온 다음이었다.

투우욱!

데이빗이 중앙선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패스를 찔러 넣었다.

“우와- 아!”

오른쪽 터치라인 앞에서 데니가 공을 잡았고, 녀석은 터치라인을 따라 웨스트햄 진영을 파고들었다.

투우욱!

그리고 데니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패스를 찔러 주었다.

공을 받은 이정렬의 앞에 리드와 옥보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왼편에 완벽하게 혼자 떨어져 있는 레믹이 손을 발 앞으로 뻗으며 달려들었다.

패스만 하면 한 골을 더 얻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고, 원정 관중들이 벌떡 일어날 정도로 완벽한 찬스이기도 했다.

주춤주춤!

그런데 이정렬은 수비수들을 제치려는 것처럼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엉성한 헛다리 짚기로 두 명을 제치기는 어렵다.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돌린 이정렬이 가까스로 레믹에게 공을 건네주었다.

삐이이익!

그러나 그때는 이미 레믹이 수비수를 지나친 다음이어서 중앙선을 향해 나오는 상황이었다.

지금 같은 때라면 차라리 뒤쪽에 있는 데니에게 공을 돌려주었어야 맞는 거였다.

주심이 휘슬을 불었고, 기를 높다랗게 들었던 선심이 천천히 내려서 어깨높이에서 멈췄다.

누구도 변명하지 못할 오프사이드였다.

양손으로 이마를 짚은 관중들이 쓰러지듯 의자로 주저앉았고, 레믹이 고개를 흔들어 가며 중앙선을 향해 걸어 나왔다.

『이정렬 선수가 오늘 욕심이 좀 나나 봅니다.』

『두 골이 앞서 있으니까요. 조금 전의 장면에서는 곧바로 레믹에게 연결하는 게 훨씬 좋았을 것 같은데요. 공격수가 골을 욕심내는 건 좋지만,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저런 플레이가 반복되면 아무래도 동료들의 신뢰를 잃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이정렬 선수, 정규 리그 첫 경기인데 욕심을 버리고 동료들을 이용하는 플레이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정지우는 동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기는 영국이다.

스트라이커가 골 욕심을 내는 것에 대해 다들 관대한 편이고, 오히려 골 욕심을 내지 않는 스트라이커를 관중들조차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곳이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곤란한 게 있다.

여러 나라에서 몰려온 선수들이 바글바글한 이곳에서, 동료들이 인정하고 이해할 때까지 함부로 저런 플레이를 해서는 곤란하다는 거였다.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모험을 했다면 적어도 골대를 향해 아깝다고 생각되는 슈팅을 날리거나, 아니면 골을 만들어 냈어야 했다.

최소한 레믹과 데니에게만큼은 미안하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줬어야지!

‘멍청아!’

정지우의 시선 앞에서 이정렬은 아까의 장면이 아쉽다는 얼굴을 하며 그냥 걸어 나왔다.

공을 잡은 웨스트햄이 서서히 앞으로 밀고 나왔다.

레믹이 10번 자라테의 앞을 막아섰고, 꼼빠니와 데니가 패스를 받을 만한 선수를 따라 달렸다.

정지우는 지친 심정으로 이정렬을 노려보았다.

4-2-3-1이다.

그리고 이정렬은 3의 가운데 자리에 들어갔다.

당연하게 꼼빠니와 데니의 중간에서 상대 팀 선수들을 따라 움직여야 했는데, 놈은 미련하게도 레믹보다 더 웨스트햄의 진영으로 들어가 있었다.

레믹과 자리를 바꾼 거라면 할 말은 없다.

그렇더라도 지금은 수비를 위해 다들 들어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해도 1의 공격수 자리는 레믹의 것이라는 사실도.

박용근이 벤치에 없었다면, 그리고 선덜랜드전에서 박상민의 활약이 없었다면, 마지막으로 정지우가 동료들에게서 무한한 신뢰를 받지 않았다면 마틴은 그를 빼 버렸을지도 모른다.

교체로 들어간 선수를 부상이 아닌데도 다시 교체 아웃 하는 건 사형선고와 같다.

관중들과 중계방송 앞에서 쓸모없는 선수란 낙인을 찍어 버리는 것이라 그렇다.

뭐가 저렇게 급할까?

38라운드 경기 중 두 번째 경기인데, 무엇이 이정렬을 저렇게 어리석게 만들었을까?

동료들이 정지우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신준석까지도 분위기를 느끼고 정지우의 눈치를 살핀다.

그런데도 이정렬은 가장 앞에 서서 공이 오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유니온 시티가 이정렬 선수에게 원톱의 자리를 맡긴 모양입니다.』

『그러네요! 지금 보시면 오히려 레믹이 맥슨의 자리로 내려가 있거든요. 분명하게 마틴 감독이 원톱의 자리에 이정렬을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 급한 웨스트햄. 그러나 쉽게 넘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레믹 선수를 좀 보세요. 꼼빠니, 데니와 함께 전방 압박을 워낙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굉장하네요! 유니온 시티! 후반인데도 마치 전반을 시작한 선수들처럼 뛰고 있습니다.』

“Lee! Lee!”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서 있던 마틴이 손을 둥그렇게 만들고서 이정렬을 불렀다. 그러고는 오른손 손가락 셋을 위로 든 상태에서 중지의 아래쪽을 왼손 검지로 찍어 댔다.

3의 위치에서 수비를 하라는 의미였다.

『마틴 감독의 지시가 있는데요? 이정렬 선수가 원톱이 아니었나 봅니다.』

『레믹과 위치를 바꾸어 섰던 모양인데요, 마틴 감독이 수비에 좀 더 치중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투욱! 툭!

27번 파예가 오비앙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오비앙이 유니온의 오른쪽 진영을 파고든 쿠야테에게 공을 찔러 주었는데,

콰아악!

신준석이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뽑아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원정 관중들이 박수를 쳐 줄 만큼 깔끔한 태클이었다.

데니가 공을 잡아서 카알에게 넘겼고, 카알이 데이빗에게, 그리고 데이빗이 꼼빠니에게 돌려주었다.

툭툭!

꼼빠니는 웨스트햄의 왼쪽 라인을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투우욱!

그러고는 옆을 달리던 레믹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레믹이 웨스트햄의 왼쪽 페널티 에어리어를 파고들다가 그대로 중거리 슈팅을 날렸다.

공은 골포스트를 한참 위로 지나가 관중석 중간으로 날아갔다.

『레믹! 욕심을 내 봅니다.』

『괜찮아요. 공격이 풀리지 않을 때는 저렇게 중거리 슛을 날려야 수비수들이 달려들거든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 레믹의 슈팅은 이제부터 이정렬에게는 공을 넘기지 않겠다는 의미와 같았고, 동료들 모두 그걸 눈치채고 있었다.

정지우는 웨스트햄의 골키퍼 아드리안이 공을 잡는 사이 얼른 벤치를 바라보았다.

마틴은 팔짱을 낀 채 터치라인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고, 박용근은 무거운 얼굴로 벤치에서 그라운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11명이 뛰는 게 축구다.

한 명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그 한 명이 리듬을 흐트러트리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축구이기도 했다.

퍼어어엉!

아드리안이 길게 공을 찼다.

중앙선 부근에서 데이빗과 자라테가 주고받듯이 머리로 공을 날린 다음이었다.

웨스트햄의 파예가 공을 잡아서 또다시 쿠야테에게 넘겨주었다.

툭툭!

쿠야테는 데니를 앞에 두고 공을 모는 척하다가 15번 사코에게 넘겨주고, 빠르게 유니온 시티의 진영을 향해 뛰었다.

투욱!

사코가 달리는 쿠야테의 앞으로 공을 돌려주었다.

와락! 와라락!

자라테, 노블, 파예, 오비앙이 골대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신준석이 쿠야테의 앞을 막아서는 순간이었다.

투욱!

쿠야테가 오비앙에게 공을 넘겨주었고,

툭!

그대로 골대로 파고들었다.

신준석이 악착같이 쿠야테를 따라 뛰었고, 무둔바가 오비앙의 슈팅 각도를 막기 위해 그를 막아섰다.

툭툭!

정지우는 오비앙의 위치에 맞춰 골대 중앙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왼편으로 감아 찰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 강하게 찰 수도 있었다.

정지우가 손을 어깨 위로 올리고 자세를 낮추는 순간이었다.

투욱!

오비앙은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을 타고 가는 것처럼 공을 흘렸다.

달려드는 선수가 슈팅을 날리라는 의미의 패스였다.

정지우가 다시 왼쪽으로 몸을 움직인 직후였다.

데이빗과 라파엘이 공 앞으로 뛰어들었고, 자라테가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자라테의 보폭이 너무 좁았다.

슈팅 자세가 아닌데?

정지우가 움찔하는 순간이었다.

투욱!

자라테가 발뒤꿈치로 공을 튕기며 공을 지나쳤다.

퍼어어엉!

사코였다.

그가 느닷없이 나타난 것처럼 뛰어들어서 섬뜩한 슈팅을 날렸다.

못 봤다. 솔직히 공이 발에 맞는 순간을 놓쳤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그라운드를 타고 날아오는 공이 오른쪽에 있는 거였다.

화아악!

손을 뻗을 틈?

정지우는 반사적으로 공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발을 내밀었다.

터억! 콰다당!

오른발에 공이 걸렸고, 대뜸 발을 뻗은 탓에 중심을 잃은 정지우가 뒤로 넘어졌다.

휘이이익!

발에 맞고 튕긴 공이 튀어 오르며 골대를 향해 휘었다.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었다.

악착같이 몸을 세우고 있지만, 저 공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정지우가 벌떡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터어엉!

크로스바가 요란하게 울리며 공이 튀어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