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62화 (162/262)

제3장. 급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1)

휘이익!

무둔바가 높다랗게 솟구쳤는데 공은 그의 머리를 지나쳤다.

이어서 공을 노린 것은 데이빗이었다.

훅!

그러나 그의 등을 옥보나가 슬쩍 미는 바람에 데이빗은 그라운드에 넘어지고 말았다.

주심이 골킥을 선언하자 데이빗이 벌떡 일어나 양팔을 뻗어 가며 항의했고,

“경기를 보라고! 경기는 안 보고 여자 가슴만 보나!”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어 댔다.

그러나 영국 리그다.

이곳 역시 오심이 빈번한 곳이고, 선수들도 그런 것 또한 축구 경기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는 곳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경기가 거칠어졌는데, 결정적인 장면은 유니온 시티가 더 자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쩐지 씩씩대며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 덩치를 상대로 턱과 명치에 정확하게 주먹을 꽂아 넣는 느낌이라면 아마 맞을 거였다.

“우와- 아!”

중앙선 아래에서 공을 잡은 신준석이 기회를 만들어 냈다.

녀석이 멋지게 찔러 준 공을 카알이 웨스트햄의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에서 잡은 거였다.

투욱!

카알은 오른발 안쪽으로 공을 띄웠다.

휘이이익!

키가 크지 않은 레믹이다.

그런데 그가 웨스트햄의 수비수, 리드와 옥보나의 틈에서 번쩍 뛰어들었다.

터어엉!

통쾌할 정도로 강렬한 헤더였다.

웨스트햄의 골키퍼 아드리안이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철렁!

“예에에에에에에-!”

수비 라인을 올렸던 웨스트햄의 허를 제대로 찌른 한 방이었고, 추가 골이었다.

레믹이 양팔을 벌린 채로 유니온 시티 관중석 앞을 달린 뒤에 높다랗게 뛰어올랐다.

저놈은 늘 수비를 위해 뛸 때보다 골을 만들고 달릴 때가 훨씬 빠르다.

레믹이 오랜만에 벤치 앞에서 뽀빠이 동작을 흉내 냈다.

“미스터 어메이징!”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전반 30분에 두 골을 앞선 상황이었다.

유니온 시티 원정 관중들이 어깨를 걸치고 제자리를 뛰며 엄청난 함성을 질러 댔다.

『이렇게 되면 웨스트햄은 맥이 빠질 수밖에 없겠는데요?』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한 골이라도 만회하면 모르겠지만, 유니온 시티가 한 골 더 도망가면 이 경기는 이대로 굳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두 번째 골은 신준석의 발끝에서 시작된 거 아니겠습니까? 현지의 느린 그림이 신준석 선수의 패스 장면을 계속 보여 주는 이유도 그럴 거구요.』

『패스가 워낙 좋았거든요. 라인을 올린 웨스트햄 수비수 사이를 정확하게 파고들었어요. 지난 경기에서는 박상민 선수가 엄청난 활약을 보이더니, 우리 선수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이정렬의 부친은 세 번 정도 박수를 치고는 시계를 힐끔거렸다.

벌써 2 대 0이다.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이 정도로 앞선 경기라면 커뮤니티 실드에서 첼시를 상대로 골을 기록한 이정렬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정지우는 원래 그렇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지난 경기에서는 박상민에게 기회를 주었고, 이번 경기에 신준석은 선발로까지 나왔다. 그런데도 이정렬을 이 상황에서 벤치에 앉혀 두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이적이 답이야.’

한국에서 방송했던 오락 프로그램에 이정렬이 나갔고, 시청률도 좋았다고 들었다. 이럴 때, 경기에 나가 골을 넣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이다.

이정렬의 부친은 이를 꽉 깨물고 벤치를 보았다.

고등학교 때 같았으면 벌써 뛰어들어서 항의했을 거다.

‘9월 1일까지는 이적이 가능하니까.’

영국에 온 것, 그 덕분에 다른 팀에서 이적 제의를 받는 것까지는 그래! 정지우와 박용근의 도움이 있었다. 인정한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몰라주고 기회를 안 준다면 여기서 더 성장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정렬의 실력에 달린 거다.

『웨스트햄 선수들! 저렇게 급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누군가 중심을 좀 잡아 줘야 합니다. 아직 후반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요!』

삐이이익!

웨스트햄의 16번 노블이 스웰던을 아예 손으로 밀어 버렸다.

이런 걸 얌전히 당하고 있을 스웰던이 아니다.

와라락!

그가 벌떡 일어나 뛰어드는 걸 데이빗과 라파엘이 급하게 달려들어 막았다.

“참아! 일부러 저러는 거야! 퇴장당하면 우리만 손해야!”

유니온 시티의 페널티 에어리어 왼편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데이빗은 일부러 정지우의 앞으로 스웰던을 끌고 왔다.

데이빗과는 이럴 때 손발이 척척 맞는다.

“스웰던! 스웰던! 괜찮아! 점수로 눌러 주자고! 그래도 이렇게 해 주니까 저놈들이 더 못 설치긴 하는 거지!”

정지우가 스웰던의 얼굴을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가만 안 둘 거야!”

“그러자구! 대신 점수로 눌러 주자!”

“좋아! Ji!”

무둔바가 정지우를 향해 눈을 찡긋할 때였다.

삑! 삑!

주심이 스웰던을 불렀다.

“가! 대신 절대 반항하지 마! 오늘 경기에는 반드시 네가 필요해! 알았어?”

삑! 삑!

스웰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심에게 걸어갔다.

이런 거로는 절대 옐로카드 안 나온다.

구두 경고를 하는 주심에게 스웰던이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눈빛만큼은 독하게 떴는데, 눈빛 가지고 경고를 주는 주심은 아직 없었으니까 그것까지는 뭐랄 게 아니었다.

데이빗이 공을 차면서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전반 내내 정지우는 공을 두 번 잡았다.

하필이면 데이지가 보고 있는데.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팀이 곤경에 빠지는 것보다는 백번 나은 일이다.

“라파엘! 헤이!”

정지우는 라파엘의 위치를 조정해 주었다.

수비의 축인 그가 움직이면 무둔바, 신준석, 그리고 스웰던의 순서로 움직이며 위치를 맞춘다.

됐다. 폼 좀 안 나면 어떠냐?

팀이 이기고, 무실점을 기록하는 게 중요한 거지.

그래야 박용근이 어떻게 가르쳤는지 제대로 알려 주고, 릴리를 살릴 주급을 받는 거다.

정지우는 슬쩍 데이지가 앉아 있는 벤치를 살폈다.

아까의 그 환하던 웃음이 자꾸만 가슴에서 떠올랐다.

생각은 원래 머리로 하는 건데 말이다.

『웨스트햄 선수들! 마음은 급한데 발이 안 맞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너무 흥분해 있어요! 웨스트햄은 리듬이 생기기 시작하면 굉장히 빠른 팀이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우격다짐으로 밀고 올라오고 있어요! 저건 아니죠! 동료를 이용해야 하는데 저렇게 혼자 달려서는!』

『카알! 웨스트햄 옥스포드의 공을 가로챘습니다. 패스할 곳이 없어 보이는데요. 우!』

삐이이익!

공을 빼앗긴 것이 분했던지 옥스포드가 카알에게 거친 태클을 날렸다.

발바닥이 보일 정도로 섬뜩한 태클이어서 주심이 당연히 카드를 꺼내느냐, 아니냐의 결과만 남았다.

『카알! 아직도 일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부상이 아니길 바랍니다. 주심이 옥스포드 선수를 부르는데, 이 정도면 퇴장도 가능해 보입니다.』

『웨스트햄 벤치는 빨리 전반이 끝나길 바랄 것 같습니다. 하프 타임에 감정을 좀 가라앉히고 후반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우우우-!”

『주심! 옐로카드를 들었습니다.』

『웨스트햄은 한숨 돌린 거네요.』

카알이 쩔뚝이면서 터치라인 바깥으로 나가는 동안, 데이빗이 공을 세우고 앞에 있는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퍼어어엉!

그가 높다랗게 공을 찼을 때였다.

삐익! 삐이이익!

주심이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길게 불었다.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통로를 향해 걸었다.

벤치에 있던 서브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오고 있었는데, 정지우는 터치라인 바깥에 주저앉아 있는 카알에게 다가갔다.

상태를 살피려고 고개를 내밀 때였다. 카알이 몸을 일으켜 통로를 향해 움직였다.

“좀 어때?”

“하마터면 성 마테오 병원으로 바로 갈 뻔했지.”

능청스러운 답에 정지우가 픽 하고 웃었다.

그리고 통로를 향해 걸었다.

솔직히 말해도 된다면 통로 위에 있는 데이지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를 보면 경기 내내 계속 시선을 빼앗길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애인이나 부인이 있는 선수들은 어떻게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거지?

정지우는 피식하고 웃으며 라커룸으로 들어섰다.

태어나서 여자에게 설렌 거, 눈 내린 산에 ‘오겐기데쓰까?’라고 외친 여자 배우 말고는 처음이었다.

밤에 일본의 TV를 보던 중에 그 여자가 외치는 게 어쩐지 정지우에게 묻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랬었다.

박상민은 이정렬, 그리고 서브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었다.

짧은 콘을 세워 놓고, 5미터를 빠르게 달린 다음, 촘촘한 걸음으로 3미터를 달리고 천천히 걸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거다.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의 바람은 하나밖에 없다.

경기에 나가서 뛰고 싶은 것.

그리고 이왕 나가는 거라면 1분이라도 더 뛸 수 있게 좀 더 빨리 나가는 거다.

하는 일 없이 구경하는 것 같지만, 벤치는 벤치대로 치열하게 싸운다. 상대 팀의 전술을 깨기 위해 포메이션을 바꾸고, 날뛰는 상대 팀 선수를 누르기 위해, 혹은 저쪽의 허를 찌르기 위해 선수를 교체한다.

전반에 유니온 시티의 경기가 워낙 좋아서 교체는 없을 확률이 높았다.

얼른 뛰어난 선수가 되고 싶다.

그래서 팀이 어떤 전술을 사용하더라도 반드시 선발로 기용되는 그런 실력을 기르고 싶다.

파란 조끼를 입은 박상민이 10분쯤 몸을 풀고 났을 때였다.

“Lee!”

앤디 킴이 이정렬을 부르며 다가왔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데도 그는 이곳 사람들이 부르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후반 준비하랍니다!”

그는 이정렬의 투입을 알렸다.

이정렬의 부친도 분명하게 보았다.

벤치에서 나온 앤디 킴이 움직인 뒤에 이정렬이 조끼를 벗는 것을 말이다.

이정렬의 부친은 참지 못하고 박수를 쳤다가 얼른 손을 내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유니온의 대승이 예상되는 경기였다.

좀 쉬운 경기여서 그렇지만, 아무튼 영국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이정렬이 골을 기록하면 조건은 더 좋아질 거다.

오늘 활약을 바탕으로 유니온 시티가 매달린다면?

이정렬의 부친은 벤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박용근이 나서서 출전과 처우에 관련된 몇 가지 다짐을 받는다면 어느 정도는 양보할 마음도 있었다.

라커룸으로 들어온 마틴은 맥슨에게 교체 아웃을 알렸다.

불만은 있을 거다. 그러나 경기를 조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몫이었다.

“후반은 전반과 전혀 다를 거다. 더 이상의 운을 바랐다가는 다 잡은 경기를 놓칠 수도 있어. 집중해! 레믹! 수비 도와주고!”

마틴이 강한 눈빛을 남기고 라커룸을 나섰다.

『후반입니다. 양 팀 교체 선수가 있습니다.』

『그렇네요. 전반에 경고를 받았던 35번 옥스포드를 빼고 14번 오비앙 선수를 넣었구요, 유니온 시티는 맥슨 대신에 이정렬 선수를 투입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2라운드에서도 우리 선수가 세 명이나 뛰게 됩니다. 선덜랜드전에서는 박상민 선수를 저 자리에 기용했는데 오늘은 이정렬 선수를 투입했습니다. 이유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정렬 선수는 전형적인 스트라이커거든요. 아무래도 프리미어리그 데뷔를 위해 배려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양 팀 선수들이 중앙선을 중심으로 나뉘어 서 있었다.

『박용근 감독이 있어서 이런 점은 우리 선수들에게 유리할 수 있겠습니다.』

『선수 선발과 교체 권한은 분명 마틴 감독에게 있겠지만, 박용근 감독을 벤치에 앉게 했으니 그 정도는 배려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박용근 감독이 선수를 키워 내는 것만큼은 인정받았으니까요.』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며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레믹이 공을 건드렸고, 공을 잡은 이정렬이 데니에게 바로 넘겨주었다.

투욱!

데니가 카알에게, 카알이 데이빗에게, 데이빗이 다시 꼼빠니에게 주었다.

정지우는 고개를 갸웃하고 웨스트햄 진영을 노려보았다.

전반과 전혀 다른 팀이 되었다고 할 만큼 단단하게 라인을 갖추고 있었고, 그만큼 뚫고 들어갈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공을 돌리는 이유도 그거였다.

10번 자라테와 15번 사코가 부지런히 전방에서 공을 쫓아다니고 있는 동안, 뒤쪽 4명과 그 뒤의 4명이 완벽하게 라인을 유지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라파엘! 무둔바!”

정지우는 입에 손을 대고 두 사람을 커다랗게 불렀다. 그러고는 양손 검지를 바깥쪽으로 벌리는 동작을 펼쳤다.

외곽을 뚫고 들어오는 공격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준석아! 위치! 야!”

라파엘을 따라 라인을 조절하던 신준석이 손짓을 보고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우의 눈빛과 표정을 본 수비수들이 긴장했고, 데이빗과 카알이 분위기를 알아채고 라인을 좀 더 촘촘하게 만들었다.

투욱!

꼼빠니에게 갔던 공이 다시 데이빗에게 돌아왔다.

툭!

데이빗은 맥슨의 자리에 있던 이정렬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저기에서 다시 카알이나 데니에게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웨스트햄의 앞쪽 선수들을 흔든다.

“우와- 아!”

그런데 공을 받은 이정렬이 빙글 몸을 돌려 웨스트햄 골대를 향해 치고 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