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61화 (161/262)

제2장. 그게 저의 역할입니다. (3)

웨스트햄과의 프리미어리그 2라운드 장소는 런던의 업튼 파크, 불린 그라운드였다.

1895년 창단된, 아이언 워커스(Iron Workers, 대장장이)란 팀이 나중에 웨스햄 유나이티드 FC로 이름을 바꾸어서 그들의 엠블린에는 두 개의 망치가 교차되어 있다.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불린 그라운드를 매각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홈 관중들에게는 매 경기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런던답게 날씨는 우중충했다.

조선소의 대장장이를 상징하는 웨스트햄과 철강 도시 유니온 시티의 대결이었다.

비슷한 느낌의 관중들이 양쪽으로 나뉘어서 경기 전 응원가를 부르는 모습이 어딘가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감동도 있었다.

양팔을 이마를 향해 뻗어 낸 홈 관중들이 웨스트햄의 응원가인 ‘I'm forever blowing bubbles’를 우렁찬 음성으로 불러 대는 가운데,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나섰다.

작은 콘을 세워 놓고, 팀에 따라 선수들이 그 주변을 달리는 동안 관중들의 열광적인 응원, 뜬금없을 정도로 불쑥 튀어나오는 고함, 그리고 거친 손동작이 쏟아져 나왔다.

원정 경기인데도 동기 셋은 그럭저럭 잘 적응하는 눈치였다.

“동네 이름이 웨스트햄이면 이스트햄도 있겠다.”

“맞아.”

“뭐?”

“이스트햄이 있다고.”

농담처럼 말을 던졌던 신준석이 ‘그래?’ 하는 얼굴로 웃었다.

“몸을 충분히 풀어 둬.”

정지우는 신준석에게 손을 들어 주고 골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런던 오후 2시, 한국은 토요일 밤 11시 경기였다.

얀센과 둘이서 골대 앞을 뛰며 몸을 풀었고, 이어서 공을 주고받았다.

잔디가 다른 곳에 비해 조금 더 푹신푹신한 느낌이었다.

원정 응원단인 유니온 시티의 익숙한 응원가가 들린 다음이었다.

웨스트햄 홈 관중들이 또다시 ‘난 언제나 비눗방울을 불어’라는 응원가를 부르며, 실제로 비눗방울을 만들어 그라운드를 향해 불기 시작했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장면이 웨스트햄 선수들에게는 절대 질 수 없다는 사명감을, 상대 팀인 유니온 시티 선수들에게는 쉽지 않겠다는 느낌을 전해 준다.

“프리미어리그는 다르지?”

얀센이 슬쩍슬쩍 관중석을 둘러보며 공을 가져왔다.

경험 많은 그도 이런 분위기의 응원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우리 응원단이 웃옷 벗어서 돌리는 게 다른 팀에게는 그렇게 부담된다고 하던데?”

“그건 그렇지! 특히 유니온 시티에는 두 사람이 살지! 하는 응원이 나오면 짜증이 난다고도 하던데.”

얀센의 말마따나 응원 열기라면 절대 뒤지지 않는 팀이 바로 유니온 시티다.

FA컵 결승에서 웃옷을 벗어 던진 장면은 두고두고 방송에 나왔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응원을 받고 나면 지는 게 죽기보다 싫어질 때가 있다.

축구란 이렇게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공을 집어 든 정지우는 반대편 골대 위쪽의 하늘을 보았다.

이 경기 역시 한국에 그대로 방송된다.

축구로 누군가를 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프로 축구 선수를 한 덕분에 릴리를 구할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축구를 자신의 소유물로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큼은 바로잡고 싶었다.

몸풀기가 끝난 시간이었다.

서브 선수들은 벤치로, 주전 선수들은 라커룸으로 움직인다.

“오늘 이기면 우리가 리그 선두야!”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음성이 어디선가 또 들렸다.

저 양반을 언제고 한번 만나서 사인한 유니폼이라도 하나 전해 주어야 하는데.

그라운드를 나서는 정지우의 눈에 장진모가 보였다.

그가 오른쪽 눈을 찡긋하면서 엄지를 세워 보이는 바람에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넉살이 저렇게 좋은 사람도 드물 거다.

정지우가 통로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Ji! Ji!”

익숙한 음성이 들려서 시선을 들었는데 통로 쪽 관중석에 빌과 토미, 샌디가 있었다.

반갑다.

손을 흔들어 주던 정지우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빌이 선물해 주었던 골키퍼 장갑을 끼고 있어서였다.

“응원할게! Ji!”

“고마워!”

통로를 들어서는 정지우를 향해 원정 관중들이 계속 ‘우리를 지켜 줘!’라며 고함을 질러 댔다.

정지우

신준석 무둔바 라파엘 스웰던

카알 데이빗

데니 맥슨 꼼빠니

레믹

유니온 시티는 또다시 4-2-3-1의 포메이션을 택했다.

라커룸의 분위기는 나쁠 이유가 없어서, 선수들 사이에서 해 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흘러 다녔다.

이럴 때는 굳이 독려할 말이 필요하지 않은 거다.

멀리서 부르는 듯한 응원가, 기도하거나 음악을 듣는 동료들, 그리고 앞으로 숙인 자세에서 골키퍼 장갑을 매만지는 정지우까지.

그때 마틴이 라커룸으로 들어섰다.

그를 따라 훅 하고 달려들었던 응원가가 문을 닫는 순간 꼬리를 뚝 잘리며 단박에 작아졌다.

“기분들은 어때?”

그는 선수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두 번째 경기다. 웨스트햄이 거칠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면에서 우리는 뒤지는 팀이 아니니까.”

농담처럼 말을 던진 마틴이 유니온 시티에서 가장 거친 스웰던의 어깨들 툭 쳤다.

“오늘 경기에서도 우리는 승리를 거머쥐고 돌아간다. 우리가 저들에게 뒤질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잊지 마라.”

마틴이 고개를 끄덕여 주고 라커룸을 나섰다.

장진모는 한쪽에서 전화기를 들고 악을 써 대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됐어요! 오늘 유니온이 승리하면 그대로 기사 내보내면 될 거 같아요!”

[그럼 경기 끝나는 대로 박 감독 인터뷰 올린다!]

“그렇죠! 그리고 예선전 승리하면 바로 허양수 기사 달리면 됩니다! 형! 만약 오늘 경기에서 지면 일단 기사 보류하는 거 알죠!”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진모야! 사랑한다!]

“끊읍시다! 아차차! 형!”

[왜? 무슨 일이야?]

“여기 올 때 내 카드로 산 비행기 표! 그거 결재 꼭 해 줘!”

[어? 손님 오셨다. 끊는다!]

웃음을 터트린 장진모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8월 한중간의 토요일 밤 11시였다.

지난주의 감동을 잊지 못한 이들이 호프집에 몰려들었고, 잠이 들지 못한 사람들이 TV 앞에 있었다.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유니온 시티는 4-2-3-1의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습니다. 레믹, 꼼빠니.』

선수 소개를 할 때마다 화면에서 선수들이 등장해 뒷짐을 지고 섰다.

『신준석 선수가 선발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골키퍼 정지우 선수입니다.』

가벼운 흥분과 응원 구호가 한국의 호프집에서도 터져 나왔다.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관중석을 향해 섰다.

벤치에 있는 박용근을 보았고, 당연하게 시선을 들어 전은주와 신준석, 이정렬의 가족들을 보았으며, 다음으로 통로 쪽에 있는 빌을 보았…….

시선을 돌리던 정지우가 의아한 눈으로 한곳을 바라보았다.

웨스트햄의 홈구장 불린 그라운드 역시 관중석이 터치라인 바로 앞에 있어서 관중석에 앉은 이들의 표정이 모두 보였다.

데이지였다. 메기도, 릴리도 없이 혼자 있는 데이지.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정지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거였다.

청재킷에 얇은 라운드 티를 안에 입고, 머리를 풀고 있어서 병원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리 새벽녘에 핀 데이지 꽃을 보는 느낌이었다.

시선이 마주친 상태에서 짧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데이지는 분명하게 알아차린 눈치였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저런 미소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누군가 저렇게 환하게 웃어 준 것도.

우중충한 여름 날씨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했고, 하늘을 덮은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기분 좋은 햇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왜 가슴이 이러지?

정지우가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동전 던지기에서 웨스트햄은 공을 선택했다.

“Ji! Ji!”

데이빗이 정지우를 향해 시선을 주어서 정지우는 벤치의 왼편 골대를 가리켰다. 혹시라도 나올지 모를 햇볕에 시선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선택이었다.

“우와아-!”

관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정지우는 골대를 향해 걸었다.

이제부터 경기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웨스트햄은 4-4-2 포메이션을 선택했다.

15 사코 10 자라테

8 쿠야테 35 옥스포드 27 파예 16 노블

3 크레스웰 21 옥보나 2 리드 12 젠킨스

1 아드리안

어차피 이 경기도 테크닉보다는 속도와 힘으로 부딪치는 경기였다.

정지우는 가까운 쪽 골포스트를 발로 차고 반대편 골포스트로 움직여 발 안쪽으로 툭 걷어찬 다음, 중앙에 서서 몸을 띄웠다.

툭!

“예에에에-!”

기다리고 있던 유니온 시티의 원정 관중들이 커다랗게 함성을 질러 주었다.

두 게임 정도였지만, 웨스트햄 선수들과 홈 관중들도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주심의 휘슬로 경기가 시작되겠습니다.』

『오늘도 허리 싸움이 되겠네요. 웨스트햄은 개막전에서 아스널을 2 대 0으로 잡으면서 상승세를 탔구요, 유니온 시티 역시 선덜랜드를 3 대 0으로 이기고 왔거든요.』

『양 팀 모두 해 볼 만한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중원 싸움이 더 치열할 수 있습니다.』

『웨스트햄! 공을 돌리고 있습니다. 보시면 지금 중원을 넘지 못하고 자꾸만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유니온 시티의 전방 압박은 수준급입니다. 저렇게까지 한 번에 팀이 바뀌기 어려운데요. 저거예요! 저거죠!』

레믹이 공을 잡은 웨스트햄의 수비수 리드를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리드는 왼쪽 터치라인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레믹을 떼어 내지 못해서 허둥대는 것이 역력했다.

『웨스트햄 선수들이 받아 줘야 합니다!』

『레믹! 리드를 끝까지 괴롭히고 있습니다. 리드 안쪽으로 패스! 아! 패스가 엉뚱하게 흘렀습니다!』

“우와아-!”

그 순간, 불린 그라운드에 함성이 커다랗게 터져 나왔다.

골키퍼인 아드리안에게 차 준 공을 맥슨이 가로챘기 때문이었다.

수비수들이 멍한 틈이었다.

주춤주춤 나오는 골키퍼 아드리안의 왼편으로 맥슨이 강하게 슈팅을 날렸다.

퍼어엉! 철렁!

“예에에에에-!”

『전반 3분 만에 맥슨의 골이 터졌습니다!』

『레믹의 어시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유니온 시티는 훨씬 여유롭게 경기를 풀어 나갈 수 있겠는데요? 그에 반해 웨스트햄은 아무래도 마음이 급하겠네요.』

유니온 시티의 원정 관중들 앞으로 달려가는 맥슨에게 레믹이 달려들었고, 둘이서 어깨동무를 한 채 동료들과 뒤엉켰다.

맥슨이 오랜만에 기록한 골이었다.

마틴이 클락의 어깨를 두드린 뒤에, 오른손을 휘두르다시피 해서 박용근과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개막전에 이어 유니온 시티 2라운드를 기분 좋게 출발합니다. 마틴 감독이 우리 박용근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나눴습니다. 박용근 감독! 손바닥이 좀 아팠겠는데요?』

『우리 선수들, 그리고 박용근 감독까지, 유니온 시티는 완전히 국민 팀이라고 할 만합니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울리며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너무 이른 시간에 골이 터지는 바람에 경기 양상이 급하게 바뀌었다. 만회 골을 넣기 위해 웨스트햄 선수들이 있는 대로 라인을 올린 데다, 투박할 정도로 거칠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투욱!

라인을 올린 웨스트햄의 왼쪽 터치라인으로 공이 파고들었다.

“우와- 아!”

꼼빠니가 멋지게 공을 잡아서 웨스트햄의 골대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퍼억! 콰다당! 철퍼덕!

웨스트햄의 12번 젠킨스가 그를 들이받아 터치라인 바깥의 광고판에 처박았다.

“우우-!”

삐이이익!

모른 척 걸어가는 젠킨스를 주심이 불렀다.

오른손을 들어 경고를 달라는 데이빗을 밀쳐 내고, 웨스트햄의 자라테와 파예를 물러서게 한 주심은 젠킨스를 향해 옐로카드를 높다랗게 들었다.

이제 겨우 전반전이 15분밖에 흐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꼼빠니가 흙에 더러워진 유니폼을 하고는 그라운드로 들어와서 공 앞에 섰다.

중앙선과 웨스트햄의 골대 중간쯤, 그리고 그라운드 전체로 봐서 왼쪽 터치라인 근처에서 얻은 프리킥이었다.

『직접 차기에는 거리가 좀 있겠는데요?』

『띄울 확률이 높죠! 유니온 시티, 무둔바 선수가 웨스트햄의 골대 앞까지 나가 있습니다! 선수들 밀치는 것 좀 보세요. 무둔바 선수, 힘으로 절대 밀리지 않죠!』

『몸싸움이 굉장합니다!』

『지난 경기에서 박상민 선수를 칭찬해 줄 만하죠. 저런 선수들 두 명을 등으로 버티고 어시스트를 기록했으니까요.』

퍼어어엉!

꼼빠니가 공으로 달려가 높다랗게 공을 띄웠다.

우르르르!

선수들이 골대를 향해 날아오는 공을 따라 뒤엉킨 채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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