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56화 (156/262)

제9장. 감독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잖아. (2)

널따란 호수에 작은 돌을 하나 던지면 파문이 인다. 그러나 자그마한 물구덩이에 커다란 돌을 던지면 상황이 전혀 달라지는 거다.

유니온 시티의 승리가 TV 뉴스의 첫머리인 것만 봐도 한국의 반응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인터넷 포털은 박상민의 이야기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그림으로 어디에서 공을 받았고, 어떻게 넘겼는지를 설명한 것부터, 겨우 한 게임 치렀는데도 레믹에 이어 프리미어리그 득점 랭킹 2위라는 등의 낯간지러운 기사까지 이어졌다.

장진모는 부장과 진지한 얼굴로 마주 앉아 있었다.

“정치자금법 위반입니다. 이걸 데스크에서 통과시켜 줄 리가 없지요.”

“그래도 한 번은 올려야 돼. 우리 임의대로 이 기사를 다른 언론사에 넘기면 저쪽에 완벽하게 명분을 주는 거라서 변명의 여지도 없다.”

“이거 올리면 형 목도 날아갈 수 있어요.”

“그래서 일단 데스크에 올리는 거 아니냐? 퇴직금은 제대로 챙겨야지.”

장진모는 부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후회할 것 같으면 지금 빠져요.”

“나?”

“형은 나랑 다르잖아.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나쁜 놈! 이제 와서 생각해 주는 척하기는? 그러잖아도 자꾸 마음 약해지는데 쓸데없는 소리 할래?”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부장이 말끝을 흐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전화벨이 두 사람의 대화를 뚝 자르고 들어왔다.

장진모가 얼른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응, 응. 언제?”

그가 귀에서 뗀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알았어! 지금 바로 일어설 테니까 지하 주차장에서 보자!”

전화는 금방 끝났다.

“조동익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네요. 이번 월드컵 예선하고 박용근 감독의 일까지를 묶어서 중요한 발표가 있다고 했다는데요?”

“그 인간이 갑자기 또 뭔 꼼수를 쓰려고 그러지?”

부장이 의아한 눈으로 장진모를 보았다.

“여론이 워낙 살벌하니까 뭔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거겠죠. 그 사람들이 그런 것만큼은 세계 최강이잖아요.”

말을 하며 장진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거 데스크에 넣을 거다. 알았지?”

“알았어요, 형! 무리하지는 마요.”

“진즉 좀 그렇게 생각해 주지 그랬냐!”

장진모를 따라 부장도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자들 앞에 나선 조동익은 평소와 다르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그는 아는 기자들과 먼저 눈짓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급하게 잡힌 회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조동익은 A4용지로 만들어진 발표 내용을 단상에 내려놓고는 기자들을 슬쩍 보았다.

“이번 월드컵 예선 성적, 그리고 영국 리그에 소속된 박용근 전 감독과 우리 선수들의 활약이 보도된 이후로 협회의 행정과 능력을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습니다.”

조동익은 침통한 표정으로 기자들을 잠시 둘러본 후에 다시 보도 내용을 향해 시선을 떨어트렸다.

“전에 발표했던 것과 같이 우리 협회는 최선을 다했으나 축구 팬들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에 협회는 박용근 감독이 월드컵 예선의 남은 한 경기를 맡아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웅성웅성.

기자들 사이에서 놀란 음성이 튀어나왔다.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인 사우디아라비아전을 통해 박용근 감독이 예선을 통과할 경우, 저를 포함하여 이사급 전원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며, 이후의 국가대표 감독 선임, 협회의 구성을 송인수 위원에게 일임할 것입니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처럼 기자회견장에 침묵이 가득했다.

그때였다.

“부회장님!”

중간에 앉아 있던 장진모가 손을 번쩍 들었다.

조동익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는데 당장 손을 든 기자는 장진모밖에 없었다.

눈짓을 받은 장진모가 바로 입을 열었다.

“협회가 무능함을 인정하고 물러난다면 결과에 상관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선 탈락이 아니라 예선을 통과하면 물러나겠다는 겁니까?”

“흠!”

조동익은 나직한 헛기침을 먼저 뱉어 냈다.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했던 협회와 기존의 대표 선수들을 비난하는 일이 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월드컵 예선은 특정 선수가 있고, 없고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플래시가 터지는 동안 조동익은 잠시 시간을 끌었다.

“박용근 감독이 월드컵 예선을 통과한다면 그동안 협회가 무능했음을 우리가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선 탈락할 경우에는 모든 책임이 박용근 감독에게 있다는 의미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장진모를 노려보았던 조동익이 입술에 힘을 꾹 주면서 감정을 추슬렀다.

“예선 탈락이 확정되면, 협회는 새로운 감독을 선임하여 장기적인 안목으로 다음 월드컵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러니까요! 정작 예선 탈락의 경우에는 다음 감독을 선임하며 아무런 책임도 안 지고 넘어가겠다는 거고, 오히려 예선을 통과하면 물러나겠다고 하시니 이해하기 어렵잖습니까?”

“예선을 통과하면 그동안 우리가 감독들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의미니까 물러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축구 팬들이 원하는 감독이 나서도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건 협회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지요.”

“내내 지켜보고 있다가 사우디아라비아를 4점 차로 이겨야 하는 시점에서 이런 판단을 내리시는 이유가 뭡니까?”

평소라면 안면 있는 기자 누군가가 말려 주었을 거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오늘따라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장진모 기자시던가?”

“그렇습니다.”

“세상을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봅니까? 기자라면 협회가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를 이성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장진모가 눈 끝을 찌부러트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축구 팬들이 내보내야 한다는 박용근 감독을 선임했는데도 예선 통과가 안 된다면 이건 딱히 협회의 잘못은 아니다. 뭐, 이런 취지인 겁니까?”

조동익이 ‘그렇습니다.’ 하고 답을 한 다음이었다.

“그래서 박 감독이 사우디아라비아전을 4점 차 이상 이기면, 그 실력을 몰라봤던 책임을 지고 물러나시겠다는 거구요?”

“바로 그겁니다.”

“이걸 축구 팬들이 납득할 거라고 보십니까?”

“그거야 기자분들이 어떻게 전해 주시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장진모가 좌우를 둘러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박 감독이 이 제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합니다만, 일단 마지막 예선전을 기존의 체제로 마치고, 협회는 다음 월드컵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문호 감독님은 이 내용을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먼저 의논한 내용입니다.”

조동익이 처음으로 자신 있는 음성으로 답을 내놓았다.

김문호는 축구 교실의 사무실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서울은 오후 2시 30분, 영국은 새벽 5시 30분이 막 넘은 시간이었다.

“지금 발표 중이니까 아마 바로 기사들이 뜰 거야. 그러니 자네는 모른 척 눈 감고 있어.”

[어떻게 하려고?]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거기에 내 자리나 하나 파 놔. 나도 가서 똬리 좀 틀어 보게.”

[그 양반이 원하는 게 도대체 뭐야?]

“자네를 마지막 희생양으로 던져서 이 위기를 넘기겠다는 거지. 자네가 와서 지면 거 봐라, 박용근도 어쩔 수 없었던 거다, 안 오면 이렇게 해도 안 오는 걸 어쩌냐, 이런 거지.”

기가 막힌 듯한 박용근의 웃음이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게 되겠어? 조금만 들여다봐도 그 시커먼 속이 다 보일 텐데?]

“명분이랑 분위기인 거지. 늘 그랬잖아. 축구 팬들 입장에서야 먹고사는 일 아니니까, 더럽고 짜증 나서 듣기 싫다 하고 외면할 거고, 그럼 또 이렇게 어물쩍 자리보전하고 넘어가는 거지.”

[그런 다음 외국인 감독 불러와서 시선 돌리겠다?]

“그렇잖아. 자네가 안 오는데 어떻게 하겠냐고 우기면서 적당히 외국인 감독 부르면 또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거잖아.”

말을 마친 김문호가 쓰게 웃었다.

“경기 봤어. 그대로 그곳에서 자리 잡아. 쓸데없이 이쪽 진흙탕 싸움에 시선 돌리지 말고. 그리고 조금 뒤부터 기자들이 엄청나게 연락할 테니까 전화 꺼 버려. 급한 일 생기면 제수씨 번호로 전화할게.”

[알았어. 참 어렵다!]

박용근의 한탄 섞인 답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정지우는 주방 쪽에 서 있었다.

자고 일어나서 물을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그 바람에 본의 아니게 박용근의 통화 내용을 모두 듣고 말았다.

그때 박용근이 주방으로 나왔다.

“어? 왜 그러고 있어?”

“물 마시러 나왔어요. 드릴까요, 감독님?”

“그러자. 컵 꺼내지 마.”

박용근은 정지우가 꺼내 준 물병을 바로 따서 입으로 가져갔다.

둘이서 시원하게 물을 마신 다음이었다.

“전화 통화 들었냐?”

“예. 일부러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원래 내 목소리가 좀 크긴 하지.”

박용근이 물을 좀 더 마시고는 병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인터넷 기사에 바로 올라올 이야기라서 감추는 게 이상한 거다.”

박용근은 김문호와의 통화 내용을 정지우에게 그대로 알려 주었다.

궁금한 것이 있을 법도 한데 정지우는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감독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뭘 어떻게 해? 눈 딱 감고 모른 척해야지.”

정지우는 남은 물을 입에 넣고 씹는 것처럼 천천히 넘겼다.

동대문 1번 개의 눈에 담긴 분노를 분명하게 보면서 말이다.

간단하게 회복 훈련을 마친 정지우는 벤치 근처의 관중석에 앉아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냐?”

그때 신준석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가왔고, 그 뒤로 박상민이 다가왔다.

“조금 뒤에 골키퍼 코치와 훈련 계획 짜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어.”

“야! 좀 살살해. 자꾸 비교되잖아!”

신준석이 장난기 가득한 음성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 모레 가신다고 내일 저녁이나 같이 먹었으면 하시던데? 아마 지금쯤 사모님께 찾아가셨을 거야. 괜찮다면 밖에서 먹어도 된다고 하시고.”

“말도 안 통하는데 밖은 아무래도 그렇지. 여차하면 우리끼리 삼겹살 구워 먹자. 하루 저녁은 우리가 차리고 치워도 되잖아?”

“그래. 그게 낫겠다.”

“정렬이는?”

“오늘 한국에서 온 방송국과 인터뷰가 있나 보던데? 아까 앤디 킴하고 미디어실로 갔어. 점심 먹고 나서 그라운드랑 촬영 있다고 들었고.”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동기 셋이 모두 뛰고 있는 경기를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서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을 텐데, 잘 견디는 모양이었다.

정지우가 다시 그라운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선덜랜드전 말이야. 어쩐지 너무 쉽게 넘어간 것 같은데, 위쪽에 있는 팀들은 대단하겠지?”

박상민이 정지우와 신준석을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상위 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와서. FA컵에서 한 번씩 이겼다고 리그도 그러라는 법은 없는 거잖아.”

정지우 역시 프리미어리그에서 그들을 상대해 본 경험은 없다.

그러나 대강 짐작할 수는 있었다.

“우리가 연습하는 강한 패스, 그리고 역습이 아예 몸에 배어 있는 팀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겠냐? 미드필드에서의 압박, 공수 전환 속도, 체력, 슈팅, 거기에 수비까지.”

정지우는 FA컵에서 만났었던 팀들을 떠올렸다.

소름 끼치도록 정교한 코너킥, 어떤 경우에도 슈팅을 놓치지 않는 집중력, 그리고 환상적인 패스.

“우리도 프리미어리그에 올라왔으니 한 방은 있는 팀이라는 게 맞겠지. 선덜랜드전은 그런 의미라고 봐야 할 거다. 솔직히 나도 붙어 봐야 알 것 같아서 더는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박상민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다음이었다.

“우린 먼저 들어가 있을게.”

신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혼자 남았다.

텅 빈 관중석, 그리고 그 중간을 차지한 파란 잔디.

정지우는 묵묵하게 그라운드를 노려보았다.

실력을 보이고 싶었다.

영국 리그에서 우뚝 서서 박용근이 그동안 가르쳐 주었던 것이 어떤 것인지, 그렇게 배운 제자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욕심 많은 이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얽히고 싶지 않아 피한 것이 마치 약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꾸만 꼬집고 들어온다.

박용근을 짓밟아 가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안간힘을 쓰는 거다.

정지우를 위해, 그리고 지금은 새롭게 출발하는 제자들을 위해 수모를 참고 있는 동대문 1번 개를 자꾸만 약 올리면서 말이다.

“물어 줘야겠지?”

한두 번도 아니고 자꾸 코를 찔러 온다면 어떡하겠나?

다시는 내밀지 못하게 손을 물어 버려야지.

피식.

정지우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부천의 1번 개가 미친 짓을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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