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감독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잖아. (1)
한국은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축구가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냐?”
“재미있게 하니까 그런 거지! 이래야 응원하는 맛이 나지 않겠냐!”
남자들이 한쪽에서 목청껏 떠들었고,
“정지우! 누나가 너 격하게 아낀다! 앞으로 누나는 죽을 때까지 널 응원할 거야!”
“난 상민이로 할란다! 그런데 지우도 그렇고, 상민이도 그렇고 우리 애들은 눈빛이 왜 그렇게 짠하니? 누나 가슴 미어지게.”
맥주에 얼굴이 불그레해진 여자 손님들이 나름으로 감상을 토해 냈다.
선덜랜드전 하이라이트가 TV에 나왔다.
정지우가 멋지게 몸을 던져 공을 막아 낸 순간 ‘예에에에에에-!’ 하는 함성이 효과음처럼 깔렸고, 이어서 레믹이 바닥을 양손으로 내리치는 장면도 나왔다.
박상민의 교체 장면 뒤에는 연속해 골을 만드는 장면이 이어졌다.
“아니! 골키퍼가 저기까지 공을 던지는 게 말이 되는 거냐?”
“왜? 실력 있는 골키퍼들은 저 정도 던지던데?”
손에 묻은 치킨 기름을 닦아 내며 대화가 이루어지는 중간이었다.
믹스트존에 선 박상민의 인터뷰가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무엇보다 팀이 승리한 것이 가장 기쁩니다. 개막전에서 뛸 수 있었던 것도 좋았구요.』
앤디 킴이 박상민의 말을 영어로 전해 주는 동안, 박상민은 흘러내리는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그때였다.
『한국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시는 팬들과 부모님께 한마디 해 주세요.』
한국말 질문이 불쑥 나왔다.
아마 한국인 기자가 기회를 노리다가 질문을 던진 모양이었다.
앤디 킴이 한국 기자의 질문을 다른 기자들에게 영어로 먼저 전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응원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누나야, 상민아! 누나가 계속 응원했어!”
여자 손님의 외침에 호프집 안에 웃음이 터져 나온 다음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랑 건강하게 계세요. 저 잘 지내요. 아셨죠? 걱정하지 마시구요! 사랑합니다, 어머니.』
말을 마친 박상민이 붉어진 눈을 감추려는 것처럼 픽 하고 웃었다.
“그래! 장하다, 장해.”
박상민의 모친은 TV 화면에 있는 그가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연신 답을 했다.
정지우가 믹스트존 앞에 섰다.
“개막전에서 팀이 승리한 것이 가장 기쁩니다.”
그는 능숙한 영어로 답을 했다.
“선덜랜드 팀을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웠는데 오늘 우리 동료들이 좀 더 뛰었고, 운도 조금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자의 질문을 듣기 위해 고개를 디민 정지우가 상체를 세운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유니온 시티에서 무척 행복합니다. 환상적인 홈 관중들과 코칭 스태프, 그리고 동료들이 저를 행복하게 해 줍니다.”
정지우가 답을 마쳤을 때였다.
“한국은 새벽 1시가 넘었습니다. 이 시간까지 응원해 준 고국의 팬들께 한마디 해 주시죠.”
이번에도 한국 기자의 질문이 TV 화면을 통해 나왔다.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축구를 통해 행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개를 짧게 숙여 보인 정지우가 믹스트존을 빠져나갔다.
지금까지 영국 리그 경기가 끝나고 믹스트존 인터뷰를 바로 보여 준 적은 없었다.
방송국에서 특별하게 편성한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정지우의 인터뷰가 끝나자 경기 하이라이트 장면이 다시 이어졌다.
벤치 위쪽의 관중석은 릴리로 인해 북적였다.
관중들이 몰려와 릴리와 함께 사진 찍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살핀 데이지가 10분쯤 시간을 허락했다.
이리저리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릴리에게 사람들이 몰렸다.
그걸 지켜보던 전은주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프다는 소녀가 저렇게 행복해하는 것으로 한복을 선물한 보답은 충분히 받았다.
라커룸의 분위기는 환상적이었다.
“레믹! 굉장한 플레이였어!”
정지우는 레믹과 손을 잡고 가슴을 부딪쳤으며, 이어서 박상민, 신준석, 데이빗, 무둔바의 순으로 손을 잡아 가며 오늘 승리를 함께 나누었다.
경기를 마친 마틴은 프리미어리그 규정에 따른 정식 기자회견을 마치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미안하네. 딱히 갈 곳이 있어야지.”
쥬피터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틴을 반겼다.
“오늘 자네가 준비했던 경기에 감동했네!”
“스태프와 선수들 덕분이지요. 앉으세요. 홍차라도 드릴까요?”
“경기를 마치고 온 자네에게 그런 수고를 끼쳐서야 되겠나?”
마틴이 책상에 앉자 쥬피터가 그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어떤가? 자네의 이번 시즌 목표를 듣고 싶은데?”
“안 믿으실 것 같은데요?”
“오호호! 마틴! 자네가 하는 말이라면 리그 우승이 목표라고 해도 믿겠네.”
과장되게 웃었던 쥬피터가 ‘설마?’ 하는 얼굴로 마틴을 살폈다.
“이번 시즌 우리의 목표는 프리미어리그 우승입니다.”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는……. 그러니까 우리가 다음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는 팀이 된다는 의미인가?”
“목표는 그렇습니다.”
고개를 모로 튼 상태 그대로 쥬피터가 상체를 세웠다.
“진심인가?”
“오늘 경기를 보셨지 않습니까?”
“선덜랜드는 최약체로 분류되는 팀이야.”
“그렇다면 강팀들과의 경기 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야 되겠군요.”
마틴의 확신에 찬 답이 이어질수록 쥬피터의 얼굴에 의심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Ji가 이번 시즌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확신하나?”
“반대로 생각해 보시죠. 회장님이 Ji를 팔아 벌어들일 이익과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까요?”
“오호!”
정말 그렇게 될까 하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가 마틴을 집요하게 훑고 있었다.
“다섯 경기만 보세요. 오늘 경기에서 우리는 아직 리듬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그 리듬이 완성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프리미어리그 보드 선두에 이름을 올리고 있을 겁니다.”
“Ji가 우리 팀을 떠나게 된다면 다른 코리안 트리오도 그렇게 움직이겠지?”
“스카우트와 관련된 이야기가 돌았지만, 그들은 결국 우리 팀에 남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Ji가 다른 팀으로 간다면, 리그 우승을 노리던 우리 팀은 잔류를 걱정하게 될 겁니다.”
“Ji를 팔아선 안 되겠군.”
“유니온 시티가 챔피언스리그에 나갔을 때의 이익을 먼저 계산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쥬피터가 고개를 갸웃하며 마틴을 바라보았다.
“프리미어리그 우승이라……?”
“유니온 시티에 이런 기회가 또 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쉽지 않겠지.”
“리그 우승,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하면 Ji와 코리안 트리오의 몸값이 얼마나 될까요?”
감추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올라온 욕심에 쥬피터의 표정이 뒤틀렸다.
“알았네. 앞으로 경기를 관람하는 맛이 제법 나겠어.”
쥬피터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Ji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고 내게 알려 주게. 물론 자네가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이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악수를 나눈 쥬피터가 사무실을 나서자 마틴은 책상에 앉았다.
최근 스포츠 베팅 업체 두 곳에서 커다란 제안을 해 왔고, 세계적인 스포츠 용품 마케팅 팀에서, 그리고 아시아 쪽의 굵직한 회사들이 쥬피터에게 광고 문의를 하는 상황이었다.
조금 전 들은 이야기가 있으니 쥬피터는 그 회사들에게 앞으로 네 경기나, 다섯 경기를 지켜보고 결정하자고 하고는 시간을 벌 게 분명했다.
“나도 함께 미쳐 가는군.”
마틴은 눕는 것처럼 의자의 등받이에 시원하게 몸을 기댔다.
박용근의 용병술은 정말이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 맥슨의 빈자리에 박상민을 선택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선덜랜드가 교체할 때까지 교체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리다가, 바로 상대 팀의 맥을 끊는 타이밍에 투입한 거였다.
“유니온 시티가 리그 우승을 하지 말란 법은 없는 거잖나!”
몸을 눕힌 마틴의 가슴에 새로운 목표가 분명하게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정지우는 박상민과 함께 소파에 늘어졌다.
“이거 좀 먹어.”
전은주가 홍삼 봉지 2개를 가져다주었는데, 경기를 뛴 날과 그다음 날은 사양할 게 아니었다.
특히나 더운 날 필드를 누빈 박상민의 경우는 체력을 보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정지우와 박상민이 입에 홍삼 봉지를 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 느닷없이 웃음이 나왔을까?
“소감이 어떠냐? 오늘 원 없이 활약했는데?”
“그냥, 하고 싶었던 축구 마음 놓고 했다는 거 좋았고……. 아 참! 우리 둘이 영상 봤던 것이 떠오르더라구. 감독님께 질문 드렸던 것도 생각나고. 상황을 위에서 보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니까!”
박상민이 꿈을 꾸는 것처럼 말을 마친 다음이었다.
전은주가 바나나를 쟁반에 담아서 소파로 다가왔다.
“집에 전화는 드렸니?”
“너무 늦어서 아침 시간에 맞춰 드리려구요.”
“기다리셨을 텐데! 다음부터는 경기 끝나면 바로바로 전화부터 드려.”
“예.”
박상민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답을 했다.
“지우야, 아까 벤치에 있던 그 아이가 릴리 맞는 거지?”
“예. 시간이 됐으면 제가 사모님께 인사시켰을 텐데 다음에 기회를 만들게요.”
“사모님이 뭐야? 서운하다, 너!”
“예?”
바나나를 건네주는 전은주가 새초롬한 눈으로 정지우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있었다.
이런 걸 어떻게 거절하겠나.
“감사합니다, 어머니.”
정지우는 바나나를 받으며 보기 좋게 웃었다.
“저녁은 감독님 오시면 먹자. 그래도 되지?”
“그럼요.”
정지우가 답을 한 다음이었다.
바나나를 뚝 잘라 입에 넣은 박상민이 TV로 움직였다.
“또 영상 보려고?”
“이게 죽이더라니까! 난 오늘부터 또 웨스트햄 경기 찾아서 아예 머리에 다 넣을 거다.”
박상민이 CD를 꽂고는 TV를 켰다.
“이제부터 네가 경기하는 모습을 상대 팀도 분석할 거야. 그걸 이겨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가 알고 있어도 힘이나 기술로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 실력을 쌓는 거야.”
박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리그에 합류한 선수가 서너 경기 반짝하고 침묵에 빠지는 이유가 그거야. 이곳 선수들이 분석하고 적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 정도라는 거지.”
“그렇구나.”
박상민이 굳게 답을 하고 TV로 시선을 돌렸다.
방 2개짜리 작은 아파트였다.
집에 돌아온 이후로 이정렬은 부친과 마주하기 싫어서 방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감독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잖아.”
“그건 그런데, 오늘 그 자리에 상민이를 넣은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야? 어? 정렬이가 나갔으면 한 골만 넣었겠어? 커뮤니티 실드에서 첼시를 상대로 골을 넣었던 아이를 빼고 상민이를 넣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박 감독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따로 감독이 있는데, 당신도 참!”
“아냐! 내가 선수 교체 때 아래를 보고 있었거든. 분명 박 감독, 그 양반이 교체 지시를 내렸어.”
거실에서 나누는 가시 돋친 대화가 이정렬의 귀를 파고들어 가슴에 자리 잡았다.
“이적 못하게 하려고 이런 거 아냐? 우리 정렬이 노리는 팀이 있다니까 잡아 두려고 이러는 거 아니냐고!”
“아이, 참! 이제 한 경기 한 걸 가지고 당신은 왜 그렇게 또 팔랑거려?”
“억울하니까 그렇지! 우리 정렬이가 기록했어야 할 골과 어시스트를 상민이에게 밀어주니까! 막말로 교체라도 해 주든가! 인터뷰 잡힌 거 알 거 아냐! 어쩌면 딱 정렬이만 빼고 애들을 내보내냐고! 이제 방송국에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 거야?”
이정렬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틀었다.
진심으로 혼자 지내고 싶었다.
신준석의 가족들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음 경기 보고 우리는 가마.”
유정호가 박용근과 함께 구단에 남아 있어서 단출하게 가족들만 앉은 자리였다.
“준석아.”
“예, 아버지.”
신준석의 부친이 진지한 얼굴로 신준석과 신윤희를 돌아보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고마울 때도 있고, 서운할 때도 있다. 네가 포르투갈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감독님과 지우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는다면 그건 아니다.”
“예.”
“윤희, 너도. 동생 때문에 와 있는 거라는 사실 잊지 말고. 사모님 자주 찾아뵙고 도와드려. 그리고 유 서방 함부로 대하지 말고. 준석이 너도 매형으로 깍듯이 대해라.”
신준석과 신윤희가 조신하게 답을 했다.
“정렬이 아버님이 많이 언짢으신 거 같으니까, 공연히 불만 섞인 말에 함부로 말 끼어들지 마라. 시간이 지나면 그 양반들이 불평한 건 없어지고, 동조했던 말만 남는다.”
“예.”
“막말로 감독님과 지우에게 감사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여기 있을 필요도 없다! 알았지?”
“그만해요, 좀! 오늘 경기 뛰고 온 애를 붙들고.”
“어? 그런가?”
말이 자꾸만 길어지자 모친이 나서서 단박에 상황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