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54화 (154/262)

제8장. 고맙다, 지우야! (2)

공을 넘겨주고 휘청인 박상민,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는 수비수들,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관중들.

그 앞에서 판틸리몬이 힘껏 몸을 띄웠다.

거리가 있는 슈팅은 거의 방향을 읽는다.

남은 것은 골대 구석을 얼마나 파고드느냐, 아니면 그라운드에 바운드 되었느냐, 그것도 아니면 지금처럼 이상하게 휘는 공이냐의 차이만 남는다.

레믹의 슈팅은 골대 오른쪽 상단 구석을 정확하게 파고들었고, 바깥쪽으로 휘기까지 했다.

판틸리몬의 손이 공을 스치는가 싶은 순간이었다.

철렁!

골 그물이 커다랗게 출렁였고, 그와 동시에 판틸리몬이 털썩 바닥에 떨어졌다.

“예에에에에에에에-!”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회색의 옷을 입은 관중들이 벌떡 일어나 껑충껑충 뛰었다.

멀리서 보면 옆 사람을 못살게 구는 딱 그런 장면처럼 옆에 있는 친구들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 대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튼,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기록한 첫 골이었다.

함성이, 함성이!

완전히 이성을 내다 던진 관중들을 배경으로 레믹이 빠르게 달렸다. 그가 높다랗게 뛰어올라 오른팔을 치켜들었는데, 비상구 표지판에 그려진 사람 모습처럼 보였다.

노란색 조끼를 입은 안전 요원들이 관중들을 제지하는 동안, 그 앞을 달린 레믹이 벤치 앞에 섰다.

우르르르!

라커룸에서 약속했던 일이다.

골을 넣으면 이렇게 하기로 했었다.

레믹이 좌우를 둘러본 후에 양손 검지를 들어 릴리를 가리켰고, 정지우와 동료들은 양손을 입에 가져갔다가 릴리에게 뻗어서 키스를 전했다.

“예에에에-!”

절차가 좀 복잡한 것 같은데, 릴리는 애드벌룬에 매달린 아이처럼 하늘을 나는 듯한 표정이었다.

투욱!

정지우는 레믹의 뒤통수를 때려 주고 릴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야? 쑥스러워하는 거야?

메기와 데이지가 짓궂은 표정으로 웃는 것을 보면 맞는 모양이었다.

첫 골이라고 주심이 시간을 많이 봐준 거다.

정지우는 재빠르게 골대를 향해 움직였고, 선수들은 중앙선을 중심으로 포메이션에 맞게 자리를 잡았다.

『박상민 선수! 개막전에서 어시스트를 기록합니다!』

『감각적인 패스였어요! 레믹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것도 놀라운데, 등으로 상대 선수 둘을 밀어내고 단번에 넘겼거든요! 세계적인 선수들의 플레이를 박상민 선수가 펼쳤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틴 감독의 용병술을 칭찬 안 할 수가 없습니다.』

TV 화면에서 박상민이 넘긴 공을 레믹이 슈팅으로 연결하는 장면이 계속해서 나왔다.

“봐, 인마! 정말 저렇게 해내잖아! 저거라니까! 저걸 아니까 박상민을 집어넣은 거라고!”

“이게 완전히 한국 팀 분위기 아니냐? 신준석이 넘겨준 공이야! 햐아! 오랜만에 축구 볼 맛 난다!”

호프집에서 주인과 아르바이트 학생이 양손에 생맥주를 들고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지우는 골대 앞에서 판틸리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역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프리미어리그는 무섭다.

세계적인 수준은 정말 다르다.

앞으로 만날 수준 높은 팀에는 얼마나 무서운 선수들이 있을까?

정지우는 눈빛을 빛내며 골키퍼 장갑을 좀 더 잡아당겼다.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선덜랜드도 달려들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일단 만회하기 위해 달려들 겁니다. 유니온 시티는 라인을 올린 선덜랜드의 뒤쪽을…….』

『아! 박상민! 공을 가로챘습니다! 밀고 들어가는 박상민! 박상민! 패스! 레믹! 안쪽으로 흘려주고! 박상민! 다시 공 잡은 박상민!』

『앞이 비었어요! 때려야죠! 때려야죠!』

『박상민! 박상민! 슈우웃!』

“예에에에에에에에에-!”

『골! 고- 올! 박상민! 박상민! 선덜랜드의 추격 의지에 쐐기를 박는 추가 골을 만들어 냅니다!』

“우와아아아-!”

호프집은 아예 폭탄을 던져 놓은 느낌이었다.

공을 가로챈 박상민이 페널티 에어리어를 치고 들어간 후, 레믹과 2 대 1 패스를 통해 최종 수비를 벗겨 냈고, 슈팅을 날린 거였다.

레믹의 골이 준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박상민이 추가 골을 만들어 냈다.

『오늘 레드 블레이트 극장의 주연은 박상민입니다!』

『그렇습니다! 박상민 선수! 공을 빼앗아서 레믹에게 연결하고 다시 받았구요! 상대 골키퍼 판틸리몬의 위치까지 읽고 완벽하게 골을 넣었습니다! 굉장합니다!』

골을 넣은 박상민이 대뜸 몸을 돌려 벤치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높다랗게 떠올라 박용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콰다다당!

박용근과 뒤에서 받치려던 유정호가 동시에 바닥에 처박혔는데, 동료들이 그 위로 계속해서 뛰어들고 있었다.

전은주는 물개 박수를 멈출 줄 몰랐다.

속옷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달리고 와서도 축구에 관한 미련을 단 한 조각도 내비치지 않았던 남편이다. 그랬던 남편이 오늘, 원했던 축구를 마음껏 펼쳐 내고 있었다.

‘멋있어! 멋있어, 여보!’

이 박수는 온전히 남편 박용근을 향한 것이었다.

마틴은 허공에 연신 주먹을 뻗어 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에는 두 사람이 살지!”

심장을 울리는 발 구르는 소리, 귀를 얼얼하게 하는 응원가, 잔디 냄새, 선수들의 거친 호흡, 그리고 승리를 담보하는 골!

이거다!

이 맛에 축구를 시작했고, 지금껏 감독으로 있었다.

개막전에서 두 골이다!

후반 15분을 남겨 놓은 상태에서 두 골!

그를 등에 태운 호랑이 정지우가 골대 앞에 있는 한, 이제 승리는 유니온 시티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였다.

팀 스태프들이 관중들만큼이나 열광하고 있었다.

정지우가 승리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미친놈!”

정지우는 웃으며 박상민을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때의 박용근이 아닌데 저렇게 달려들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인 건지.

세레머니를 위해 달려갔던 신준석이 피식피식 웃으며 돌아왔다.

“저놈 완전히 맛 갔다. 머리를 두드려 주는데, 난 줄 모르는 거 같더라구.”

“그럴 만도 하지.”

“그런가? 아무튼, 저놈 잘되는 거 같아서 정말 좋다!”

정지우가 박상민을 한 번 더 바라볼 때였다.

“고맙다, 지우야!”

신준석이 뜬금없는 인사를 남기고 얼른 제 위치로 달려갔다.

추가 시간을 계산해도 후반이 15분밖에 남지 않았다.

『선덜랜드! 선수 교체입니다! 8번 로드웰을 대신해서 9번 파비오 보리니 선수를 투입합니다.』

『유니온 시티의 골대 앞에서 좀 더 공격적인 장면을 연출하겠다는 의도로 보이네요!』

『박상민의 추가골 이후로 선덜랜드! 마음이 급합니다.』

데포가 밀어준 공을 플레처가 받았다. 그가 다시 렌스에게 공을 건네준 다음이었다.

퍼어어엉!

렌스는 공을 받는 즉시 골대 앞으로 길게 차 주었다.

『지금은 일단 보내 놓고 보겠다는 겁니다!』

『정지우! 달려 나와서 공을 잡았습니다! 데포! 신경질적으로 정지우를 밀칩니다! 정지우! 그대로 달려 나갑니다! 정지우! 정지우! 길게!』

정지우가 던진 공을 박상민이 바로 받았다.

터억! 투우욱!

박상민은 가슴으로 공을 받아 반대편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패스를 넣었다.

빠르고 간결한 패스였고, 뛰어나간 수비수들 사이를 꿰뚫는 멋진 패스였다.

『박상민의 패스! 레믹! 공을 잡은 레믹! 판틸리몬을 제쳤습니다. 레믹! 레믹!』

레믹이 골키퍼 판틸리몬의 왼쪽으로 공을 넘겨 놓고 달렸다.

골대에서 벗어나기 직전에 그가 툭 차 넣은 공을 향해 선덜랜드 수비수 둘이 달려들었는데,

“예에에에에에-!”

공과 함께 그대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말았다.

레믹이 박상민을 검지로 가리키며 달려와 목을 끌어안았다.

『박상민! 골과 두 개의 어시스트를 영국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에서 기록합니다! 유니온 시티의 동료들이 박상민 선수에게 먼저 달려들고 있습니다.』

『믿을 수가 없네요. 정지우 선수가 던져 준 공을 박상민이 받았고, 레믹이 바로 골로 만들었어요. 대략 5초가 안 걸린 것 같은데요?』

『후반 들어 득점포를 완벽하게 가동하는 유니온 시티! 선덜랜드를 완전히 주저앉힙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가뜩이나 더운 여름날이다.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웃옷을 벗어서 높이 들고는 빙글빙글 돌려 댔다.

“나나나- 나! 나나나- 나! 헤이! 헤이! 헤이! 굿바이!”

이어서 여러 가지 색의 선풍기를 켜 놓은 것 같은 관중석에서 원정 응원단을 조롱하는 응원가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출입구를 통해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선덜랜드의 원정 관중들이 나올 만큼 이번 추가 골이 주는 충격은 컸다.

삐이익!

남은 정규 시간은 3분가량이었다.

선덜랜드가 또다시 밀고 들어왔지만, 사기가 오른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감당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뻥뻥 내지른 공을 따라 선덜랜드 선수들이 달려들었지만, 우선 사기가 꺾인 데다 급하게 날린 공이어서 무둔바와 라파엘을 뚫기는 어려웠다.

정지우가 공을 잡아서 라파엘에게 굴려 줄 때, 대기심이 추가 시간 3분을 알리는 보드를 높게 들었다.

패스를 돌리며 시간을 끄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에게 선덜랜드 선수들이 거칠게 달려들었다.

삐이익!

주심이 파울을 선언해도 유니온 시티 선수들은 공격을 전개하지 않았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란 말은 있다.

그러나 프로 경기에서 앞선 팀에게 그 말은 사치와 같다.

세 골이나 앞섰으니까 그냥 공격해도 되지 않냐고 묻는 건 아마추어, 악착같이 점수를 지켜서 승점 3점을 따내는 게 프로다.

삐이익!

주심이 유니온 시티의 스로인을 선언했다.

공을 잡은 꼼빠니가 던질 것처럼 하다가, 다가온 스웰던에게 공을 주고는 그라운드 안으로 뛰었다.

스웰던은 주춤주춤 라인을 타고 걸으며 시간을 끈다.

3분?

1분에도 세 골이 터지는 게 프로 경기다. 그러니 이런 때에 어떡해서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

삐이이익!

주심이 단박에 휘슬을 불고는 스웰던에게 옐로카드를 들었다.

“우우-!”

상관없다. 경고를 받느라 그만큼 시간을 까먹었으니까.

휘이익!

스웰던이 던져 준 공을 꼼빠니가 받아서 다시 스웰던에게 넘겼다.

퍼어어엉!

스웰던이 반대쪽 터치라인에 있는 데니에게 공을 주었고,

투우욱!

데니는 바로 중앙에 있는 박상민에게 차 주었다.

툭툭!

박상민은 시간을 끄는 것처럼 공을 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투우우욱!

“예에-!”

그러다가 단숨에 선덜랜드의 왼편 구석으로 공을 굴렸다.

꼼빠니였다.

그가 텅 비어 버린 선덜랜드의 왼쪽 구석에서 공을 잡고 골대를 향해 치고 들어왔다.

투욱!

꼼빠니와 박상민의 2 대 1 패스처럼 보였다.

수비수들이 꼼빠니에게 달려들 때, 박상민은 빙글 몸을 돌려 반대편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공을 찔러 주었다.

“우와-!”

멋진 패스에 탄성이 터졌는데, 그 공을 향해 레믹이 무섭게 달려들고 있었다.

퍼어어엉!

빨랫줄처럼 날아간 공을 판틸리몬이 악착같이 쳐 냈다.

투욱!

그리고 그 공이 박상민 앞에 떨어졌다.

화악!

벌떡 일어선 판틸리몬과 수비수 코아체스가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투욱!

박상민은 오른발 바깥으로 공을 밀어냈다.

툭!

그리고 그 공을 레믹이 골대를 향해 밀어 넣었다.

“우-!”

세상에!

레믹의 발에 맞은 공이 홱 휘더니 골포스트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해트트릭을 날려 버린 레믹이 혀를 길게 내밀고는 볼을 쓸어내렸는데, 관중들은 그다지 크게 실망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뒤로 물러나는 동안, 판틸리몬이 급하게 공을 세우고 강하게 차 주었다.

그 공이 높다랗게 떠서 중앙선을 향해 날아올 때였다.

삐이익! 삐익! 삐익!

주심이 개막전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커다랗게 불었다.

미쳐 버린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정지우는 하늘을 향해 검지를 높게 들었다.

한 경기, 릴리를 지켜 낸 듯한 한 경기에서 무실점 목표를 이루었다.

선덜랜드 감독, 그리고 코칭 스태프들과 악수를 나눈 마틴이 유니온 시티의 전통대로 홈 관중들을 향해 손을 높다랗게 들고 박수를 쳤다.

이건 박용근이라고 빠질 수 없는 일이다.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에는 두 사람이 살지!”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손을 맞잡고 가슴을 부딪치며 인사했다. 필드 선수들의 몸에서 땀 냄새가 훅훅 끼쳤는데, 이것이 프로 선수의 삶인 거다.

정지우의 앞으로 판틸리몬이 걸어왔다. 10센티미터는 더 커 보이는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꽈악! 쿵!

정지우가 그의 손을 잡고 가슴을 부딪친 다음이었다.

“다음 경기에서 보자고.”

판틸리몬이 어깨를 툭 쳐 주고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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