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고맙다, 지우야! (1)
『후반전입니다. 전반까지 팽팽했기 때문에 양 팀 벤치에서 나름대로 준비를 했을 것 같은데요, 선수 교체가 있다면 박상민이나 이정렬 선수가 들어올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전반에 레믹의 몸놀림이 나쁘지 않아서 이정렬 선수는 어떨지 몰라도, 미드필더인 박상민 선수는 충분히 투입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삐이이익!
그때 주심이 기다랗게 휘슬을 불었다.
『선덜랜드의 선공입니다. 데포, 로드웰에게, 로드웰, 매튜스에게 공을 넘깁니다. 선덜랜드는 후반에도 4-5-1 포메이션을 유지하는 것 같은데요?』
『유니온 시티도 현재까지 포메이션의 변화는 없습니다. 전반과 같이 라인을 올린 것까지 특별한 변화가 없네요.』
『데니가 건드린 공, 다시 선덜랜드의 라르손이 잡습니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양 팀 선수들, 미드필드에서 한 치의 양보 없이 달려들고 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다.
박상민의 모친은 또다시 부친을 얇은 이불에 태워 거실로 나왔다.
요즘 TV는 안테나선이 아니라 벽을 뚫고 들어온 선에 셋톱박스까지 연결해야 해서 당최 방으로 옮길 방법이 없었다.
지금까지 두 번쯤 앵커와 해설자가 아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리고 어쩌다가 벤치를 보여 주는 화면에 아들 얼굴이 나온다. 스치듯 나오는 아들의 얼굴이다. 그 잠깐을 놓칠까 봐 모친은 잠시도 다른 곳을 볼 수가 없었다.
『유니온 시티! 또 공을 빼앗겼습니다. 왜 그런지 선수들이 패스를 너무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러네요. 데니의 경우는 아예 슈팅처럼 공을 보내고 있는데 저럴 필요 없어요. 전반처럼 타이밍을 가져가는 게 좋습니다.』
『공을 빼앗기고 끝까지 달려드는 건 좋은데, 그전에 좀 더 안정적인 패스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마틴은 선수들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연습 때처럼 강한 패스를 시도하다가 공을 계속 뺏기고 있어서 모를 수도 없었다.
벤치에서 따로 지시한 적이 없으니, 저건 분명 정지우가 제안한 거다.
도대체 리듬이란 게 생기기는 할까.
박용근은 저 강한 패스에 리듬이 생기기 시작하면 분명하게 효과가 나올 거라고 했었다.
스승이나 제자나.
마틴은 오른손으로 입과 턱을 쓸며 골대를 보았다.
제자인 정지우는 리그 38경기 무실점이 목표라고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스승 박용근은 리그 우승을 말해서 마틴의 넋을 빼놓았었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을 때, 선심이 높다랗게 들었던 깃발을 45도 위로 들었다. 선심의 건너편 터치라인 쪽에 있던 선덜랜드 선수가 오프사이드에 걸렸다는 의미였다.
그라운드와 수평으로 들면 골대 앞쪽, 45도 아래로 내리면 선심 근처에서 오프사이드에 걸린 것을 의미하는 거야 상식이고.
퍼엉!
신준석이 카알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제기랄! 그렇게까지 강하게 찰 필요는 없다고!
박용근의 목표는 다른 스태프들에게 말하지도 못했다.
혹시라도 그를 터무니없는 사람으로 취급할까 봐 그냥 입을 다문 거였다.
막말로 박용근이 바보 취급당하면 그를 추천해 리저브 팀 감독에 앉힌 자신의 안목까지 의심받게 되는 거였다.
“우-!”
데이빗이 레믹을 향해 찔러 준 공이 그대로 라인 밖으로 날아갔다.
혹시 슈팅인데 잘못 맞았던 건 아니겠지?
지금이라도 패스를 제대로 하라고 고함을 질러야 할까?
당장 선덜랜드를 상대로 승점 3점을 얻지 못하면 리그 우승은 고사하고 강등권으로 힘차게 달려가게 된다.
마틴은 확인처럼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자신 있다는 얼굴과 태도였다.
‘흠!’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정지우가 망가지면 마틴 역시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좋아! 이렇게 된 거라면!’
마틴은 이 경기를 박용근이 원하는 방식으로 풀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옆에 앉은 유정호에게 손짓을 했다.
“박 감독에게 선수 교체를 원할 경우, 편안하게 제안해 달라고 말해 주겠나?”
관중들의 함성이 줄어 있어서 대화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말을 전했습니다.”
유정호의 대답에 마틴은 고개를 빼서 박용근을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알아서 해 보라는 뜻이었다.
스태프에게 권한을 주는 것 역시 감독의 능력인 거다.
『후반 15분이 지났습니다만, 전반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는 선덜랜드의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는데, 선수 교체를 하든가 해서라도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65분에서 70분 사이가 교체하기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거든요. 유니온 시티는 이미 교체 카드를 하나 썼기 때문에 아무래도 신중하게 계산해야 할 겁니다.』
『아! 선덜랜드가 교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케터몰을 준비시키네요. 아무래도 유니온 시티의 뒤를 노리겠다는 의미이구요, 라파엘과 무둔바에게 묶여서 움직이지 못하는 데포를 좀 더 자유롭게 하겠다는 작전 같습니다.』
정지우는 공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위치를 바꾸었다.
“준석아!”
그리고 그럴 때마다 수비수들의 위치를 계속 지시해 주었다.
이렇게 손발을 맞춰 버릇하면 결정적인 위기 상황에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빈 곳을 지켜 주게 되는 거다.
감독들이 수비수들을 구성하면 함부로 바꾸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라파엘과 무둔바의 조합처럼 중앙 수비수 둘이 탄탄해지면 어지간해서는 이 둘을 떼어 놓기가 어렵다.
수비에서 손발이 안 맞는다는 것의 의미가 곧 실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삐이이익!
공이 터치라인 바깥으로 나가자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대기심이 붉은색 7, 파란색 6이라는 숫자가 찍힌 패드를 높다랗게 들었다.
선덜랜드의 7번 라르손이 밖으로 뛰어나갔고, 등번호 6번의 케터몰이 빠르게 들어왔다.
선덜랜드의 스로인이었다.
공을 머리 위로 든 선덜랜드의 매튜스가 주춤거리며 조금씩 유니온 시티 진영을 향해 움직였다.
저 걸음이 때론 골과 연결된다.
그래서 얍삽해 보이지만 공을 던지는 선수는 최선을 다해 상대 진영으로 걷는 거다.
매튜스의 뒤에서 반소매 면 티를 입은 남자아이가 ‘비겁한 짓 좀 그만해!’라고 외쳐 대는 앞이다.
저런 거 반응하면 경기 못한다.
휘이이익!
매튜스가 던진 공을 로드웰이 받아서 바로 매튜스에게 돌려주었다.
투욱!
매튜스가 다시 뒤에 있는 수비수 코아체스에게, 코아체스가 카불에게, 카불이 렌스에게 공을 건네주었다.
골키퍼 앞을 지나는 패스 세 번만으로 왼쪽 터치라인에서 던진 공이 오른쪽 터치라인 앞에 있는 거였다.
투우욱!
렌스가 카알과 신준석의 사이로 찔러 준 공을 교체로 들어온 케터몰이 잡았다.
투욱!
케터몰은 옆에 있는 플레처에게 공을 넘겼고,
툭!
플레처는 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안으로 툭 찔러 넣었다.
“우예-!”
데이빗과 무둔바의 사이를 뚫고 들어온 공을 향해 데포가 달려들었다.
다만 공의 속도가 워낙 빨랐고, 방향이 정지우의 정면이어서 그가 잡기는 어려웠다.
와락!
정지우는 빠르게 달려 나가 공을 안고 앞으로 엎어졌다.
이런 때 몸을 돌리거나 손만 뻗었다간 데포 같은 선수에게 공을 뺏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확실하게 내가 잡았다는 의지를 보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정지우는 엎드린 상태에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골키퍼는 확인하고,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대 팀 선수가 뒤에 있을 때도 있었다.
정지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킬 때였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유니온 시티의 선수 교체입니다! 교체 선수가……?』
『박상민이네요! 박상민 선수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화면에 정강이 보호대를 만지는 박상민이 제대로 잡혔다.
앤디 킴이 전해 주는 마틴의 지시를 들으며 박상민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꼼빠니나 데니를 빼게 되나요?』
『박상민 선수가 아무래도 공격형 미드필더니까요. 어? 맥슨을 뺍니다. 그렇다면 유니온 시티의 벤치는 레믹의 뒤에 박상민 선수를 두고 2선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맡기는 거라고 보이는데요.』
『양 팀 한 치의 양보 없이 부딪칩니다. 데포의 뒤에 케터몰을 넣자, 바로 레믹의 뒤에 박상민을 투입했습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홈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하는 맥슨을 박수로 위로해 주었다.
그와 손을 마주친 박상민이 빠르게 달려 나갔다.
모친의 험하게 굽은 양손이 어느새 기도하는 사람처럼 붙어 있었다.
얼굴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박용근과 정지우가 잘 살펴 준 모양이었다.
TV 화면 가득 나온 박상민은 양손 검지를 들어 꼼빠니와 데니의 위치를 알려 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여기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아버지하고 엄마는 이렇게 잘 지내니까.
알았지?
“우와! 그럼 우리 선수가 세 명이나 뛰는 거야!”
“야, 인마! 벤치에 박용근 감독이 앉아 있잖아! 당연히 기회를 주겠지!”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감독이 영국 사람이야! 저 인간들이 박용근 말에 선수를 내보낼 것 같으냐!”
“박상민이 대표할 때 기억 안 나냐? 죽여줬다니까!”
호프집에 열띤 토론이 펼쳐지는 동안, TV 화면에서는 정지우가 공을 던져 주고 있었다.
『개막전에서 우리 선수가 세 명이나 뛰고 있습니다.』
『그러네요! 사실 맥슨 자리에 박상민을 투입한 건 좀 의외입니다. 커뮤니티 실드에서 골을 기록했던 이정렬이 2선 스트라이커 자리에는 더 잘 어울리거든요.』
『활동 범위를 넓히고, 공을 간직하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은데요. 라파엘! 공을 앞으로 넘겼습니다. 카알, 다시 라파엘에게.』
이정렬의 부친은 입술에 힘을 꾹 주고 벤치와 그라운드를 노려보았다.
분명 스트라이커를 뺐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 이정렬이 아니라 박상민을 넣었다.
커뮤니티 실드에서 그렇게 멋진 골을 만들어 냈던 아들을 놔두고 말이다.
함께 산다고 편애하는 건가, 아니면 지난번 이적 이야기에 대한 앙갚음인가?
박용근이 저렇게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전은주가 옆에 있어서 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불쾌한 감정은 계속해서 위로 올라왔다.
어렵게 부탁했던 인터뷰를 거절당한 것도 불쑥 생각났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아들만 바보로 만든다.
일단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말이다.
박상민을 투입한 효과가 나오는 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와아-!”
유니온 시티의 홈 관중들은 박상민이 공을 잡으면 기대에 찬 함성을 터트렸다.
레믹의 뒤에 선 그가 공을 뿌리면서부터 유니온 시티의 숨통이 확 뚫리고 있었다.
콰아악!
거칠게 달려드는 선덜랜드 선수들에게 힘으로 밀리지도 않는다. 팔을 붙잡는 로드웰의 옷을 잡아 가며 버텨서 끝끝내 공을 지켜 냈다.
“헤이! Sang!”
동료들이 박상민을 믿고 공을 넘겨주었고, 뛰어가며 돌려받는다.
정지우는 입술에 웃음을 달고서 박상민을 바라보았다.
지겹게 질문을 해 대던 효과가 이렇게 바로 나올 줄은 몰랐다. 공을 잡아 넘기는 타이밍, 방향, 탄력까지 당장 뭐라 할 부분이 없었다.
‘저놈이 저 정도였냐?’
신준석이 놀란 눈으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과일 깎는 것보다는 축구를 잘했지!’
정지우의 생각이 신준석에게 전해지기는 어려웠다.
콰아악!
공을 잡은 데니를 향해 선덜랜드의 반 아놀트가 몸을 던졌다. 파울이 나오겠지 했던 태클이었는데 주심은 또다시 휘슬을 불지 않았다.
퍼어엉!
렌스가 반대편으로 길게 날린 공을 로드웰이 가슴으로 받았다.
투우욱!
로드웰은 오른쪽 페널티 에어리어로 달려드는 데포를 향해 공을 찔러 주었다.
터억!
그러나 그 공을 잡은 것은 라파엘이었다.
투욱!
라파엘은 오른쪽 앞에 있는 신준석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신준석이 일단 공을 잡을 줄 알았다.
퍼어어엉!
그런데 신준석은 달려들던 탄력을 이용해 공을 걷어 냈다.
박상민을 향해서였다.
공을 뺏기 위해 선덜랜드의 수비수들이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콰악! 터억!
박상민은 뒤로 기댄 것처럼 상대 선수 둘을 등으로 버텨 냈다.
‘레믹!’
인상을 있는 대로 쓴 상태에서 촐랑이 레믹과 시선도 맞추었다.
툭!
그리고 겨우 뻗어 낸 발끝으로 공의 방향만 바꾸었다.
“예에-!”
눈으로 따라가기도 바쁠 정도로 삽시간에 연결된 패스였다.
퍼어어엉!
레믹이 불쑥 튀어나와 골대를 향해 강하게 슈팅을 날렸다.
얼마나 힘껏 찼는지 뻗어 낸 오른발을 따라 레믹의 몸이 허공에 들릴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