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52화 (152/262)

제7장. 내가 공을 막아내는 것처럼. (2)

엎어졌다가 몸을 돌려 상체를 일으킨 레믹을 향해 주심이 옐로카드를 높다랗게 들었다.

“우우우-!”

레믹이 그라운드를 양손으로 강하게 내리치며 분통을 터트렸는데, 역시나 달라질 건 없었다.

『주심이 레믹에게 옐로카드를 들었습니다. 페널티킥을 유도하기 위한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때 느린 그림이 다시 나왔다.

판틸리몬의 손이 레믹의 발목을 먼저 건드린 후에 공을 가져갔다.

『유니온 시티와 레믹 입장에선 많이 억울하겠는데요. 주심이 보기에 레믹 선수의 동작이 너무 컸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글쎄요, 이건 페널티킥을 줘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틴 감독, 대기심에게 거칠게 항의하고 있습니다.』

『선수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부분입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경기를 살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남자의 고함이 쩌렁쩌렁 그라운드에 울려 나왔다.

판틸리몬이 파울을 얻은 자리에 공을 내려놓을 때까지도 관중석에서는 ‘우우-!’ 하는 야유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호프집에 있던 이들 역시 불만을 터트렸다.

“축구 종주국이 뭐 저래? 저런 거 하날 제대로 못 보나?”

“아니! 부심이 봤을 거 아냐! 혹시 동양인 선수가 있다고 불리하게 판정한 건가?”

TV 화면은 계속해서 레믹의 발목에 걸린 판틸리몬의 손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양 팀이 중앙선 부근에서 격렬하게 맞붙고 있습니다. 마치 중앙선에서 득점이 나오는 경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있구요, 어느 팀의 골키퍼가 먼저 실점을 하느냐의 싸움 같기도 합니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데 지금까지 실점이 없어요.』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웅장한 남자들의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를 뒤덮었다.

허리 싸움에서 밀리는 순간, 승부의 추가 기운다는 것을 선수들 모두가 알고 있어서 경기가 확실히 거칠게 진행되었다.

퍼억! 콰다당!

공을 잡은 맥슨을 카불이 거칠게 들이받았다.

삐이익!

주심이 달려와 단호한 손짓으로 구두 주의를 주는 동안, 데이빗은 경고를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계속해서 카불을 가리켰다.

주심이 몸싸움에 관대한 판정을 하는 것도 거친 경기에 불을 지피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공을 바닥에 놓은 꼼빠니가 빠르게 뒤로 차 주었다.

카알이 달려 나가 공을 받았다.

그의 팔을 로드웰이 잡아챘지만, 주심은 역시나 휘슬을 불지 않았다.

파울을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주심의 재량에 의한 일이고, 그것이 또 영국 리그의 특징인 거다.

상대 팀 선수가 붙잡더라도 악착같이 버티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게 힘으로 상대하다가 상대 팀 선수가 그걸 넘어서는 행위를 했을 때야 파울을 주는 거다.

투욱!

카알은 신준석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터억!

신준석이 공을 앞으로 굴려서 힘껏 차 내는 순간이었다.

휘이이익!

달려든 플레처가 신준석에게 발을 뻗어 냈다.

뻐어억!

“아악!”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신준석이 그라운드에 엎어졌다.

발을 앞으로 내지르는 신준석의 발등과 발목에 발바닥을 가져다 댔다.

저건 누가 뭐래도 선수 생명을 끊을 수도 있는 더럽고 잔인한 플레이였다.

“헤이!”

데니가 단박에 달려들어 플레처의 가슴을 밀어냈다.

“우우우-!”

삐이익! 삐익!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부는 동안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플레처를 둘러싼 채로 손으로 밀어 댔고, 선덜랜드 선수들이 달려와 그를 감쌌다.

플레처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는 것처럼 양손을 들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정지우는 빠르게 신준석에게 달려갔다.

“끄으으!”

발목을 부여잡고 버둥대는 것으로 봐서 통증이 심각한 모양이었다.

팀 닥터가 스태프 한 명, 그리고 앤디 킴과 달려왔다.

그때 선덜랜드의 로드웰이 다가왔다.

“비켜!”

정지우는 그를 밀어냈다.

“사과하려는 거야! 이럴 필요 없잖아!”

“상태를 모르니까 저리 가라고!”

정지우가 다시 그를 밀어내는 순간이었다.

와락!

로드웰이 정지우의 가슴을 확 밀치고 달려들었다.

와라락!

정지우는 놈의 팔을 밀치며 그대로 앞으로 나갔다.

삑! 삑익! 삐익!

꼴 같지 않은 휘슬?

이런 건 어차피 경고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지우가 경고를 먹으면 발을 뻗었던 플레처는 퇴장을 당할 확률이 높아지는 거다.

“Ji! 참아! 참아!”

무둔바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정지우의 앞을 힘껏 막아섰다.

“동업자 정신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냐! 너, 이리 와! 와 봐!”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로드웰이 신준석에게 다가온 건 파울이 미안해서가 아니라 선덜랜드 동료들이 기죽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서 플레처가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주심에게 보이려는 의도도 포함된 거였고.

“물러나! 물러나라고!”

주심이 정지우의 코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바싹 다가와 냉정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쓰러진 선수를 향해 오는 걸 가만두고 보라고?”

정지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영어는 이럴 때 정말 커다란 위력을 발휘한다.

동양인 선수는 의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수동적이라고 느끼는 주심들에게 정지우의 능숙한 영어는 늘 효과를 발휘하곤 했었다.

지금처럼.

“여기서 더 나서면 경고를 줄 수밖에 없어.”

예상대로 주심은 카드를 꺼낼 마음이 없었다.

“너무하잖아! 공을 차는 선수에게 발을 뻗었어! 발목이 나가면 선수 생활 끝나는 거 아냐!”

“알았다니까! 그 부분은 내 고유 권한이야! 더 나서는 건 곤란해!”

데이빗이 다가와 정지우의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목을 감싸 안았다.

함께 생활한 시간이 긴 선수들끼리 손발이 맞는다는 건 바로 이런 거다.

물러서야 할 때 적당하게 명분을 만들어 주는 것.

여기까지가 좋았다. 주심의 권위를 더 건드려서는 곤란한 거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관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쳐 주는 가운데, 신준석이 쩔뚝거리며 그라운드 바깥으로 나갔다.

주심은 플레처를 향해 옐로카드를 높다랗게 들었다. 당연하게 로드웰에게는 구두 경고를 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전반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정규 시간은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신준석 선수가 큰 부상이 아니어야 할 텐데요.』

그라운드 바깥에서 신준석의 발목 상태를 점검하는 팀 닥터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다.

저 녀석의 성공을 위해 온 가족이 매달리다시피 했고, 지금은 영국으로 건너와 벤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신준석의 부친은 이를 꽉 깨물고 아들인 신준석과 골대 앞에 있는 정지우를 보았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쓰러진 아들의 앞을 지키고 있다가 상대 팀 선수와 드잡이를 마다치 않는 정지우를 보며 울컥한 건 있었다.

덩치가 산만 한 서양 선수들이다.

알고 지내서 그런지 정지우는 그들보다 좀 약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상대 선수에 비해 조금도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덩치가 산만 한 무둔바가 나서서 겨우 뜯어말릴 정도로 거칠게 달려들었었다.

주심에게 따지고 들던 모습은 또 어떤가.

그래! 고맙다! 오늘 또 네가 크게 도와줬다.

내 안 잊으마!

너 같은 친구가 없는 곳에서 저렇게 당했다면 지켜보는 아비 심정이 얼마나 새카맣게 탔겠니.

정신이 어질어질할 정도의 응원 속에서 아들이 일어나 터치라인 바깥에 서는 것이 보였다.

신준석의 부친은 조심스럽게 숨을 뱉어 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신준석 선수가 들어왔습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모양입니다.』

『유니온 시티가 라인을 좀 더 끌어 올린 것 같은데요?』

『그러네요. 수비 라인이 훨씬 위로 올라왔어요. 뒤를 뚫리는 한이 있더라도 중앙 지역의 우위를 확실히 잡고 가겠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경기는 좀 더 치열해졌다.

중앙선을 중심으로 공을 뺏고 빼앗겼으며, 거친 태클, 몸싸움이 수시로 벌어졌다.

개막전이다.

승점 3점으로 단박에 리그 1위도 되는 경기, 그리고 이 경기에서 승리해야 다음 경기를 좀 더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다.

유니온 시티나 선덜랜드 모두 강등을 면하기 위해서는 하위권에 속한 팀을 잡아야 한다는 계산까지 더해져서 더더욱 양보하기 어려운 경기였다.

대기심이 5라는 파란색 숫자를 높다랗게 들었다.

5분의 추가 시간은 적당한 수준이었다.

신준석은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라파엘을 따라 좀 더 올라간 신준석이 중앙선에서 움직이는 공을 따라 좌우로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저놈이 원래 센스는 좀 있었다.

퍼어어엉!

선덜랜드 로드웰이 자기 진영 안쪽에 있는 수비수 매튜스를 향해 공을 길게 차 주었다.

중앙선에서 치고받는 것을 잠시 쉬자는 의미였고, 좁은 지역에 모여 있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끌어내겠다는 의도였다.

양 팀이 빠르게 라인을 정비했다.

프리미어리그 20개 팀에서 하위에 속한다고 꼽히는 두 팀이다.

막말로 고만고만한 실력이어서 더 치열할 수도 있었다.

투욱!

공은 선덜랜드의 골키퍼 판틸리몬에게 갔다가 바로 앞에 있던 카불을 거쳐, 반대편에 서 있는 수비수 반 아놀트에게 넘어갔다.

퍼어어엉!

데니와 레믹이 달려들자 반 아놀트는 11번 존슨을 향해 대각선으로 기다랗게 공을 넘겼다.

꼼빠니와 그 뒤에 스웰던이 버티는 방향이었다.

발재간이 있는 꼼빠니가 앞에서 달라붙는 사이에 스웰던이 존슨의 뒤에서 달려들었다.

꽈악! 콱!

스웰던이 존슨의 상의 뒤를 당겼고, 존슨은 스웰던의 앞쪽을 붙잡고 뒤엉켰다.

투욱! 툭!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그사이, 꼼빠니가 발바닥으로 끌어내는 것처럼 존슨의 발 틈에서 공을 빼냈다.

“우와- 아!”

패스를 할 줄 알았던 꼼빠니가 빠르게 공을 치고 달렸다.

데이빗과 카알, 맥슨과 레믹이 꼼빠니를 따라 선덜랜드의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달려들었다.

투우욱!

꼼빠니는 달리는 데이빗의 앞으로 공을 흘려주었다.

와락!

코아체스가 달려 나왔지만, 데이빗이 좀 더 빨랐다.

투욱!

데이빗은 오른쪽에서 달리는 카알에게 바로 공을 넘겼다.

“예아-!”

수비수들이 페널티 에어리어에 있었지만, 빠른 패스에 흔들려서 골대 한쪽이 훤히 보였다.

글자 그대로 완벽한 슈팅 찬스였다.

퍼어어엉!

카알은 달려가던 탄력을 이용해 힘 있게 슈팅을 날렸다.

그러나 골대 하나만큼 위로 떠 버리는 바람에 관중석 중간으로 그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삐이이이익! 삐이익!

전반이 그렇게 끝났다.

골대를 벗어나 통로를 향하던 정지우는 어쩐지 묘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판틸리몬이었다. 그가 생긴 것과 다르게 도전적인 눈빛으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골키퍼끼리 공을 넣는 건 아니니까.

그가 무실점을 기록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지우의 실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닌 거다.

벤치에 있던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설 때 정지우는 터널로 들어섰다.

“괜찮냐?”

“발목이 우리우리하다.”

신준석이 독특한 표현으로 발목의 통증을 설명해 주었다.

라커룸으로 들어간 선수들이 일제히 물을 들이켰다.

8월의 한낮에 뛰는 경기여서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그만큼 갈증이 심하게 느껴졌다.

“You O.K?”

못 알아듣기가 더 어려울 것 같은 무둔바의 질문에 ‘O.K! Thank you!’ 하고 신준석이 답을 했다.

정지우가 작은 물병에 반쯤 남은 물을 단숨에 마시고 났을 때였다.

“Ji!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레믹이 답답한 얼굴로 정지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처럼 물러서지 말고 네 플레이를 해. 뒤에서 보니까 오늘 컨디션 최고던데?”

“그렇지?”

놈이 완벽하게 고민을 해결한 얼굴로 옆에 있는 맥슨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저 정도로 한결같이 들쭉날쭉하기도 쉽지 않을 거다.

“프리미어리그 별거 없지?”

정지우의 말에 동료들이 시선을 주었다.

“연습했던 대로 패스할 때 좀 더 강하고 빠르게 차. 실수 따위, 서로 메워 주는 거로 하고 연습했었던 대로 하자.”

빤한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엄청난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처럼 동료들이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선덜랜드 역시 중앙선에서 한 번에 넘기는 패스를 주지 못하고 있었어. 왜 그럴까? 미드필드에서 치고받는 것보다 한 방에 넘어오는 게 더 편할 텐데?”

“역습을 두려워한다는 건가?”

질문을 던진 데이빗이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카알을 본 다음이었다.

“결정적인 기회는 우리가 더 많았어. 레믹을 좀 더 밀어주자. 레믹! 후반에는 수비 걱정 덜고 역습을 노려. 그래서 우리와 우리의 마스코트에게 승리를 안겨 줘.”

“내 역할이 원래 그런 거 아냐?”

촐랑이 레믹이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태도로 답을 했다.

“밀어붙이는 척하지만, 선덜랜드는 엉덩이를 빼고 있는 거야. 그 뒤를 찔러 주자! 후반에 가진 걸 다 쏟아붓자! 지고 주저앉는 것보다 이긴 후에 쓰러지는 게 훨씬 통쾌하지 않을까?”

“오호!”

쓰러진다는 표현 때문이었는지 스웰던의 눈이 번들번들 빛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