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개막전 (2)
골키퍼 선발은 정지우였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개막전과 리그 경기 선발 최초 동양인 골키퍼의 타이틀이 이틀 뒤면 정지우의 몫이 되는 발표였다.
그 외에 리저브 팀에서 올라온 웨스 모건과 데니가 선발에 뽑힌 것까지를 포함해, 개막전 명단은 커뮤니티 실드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선수층이 얇은 덕분에 동기 셋이 서브로 올랐다는 것 역시 변함이 없었다.
바튼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신준석과 이정렬을 내려 준 정지우는 박상민과 함께 집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많이 피곤하지?”
“오늘 훈련은 별거 없었어요.”
“그래도 훈련을 마쳤는데 힘이 들지. 얼른 옷 갈아입어.”
반겨 주는 사람과 이런 대화를 나눌 집이 생겼다.
전은주가 돌아온 것 하나로 말이다.
“난 옷 갈아입을게.”
박상민이 방으로 올라가고 난 다음이었다.
“저 병원에 좀 다녀올게요. 한복 전해 주고, 알려 줄 것도 있어서요.”
‘저녁은?’ 하는 전은주의 시선을 본 정지우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밥을 걱정해 주는 누군가가 집에 있다니.
“저녁 먹기 전에 들어올 거예요.”
“그래. 잠깐 기다려.”
전은주가 가져다준 보자기를 든 정지우는 바튼과 함께 다시 집을 나섰다.
한복을 본 릴리와 메기의 반응은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아차 싶은 것도 있었다.
족두리를 머리에 올리려던 릴리가 아쉬운 표정을 지어서였다. 빠져 버린 머리칼 탓에 비니를 벗기 곤란한 모양이었다.
“줄이 길어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지우는 고무줄을 길게 늘여서 비니 위에 족두리를 얹어 주었다.
“오우! 세상에!”
감탄사를 쏟아 낸 메기가 전화기를 들었다.
그녀는 팔을 쭉 뻗거나 시선을 떨궈 저고리와 치마를 내려다보는 릴리를 계속해서 찍었다.
“Ji, 같이 찍어.”
“그럴까요?”
정지우는 메기의 권유대로 릴리의 옆에 앉아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선발은? Ji가 골키퍼 맞아?”
“개막전 선발은 확정됐어. 릴리는 어때?”
“나…….”
릴리가 옷고름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뭔데? 결과가 안 좋아?”
“아니!”
장난을 마친 릴리가 환하게 웃으며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나! 가도 된댔어! 그날 마미와 닥터 데이지도 함께 가기로 했어!”
“예에!”
정지우는 릴리를 번쩍 들어서 얼굴 위로 올렸다.
맑은 웃음소리, 기쁨과 기대가 가득한 파란 눈동자.
손에 느껴지는 무게가 너무 가벼운 것이 가슴 아팠지만, 그건 점점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정지우의 웃음, 릴리의 환호, 그리고 메기의 반응이 워낙 요란해서 지나가던 직원들이 안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이어서 데이지가 병실에 들어섰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옷이 어디서 생겼지?”
“닥터 데이지! Ji가 내게 선물해 준 거예요! Ji와 함께 지내는 분이 한국에서 나를 위해 준비했대요!”
“릴리가 아니면 못 입겠는데?”
정지우와 릴리가 바라보는 앞에서 데이지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예쁜 옷을 입으면 나는 옷과 비교돼서 괴물처럼 보일 거야.”
데이지가 양손 엄지와 검지를 눈과 입 끝에 대고 위아래로 쭉 당겼다.
까르르! 하는 릴리의 웃음을 들으며 정지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지의 눈빛이 그녀의 얼굴과 다르게 힘겨워 보여서였다.
이번에는 데이지와 릴리가 사진을 찍느라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럼 나는 가 볼게요. 입장권은 티켓 창구에 맡겨 둘 테니 와서 찾아요. 릴리, 개막전에서 봐.”
“나 잠을 못 잘 것 같아.”
“그럼 안 되지.”
릴리를 안아 준 정지우는 메기와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서 있을 때였다.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로 데이지가 다가왔다.
회색 셔츠에 의사 가운을 덧입었다.
왼쪽 윗주머니에 꽂힌 여러 가지 색의 펜, 그리고 손을 넣고 있는 오른쪽 아래 주머니에 담긴 청진기.
그런데 그 아래로 푸른색의 허름한 수술복 바지에 편해 보이는 신발을 신고 있어서, 어딘가 발란스가 안 맞는 느낌이기도 했다.
“릴리에게 문제가 있나요?”
데이지가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병실에서 릴리를 대할 때 눈이 웃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녀는 힘겨운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문제가 있어요? 경기장에 올 수 있다고 하던데요?”
“Ji, 시간 여유 있어요?”
질문에 질문이 날아왔다.
정지우는 병실 쪽을 바라본 뒤에 입을 열었다.
“한 시간가량은 괜찮아요.”
“괜찮다면 올라가서 이야기하죠.”
데이지가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다시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내려가는 버튼이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올라탔다.
9층 버튼을 누른 데이지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로 말이 없었다. 그녀는 9층에서 내려 복도를 따라 걸은 뒤에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휘이이잉!
선수 터널을 지나 그라운드로 나선 것 같았다.
건물의 반쯤이 옥상처럼 텅 비어 있는 공간이었고, 군데군데 나무로 된 벤치가 있었다.
“스태프들을 위한 장소예요. 가끔 하늘이 보고 싶을 때면 올라오죠.”
동양인 여자가 능숙한 영국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그녀의 복장처럼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앉을래요?”
“그러죠.”
정지우는 벤치의 한쪽에 편하게 앉았다.
건물 끝으로 펼쳐진 유니온 시티의 나지막한 건물들과 그 위로 연결된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메기는 모르는 것 같던데?”
“맞아요.”
답을 한 데이지가 커다랗게 한숨을 토해 냈다.
“수치가 많이 안 좋아요. 개막전을 보는 것에 그런 이유가 포함되어 있어요. 마지막일지 모를 추억을 선물하고 싶은 거요. 메기에게 말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용기가 필요한데, 자꾸만 시간을 끌게 돼요.”
어머니의 마지막 방법도 수술이었다.
“수술이 마지막 기회인 거지요? 다른 방법이 없는 거?”
고개를 끄덕인 데이지를 보자 정지우는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슨 놈의 병이 저 어린아이까지!
어머니를 그렇게 데려갔으면, 그것 때문에 처박혔었던 6년이란 세월을 다시 일어서게 한 아이라면, 뭐 신의 은총이라든가, 그런 게 좀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정지우는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감추지 않은 채로 앞을 노려보았다.
“뭐가 이래!”
불쑥 튀어나온 불평이었다.
병이 다가오지 못하게 침대를 지켜 주기로 했었는데, 정말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였다.
팔을 아무리 뻗어도 릴리가 무서워하는 병을 막아 낼 능력을 지니지는 못한 거였다.
“이제 겨우 잊을 만한데! 사는 게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꼭 이래야 하는 거야!”
한국말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데이지가 바라보는 앞에서 터져 나온 한국말.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도 모를 화가 자꾸만 솟구쳤다.
“방법을 찾아요. 수술의 성공률을 높일 방법! 다른 치료법! 그게 뭐라도 좋으니 그런 걸 찾아봐요.”
정지우는 앞을 노려본 채로 입을 열었다.
“내가 골대를 지키고 공을 막아 내는 것처럼 당신이 릴리를 지켜 줘요.”
“우리 힘으론 불가능해요.”
“그럼 다른 누군가의 힘이라도 빌려요!”
정지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 데이지는 완전히 지친 얼굴이었다. 사실 데이지는 잘못한 게 없는 거였다.
“소리 질러서 미안합니다.”
“아뇨. Ji가 그렇게 화를 내주는 게 오히려 힘이 되네요. 당신이 릴리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요.”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심정인 것이 분명했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나요?”
“개막전을 보고 나면 수술을 할 계획이에요. 후! 경기를 앞둔 당신에게 부담을 줄까 봐 말하지 않으려 했었는데……. 미안해요. 난 릴리를 알고 함께 걱정할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힘겹게 말을 하면서 데이지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환자를 상대하는 의사들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가?
“닥터 데이지가 최선을 다한다는 건 알죠.”
“수술 일정을 잡는 것 자체가 두렵다면 믿겠어요? 내가 릴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수술이 잘못될까 봐! 그게 두려운데 이 방법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섬뜩한 슈팅이 날아올 때 느껴지는 지독한 외로움, 날아오는 공을 향해 몸을 던진 뒤에 손끝을 스치는 공을 볼 때의 두려움.
말을 마친 데이지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정말 다른 방법은 없나요? 하다못해 수술의 성공 확률을 높일 방법 같은 거요.”
데이지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병원의 의료진이나 시설로는 어려워요. 한국이나 일본, 미국에서 수술을 받는다면 가능성을 조금 늘릴 수 있겠지만…….”
정지우의 반짝이는 눈을 본 데이지가 고개를 잘게 저었다.
“Ji, 비용이 너무 엄청나요. 메기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얼마나 되는데요?”
“상상 이상이에요. 거기에 입원, 후속 치료, 그리고 혹시 모를 재수술까지 계산하면…….”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데 얼마나 필요하냐구요?”
데이지가 손가락을 위로 든 채로 손바닥 안쪽으로 눈물을 닦았다. 왜 그런지 데이지는 그렇게 눈물을 닦았다.
“흠! 편차가 너무 커서 가늠이 안 되긴 하는데요. 대략 25만 파운드(한화 4억 3천만 원 상당)에서 50만 파운드(한화 8억 7천만 원 상당)가량 들 거예요.”
“알았어요.”
무슨 소리인가 하는 것처럼 데이지가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그거 내가 준비하죠.”
침묵이 바람을 타고 지나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Ji?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내가 준비하겠다구요.”
“잘못 들었는지 모르겠는데요, 25만 파운드예요.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 최소로 필요한 치료비가 25만 파운드라니까요!”
“25만 파운드, 알아들었어요. 50만 파운드까지 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았구요. 맞죠?”
“Ji? 설마……?”
“내가 비용을 준비한다면 나머지 준비를 해 줄 수 있겠어요? 한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데이지가 그걸 준비할 수 있냐구요?”
“그거야.”
데이지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그럼 그렇게 준비합시다.”
“Ji, 이상한 질문인데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데이지가 의아한 눈빛으로 질문을 던진 다음이었다.
“저기에서 그걸 바라시는 분이 계시거든요.”
정지우는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정지우의 시선을 따라 데이지가 멍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엄마, 이래서 릴리를 만나게 한 거죠?’
답은 없었다.
그러나 릴리를 만나서 슬럼프를 벗어날 수 있었고, 그 뒤로 오늘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Ji, 다시 한 번만 확인할게요. 그러니까 릴리의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을…….”
정지우는 데이지의 양쪽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은 뒤에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내가 전부 부담합니다.”
“50만 파운드까지를요?”
“그보다 더 필요하다면 그것도 부담하죠.”
“릴리 치료비인 거 알죠?”
씨익 웃는 정지우를 보며 데이지가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
“난 휴가를 신청해야 해요.”
“부탁할게요. 비용은 내일 보내 드리죠.”
“아뇨! 그건 청구서가 나올 때 처리하면 돼요. 이거 메기에게 말해도 되는 거죠?”
고개를 살짝 비튼 상태에서 데이지가 질문을 던졌다. 허락을 구하는 눈치여서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우!”
와락!
데이지가 정지우의 목을 느닷없이 끌어안았다.
“닥터 데이지에게 부탁해도 되는 거죠?”
“최고의 수술과 치료를 받는 것만은 확실할 거예요! 고마워요, Ji! 정말 고마워요!”
데이지의 등을 다독이는 정지우의 시선에 하늘이 들어왔다.
‘엄마! 고마워요! 기회 주셔서요!’
여전히 답은 없었다.
파란색 배경에 흰색을 섞은 듯한 하늘과 옅게 흩어진 구름만 시선에 담겼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간 정지우는 퇴근한 박용근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축구 선수를 키우는 집에 친구가 와서 함께 지내는 딱 그런 분위기였는데, 전은주가 있는 것과 없을 때의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신윤희가 들었다면 서운할 이야기인데, 뭔가 차원이 다른 아늑함이 전은주의 손길에서 나오는 느낌이기도 했다.
박상민은 확실히 말이 많아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훈련이나 영상을 보며 궁금했던 것들을 박용근에게 질문했다.
그 바람에 박용근은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가 궁금한 것을 묻고 있는데 밥 먹겠다는 이유로 답을 미루는 성격이 아닌 탓이었다.
“야! 감독님, 식사하시게 좀 나중에 해!”
“어? 그래?”
보다 못한 정지우가 나섰는데 박용근이 웃으며 박상민의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어머니, 우리 비벼 먹어요!”
그때 정지우가 무심결에 건넨 말이 식탁에 침묵을 확 뿌리고 어디론가 몸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