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개막전 (1)
저녁 식사는 신준석과 이정렬의 가족이 모두 모였다.
식사를 마치고 월드컵 예선전을 볼 수 있어서 함께할 타이밍으로도 적당했다.
기쁘고 반가울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차려 놓은 음식마다 잔가시가 하나씩 박혀 있는 것처럼 밥을 먹는 내내 껄끄러운 느낌이었다.
거, 왜 그런 거 있잖나.
다들 느끼고 알 수 있는데 말로 꺼내기 그런 거.
이정렬 부친의 눈빛과 표정에 묻은 앙금과 털어 내지 못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내가 뭘?’ 하고 반문하면 증거를 댈 수 없는 그런 종류이기도 했다.
하여간 저녁을 먹었고, 다들 소파에 앉아 TV에 시선을 주었다.
케이블 스포츠 채널을 통해서 보는 중계였다.
당연하게 앵커와 해설자가 영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김문호’와 같은 이름 외에는 알아듣는 말이 없었다.
간혹 중요한 멘트가 있을 때마다 정지우나 유정호가 우리말로 알려 주었는데, 앵커와 해설자는 한국의 이번 예선전이 무척이나 힘겨울 거라는 멘트를 주로 나누었다.
“지우야, 넌 그럼 일어도 이 정도 수준이냐?”
“예?”
“아니, 고작 3년인데 워낙 오래 산 사람처럼 말을 해서 묻는 거다. 너 일본에서도 3년 정도 있지 않았냐?”
“예.”
경기가 아직 시작하지 않은 틈을 타서 신준석의 부친이 건넨 질문이었다. 언젠가 비슷한 대화를 나눈 것 같았는데, 그때는 공의 방향을 어떻게 알게 되었냐는 내용 같았다.
커다란 사각 탁자에 과일과 음료수, 물병이 놓여 있었고, 그 주변에 삥 둘러앉은 이들의 시선이 전부 정지우를 향해 있었다.
“혼자였으니까요. 중계만 계속 봤어요. 일본에서 말을 익힌 과정이 영어를 익히는 데도 도움이 됐구요. 또 골키퍼는 수비수들에게 지시를 해야 해서 좀 더 빨리 는 것도 있구요.”
“그러니까 일어도 이 정도는 한다는 거구나?”
“저도 아직 못 알아듣는 거 많아요.”
그때 경기가 시작되었다.
김문호는 결국 이진용을 골키퍼로 기용했으며, 유병조를 제외한 선수들, 최윤섭, 황지선, 조성환을 선발로 내세웠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UAE 팀 관중들이 일방적인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경기장 한쪽에 오래전 유행했던 붉은색 옷을 입은 교포 응원단이 태극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일방적인 경기였다.
선 수비, 후 역습을 노리고 있음을 시작과 동시에 알려 줄 만큼 한국 대표팀은 라인 전체를 웅크렸다.
문제는 두드려 맞다가 기회가 생겼을 때였다.
두 번쯤 패스가 연결된 뒤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바로 공을 빼앗겼다.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한국 팀이 오늘은 이름값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선전 성적이 나빴던 이유가 오늘 경기에 전부 나와 있습니다. 수비, 미드필드 지역, 공격, 총체적인 난국입니다.』
굳이 앵커와 해설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선수들끼리 손발이 전혀 맞지 않아서 지켜보기 힘겨울 정도였다.
게다가 테크니컬 지역에 서서 고함을 지르는 김문호의 지시가 선수들에게 전혀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전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한국 팀은 허둥지둥 공을 걷어 내기에 바빴다.
응원은 고사하고 지켜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의 경기였다. 솔직히 김문호가 감독을 맡지 않았다면 아예 이 시간에 선덜랜드의 경기 영상을 보는 것이 훨씬 더 남는 일일 거였다.
이상한 피리 소리, 탬버린처럼 생긴 작은 북을 치는 소리, 함성,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애처롭게 들리는 ‘대- 한민국’ 하는 응원이 경기를 소리로 표현하고 있었다.
짜임새가 전혀 없는 엉성한 경기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는 경기였다.
김문호가 선발한 선수들이 악착같이 몸을 던지며 슈팅을 막아 주었는데, 솔직히 UAE 선수들의 효과적이지 못한 공격이 점수를 만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엄청난 인내 속에서 45분이 끝났다.
『한국 팀이 전반전을 겨우 넘겼습니다.』
앵커의 한마디 뒤에 하이라이트 장면이 나왔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UAE를 상대로 몸을 던지는 우리 선수들의 모습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힘겹게 얼굴을 쓸어내리는 김문호를 보여 주었다.
소파 주변으로 정적이 흘렀다.
협회가 어떤 횡포를 부렸든 간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기를 지켜보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큼, 저희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후반을 포기했는지 이정렬의 부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바라보는 이정렬과 모친의 표정에서 의논 없이 혼자 결정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뭐랄 것은 없었다.
“아버지, 전 그럼 더 보고 갈게요.”
“말 한마디 못하는 우리만 가라는 거냐?”
이정렬이 난처한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다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서 5분 거리다. 그렇더라도 저렇게까지 말하는 두 양반을 그냥 가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다.
“감독님,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지우야, 낼 보자.”
그렇게 3명이 자리를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바로 전반 경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기보다 이정렬 부친의 태도를 입에 담지 않으려는 노력과 같았다.
26살인 정지우가 보기에도 이정렬 부친은 무언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입에 담을 문제는 아닌 거였다.
“아효! 아버님도 참!”
그때 유정호가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정렬이 아버님께서 낮에 방송 출연을 물어보시더라구요. 지우랑 같이 나가는 조건으로 정렬이까지 불러 준다고. 이참에 인터뷰에 응해 주면 어떻겠냐고 하시기에 제가 안 된다고 말씀드렸거든요.”
느끼하게 생긴 남자가 TV 화면에 턱 선을 내밀고는 남성용 화장품을 알려 주는 앞이었다.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이야기여서 정지우는 멍한 얼굴로 유정호를 바라보았다.
“감독님이나 내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자꾸 정렬이 아버님 쪽으로 전화를 뚫나 봐. 지난번에 인터뷰했던 기자가 꼬드기는 것 같기도 하고. 이참에 인터뷰 좀 하는 게 뭐 어떠냐고 많이 서운해하시던데.”
신준석의 부친이 나직하게 ‘흠.’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걸 그만하라는 의미처럼 보였다.
“간식 좀 가져다줄까?”
“아뇨, 누나. 뭐 드실래요? 과일이 좋다고 하던데요?”
“얘는! 그런 거 아냐.”
정지우의 권유에 신윤희가 얼른 고개를 떨궜다.
아무튼, 하프타임이 지났다.
그리고 그렇게 후반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추웠던 골방에 전기난로를 피워 놓은 것처럼 분위기가 좀 더 나아졌다.
대화 도중 간간이 웃음도 나왔다.
그렇다고 경기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반과 똑같이 골을 만들려고 애쓰는 UAE의 공격을 한국 대표팀이 겨우겨우 막아 내는 플레이가 이어졌다.
이진용이 높다랗게 뜬 공을 잡기 위해 달려 나왔다가 겨우 쳐 내고 얼른 골대를 향해 뛰었다.
“방향이 잘못된 거지?”
쳐 낸 공이 페널티 에어리어 정면에 떨어지자 박상민이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낮에 선덜랜드 영상을 보며 나눴던 대화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판단이 늦었어. 뛰어나올 거였으면 좀 더 일찍 나와서 아예 공을 잡았어야 돼. 골키퍼가 먼저 자리를 잡으면 상대 팀은 파울이 아니고는 자리를 뺏지 못하거든.”
“그렇구나.”
골키퍼의 움직임이라 편하게 건넨 대답이었다.
“역습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러나 박상민이 다시 던진 질문에 아예 답을 하지 않았다.
박용근은 물론이고, 신준석의 가족들이 있는 앞에서 다른 포지션에 대해 아는 척하기 싫어서였다.
다행히 박상민의 질문은 혼잣말처럼 지나갔다.
아찔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이진용이 겨우 막아 낸 공이 바로 앞에 서 있던 UAE 선수의 발에 제대로 걸린 거였다.
그냥 골이었다.
그런데 불과 골대 3미터 앞에서 날린 슈팅이 골대를 훌쩍 넘어가고 말았다.
힘이 들어가서 그런 것이겠지만, 저렇게 가까운 곳에서 일부러 크로스바를 넘기라고 시켜도 제대로 할까 싶을 정도의 슈팅이었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바닥에 쓰러지는 일이 잦아졌다.
엄청난 야유와 물병이 날아들었는데, 수비를 해내던 선수들이 발에 쥐가 난 거여서 저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경기가 어떻게 끝나든 간에 김문호의 수명이 어느 정도는 줄었을 게 분명했다.
삐이이익! 삐익! 삐이익!
추가 시간까지 모두 끝났다.
물병과 야유가 그라운드로 사정없이 날아들었고, 카메라는 전반의 마지막과 마찬가지로 처참한 표정으로 서 있는 김문호 감독을 비춰 주었다.
이런 경기에 할 말이 뭐가 있겠나.
다들 찜찜한 분위기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게시판은 김문호를 향한 욕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경기가 흐뭇한 몇 명도 있었다.
조동익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려놓으며 지난 새벽에 있었던 축구를 떠올렸고, 느긋한 마음으로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살폈다.
나만 아니면 되지!
김문호가 멋지게 달려 나가서 시원하게 욕을 먹어 주고 있어서, 협회 이야기가 나왔다가도 바로바로 묻히고 있었다.
게다가 ‘협회가 새 사람을 구했는데도 안 되는 거 아니냐!’로 분위기가 몰리고 있었다.
“저 죽일 놈들만 무너지면 된다!”
간혹 박용근과 정지우의 이야기만 나오지 않았다면 월드컵은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될 거였다.
하여간 이제는 마지막 경기를 마친 김문호가 월드컵 예선 탈락이라는 거센 여론을 맞고 통렬하게 죽어 주는 일만 남은 거여서, 조동익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서운 인간.’
조동익은 허양수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혹시 UAE전을 비기게 되었는데 해외에서 박용근과 선수들이 무섭게 활약하면 곤란해진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박용근 밑에 있는 선수들을 빼내라.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해내는지.
바둑으로 치자면 조동익이 첫 돌을 올려놓을 때 허양수는 계가를 하는 수준이 아닌가.
하긴 바둑판과 돌을 주면 알까기를 생각하는 한승관도 있기는 있다.
자! 상황이 이러니 죽기보다 싫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박용근과 정지우가 능력이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단판으로 결정 나는 FA컵과 친선전 성격이 강한 커뮤니티 실드에서 성과를 보였다고 세계 최고 수준의 리그에서 계속 먹히리란 보장은 없는 거다.
만약 계속 먹힌다면?
허양수의 다음 계책이 호랑이처럼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가, 박용근과 정지우의 대가리를 버적버적 깨물어 먹을 거니까 상관없다.
“하아!”
검찰 수사 적당하게 넘겼지, 협회 부회장 자리 지켰지, 월드컵 예선 탈락의 고비를 넘길 방법 빵빵하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는 거다.
조동익은 혹시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저놈들이 사우디아라비아를 4점 차로 이겨?
그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한국이 포함된 B조 최강팀이 사우디아라비아다.
좋다! 박용근이 정지우와 키즈들을 다 데려온다고 치자!
그러나 축구는 11명이 필요하고, 후보까지 최소 18명에서 22명이 필요한 경기다.
조동익의 말을 충실히 따라 주는 선수들이 알아서 또 정리해 주지 않겠나?
“푸하하하!”
조동익의 웃음이 허양수의 것보다 작은 그의 사무실을 떠다녔다.
***
바닥에 찍어 놓은 표식을 좌우로 뛴 다음, 앞으로 달려 나가는 기본 훈련에, 수비와 미드필드의 라인을 유지하거나 포메이션별로 공수 연결 훈련이 이어졌다.
토요일 2시 경기를 앞두고 있어서 목요일과 금요일 훈련은 컨디션을 끌어 올리는 수준이었다.
훈련을 마친 정지우는 골키퍼 코치와 점프를 늘릴 방법에 대해 의논했고, 이어서 지난 시즌 상대 팀들의 득점 상황을 담은 영상 전체를 요구했다.
“영상을 전부?”
“순서대로 하자구요. 선덜랜드전이 끝나면 다음이 웨스트햄이니까, 그 팀의 득점 영상을 주면 되죠. 우리 팀 제외하면 전부 19팀이니까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전에 박 감독님께 전한 영상도 있잖아.”
“득점 상황만 따로 있었으면 싶어요.”
“오케이.”
답을 한 골키퍼 코치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골키퍼 코치로 일하면서 자네를 만난 것에 감사해. 오랜 기간 골키퍼들을 훈련하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무실점을 목표로 훈련한 적은 없었다.”
골키퍼 코치가 함께 일어서며 굳은 얼굴로 말을 건넸다.
“나와 우리 팀 스태프들은 자네가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다.”
“정상으로 안 보인다는 것은 아시죠?”
골키퍼 코치가 졌다는 투로 웃었다.
“대신 성공하면 나와 우리 스태프의 공을 반드시 언급해 줘야 해.”
“약속하죠.”
정지우가 내민 손을 골키퍼 코치가 힘껏 마주 잡았다.
사무실을 나선 정지우가 동기 셋을 만나러 갔을 때 분위기가 술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선발 명단이 나왔어, Ji.”
정지우의 질문에 웨스 모건이 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