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그런 거 우리도 연습했어! (2)
TV 앞에 있던 장진모가 노가리의 머리를 뚝 잘라 냈다. 탁자에는 빈 맥주 캔이 여러 개 줄을 서 있었다.
“그만 마시지?”
“거! 형은 다 나쁜데 속 좁은 게 제일 나빠.”
맞은편에 앉았던 부장이 흐느끼는 것처럼 웃었다.
“기사는 내가 알아서 씁니다. 저런 경기를 보고 어떻게 기사를 안 쓰겠어요? 그리고 내가 형 보여 줬어? 정지우랑 나랑 같이! 어! 저녁도 먹고! 홍삼도 먹고! 어! 나 그런 사이야!”
장진모가 탁자에 있던 전화기를 들었다.
“야! 봤다! 봤어! 정지우가 마지못해 웃어 주는 사진!”
“어허! 또 그러신다! 내가 선물까지 사 줬더니!”
“미친놈. 세일이라는 딱지나 좀 떼고 주든가. 그리고 인마! 영국까지 가서 오는 놈이 머그잔이 뭐냐? 그것도 똑같이 정지우 사진 그려진 머그잔 세 개. 물 마실 때마다 무섭다.”
장진모는 전화기의 사진을 확인하는 척하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너! 거기 같이 사진 찍은 여자가 에이미인가 하는 그 아가씨냐?”
“그걸 언제 봤어요?”
“가관이더구먼. 난 네놈이 그런 얼굴 하는 거 처음 본 거 같다. 아니지! 언제였냐? 그 피아노 학원 하던 아가씨?”
“왜 이래요? 또?”
“알았다. 그런데 경기 끝났는데 우린 아예 기사 안 쓰기로 한 거냐?”
“동재가 쓰고 있어요. 나는 구단에 연락해 봐서 추가 기사 쓰기로 했구요.”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앞에서 장진모는 밖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런데 형, 그 기사는 언제 터트릴 겁니까?”
“이게 어쩐지 이상하게 돌아간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편안한 셔츠 차림의 부장과 목이 늘어진 면 티를 입은 장진모의 눈빛과 표정이 한순간에 진지하게 바뀌어 있어서 그랬다.
“원래 조동익이 비리 혐의로 날아간 다음에 터트려야 효과가 큰 건데, 이 인간이 검찰 조사 이후에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어서 자칫하면 모함 기사처럼 보일 수 있다.”
“흐흠.”
“거기에 어설프게 건드려 놔서 아파트 받은 거랑 분당 상가 받은 것까지 합법적으로 처리해 버렸거든. 그러니 이 기사 내보내 봐야 허양수를 잡기는커녕, 또 피할 구멍만 만들어 줄 가능성이 높지.”
설명을 들은 장진모가 탁자에 놓인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영국과는 언제 통화할 거냐?”
“저기 행사 다 끝나야 여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제도 통화했나 보던데?”
“오늘 경기 상황 물어보려고 전화했던 건데요……. 아니, 나한테 누구 붙여 놨어요? 분명 나 혼자 있을 때 한 건데?”
“네놈 주둥이에서 영어가 튀어나오는데 소문이 안 나겠냐?”
장진모는 대꾸도 하지 않고 맥주 캔을 거꾸로 들어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고 있었다.
부장이 탁자에 몸을 가까이 가져오며 장진모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봐. 너, 에이미인가 하는 그 아가씨 좋아하지?”
“캑! 쿨럭!”
“에이! 더러운 새끼!”
부장이 빠르게 팔을 움직여서 몸에 튄 맥주를 털어 냈다.
선수들이 돌아가며 팔각으로 된 우승 트로피를 높게 들었다.
“예에에에!”
관중들은 마치 자신이 그 트로피를 든 것처럼 흥분하며 함성을 질러 주었는데, 정지우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지역 축구팀은 할아버지, 혹은 이전부터 함께해 온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정지우는 트로피를 높게 들었다.
“예에에에에에-!”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와 달려드는 방송용 카메라보다 관중들이 질러 주는 함성이 훨씬 더 기쁘고 고맙다.
옆에 있던 박상민에게 트로피를 건네준 정지우는 웸블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놓쳤던 파브레가스의 슈팅이 자꾸만 가슴 한쪽에 박혀서 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가 세계적인 선수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 이상 잘하는 선수가 팀마다 한두 명씩 있는 곳이 프리미어리그인 거다. 그러니 오늘처럼 섬뜩한 슈팅을 계속 상대해야 한다면 부족한 무언가를 찾아내야 하는 게 옳은 일이다.
간단하게 기자회견을 마친 정지우는 동료들과 샤워를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한국에서 온 동기 세 놈은 경기 전보다 더 흥분한 얼굴이었다.
“상민아!”
정지우는 건너편 두 칸 뒤에 앉은 박상민을 불렀다.
의자 틈에서 일어난 박상민이 정지우의 손짓을 보고는 통로를 걸어 옆자리에 앉았다.
“집에 전화 드렸어?”
“아니.”
“전화 드려.”
“지금?”
“그래. 기다리실 거야.”
박상민이 주저하는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다.
부모들이 와 있는 신준석과 이정렬도 그렇지만, 이럴 때 전화할 곳이 없는 정지우의 입장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전화기 가져왔어?”
“가방에 있어.”
“그럼 얼른 가서 전화 드려.”
“미안하다.”
정지우가 픽 하고 웃는 것을 본 박상민이 자리로 움직였다.
어둠이 천천히 손을 내미는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조금만 더 나이가 있었더라면, 어머니를 그렇게 안타깝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정지우는 손바닥을 차창에 붙였다.
손가락 사이로 기울어지는 햇살이 파고들었다.
직업병인 거다.
어쩐지 햇살을 막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말이다.
한국은 꽤 늦은 시간일 거였다.
출근해야 하는 어머니를 생각해 보기도 해야 했다.
그러나 박상민은 전화기에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가 아는 노모는 경기 전날이나 활약이 뛰어났던 날이면, 싱크대 수도꼭지 옆에 맹물을 떠 놓고 빌곤 했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보고 계셨을까?
혹시 지친 삶에 모르고 있었는데 괜히 잠을 깨우는 건 아닐까?
[여보세요?]
“엄마? 나.”
노모는 대뜸 울먹이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일은? 축구 봤다. 아버지도 보셨어.]
“나 잘했지?”
[그러엄. 우리 아들 정말 잘했어.]
“그런데 왜 울어?”
아들에게 들릴까 싶어 울음을 감추려는 답답한 숨소리가 울음보다 서럽게 들렸다.
“엄마, 나 잘 있어. 여기 정말 좋아. 미안해. 나만 이렇게 잘 지내서.”
붉어진 눈을 감추기 위해 박상민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셔. 내가 아버지랑 꼭 호강시켜 드릴게. 응?”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 후에 겨우 꺼내 든 ‘그래.’ 하는 답이 있었다.
[엄마가 주책이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잘했는데. 축구하는 모습 보니까 좋아서 그런 거야.]
“알아.”
[감독님 말씀 잘 듣고! 지우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알았어요. 아버지는?”
[약 드시고 주무셔. 내가 내일 아침에 말씀드릴게.]
몇 마디 안부를 더 전한 박상민은 전화를 끊었다.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었다.
경기가 있었고, 그 경기의 내용이 짜릿했기 때문에 식탁 위로 흥분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다들 눈치를 살피느라 누구도 입을 열지는 못했다.
우선 혼자 지내는 정지우가 걸리는 모양이었고, 다음으로 마지막에 겨우 그라운드를 밟아 봤던 신준석의 입장을 배려한 것으로 보였다.
돼지 불고기가 식탁에 올라와 있었다.
요게 참 묘하다.
전은주가 만들어 준 것은 아무리 먹어도 물리는 법이 없는데, 신윤희가 만든 것은 단맛 때문에 많이 먹기 어렵다는 거 말이다.
어머니의 손맛이란 말을 이런 때 쓰는 건가 싶었다.
정지우가 계란말이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지우야, 그런데 너 골대에 맞고 공 튀어나온 직후에, 그때 왜 그렇게 무서운 눈을 했던 거냐?”
신윤희가 만든 불고기를 밥 위에 잔뜩 올린 신준석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거 골을 먹었어도 할 말 없는 슈팅이었거든. 그게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났어.”
신준석과 이정렬의 가족들이 무슨 소리인가 하는 눈으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골키퍼가 한 골을 안 먹을 수는 없는 거잖냐.”
정지우를 향한 시선을 설명한 것처럼 신준석이 질문을 던졌다.
“글쎄.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골을 먹을 뻔했던 순간을 다 그러려니 하고 넘겨서는 안 되는 거 아닐까? 왜 못 막았는지, 왜 그런 순간이 나왔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다음번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알아챌 수 있으니까.”
답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동기들은 동기들대로, 가족들은 가족들끼리 시선을 마주치며 정지우의 답을 듣고 있었다.
박용근이 묵묵하게 듣고만 있어서 화제는 거기에서 골을 넣는 순간으로 넘어갔다.
식사가 끝났다. 다 같이 보약과 홍삼을 순서대로 먹고서 소파에 앉았다.
아직 잠이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유정호의 전화와 박용근의 전화기가 꾸준히 울려서 무음으로 처리해 놓은 것을 제외하면 특별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소파에 앉아 있는 신준석과 이정렬 가족의 표정이 좀 묘했다.
가족들끼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싶었다.
불편한 곳에 끼어 있는 게 싫었던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감독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정렬의 부친이 곤란한 표정으로 신준석의 부친을 바라본 뒤에 입을 열었다.
“지우, 너도 좀 들었으면 싶다.”
박용근이 등을 세웠고, 정지우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사모님도 오셔야 하고, 여기 윤희와 유 대표가 지내기도 그렇고 해서, 이번에 준석이와 우리 애가 지낼 곳을 따로 준비해 놓고 갈까 합니다.”
정지우는 뜻밖의 말이었는데, 박용근은 짐작하고 있었던 얼굴이었다.
“윤희가 있다고는 해도 사모님께서 오시면 분명 우리 아이들 뒤치다꺼리까지 하실 분이어서 어렵게 내린 결정입니다.”
신준석의 부친이 설명을 덧붙이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정지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우야, 네게 많은 것을 받았는데 이건 또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니까 그렇게 이해해 다오.”
“예.”
정지우는 간단하게 답을 했다.
신윤희와 유정호, 두 사람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될 만한 제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따님이 일하는 것이 걸렸던 참입니다. 아쉽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있기도 어렵구요. 너무 어려워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박용근 또한 흔쾌하게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네가 애써야겠네?”
“예. 그렇지 않아도 내일부터 좀 알아볼 생각입니다.”
박용근의 질문에 유정호가 바로 답을 건넸다.
그런데 느낌이 묘하게 불편했다.
언젠가 고등학교 때 회식 비용이나 합숙 비용을 이야기할 때의 느낌과도 같았다.
너무 날카롭게 생각하는 건가?
사실 지금 회식비 걷자고 하면 가장 많이 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정지우니까 말이다.
대강 결론을 내린 뒤에 어른들과 유정호가 위층으로 올라갔고, 박용근은 서재로 들어갔다.
“미안하다.”
“뭐가?”
“그냥.”
신준석의 말에 정지우가 픽 하고 웃으며 놈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인마! 막말로 누나 생각하면 그게 맞는 거지.”
정지우는 웃으며 대화를 끝냈다.
묻고 싶었다.
유정호까지 옮겨 갈 계획이라면 이미 며칠 전에 이야기가 나왔을 텐데, 왜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그런데 그걸 묻는 것과 변명 같은 답을 듣는 그 과정이 싫었다. 어쩐지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이 그 답에 묻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경기가 끝나면 일찍 잠이 든다.
잠시 경기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정지우는 침실로 들어갔다.
아침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편안하게 식사했고, 회복 훈련을 위해 박용근, 동기 셋과 함께 레드 블레이트로 향했다.
유정호가 렌트할 집을 알아보기 위해 남아서 박용근은 일단 앤디 킴과 함께 움직였다.
레드 블레이트에 도착한 정지우는 동기 셋과 함께 라커룸으로 향했다.
“하이!”
누구보다 데니 놈이 반갑게 다가왔다.
심지어 이정렬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떠드는 놈을 보자 웃음이 먼저 나왔다.
간단하게 몸을 푼 뒤에 가볍게 달리고, 다시 몸을 풀고, 좀 더 뛴다.
회복 훈련은 무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하는 거였다.
그래서 정말 땀이 나올 정도가 되면 훈련을 마친다.
정지우는 골대를 향해 걸어갔다.
크로스바까지의 높이는 2.44미터다.
187의 정지우가 까치발을 들고 손을 위로 쭉 뻗으면 닿는 높이인 거였다.
골포스트와 포스트 사이, 그러니까 골대의 가로 길이는 높이의 3배, 7.32미터로 정해져 있다.
중앙에 선 골키퍼가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손을 쭉 뻗어서 누우면 2.44미터를 커버하니까, 남는 1.22미터는 점프로 해결해야 한다는 답이 나온다.
더 빨리, 더 정확하게 1.22미터를 커버할 훈련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