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이제 좀 제대로 보인다. (3)
“Ji! Lee! 두 사람 준비해!”
마틴의 지시를 들은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렬아! 너랑 나랑 교체!”
자리에서 일어난 정지우는 운동복 상의의 지퍼를 내렸다.
“우와- 아!”
조끼를 벗던 이정렬이 뜻밖의 함성에 고개를 돌렸다.
벤치 뒤쪽의 관중들이었다.
그들이 정지우가 준비하는 것을 보며 함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뒤늦게 시선을 돌린 이들 또한 곧바로 함성을 지르고 있어서 마치 파도타기 응원 같은 느낌이었다.
정지우와 이정렬이 함께 벤치를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에는 두 사람이 살지!”
첼시의 관중들까지 함께 부르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응원가가 웸블리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꼼빠니 대신에 Lee를 넣는 거야! 중앙에서부터 레믹과 호흡을 맞춰 주고, 기회가 된다면 역습을 노린다! 자네는 페널티킥으로 넘어갈 때를 대비하고!”
정지우를 붙잡은 마틴의 설명이었다.
그 바로 뒤에서 박용근이 이정렬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정지우는 마틴에게 좀 더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커다랗게 말을 건네고 있는데도 함성에 섞여서 지시가 뚝뚝 잘리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스크립터가 대기심에게 달려가 교체를 알리는 동안, 정지우와 이정렬은 터치라인 바깥에 서서 대기했다.
“후! 후!”
이정렬은 긴장을 털어 내려는 것처럼 자꾸만 숨을 뱉어 냈다.
“꼼빠니 자리에 들어가는 거란다! 중앙을 지원하다가 레믹과 역습을 노리는 거!”
“감독님께 들었어!”
이정렬이 정지우의 귀에 대고 커다랗게 답을 한 뒤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는 지는 경기가 없지! 세상에서 제일 강하지!”
모두 일어나 응원을 펼치는 사이에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부친과 모친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함성과 응원에서 나가는 경기라니!
삐이이익!
그때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대기심이 등번호가 적힌 패널을 높다랗게 들자 얀센이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그는 중간에 손을 들어서 박수를 치는 여유를 보였고, 동료들과 손을 마주치기도 했다.
마지막 30초, 1분이 얼마나 처절하고 힘겨운지를 알고 있어서 나온 행동이었고, 이렇게라도 시간을 끌어서 승부차기로 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의도였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관중들이 얀센의 심정을 모를 리 없었다.
박수로 지금까지의 플레이와 퇴장하면서까지 팀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격려해 주었다.
정지우가 들어가고, 곧바로 이정렬이 그라운드를 밟았다.
쿵. 쿵. 쿵. 쿵. 쿵.
“오오- 오! 오오- 오!”
첼시 선수들이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앞에서 정지우는 걷는 속도만큼이나 천천히 달려서 골대 앞에 도착했다.
툭!
왼쪽 포스트를 발로 찼고, 천천히 달려가 오른쪽 포스트를 또 발 안쪽으로 건드렸다. 그리고 중앙으로 와서 높다랗게 뛰었다.
“예에에-!”
유치한 행동일 수 있었다.
그러나 동료들에게 기운을 불어넣고, 응원단에 활기를 넣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였다.
첼시의 프리킥이었다.
중앙선에서 조금 넘어온 지점이라 직접 골을 노리지는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페널티 에어리어 앞은 조심해야 했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자 마티치가 공 앞쪽에서 힐끔 골대를 바라보았다.
라파엘이 수비 라인을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 근처로 끌고 올라가 있어서 공을 찬 직후에 선수들이 달려 들어올 상황이었다.
퍼어어엉!
마티치가 빠르고 높게 공을 날렸다.
무둔바가 골대 앞쪽을 차지한 채 밀고 들어오는 선수들과 몸싸움을 벌였고, 라파엘과 스웰던이 이리저리 뛰는 첼시의 선수들을 바싹 따라붙었다.
공의 궤적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건 굳이 기다릴 이유가 없는 거였다.
와락!
정지우는 골대 앞쪽으로 달려 나가며, 그 반동을 이용해 높다랗게 뛰어올랐다.
휘이익!
아자르가 왼편에서, 그리고 오스카가 정지우의 바로 앞에서 동시에 뛰어올랐다.
터억!
공을 잡는 순간이었다.
퍼억!
거칠게 휘두른 오스카의 팔이 정지우의 오른쪽 볼을 강하게 때렸다.
순간 눈에 불이 번쩍 튀었고, 볼과 턱에 기분 더러운 통증이 느껴졌다.
분명 어느 정도는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공을 가슴에 안은 채 바닥에 내려선 다음이었다.
콰악!
“우-!”
정지우는 자세를 바로잡는 오스카를 대뜸 어깨로 들이받았다.
콰다당!
바닥에 쓰러진 그가 맞지도 않은 얼굴을 감싸고 뒹굴었다.
삐이이익!
“왜 이래! 뭐 하는 거야!”
이바노비치가 정지우의 가슴을 밀치며 다가왔다.
이런다고 물러선다고?
정지우는 거칠게 이바노비치의 손을 뿌리쳤다.
“넌 또 뭐야! 내가 당했던 것처럼 얼굴 한번 갈겨 줄까!”
“무슨 짓이야!”
무둔바와 스웰던이 달려들었고, 다시 모제스와 주마가 끼어들었다.
삑! 삑! 삑! 삑!
이미 선수들이 뒤엉킨 다음이었다.
“여기까지야! 이 정도면 충분해!”
라파엘과 데이빗, 박상민이 정지우를 끌고 골대 한쪽으로 움직였다. 물론 그때까지도 정지우는 공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양 팀 선수들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삑삑!
주심이 휘슬을 불어서 정지우와 오스카를 불렀다.
이 정도에 퇴장을 주기는 어렵겠지만, 막말로 레드카드를 꺼내 든다고 해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박상민에 이어 두 번씩이나 얌전히 맞고 있으면 동료들의 사기가 함께 부러진다.
오스카는 분명 그걸 노린 거니까 퇴장당할 거면 함께 쫓겨날 각오를 하는 게 맞다.
정지우는 주심의 앞으로 움직였다.
“봐요! 얼굴을 맞았다니까요!”
정지우에게 레드카드를 주라는 것처럼 두 손을 모아 항변하는 오스카를 향해 주심이 옐로카드를 높이 들었다.
“우-!”
오스카에게 옐로카드를 보인 주심이 다시 정지우를 향해서도 옐로카드를 들어 보였다.
시간 벌었지, 양쪽 모두 경고 먹었지.
이 정도면 남는 장사인 거다.
게다가 정지우가 오스카를 거칠게 들이받은 후에 동료들의 표정이 달라져 있는 것도 계산에서 빼면 곤란한 거였다.
선수들이 뒤로 물러날 때 정지우는 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일부러 그런 거지?”
데이빗이 공을 내려놓는 정지우에게 툭 말을 건네고는 중앙선을 향해 달려갔다.
알면 좀 제대로 해 보든가!
투욱!
상체를 세운 정지우가 앞에 있는 라파엘에게 공을 차 주었다.
페널티킥으로 승부를 가리게 된다면 첼시가 좀 더 억울한 느낌일 거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어쩐지 유니온 시티의 편을 들어 주는 느낌이었다.
첼시가 다급하게 달려들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그사이 라파엘에게서 공을 받은 데이빗이 다시 뒤쪽에 있던 스웰던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투욱!
스웰던이 무둔바에게, 무둔바가 정지우에게 공을 패스하는 동안 첼시의 선수들이 빠르게 달려들었다.
정지우가 패스할 곳을 모두 차단하겠다는 것처럼 주변에 있던 웨스 모건과 라파엘, 무둔바에게까지 바싹 달라붙었다.
퍼어엉!
정지우는 중앙을 향해 공을 걷어 냈다.
박상민과 파브레가스, 오스카가 공중에 높다랗게 떠올랐다.
터엉!
공은 오스카의 머리에 맞고 중앙선 쪽으로 튀었다.
카알과 데이빗이 달려들었고, 아자르와 레미가 간발의 차이로 뛰어들었다.
터엉!
데이빗이 먼저 머리로 공을 받아 첼시 진영으로 날렸다.
터엉!
이번엔 마티치가 또다시 머리로 공을 넘겼는데, 첼시의 아자르가 카알을 등으로 밀어내며 공을 받았다.
콰아악!
그때였다. 박상민이 느닷없이 아자르를 향해 태클을 들어갔다.
“우와-!”
그야말로 공만 쏙 빼내는 교과서 같은 태클이었다.
퍼어어엉!
공을 잡은 것은 데니였다.
짧게 공을 돌릴 줄 알았던 그 순간에 놈은 반대편 코너를 향해 기다랗게 공을 넘겼다.
텅 빈 첼시의 왼편 공간에 공이 떨어졌고, 유니온 시티의 선수 한 명이 무섭게 달려들고 있었다.
“예에-!”
이정렬이었다.
그가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서는 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공을 살려 냈다.
툭툭! 툭!
이정렬은 투박한 헛다리를 짚으며 이바노비치를 상대했다.
본인은 최선을 다해 펼치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정지우가 보기엔 어설프게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주춤! 주춤!
이정렬이 시간을 끄는 동안 첼시의 선수들이 모두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로 몰려들었다.
투욱!
이정렬은 뒤쪽에 있는 박상민에게 공을 넘겨주고 곧바로 골대를 향해 뛰어갔다.
단박에 치고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런대로 시간을 소비했으니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대기심이 7분을 가리키는 패드를 높게 들었고, 그라운드에 ‘추가 시간은 7분입니다.’ 하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박상민은 공을 멀찍이 뒤로 빼 데이빗에게 넘겼다.
어차피 첼시가 단단하게 수비벽을 세웠고, 유니온 시티 공격수가 별로 없었다.
투욱!
데이빗이 데니에게 공을 넘겼다.
콰악!
그런데 그때 첼시의 주마가 데니를 거칠게 들이받고 공을 가로챘다.
“우-!”
주저앉은 데니가 손을 높이 들었는데 주심은 그를 외면했다.
투우우욱!
주마가 중앙에 있던 파브레가스에게 패스하는 것을 보고 라파엘이 뛰어들었다.
휘이익!
그러나 파브레가스는 공을 건드리지도 않고 안쪽으로 뛰었다.
“예에에!”
그렇게 지나간 공을 잡은 것은 윌리안이었다.
투욱!
그는 공을 한 번 툭 차서 밀어놓고 유니온 시티의 오른쪽 코너를 무섭게 파고들었다.
스웰던이 단박에 달려들지 못하고 거리를 띄웠을 때,
퍼어엉!
달리는 탄력을 이용해 윌리안이 골대로 센터링을 날렸다.
유니온 시티가 연습했던 역습을 그대로 보는 듯한 공격이었다.
정지우는 자세를 낮추고 공을 따라 옆으로 움직였다.
라파엘은 마티치에게 붙어서 골대를 벗어나 있었고, 무둔바는 파브레가스를 잡는다고 레미를 놓쳤다.
휘이이익!
공이 골대를 지나쳤다.
빠르게 공을 따라 두 걸음을 움직인 정지우는 골포스트와의 간격을 좁히며 몸을 틀었다.
정지우의 오른쪽에서 레미가 높다랗게 떠올랐다. 그러고는 정확하게 이마로 공을 찍었다.
터어어엉!
얼마나 빨랐는지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휘익!
정지우는 반사적으로 왼팔을 휘둘렀다.
터억!
공이 튀어 나가는 감각을 느꼈고, 아자르가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퍼어엉!
그의 발에 걸린 공이 오른쪽 옆구리와 골포스트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럴 때 판단이란 의미가 없다.
고작 5미터 앞에서 슈팅이 날아오는데 생각할 시간 따윈 아예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였다.
가슴을 넓게 벌린 정지우가 오른쪽으로 몸을 쓰러트렸다.
터어억!
잡지 못했다. 잡을 수도 없을 만큼 강한 슈팅이었다.
가슴에 맞고 공이 튀어 나갔는데 아자르를 넘어간 것이 다행이었다.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공을 잡은 것은 레미였다.
퍼어엉! 터엉!
그가 날린 슈팅이 무둔바의 발에 걸려 나갔다.
주춤주춤!
정지우는 공중에서 커다랗게 휜 공을 따라 왼편으로 움직였다.
보인다! 이 정도 거리면 된다!
떨어지는 공을 향해 파브레가스가 빠르게 달려들었고,
퍼어엉!
그가 몸이 붕 뜰 정도로 강력한 슈팅을 날렸다.
제대로 맞았다.
그래서 발에서 떨어지는 순간 공이 꿈틀거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회전이 전혀 걸리지 않았다.
무늬가 그대로 보이는 공이 총알처럼 빠르게 코너를 향해 날아오는데 꿈틀거리기까지 한다.
화아아아악!
정지우는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릴 때부터, 그리고 공을 향해 손을 뻗는 동안은 세상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공만 보인다.
그런데 허공에 떠 있는 그 짧은 순간에 정지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꿈틀!
손이 닿기 직전에 공이 살아 있는 것처럼 바깥쪽으로 휘어졌기 때문이었다.
터어엉! 털썩!
“우우우-!”
골포스트와 크로스바가 이어지는 코너를 강하게 때린 공이 높다랗게 떠올라서 바깥쪽으로 튀어 나갔다.
몸을 일으킨 정지우의 눈에 독이 잔뜩 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