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37화 (137/262)

제1장.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2)

공은 유니온 시티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을 천천히 돌았다.

레믹과 맥슨이 공을 받는 첼시 선수에게 달려들곤 했는데 역시 공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붙어야죠! 저렇게 자유롭게 두면 안 됩니다. 슈팅 기회를 주면……!』

해설자의 설명 중간이었다.

퍼어엉!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파브레가스가 강력한 슈팅을 날렸다.

『오오- 우!』

화아악!

얀센이 다급하게 몸을 날렸지만, 공은 이미 손끝을 벗어나 있었다.

터어어엉!

또다시 골포스트 윗부분을 강하게 때린 공이 높다랗게 튕겨 나왔다.

『전반 7분입니다! 유니온 시티 골대가 두 번이나 슈퍼 세이브를 보이며 위기에서 팀을 구해 냅니다!』

유니온 시티 관계자나 관중들이 들었다면 약을 올리는 줄 알고 욕을 바리바리 퍼부었을 캐스터의 멘트가 TV를 타고 나왔다.

레믹이 빠르게 뛰어나왔으나 튀어나온 공을 잡은 것은 역시 첼시의 케이힐이었다.

『일방적인 공세입니다. 유니온 시티 선수 전부가 페널티 에어리어 주변에 있습니다.』

『일단 걷어 내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이네요. 어떡해서든 외곽으로 처리해서 라인을 정비할 필요가 있어요.』

케이힐이 넘겨준 공을 받은 아자르가 유니온 시티 진영의 왼편을 파고들다가 다시 뒤로 넘겨주었다.

윌리안이 공을 받는 순간이었다.

당연하게 주변을 살피며 기회를 노릴 줄 알았던 그가 그대로 공을 안으로 툭 밀어 넣었다.

“우와- 아!”

아자르가 수비수 틈을 파고들며 공을 향해 뛰었다.

콰아아악! 콰다다당!

라파엘이 그를 향해 태클로 몸을 날렸고, 아자르와 함께 그라운드에 뒤엉켰다.

삐이이익!

데이빗과 카알이 주심에게 달려가 정상적인 태클이라고 설명했고, 상체를 세워 앉은 아자르와 첼시 선수들이 페널티킥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양팔을 높다랗게 들었다.

선심을 바라본 주심은 코너 플래그를 가리켰다.

“우우-!”

라파엘이 분명하게 공을 먼저 건드렸고, 그로 인해 넘어진 정상적인 플레이라고 인정한 거였다.

『경기가 숨 막히게 진행됩니다. 마티치가 코너킥을 준비하고 있고, 선수들이 골대 앞에 가득합니다.』

『짧게 돌릴 수 있어요.』

삐이익!

주심이 공을 차라는 신호로 휘슬을 분 직후였다.

삑삑삑삑!

마티치가 공을 차기도 전에 다시 날카롭게 휘슬이 울렸다.

선수들이 골대 앞에서 뒤엉켰는데 스웰던과 존 테리를 양 팀 동료들이 뜯어말리고 있었다.

주심이 검지로 두 선수를 가리키고는 다가오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안쪽으로 움직였다.

“자리싸움하다가 그런 겁니다. 의도적인 건 아니에요.”

유독 오늘 주심의 눈에 뜨인 스웰던을 변명하느라 데이빗이 다가갔는데, 주심은 단호하게 물러나게 한 후에 두 선수를 앞에 세웠다.

“두 사람 모두 한 번 더 그런 모습을 보이면 분명하게 카드를 꺼낼 거야.”

주심이 양손 검지를 바깥쪽으로 벌려 가며 두 사람에게 주의를 주었다.

툭! 탁!

화해를 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스웰던은 존 테리의 뒤통수를 때렸고, 존 테리는 스웰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주심이 시선을 돌리자 마티치가 두 손을 높다랗게 들었고, 선수들이 다시 뒤엉켰다.

삐이이익!

『첼시의 코너킥입니다.』

퍼어어엉!

공은 골키퍼 에어리어 경계선을 향해 날다가 중간에서 골대를 향해 절묘하게 휘었다.

‘제발 좀 나와서 잡아!’

정지우는 움찔하면서 골대 앞을 노려보았다.

얀센이 밀치고 나와야 할 타이밍이었다.

첼시 선수들과 뒤엉켜 골키퍼 차징이라도 얻어 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리에서 주춤거리며 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휘이익! 휘익! 휘이이익!

첼시와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동시에 뛰어올랐다.

이바노비치가 무둔바의 상의를 얼마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길게 늘어난 상의가 미니스커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삐이이익!

휘슬을 먼저 불었고,

터어엉! 철렁!

파브레가스가 머리로 받은 공이 골대로 들어갔다.

삑! 삑!

주심은 고개를 저으며 이바노비치를 가리켰다.

『유니온 시티,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납니다!』

『무둔바 선수가 오늘 굉장한 활약이네요. 사실 챔피언십에 있는 동안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오늘 위치 선정, 대인 마크, 공중볼 경합, 나무랄 곳이 없습니다.』

『전반에만 골대가 두 골, 무둔바가 등으로 한 번, 이번에 한 번, 골대와 합쳐서 네 골을 막아 냈습니다.』

얀센이 공을 차려고 하자 첼시 선수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패스할 곳을 차단했다.

『오늘 첼시는 전반만 뛰고 경기를 마칠 생각인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많이 뜁니다! 전반에 골을 넣고 후반을 잠그겠다는 작전이 아닐까 싶은데요.』

실제로 첼시 선수들은 거의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넘어와 있었다.

경기는 계속 첼시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유니온 시티가 겨우겨우 막아 내는 수준으로 흘렀다.

“첼시!”

짝짝!

“첼시!”

짝짝!

“No one can stop us now(누구도 지금 우리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

경기를 쥐고 있는 팀의 관중이 응원가를 부를 권리가 있다.

그래서 경기 시작 이후 계속해서 첼시의 응원가가 웸블리 스타디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퍼어어엉!

마티치가 날린 중거리 슈팅을 라파엘이 발을 뻗어 겨우 걷어 냈고, 치고 달리는 아자르를 웨스 모건과 데니가 동시에 달려들어 억지로 막아 냈다.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경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당장 방법은 없어 보였다.

정지우는 유니온 시티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양 팀 선수들이 잔뜩 몰려서 위태위태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시선은 그대로 둔 채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정지우가 박상민의 귀에 대고 말을 건넸다.

“상민아! 저런 상태에서 공을 잡으면 무조건 넘겨서 역습을 노리거나, 만약 앞에 선수가 없으면 바로 치고 달려!”

박상민이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가 정지우의 시선을 따라 그라운드로 고개를 돌렸다.

“교체가 있다면 우리 중에는 네가 가장 유력해. 그러니까 네가 데니나 꼼빠니 자리에 있다면 어떨지를 생각해 둬. 수비 지원, 공격 연결, 그리고 혼자라면 무조건 치고 달려서 파울 유도. 알았지?”

정지우가 하는 말이다. 박상민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유니온 시티는 선수 교체가 필요해 보이는데 어떻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정지우 선수를 내보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부상이나 컨디션에 문제가 있는 것 같구요, 다른 세 선수는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당장은 내보내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영국의 중계방송 카메라도 교체가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유니온 시티의 벤치를 비춰 주었다.

『박용근 감독이 마틴 감독과 무언가를 의논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뒤로 정지우 선수가 있구요. 아! 우리 선수들, 신준석, 이정렬, 박상민 선수가 몸을 풀러 나왔습니다!』

『필드 선수들은 15분이나 20분마다 감독의 지시가 없어도 몸을 풀어 둡니다. 아직 다른 지시는 없어 보입니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첼시가 여전히 공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앞에서와 같은 결정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첼시 선수들이 공을 뒤로 돌리고 있습니다.』

『워낙 골대 앞에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촘촘하게 서 있어서 쉽지 않아 보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수비 훈련은 참 단단하게 했던 것으로 보이네요.』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최고 수훈은 골대가 세우지 않았습니까?』

해설자의 웃음이 TV 화면 뒤에서 들려왔다.

박상민의 모친은 손바닥을 공손하게 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용근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부터 간절하게 쓸어 댔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너무 간절해서 그랬을까?

화면에 정지우부터 신준석, 이정렬이 보이더니, 마지막에 조끼를 입고 벤치를 빠져나오는 아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나왔다.

고생에 짓눌려 중간 마디가 휘어진 손가락들이 주인의 소망을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 애달프게 움직였다.

그저 원하는 축구, 무탈하게 하면 된다.

저기까지 가서 미운털 박히지 않았으면 싶고, 못난 부모 탓에 천덕꾸러기 되지 않기를 바란다.

‘힘겨운 일이 있으면 이 못난 어미에게 다 시켜 주시고, 다칠 게 아직 남았다면 늙어서 쓸모없는 이 어미 다리 분지르시고.’

지금까지 어렵게만 살았던 자식 놈만은 지금부터라도 배부르고 등 따시게, 축구 잘하며 살게 해 주면 싶었다.

그거 말고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나.

“어이구!”

박상민의 부친이 놀란 소리를 토해 냈다.

첼시 선수의 강력한 슈팅이 골대를 스치듯 아웃된 것을 보아서였다.

부친은 자꾸만 듣기 거북한 소리를 만들며 힘겹게 숨을 쉬었다. 누워 있어도 힘들어하던 사람이 앉아 있으려니 그렇고, 또 그렇게 TV를 보며 응원하자니 자연 그렇게 되었다.

“그러지 말고 누워요. 내가 자리 봐 드릴게.”

“상민이가 저 먼 곳에서 저러고 있는데 내가 누워 있어서야 되겠나. 안 나와도 이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래.”

정강이부터 허리까지 꿰맨 자리가 길게 이어진 박상민의 부친이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박상민의 모친도 더는 권하지 못했다.

뺑소니차에 치인 이후로 모친이 벌었고, 그다음으로 박상민이 번 것으로 먹고살았다. 거기에 떠나기 전 아들의 서러운 울음을 듣고도 내색 한마디 못했던 남편이다.

모르긴 몰라도 속이 새카맣게 타서 제 색깔은 바늘 틈만큼도 없을 남편도 박상민의 모친과 같은 생각일 거였다.

레믹에게 공이 서너 번 넘어가기는 했는데, 혼자서 이리저리 휘젓다가 뺏긴 것이 유니온 시티의 공격 전부였다.

데이빗이 아무리 중심을 잡으려 애써 봐도 꼼빠니는 거친 플레이에 밀리고, 데니는 긴장 탓인지 아직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첼시의 응원가만이 계속 울려 퍼지는 전반전이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벤치가 경기를 외면하지 않았다면 분명 계산이 있을 텐데, 박용근과 대화를 나눈 마틴은 여전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Ji라도 넣어 주든가!’

경기를 뒤집을 선수가 필요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것 같은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의 투지에 불을 확 댕겨 줄 수 있는 선수!

“헉헉!”

공을 따라 달린 데이빗이 왼편으로 뛰어가는 윌리안을 손으로 가리켰다. 뒤편에서 누군가 맡으라는 의미였다.

사람 참 묘하다!

필드 플레이어도 아니고 골키퍼인데 정지우가 나서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지금도 동료들이 설렁설렁 뛰는 것은 정말 아니다. 그런데 정지우가 들어오면 여기에 알지 못할 무언가가 더해진다.

“카알! 그쪽! 헤이!”

뒤편에서 얀센의 고함이 들렸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정지우의 조언이 있은 뒤에 바뀌었다. 분명 수비에 도움은 된다. 그런데 ‘오리지널’이 주는 그 화끈한 맛은 확실히 없었다.

등골이 오싹한 슈팅과 잘게 잘게 자르고 들어오는 공격을 악착같이 막아 내느라 온몸의 기운이 쭉 빠졌을 때쯤이었다.

삐이이이익!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길게 불어 전반전 종료를 알렸다.

‘앞으로 이런 팀들과 계속 경기를 해야 하는 거라고?’

데이빗은 커다랗게 숨을 토해 냈다.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정지우는 동기 3명, 그리고 서브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나가 몸을 풀었다.

골키퍼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정지우는 동기들과 서서 공을 주고받았다.

투욱!

공이 날아오면 일부러 가슴 높이로 차 주기도 했다.

투욱! 툭!

정지우의 장단에 맞춰서 신준석이 공을 높다랗게 띄워 주었다.

터억!

정지우는 가슴으로 공을 받아 앞으로 내린 뒤에 떨어지는 공을 그대로 툭 차 주었다.

터엉!

박상민이 껑충 뛰어올라 머리로 방향을 바꾸었고,

퍼어엉!

그 공을 이정렬이 골대를 향해 멋지게 찼다.

폼은 좋았는데 높다랗게 떠서 절대 골이 나올 수 없는 슈팅이었다.

“뭐야!”

셋이서 동시에 비난하자 이정렬이 장난처럼 두 손을 모았다.

괜찮다. 나쁘지 않다.

함께 있으니까 이럴 수 있는 거다.

몸을 풀었던 서브 선수들이 벤치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팀 스크립터 클락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정지우에게 영어로 말을 건넸다.

“상민아! 너, 후반 출전이란다! 준비하래!”

박상민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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