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승리를 안겨주고 싶다. (1)
네 칸으로 구성된 스포츠 소식 박스 안에 갖가지 축구 소식이 커다랗게 담겨 있었다.
정지우가 마우스를 움직여 앞쪽 기사를 클릭하자 기사 제목 아래로 오래전 박용근의 사진이 떠올랐다.
<파벌로 성공한 박용근 키즈>
거슬리는 제목에 딱 들어맞는 내용의 기사였다.
정지우의 계약을 조건으로 한국에 축구 교실을 만들려던 박용근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제자들 셋을 데리고 유니온 시티에 끼어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증거로 기자는 박상민과 이정렬의 연봉이 EPL 단기 임대 평균일 정도로 헐값이라는 주장을 내세웠으며, 마지막에 과연 그들이 프리미어리그에서 몇 분이나 뛸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적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이렇게만 끝내기 미안했던지 선수들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바람을 마지막에 달아 놓았다.
기사를 다 읽은 박용근이 콧바람 소리를 내는 것처럼 웃었다.
“인터뷰를 안 해 줘서 그런 모양이다. 신경 쓰지 마라.”
제자들이 보는 앞이어서 그런가 하고 안색을 살폈는데, 실제로도 박용근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다음 기사가 뭐라는 거냐?”
박용근이 모니터에 올라온 작은 글씨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가 얼른 돋보기안경을 집어 들었다.
딸각, 딸각.
정지우가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바꾸자 ‘국가대표 유병조, 후배 골키퍼 강태섭 폭행’이라는 제목과 함께 퉁퉁 부은 강태섭의 얼굴이 올라왔다.
술을 마신 후에 버릇없이 구는 강태섭을 혼내 주려다 일이 커졌다는 기사였다.
“흠!”
박용근은 오히려 이 기사에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 감독도 참! 속이 얼마나 썩었을 거야.”
이런 건 또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정렬이는?”
“한국에 전화하고 있습니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경기에만 집중해라. 인터뷰를 거절하는 동안은 계속 이런 기사가 나올 거다. 다른 거 없다. 실력으로 증명하는 게 최고야. 알았지?”
“예.”
답을 하고 나서 정지우는 동기 둘과 함께 일어섰다.
“감독님,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푹 쉬어.”
셋이서 서재를 나와 거실에 들렀을 때였다.
“지우야, 정렬이와 인터뷰한 기자가 저 기사 썼나 봐. 연봉이랑 이런 거 물어봐서 한국보다는 많이 받는데 이쪽 기준에선 별거 아닌 거란 대화도 있었다던데.”
신준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렬이 아버님하고도 친분이 있어서 아마 아버님이 슬쩍 연봉을 알려 주셨을 수도 있고.”
운동복 바지에 면 티를 입은 정지우가 힐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지금 아버지하고 통화하는 거 같더라.”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냐? 신경 쓰지 말자.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말 안 돌게 조금 조심하고.”
“미안하다.”
“네가 그럴 게 뭐 있어? 정렬이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닐 거고. 잊어버려. 대신 이런 일이 또 생기지 않게 조심하면 되는 거지.”
“그래.”
말을 마친 신준석이 주방 쪽으로 움직였다.
“야! 과일이나 먹고 자자. 출출하다.”
동기가 함께 있어서 좋은 건 외롭지 않다는 거고, 불편한 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꼭 끌어들이려고 하는 거였다.
셋이서 주르르 식탁으로 움직였다.
박상민이 냉장고를 열어 멜론과 사과, 바나나를 꺼냈다.
“토끼 모양으로 깎아 줄까, 아니면 불꽃 모양으로 깎아 줄까?”
“헛소리하지 말고 그냥 반으로 뚝뚝 잘라.”
“어? 칼 든 사람이 나라는 거 잊으면 곤란하다.”
별것도 아닌 거로 셋이서 킬킬대고 웃었다.
“이 집에 있으면 정말 좋아. 고등학교 때 너 힘들었던 거 보상받은 거 같기도 하고.”
박상민이 과일을 깎는 옆에서 신준석이 흘리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준석아.”
“왜?”
“가서 감독님께 과일 드실 거냐고 여쭤보고 와. 그리고 생각하는 척 분위기 잡지 마라. 전혀 안 어울린다.”
“예, 예. 그저 나만 물지 않으면 됩니다.”
“여쭤볼 게 뭐 있어? 그냥 들고 가면 되지. 잠깐만 기다려.”
박상민이 접시에 토끼 머리 형태로 깎은 사과 조각과 다이아몬드 형태로 깎은 멜론을 올렸다.
제자들이 내려간 직후에 박용근은 전화기를 들어 김문호의 번호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보세요?]
김문호의 음성이 들렸다.
“많이 힘들어?”
[뭐야? 리그 시작 앞두고 정신없을 줄 알았더니, 기사 들춰 볼 시간은 있나 보네?]
김문호는 밝은 음성이었다.
[이진용이를 쓰게 하려고 내가 데려온 강태섭이를 이렇게 만든 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도 김문호는 금세 속에 있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이충도의 농간 같기는 한데 증거도 없고, 이런 말 털어놓을 사람이 박 감독 말고 없어서. 후우! 돈 참 무섭다.]
“이충도란 양반, 검찰 수사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된 게 흐지부지야. 조동익이 받았다는 아파트나 문광국이 분당 상가 이야기도 쑥 들어갔고, 오히려 내가 기회주의자로 몰리는 느낌이야.]
박용근은 나직하게 웃기만 했다.
[일단 지켜보자고. 다음 주까지 선수 명단 올려야 하니까 그래서 아마 급했던 모양이야. 막말로 예선전에서 다른 골키퍼가 눈부신 선방 펼치면 그게 더 무서웠을 테니까.]
“태섭이는 좀 어때?”
[두 달은 운동 틀렸어. 국내 프로팀에서 협조도 거부하고 있어서, 어쨌든 이진용이하고 주상도 데리고 가야 할 것 같다.]
“주상도는 문광국이가 아끼던 골키퍼 아닌가?”
[어쩌겠어? 그래도 서브 한 명은 있어야지.]
박용근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똑똑똑.
신준석이 서재 입구를 두드린 후에 과일 접시를 올려 주고 빠르게 나갔다.
식탁에는 멜론이 다이아몬드 형태로 오묘하게 깎여 있었다.
“김 감독님하고 통화하시나 보더라.”
포크로 멜론을 찍어 든 신준석이 소곤거리는 투로 정지우에게 말을 건넸다.
“아후! 감독님 표정이! 난 우시는 줄 알았다.”
“김 감독님하고 원래 그런 사이셨잖아. 지금 지우랑 네 관계 같지 않았겠냐? 나중에 나이 들면 너희 둘이 딱 그 모습인 거잖아.”
박상민의 대꾸에 신준석이 장난스럽게 흘겨보았으나 정지우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셋이서 과일을 먹고 있을 때 이정렬이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얼른 와. 과일 먹자.”
신준석이 불렀는데도 이정렬은 정지우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미안하다, 지우야.”
“나한테 그럴 게 뭐 있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대신 내일 아침에 감독님께는 꼭 죄송하다고 말씀드려라.”
“그래, 그럴게. 아버지도 많이 염려하시더라고.”
“앉아.”
넷이서 앉자 자연스럽게 강태섭의 이야기가 나왔다.
축구판 이야기다. 동기들의 이런 화제에까지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었지만, 이정렬이 내려온 지 5분도 되지 않은 터라 정지우는 잠시 더 앉아 있기로 했다.
“커뮤니티 결승전이 웸블리에서 열리지? 관객이 9만 명이라는데 분위기가 도대체 어떤 걸까? 난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FA컵 결승 때 어땠냐? 하기야! 네가 떨렸을 리가 없지.”
이정렬의 말꼬리를 붙들고 신준석이 던진 질문이었다.
“웸블리에 가게 된다면 그냥 느껴. 앞으로 겪을 영국 리그는 거의 그런 분위기일 테니까. 커뮤니티 실드보다 어쩌면 리그 경기에서 더 열광적인 응원이 나올 수도 있어.”
서울 가는 기차표를 산 시골 쥐 셋이서 서울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얼굴이어서, 말을 건넨 정지우는 픽 하고 웃고 말았다.
“영국 리그를 즐기겠다고 생각해. 악 받치게 달려들던 선수가 경기 뒤에 거짓말처럼 손을 내밀거든. 그게 영국 리그인 거야. 물론 정말 악한 놈들도 있으니까 조심하고.”
이왕 나온 김에 정지우는 하고 싶었던 말을 좀 더 하기로 했다.
“거친 플레이도 그래. 상대 팀 선수들, 관중들, 심지어 주심과 부심도 다 그러려니 해. 이곳은 쭈뼛대는 선수를 경멸하다시피 한다. 그러니 슈팅이든, 수비든, 다부지게 부딪치겠다고 생각하는 게 적응이 빠를 거다.”
3명의 동기가 평가전을 떠올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더 도울 수 있는 건 없다. 내일부터 영어 열심히 익혀서 인사부터 먼저 건네 버릇해. 동료들 이름 기억해 주고. 앞으로 리그와 팀에 녹아드는 건 이제부터 너희 몫이다.”
“그래, 알았다. 그나마 네가 있어서 그 덕분에 패스라도 바로 받을 수 있었을 거야. 포르투갈에 처음 갔을 때 한 달은 아예 패스조차 주지 않더라구.”
신준석이 정지우의 말을 받은 다음이었다.
“정말 그러냐?”
박상민이 궁금한 얼굴로 신준석을 보았다.
“길게 생각할 것 없다. 막말로 지우 없었을 때 데니란 놈이랑 정렬이가 붙었다고 생각해 봐라. 다음 날부터 우리 셋, 완전히 왕따 돼 있었을걸?”
“그건 그러네.”
“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 그만 일어나자.”
정지우의 말에 동기들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사흘의 훈련이 끝나고 주말이 돌아왔다.
다음 일요일이 8월 2일 커뮤니티 실드가 있는 날이고, 다시 8월 8일이 프리미어리그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목요일부터 박용근과 동기 셋이 저녁마다 한국인 강사에게 영어 강습을 받았다.
하루 한 시간씩 하는 수업이었는데, 단체로 교육받을 경우 효율이 떨어진다는 구단의 조언에 따라 강사를 다 개인별로 두었다.
그 외에 한국말이 가능한 스태프 한 명을 더 지원받았다.
바튼은 계속 정지우를 지원하고, 새롭게 온 직원인 앤디 킴은 동기 셋의 이동을 위한 운전과 통역을 맡았다.
“킴이라고 부르는 게 편합니다.”
24살의 앤디 킴은 영국식 영어 악센트가 담긴 듯한 한국말을 했는데, 하여간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토요일은 오전 훈련으로 일정을 마쳤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나서 바보들처럼 소파에 주르륵 앉아 홍삼 봉지를 입에 물고 있을 때였다.
띵동! 띵동! 띵동!
벨이 울렸다.
미어캣처럼 6명의 시선이 동시에 인터폰을 향해 돌아갔는데, 가장 가까이에 앉은 유정호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Hello? Who is it?”
누군가를 확인하던 유정호가 ‘네?’ 하고는 잽싸게 고개를 돌려 안을 보았다.
“누군데? 왜 그래? 형?”
“아차차!”
현관문을 향해 움직인 유정호가 ‘준석이 아버님이신데?’ 하는 말을 남기고는 재빨리 뛰어나갔다.
준석이 아버님이? 연락도 없이? 이곳을 바로 오셨다고?
정지우를 시작으로 박용근과 동기 셋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인 직후였다.
커다란 가방을 두 손으로 끌어가며 유정호가 들어왔고, 그 뒤로 정말 신준석, 이정렬의 부친과 모친이 현관을 들어서고 있었다.
“아버지!”
신준석과 이정렬의 놀란 외침을 외면하다시피 한 4명은 가장 먼저 박용근에게 인사를 전했고, 다음으로 정지우의 손을 잡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들이 가져온 커다란 가방만 4개다.
한바탕 소란 후에 소파에 둘러앉았는데, 자리가 좁아서 동기 셋은 식탁의 의자를 가져왔다.
“어떻게 연락도 없이 오셨어요?”
“준석이 저놈부터 당장 말도 안 통할 텐데, 괜히 우리 온다고 알리면 감독님이나 지우 너만 번거롭게 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그냥 우리끼리 왔다.”
“저를 부르시지요?”
“듣자니 자네가 감독님 통역 맡았다면서? 그런 중요한 일을 자네 마음대로 그렇게 쉽게 비울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점수를 따려던 유정호가 냉큼 시선을 떨궜다.
“피곤하시죠? 식사는요?”
“비행기에서 먹은 지 얼마 안 된다. 그리고 잠자리도 이 앞에 호텔 예약해 두었으니까 절대로 부담 갖지 마라.”
“그런 말씀이 어딨어요? 이 층에 방 있으니까 거기서 주무시구요, 정 뭐하면 상민이랑 정호 형은 제 방에서 함께 자면 돼요.”
“아니다. 네가 이렇게 성공한 거 본 거로 난 됐다. 이 집 보니까 이제는 정말 네가 좋아졌구나 싶어서……. 됐다. 잘했다.”
준석이 부친이 손을 뻗어서 정지우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모친들은 신윤희와 주방으로 움직여 음식들을 꺼냈다.
가방 절반은 아예 홍삼으로 가득 차서 몇 달은 충분히 먹을 정도의 양이었다.
“감독님, 제가 부족해서 이상한 기사가 나갔습니다. 자식 놈 맡아 주신 것도 송구한데 뵐 낯이 없습니다.”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이미 잊었습니다. 마음 쓰시지 마세요.”
그사이 소파에 있던 이정렬의 부친이 진중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지우야, 네가 이렇게 도움 주는데 너한테도 면목이 없다.”
“저 고등학교 때 가서 밥 먹은 것만 해도 정렬이 몇 년은 다른 곳에 못 가게 붙들어야 할 거예요. 함께 있어서 의지가 돼요.”
“그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다.”
대강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 모친들이 거실로 떡과 식혜를 가져왔다.
“아버지, 언제 가세요?”
“이왕 온 김에 다음 일요일에 있을 경기까지 보고 가려고. 일주일 정도라 너무 번잡스럽게 하는 것 같아서 호텔을 잡았지.”
토요일 오후가 시끌벅적하게 지나갔다.
누구보다 이정렬과 이정렬의 부친이 커다란 짐을 덜어 낸 듯 홀가분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