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우리에게는 미친개가 있어야 하는 거야. (1)
김문호는 쭉 찢어진 눈으로 국가대표팀 코치 신동수와 골키퍼 코치 이광호를 노려보았다.
“태극 마크를 단 선수들이 태업을 하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태업이라는 말은 안 했습니다.”
“열심히 뛸 자신이 없다는 말이 태업이 아니면 뭐냐? 너 지금 나하고 장난치자는 거야?”
“말씀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축구판의 대선배다. 그래서 존댓말을 쓰고는 있지만, 신동수의 태도는 ‘어디 맘대로 해 봐라’라는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흐흐.”
김문호가 웃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다 집어치우고 뺨이라도 시원하게 날려 주겠다는 각오가 선 게 분명했다.
“감독님, 일단 좀 가라앉히시고.”
송인수가 얼른 나서서 김문호의 시선을 뺏었다.
“자네들은 코치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그리고 면담을 단칼에 정리해 버렸다.
“가 보겠습니다.”
신동수와 이광호가 속이 후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후우!”
김문호의 깊은 한숨이 국가대표팀의 현재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었다.
선수들이야 많다.
하지만 프로팀은 협조를 거부하고 있고, 기존의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대놓고 김문호를 거부하거나 조롱하는 형국이었다.
월드컵 예선이 한 달 며칠 남았는데 말이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송인수가 김문호의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감독님 제자 중에 추천할 만한 선수가 몇 명이나 됩니까?”
“나 하나로는 어림도 없고, 박 감독 제자들까지 계산하면 대략 7명 정도 나올 겁니다.”
“흠, 코치진은요?”
“경력이 너무 부족해요.”
김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나 하나 나가서 욕먹는 거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예선전이 엉망으로 끝나면 그 아이들은 아예 너덜너덜 씹힐 텐데, 그걸 알면서 어떻게 추천하겠습니까?”
“하아! 거, 참!”
송인수가 답답한 속을 쏟아 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파벌이 이렇게 깊숙하게 파고들어서 속까지 시커멓게 썩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일단 이대로 가시죠.”
“이대로라니요?”
“감독님께서 맡아 주신 것만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말을 끌고 물가에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는 겁니다. 부를 수 있는 선수들에 기존 대표 선수들 몇 명 추려서 예선만 넘겨주십시오.”
“그다음은요?”
“어차피 망칠 거라면 확실하게 망가져 버리는 게 낫습니다. 예선 두 게임 치르고 나서 외국인 감독 초빙하고, 처음부터 새롭게 짠다고 생각하고 준비할 생각입니다.”
송인수는 아예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코치 대행 체제로 가려고 해도 그나마 자격이 안 돼서 감독님께 누를 끼쳤습니다.”
“지금 그런 말 해서 뭐하겠습니까? 일단 전에 브라질과의 평가전 전반을 뛰었던 선수들 위주로 추려 보겠습니다.”
김문호가 입술을 씹으며 답을 건넸다.
***
자체 평가전을 매일 진행하겠다는 박용근의 계획은 그라운드 키퍼의 요구에 의해 사흘에 한 번으로 줄어들었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싶은데, 하여간 영국 리그에서 그라운드 키퍼의 의견은 가장 우선해서 존중되는 것 중 하나였다.
구름이 많은 날은 인공조명을 켜서라도 잔디에게 기운을 주고, 야간에는 푹 쉴 수 있도록 배려한다.
결국, 리저브 팀은 이틀을 근처에 있는 유니온 파크 그라운드를 임대해서 사용하기로 했다.
아직 1군 훈련이 시작되기 전이다.
골키퍼 훈련은 어떠냐는 질문에 리저브 팀 평가전이 없는 날에 한해서는 괜찮다는 답이 있었다.
솔직히 정지우 입장에서는 오히려 편안하게 훈련할 수 있게 된 거였다.
물론 골대를 교대로 사용하라는 조건은 달렸는데, 굳이 한곳을 고집할 이유가 없으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얀센과 기예르모까지 리저브 팀 훈련에 참가해서 정지우는 골키퍼 코치와 함께 연습에 집중했다.
무둔바와 둘이서 이틀을 죽어라 훈련하고, 사흘째 되는 날은 리저브 팀의 자체 평가전을 관람하면 되는 거라서 전체적인 리듬도 좋았다.
그사이, 1군 선수들이 한두 명씩 돌아오면서 레드 블레이트가 북적이는 느낌이었다.
한적하던 피트니스 룸이 선수들로 차기 시작했고, 자체 평가전이 벌어지는 시간에는 관중석에 1군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관람하는 동료들의 반응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레믹은 경계하는 눈빛이었고, 데이빗과 카알, 스웰던은 무척이나 놀라는 얼굴이었으며, 꼼빠니는 흥미가 동한 것처럼 보였다.
이정렬과 박상민은 덩치에서 다른 선수들에 밀리지 않았다.
물론 185에 93킬로그램의 덩치를 가진 웨스 모건에는 부족해 보였지만, 기본적으로 줄을 세워 놓으면 그래도 체격 면에서는 앞쪽에 서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박상민은 기술과 투지에서도 뒤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원래 통뼈에 힘이 좋은 집안이다. 제대로 부딪치면 대개 상대 선수가 좀 더 다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정지우는 박상민이 뛰는 것을 보며 웃음을 달았다.
축구에 굶주렸던 것 때문인지 거의 미친 말을 그라운드에 풀어 놓은 수준이었다.
콰아악! 콰다당!
커다랗게 부딪쳐서 넘어졌더라도 지금처럼 벌떡 일어나 달린다. 분명 옆구리 어딘가에 멍이 들었을 텐데.
“헤이!”
고함을 지르고, 어디로 패스하라고 지시도 하고 있었다.
저런 놈이 박용근과 정지우 앞에서 눈물을 찔찔 흘린다는 것을 알면 리저브 팀 선수들이 뭐라고 할지 궁금할 정도였다.
신준석은 해외 리그에서 뛰었던 요령으로 견디는 것처럼 보였다. 그럭저럭 잘해 낸다. 딱히 흠잡기 어렵다.
그런데 어쩐지 물을 너무 많이 넣어 끓인 라면처럼 무언가 아쉽고 부족한 느낌이었다.
문제는 이정렬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은 박상민을 제외하고 그에게 공을 제대로 밀어주는 선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15분씩 나눠서 뛰던 경기를 박용근은 전후반 30분으로 진행했다.
당장 보기에 두 팀 모두 미드필더들의 움직임이 탄탄했고, 수비와 공격의 공간이 촘촘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꽤 엄청난 발전이었다.
전반이 끝나고 선수들이 그라운드 바깥으로 나왔다.
박용근은 먼저 파란색 조끼를 입은 팀의 선수들을 불러서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정지우가 바닥에 주저앉아 물을 마시는 동기들을 보고 있을 때였다.
“Ji, 저기 미드필더 보는 선수는 경력이 어떻게 돼? 패스나 드리블도 그렇고, 축구 센스가 제법인데?”
카알이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1군 동료들이 비슷한 표정으로 정지우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 훈련하다가 이번에 합류했어.”
“저런 선수가? 도대체 한국은 어느 수준이어야 프로팀에 들어가는 거야?”
꼼빠니가 놀라서 물었는데,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대화가 끝나자 정지우는 이정렬을 보았다.
지친 얼굴에 어딘지 짜증이 묻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러면 몸이 무거워져서 실제로도 제대로 뛰지 못한다.
박용근이 이정렬의 저런 표정을 모를 리는 없을 거고?
저녁에 들어가면 슬쩍 말이나 건네 볼까?
정지우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박용근이 노란 조끼 팀에게 다가와 전술판을 보여 주었다.
유정호가 옆에서 영어로 설명해 주고 있었는데 팀의 분위기가 파란 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어딘가 선수들 전체에 불만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정지우는 얀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직후에 무심코 고개를 든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얀센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전술판으로 움직이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확실히 문제가 있는 거였다.
휴식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아래에서 보고 있을게.”
정지우는 관람석에서 일어나 벤치 앞쪽의 사이드라인으로 움직였다.
전반적인 흐름을 보는 건 관람석이 좋지만, 현장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한 걸음이라도 가까운 것이 훨씬 낫다.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공수를 전환하는 리듬, 호흡, 패스, 간격 등에서 확실히 파란 조끼 팀이 앞서고 있었다.
처음에 조심해서 플레이를 펼치던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개인의 성향과 패턴을 어느 정도 익힌 뒤라서 거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헤이!”
박상민이 손을 들었고, 앤디가 그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툭툭!
파란 팀의 미드필더들은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박상민이 제칠 것에 대비한다는 의미였고, 그만큼 그를 인정한다는 뜻도 되는 거였다.
투욱!
박상민은 공을 웨스에게 건네주고 앞으로 뛰었다.
콰악!
중계방송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을 몸싸움이 벌어졌는데, 박상민은 비틀하면서도 용케 중심을 잃지 않고 앞으로 뛰었다.
그때였다.
“Goddamn it!”
자체 평가전에서 나오기 어려운 욕이 커다랗게 들렸다.
영국 선수 데니가 이정렬과 뒤엉켜 가슴과 머리를 밀치며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삑! 삑! 삑!
동료들이 몰려가 데니를 말리는 순간이었다.
“더러운 노란 원숭이!”
데니의 입에서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 튀어나왔다.
와락!
정지우는 그대로 데니를 향해 뛰어갔다.
관중석에 있던 1군 선수들이 급하게 정지우를 향해 움직였는데, 워낙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콰아악!
정지우는 그대로 달려가서 데니의 목을 움켜쥐었다.
“너 뭐라고 그랬어!”
177에 70킬로그램의 덩치를 가진 데니다.
영국 선수 특유의 단단함을 가졌다고 해도 정지우 역시 완력이나 강단에서 지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거다.
박용근이 유정호와 함께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동양인이라는 것이 비난의 이유가 된다고?
이런 놈과 한 팀이라니!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몰래 하는 뒷말은 몰라도 자체 평가전에서 이따위 소리를 지르는 놈이 있다니? 이놈은 절대로 동료가 아닌 거다.
“Ji! Ji! Calm down(가라앉혀)! Calm down!”
카알과 데이빗이 말리는 것을 뿌리치며 정지우는 데니를 좀 더 가까이 잡아당겼다.
타아악!
놈이 거칠게 정지우의 왼팔을 뿌리치는 순간이었다.
콰악!
정지우는 오른손으로 녀석의 목을 또다시 꽉 쥐었다.
“뭐라고 그랬어! 그래서! 네가 경기를 하는데 동양인인 게 무슨 상관인데!”
박용근과 정지우가 있는 앞에서 저런 말을 뱉었다는 건, 지금까지 가슴속에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의미와 같은 거였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Ji! 이건 안 좋아! 그만! 그만!”
박용근이 바로 곁에 있었다.
그는 유정호에게서 조금 전 욕설의 의미를 전해 들은 뒤부터 뒷짐을 진 채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동료들이 악착같이 매달렸다.
거기에 신준석, 박상민, 그리고 싸움을 시작했던 이정렬까지 끼어들어 정지우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숫자는 한계가 있었다.
거기에 정지우의 번들거리는 눈빛에 질린 건지, 아니면 제 놈이 지껄인 소리가 얼마나 위험한 말이었는지를 깨달았는지는 몰라도 데니까지 뒤로 물러나려고 해서 목을 놓치고 말았다.
콰아악! 털썩!
그런데 그 순간에 데니가 날다시피 뒤로 날아가서 엉덩이부터 뒤로 처박히고 말았다.
무둔바였다. 그 커다란 놈이 데니의 가슴을 있는 힘껏 밀쳐 낸 거였다.
“너는 또 왜 이래! 무둔바! 진정해! 제발!”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그런데 정지우가 보기에도 무둔바는 정상을 넘어서 있었다.
“피부색이 축구와 무슨 상관이야! 블랙이든, 옐로우든! 너처럼 더럽고 역겨운 놈이 어떻게 축구를 하지!”
으릉으릉 울리는 듯한 고함을 뱉어 내며 달려드는 무둔바의 눈 역시 정지우와 다르지 않았다.
기가 막혔지만, 정지우는 무둔바의 앞을 막아섰다.
꽈악!
그리고 두 손을 들어서 무둔바의 머리를 꽉 잡았다.
“무둔바! 무둔바!”
무둔바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Ji?”
이놈은 정말 정신줄을 놓았던 거였다.
“난 Ji를 무시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어.”
“알아. 그래! 고마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뒤편에 있던 데니를 동료들이 벤치로 끌고 가고 있었다.
뒤늦게 마틴과 스태프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다가왔고, 몇몇은 데이빗을 붙들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피고 있었다.
대강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한 번 감정이 달려가자 너무 실망스러워서 레드 블레이트에 있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전에도 보이지 않는 차별이야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과 입 밖으로 뱉는 것, 함께 훈련하고 함께 뛰는 동료 속에 저런 놈이 있다는 것이 진절머리 나도록 싫었다.
그것도 박용근이 지휘하는 그라운드 안에서.
“Ji, 이야기를 좀 할까?”
마틴이 다가왔을 때였다.
“코치, 계약을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난 이런 모욕을 받으며 운동할 생각은 없습니다.”
주변에 둘러섰던 동료들이 모두 들었다.
마틴은 물론이고, 누구도 당장 입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