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26화 (126/262)

제5장. 저놈들 좀 챙겨줘라. (2)

경기가 시작되었고, 관중석에서는 8개의 비디오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박용근의 지시가 있었던 게 분명한 일이었다.

공은 파란색 조끼 팀의 진영을 돌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주심의 역할을 대신한 박용근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선수들을 살피는 가운데,

“헤이! 컴!”

공을 달라고 소리 지르는 선수들의 목소리가 그라운드 이곳저곳에서 울려 나왔다.

정지우는 리저브 팀에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었다.

재정이 열악한 유니온 시티에 단기 임대로 왔고, 온 날부터 바로 얀센의 서브로 벤치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저브 팀 선수들을 잘 알지 못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전체적인 수준이나 눈에 띄는 선수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경기를 지켜보았다.

공격수인 이정렬과 미드필더인 박상민이 공을 가진 선수를 향해 움직였다.

투욱! 툭툭!

몇 번을 말하는지 모르지만, 공은 사람보다 빠르다.

그러니 상황에 맞춰 달려들 때와 가로챌 때, 아니면 패스를 할 수 없도록 앞을 막아설 때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툭툭!

이정렬을 앞에 둔 파란 팀 수비수가 여유를 부렸다.

와락! 콰당!

기회를 노린 이정렬이 달려들었는데 수비수는 어깨와 팔로 그를 밀어 버렸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이정렬이 주심 역할을 맡은 박용근을 바라보았으나, 돌아온 것은 ‘왜 그러고 있냐?’라는 눈빛 정도였다.

이정렬이 일어서면서 사이드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지우는 빠르게 고개를 저어 주었다.

그 정도를 반칙으로 불어 주면 챔피언십이나 프리미어리그에서는 경기가 아예 진행되지도 않는다.

덩치가 큰 편에 속하는 이정렬이다.

그러니 자신이 수비수의 손짓 한 번에 벌러덩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을 거였다.

영상으로 보던 경기와 실제 경기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이정렬은 제대로 실감한 눈치였다.

‘얼른 경기에 집중해!’

정지우의 눈을 바라본 이정렬이 몸을 돌려 뛰어갔다.

아직은 모르고 있을 거다.

소위 스트라이커 포지션을 맡은 선수가 수비수를 이겨 내지 못하고 저렇게 쉽게 넘어지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공은 중앙선을 넘어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까지 움직였다.

얀센이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소리를 질러 대는 앞이었다.

투우욱!

오른쪽 모서리로 공이 날아갔다.

퍼어어엉!

그리고 그 공을 기다리던 파란 팀 선수가 골대 앞으로 기다랗게 차 주었다.

와락! 와라락! 와락!

선수들이 뒤엉켰을 때 신준석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가볍게 자리를 빼앗겼고, 이어서 상대 선수에게 짓눌렸다.

반칙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거고, 저 정도로 거칠게 밀어붙이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거였다.

터어어엉!

파란 팀 선수가 날린 헤더가 골대를 높다랗게 넘어갔다.

얀센이 신준석에게 주었던 시선을 돌려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이래서 되겠어?’

피식.

정지우는 입술 한쪽을 올리며 웃어 주었다.

‘좀 도와줘.’

얀센이 몸을 돌려 뒤에서 건네주는 공을 받아 바닥에 놓았다.

투욱!

그러고는 신준석을 향해 차 주었다.

투욱! 툭!

신준석은 분명 박상민을 보았다. 그러면서 바보같이 시간을 끌었다.

와락! 와라라락!

앞쪽에서 3명의 파란 팀 선수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투웅!

급하게 차 내느라 패스가 엉성했지만, 뺏기지는 않았다.

당황스러울 거다.

그렇지만 이쪽 리그는 이런 모습인 거다.

적응하든가? 떠나든가.

잔인한 소리지만 책임은 온전히 본인들의 몫이었다.

파란 팀이 전반적으로 좀 더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박상민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그는 경기가 시작되고 10분이 넘도록 공을 한 번도 터치하지 못했다.

‘이래서였구나.’

정지우는 박용근을 슬쩍 보았다.

어제 멋진 패스와 슈팅을 선수들에게 보여 주고 오늘 바로 경기를 갖는 거다.

당연하게 파란 팀의 선수들은 신준석, 박상민, 이정렬로 이어지는 역습을 대비했고, 그 중심에 선 박상민이 패스를 받지 못하도록 마크하고 있었다.

게다가 노란 팀의 선수들은 굳이 처음 보는 박상민에게 공을 건네줄 이유가 없었다.

실력을 믿을 수도 없고, 밀착 마크를 당하는 상황이니까.

이럴 때 답은 뛰는 것 말고는 없다.

마크맨을 떨쳐 내고, 공간을 찾아야 하며, 동료들이 패스해 줄 수밖에 없는 위치를 확보해야 하는 거다.

삐이이익!

경기 시작 후, 15분이 지났을 때 박용근은 휘슬을 길게 불어 경기를 중단시켰다.

“모이라고 해 봐!”

유정호가 파란 팀의 선수들을 불러들였고, 신호를 받은 팀 스크립터가 전술판을 들고 뛰어 들어갔다.

“리치!”

“예스, 코치.”

실제로 그라운드에 나와 뛰는 훈련의 첫날이었다. 그런데도 박용근은 선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너는 공격형 미드필더다. 아까 센터링이 올라갈 때 포지션을 기억하나?”

리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이아몬드를 구성하는 꼭짓점이 리치, 너여야 하는 거다. 공격할 때는 네가 위쪽에서 중심을 잡아 주고, 그 자리에서부터 역습을 막아 줘야 한다.”

박용근이 전술판에 그림을 그려 가며 리치와 뒤에 선 두 미드필더의 포지션을 지적해 주었다.

“수비 시에는 뒤쪽으로 내려와서 삼각형을 뒤집는 것처럼 포지션을 잡아. 이 자리, 바로 이 자리에서 센터백과 골대를 지켜 줘야지!”

“알겠습니다, 코치.”

리치는 이미 박용근에게 마음을 빼앗긴 얼굴이었다.

하긴 첫날부터 이름을 기억하고, 자신의 역할을 강조해 주는 감독이 싫을 선수가 어디 있겠나.

“데니! 너는 수비 시에 리치의 뒤에서 공을 커트해야 해. 대신 공격할 때는 라인을 조절해서 위로 올라와. 공격과 미드필더, 그리고 수비 라인이 촘촘하게. 이 간격이 무너지면 실점의 빌미가 된다.”

“예스, 코치.”

파란 팀에 지시를 마친 박용근이 이번엔 물을 마시고 있는 노란 팀을 불러 모았다.

“앤디! 상대 팀의 슈팅 때 선수를 잡아 줘.”

기름 바른 머리를 멋지게 넘긴 벨기에 선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웨스 모건하고 너는 수비 시에 이곳과 이곳을 지켜 줘. 특히 웨스 넌, 이쪽에서 위치를 확보하고 점프하는 상대팀 선수를 잡아. 그리고 반격할 때는 상민이와 동시에 여기 중앙을 맡아 주고.”

영국 흑인 웨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박상민, 마크가 붙었다고 다이아몬드 대형을 흩트려 놓으니까 중앙에서 패스가 이루어지지 않는 거잖아!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놈이 아무렴 수비 방해 전혀 없이 경기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냐!”

“죄송합니다.”

포지션에 따른 움직임을 지적해 준 박용근이 다시 선수들을 모았다.

삐이이익!

휘슬과 함께 공이 움직였다.

정지우가 팔짱을 낀 채 경기를 지켜볼 때였다.

“Ji!”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곳에서 마틴 감독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동료들 영입 소식은 들었지?”

“예.”

“쥬피터 회장이 아주 만족해하는데 지금 경기를 보았더라면 계약이 연기될 뻔했어.”

농담처럼 건넨 마크의 말에 정지우가 픽 하고 웃었다.

“나는 박 감독이 우직한 줄만 알았더니, 확실히 날카로운 구석이 있군.”

“무슨 뜻입니까?”

“당분간 자체 평가전이 계속될 거다. 다음 주부터 1군 선수들이 개인 훈련을 위해 그라운드로 나오게 되는데,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한국에서 온 세 선수의 능력을 보일 수 있게 되지.”

처음으로 공을 받은 박상민이 바로 옆으로 넘겨주고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터억!

파란 팀 미드필더가 분명 일부러 부딪친 것 같았는데 박상민은 그걸 버텨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실전 감각을 쌓고, 영국 리그를 경험하게 하며, 이 중에서 저 세 선수와 호흡을 맞출 선수를 추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감독님이요?”

시선을 박용근에게 준 채로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구단에서는 별 비용 들이지 않고 역습에 최적화된 선수 세 명을 들여온 거지. 저 세 명이 승점 12점, 네 경기만 잡아 줘도 유니온은 남는 장사야.”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동기 세 명이 따돌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요?”

마틴이 짓궂은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섯 경기? 그 안에 저 세 명은 역습을 제대로 그려 낼 거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선수들은 자연히 포인트를 올릴 수 있는 저 세 명에게 공을 몰아주게 되지. 내기하겠나? 여섯 경기?”

정규 리그를 코앞에 둔 감독이 이렇게 편안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것도 13년 만에 승격한 프리미어리그인데.

“뭘 걸면 됩니까?”

이 정도 농담이라면 받아 줘도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졌던 거다.

그러나 정지우와 마틴은 그라운드에 시선이 뺏겨서 더는 대화를 이어 가지 못했다.

퍼어엉!

수비에서 공을 잡은 신준석이 그대로 중앙선을 향해 공을 날려 주었다.

이거! 어제까지 매일 보던 장면이었다.

이정렬이 수비수들을 뿌리치며 앞으로 뛰어가는 동안이었다.

투욱!

왼발 안쪽으로 공을 받은 박상민이 반 바퀴를 도는 동작으로 마크맨 둘을 벗겨 냈다.

퍼어어엉!

그러고는 길게 공을 차 주었다.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날아간 공이 중간에서 기가 막히게 휘며 떨어졌다.

휘이이익!

이정렬은 허공을 나는 것처럼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터어어엉! 화아아악!

다이빙 헤더에 걸린 공이 골대로 날았고, 기예르모가 몸을 날렸다.

철렁!

“우-!”

짝짝짝짝짝짝짝짝짝!

“하마터면 10파운드를 날릴 뻔했군.”

마틴은 만족한 것처럼 웃었는데, 정지우는 기가 막혀서 웃었다.

저 세 놈이 해낸 거라고? 그것도 첫 연습 경기에서?

이렇게 환상적인 연결과 슈팅을?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얼마든지 먹히고 남을 이 역습을?

손뼉을 치는 정지우를 힐끔 본 마틴이 몸을 돌려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역시 모르고 있었는데, 그는 분명 두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15분씩 네 세트로 이뤄진 평가전이 끝났다.

간단한 동작으로 몸을 푼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지우야!”

박상민은 완전히 지친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눈빛만큼은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 반짝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뛴 거지? 기분은 어때?”

“미칠 거 같아. 가슴이 아직도 뛰어!”

정지우가 뒤통수를 툭 때렸는데도 박상민은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얼마나 축구가 하고 싶었으면 이럴까 싶기도 했다.

“아! 오늘은 고기 좀 먹어야 할 거 같은데?”

“몸이 무거워 보여. 너 살을 더 빼야 하는 거 아니냐?”

“여보세요? 1군 골키퍼님! 사람을 그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는 겁니다.”

넉살 좋은 신준석 역시 모처럼 밝은 얼굴이었다.

골을 넣은 이정렬만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야! 이 정도면 된 거냐? 정말 이렇게 쉽게 골을 넣어도 되는 거야?”

정지우와 박상민, 신준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체 평가전이었잖아. 반쯤 거저먹은 거지. 그렇더라도 적응을 빨리해서 다행이다. 솔직히 무둔바를 이겨 내면 어지간한 팀의 덩치들은 거의 이겨 낼 수 있을 거고. 저 친구 덕 많이 본 거지.”

그새 얼굴을 익혔다고 무둔바가 다가와 세 녀석과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멋진 골이었어.”

특히나 늘 몸싸움을 하던 이정렬에게는 덕담까지 건네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박상민은 피곤과 몰려오는 잠을 이겨 내려 뻘겋게 변한 눈을 연신 끔벅였다.

“지우야, 이곳은 리저브 팀 감독이 벤치에 앉냐?”

“예, 감독님. 다른 팀들도 보면 함께 나와서 경기 중 선수 상태에 관해 의논하는 거 같았어요.”

“확실히 시스템이 다르긴 하구나.”

“상위 팀들은 스태프 숫자도 꽤 많더라구요.”

“그럴 것 같다.”

그 와중에도 꾸벅꾸벅 조는 박상민을 돌아보며 박용근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홍삼을 입에 문 3명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훈련과 경기가 주는 피곤함은 확실히 수준 자체가 다르다.

“감독님, 당분간 자체 평가전을 계속하실 건가요?”

“음! 오늘 녹화한 테이프를 가져왔거든. 이걸 내일 오전에 보여 주면서 보완할 점들을 알려 주고 오후에 다시 녹화할 생각이다. 왜?”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운동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게 가장 중요하지. 특히나 리저브 팀들은 경기 영상을 일부러라도 자꾸 봐야 해. 자신이 어떤 플레이를 펼치는지, 공을 잡을 때 어떤 모습인지를 알아야 그만큼 수정도 빠르지.”

하루가 또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정지우는 박용근과 함께 오늘 있었던 평가전 영상들을 보았다.

돋보기를 코 아래에 걸치고 메모하던 박용근이 문득 시선을 들었다.

“왜?”

“감독님 축구 다시 하시는 게 좋아서요.”

“너 장가갈 때 된 거 아니냐?”

“제가요?”

“자꾸 능글맞은 소리만 하는 걸 보면 때가 되긴 한 모양인데?”

저녁에 이렇게 둘이서 지내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얼른 실력을 보여 주고 싶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박용근이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 제자들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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