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정말 돼가는 거 같다. (2)
사람 사는 것처럼 북적이는 분위기로 아침을 시작했다.
“준석아, 아침 먹고 상민이, 정렬이랑 소파 탁자에 둔 경기들 봐 둬. 지난 46경기에 FA컵 경기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날짜로 따져서 뒤편부터 보는 게 좋을 거야.”
“알았어!”
신준석이 ‘아라써!’ 하는 경쾌한 느낌으로 답을 했다.
“누나, 밥 더 있어요?”
“너는 시차를 안 느끼냐?”
밥을 더 뜨러 움직이는 박상민에게 유정호가 신기한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나이트클럽이 원래 오후에 일어나서 새벽까지 일하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전 이 리듬이 딱 맞는데요?”
“확실히 인생은 오묘한 구석이 있는 거야. 그런 게 도움 될 줄 누가 알았겠냐?”
유정호의 철학적인 말이 유쾌하게 느껴지는 분위기?
그런 느낌의 식사를 마친 정지우는 박용근, 유정호와 함께 집을 나섰다.
“다녀오세요, 감독님!”
동료 셋과 누나 한 명의 배웅을 받으며 박용근과 함께 나서는 길도 나쁘지 않았다.
“세 녀석 모두 당분간 몸을 만들고, 그 뒤에 리저브 팀 전술 훈련에 참가시킬 생각이다. 오늘 마틴 감독과 의논해서 세부적인 훈련 스케줄을 짤 거고.”
“예, 감독님.”
박용근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감독님, 혹시 북적이는 거랑 이렇게 지내는 거 말씀하시려는 거였으면 전 정말 괜찮아요. 그동안 혼자 외롭게 지냈던 거 보상받는 기분이기도 하구요.”
박용근이 픽 하고 웃는 것을 보며 유정호가 눈치를 살폈다. ‘정말 그런 걸 알아봤단 말이냐!’ 하는 눈빛이었다.
레드 블레이트에 도착했고, ‘감독님, 끝나고 뵙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한 후에 정지우는 라커룸으로 움직였다.
그렇다면 박용근은?
당연하게 마틴의 사무실로 움직였다.
노크를 하고 들어선 박용근을 마틴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혼자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미 어시스턴트 코치, 컨설턴트, 골키핑 코치, 피트니스 코치, 전술 개발 매니저, 아카데미 매니저, 팀 스크립터까지 꽤 여러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용근과 먼저 인사를 나눈 마틴이 고개를 돌렸다.
“여러분, 다들 아시겠지만 오늘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새롭게 리저브 팀을 이끌어 줄 박용근 감독입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서양 사람들이 이런 거 정말 능청스럽게 잘한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박용근을 향해 손뼉을 쳐 주었고, 개중에는 눈인사나, 혹은 ‘멋진 시즌을 기대합니다!’ 하는 말을 건네는 이도 있었다.
인사가 끝나고 다들 자리에 앉자, 마틴이 만족한 얼굴로 박용근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선수 세 명을 추천할 예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다음 시즌에 대한 계획이 있다면 들을 수 있을까요?”
마틴에게 답을 하는 것처럼 박용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분들이 오실 줄은 몰라서 자료를 한 부만 준비해 왔습니다.”
클락이 재빨리 일어나 박용근이 가방에서 꺼내 든 자료를 받아서 방을 나섰다.
5분쯤 잡담하는 시간처럼 마틴이 ‘피로는 풀렸냐?’, ‘한국의 계절은 어떠냐?’를 물어보며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때쯤 클락이 복사한 서류를 들고 돌아왔다.
앉아 있는 이들이 모두 자료를 받아 든 다음이었다.
“박 감독님, 부탁합니다.”
마틴이 전술판을 가리켰고, 박용근이 그 앞으로 움직였다.
통역을 위해 유정호가 박용근의 옆에 섰다.
“영어 실력이 부족한 관계로 최대한 글을 적게 썼습니다.”
나직한 웃음이 마틴의 방에 깔렸다.
“지금 나눠 드린 자료는 대부분 후스코어 사이트를 참조했습니다. 그 외에 별표로 표시된 자료는 영상에 있는 타이머를 이용한 것입니다.”
박용근의 설명이 이어지며 앉아 있는 이들이 자료의 뒷장을 훑어보았다.
“다음 시즌에 우리 팀이 프리미어리그에 살아남으려면 세 가지를 개선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박용근의 말을 유정호가 빠르게 영어로 전해 주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미드필더진입니다. 자료에 보시면 미드필더에서 공을 빼앗은 횟수보다 빼앗긴 횟수가 27퍼센트 많습니다.”
방 안의 분위기가 조금은 무거워졌다.
챔피언십에서 뛰었던 유니온 시티의 기록이었다.
그런데도 미드필더가 뿌린 킬러 패스, 전진 패스, 전체 패스의 성공률이 한 수준 위라는 EPL 평균보다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었다.
다음은 수비수들의 센터링 허용과 코너킥 허용 기록이었다.
이 부분은 반대로 EPL 평균 수치보다 월등히 높아서 골을 먹을 위험이 높게 나왔다.
솔직히 이 정도는 리그에 몸담은 기술진들이 모두 알고 있는 자료들이었다.
“마지막입니다. 유니온 시티의 역습 성공률입니다. 역시 15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료를 뒤적이는 소리가 간간이 울려 나왔다.
“역습 상황에서 6초 이내에 슈팅이 나오면 성공률이 90퍼센트에 이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건 기록 사이트에 없는 내용이어서, 다들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박용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골키퍼인 정지우가 공을 던져 주고, 레믹이 골을 넣은 게 가장 확실한 역습이었습니다. 이때 공을 던진 후부터 골이 나올 때까지가 5초 이내입니다.”
박용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술 개발 매니저가 연필 든 손을 눈앞으로 들었다.
“우리 팀의 다음 시즌 공격 루트를 역습 상황에 집중하자는 의미입니까? 말씀하신 대로라면…….”
전술 개발 매니저가 힐끔 자료를 살핀 후에 고개를 들었다.
“6초군요. 그 6초 이내에 골을 만들어 낼 역습 훈련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 리저브 팀의 훈련은 지금 말씀드린 자료를 바탕으로 계획을 세울 예정입니다.”
마틴은 팔짱을 낀 채 책상에 걸터앉아 듣고만 있었다.
“스웰던의 몸싸움을 누군가 나눠 줘야 합니다. 특히 미드필더진에서 상대에게 위협이 되는 선수와 공격에서 레믹을 보조하며 슈팅을 대신할 선수가 필요합니다.”
듣고 있던 이들이 시선을 교환한 뒤에 다시 박용근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수비에서 라파엘에게 도움 될 선수도 있어야 합니다. 선발진은 훌륭합니다만, 우리는 적어도 로테이션을 위한 또 다른 선발을 준비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말을 마친 박용근이 자료를 내려놓았다.
“이 계획은 리저브 팀을 이렇게 이끌어 보고 싶다는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물론 여기에 계신 마틴 감독님의 전술에 따른 훈련이 가장 기본이 됩니다.”
박용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질문이 쭉 날아들었다.
책상에 걸터앉은 마틴, 다리를 꼬고 등을 척 기댄 컨설턴트, 그 외에도 편안한 자세로 앉은 이들이 세세한 부분까지 질문을 던졌다.
한국의 구단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였는데, 간혹 터지는 웃음과 뜻밖의 진지함이 뒤섞인 시간이었다.
예상보다 길었던 회의가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이 박용근과 악수를 나누고 방을 빠져나갔고, 클락이 자리를 정리했다.
“이야기를 좀 더 나눌 수 있을까요?”
마틴은 박용근에게 책상 앞의 자리를 권했다.
“쥬피터 회장이 제안한 선수 영입 비용이 대략 5백만 파운드(한화 86억 상당)입니다. 물론 Ji의 영입 비용은 제외한 금액입니다.”
박용근의 반응을 살피며 마틴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리저브 팀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고, 박 감독님이 추천하는 세 선수를 보강하는 수준에서 선수 영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연봉을 알 수 있을까요?”
“제가 데려온 선수들을 평가해 보시고, 결정하셔도 됩니다.”
마틴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Ji가 아직 계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조건을 걸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 계약만큼은 지우의 이름을 걸어선 곤란합니다. 실력으로 평가해서 판단해 주셨으면 싶습니다.”
마틴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리저브 팀에서 테스트 선수로 등록하겠습니다. 그래야 다른 선수들이 납득합니다. 그리고 1군과 리저브 팀이 함께 훈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제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지훈련은 원래 1군만 갑니다. 리저브 팀과의 훈련을 위해 이번 훈련 장소는 레드 블레이트로 정하겠습니다.”
마틴이 전지훈련에 대한 계획을 수정하겠다는 뜻을 전하는 것으로 대강 의논이 끝났다.
“박 감독님, 다음 시즌 목표를 어디까지 정하고 있습니까?”
일어서기 직전에 마틴이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어디까지 하고 싶은 겁니까?’ 하는 마틴의 표정에 말을 전한 유정호마저 궁금한 얼굴로 답을 기다렸다.
“프리미어리그 우승입니다.”
박용근의 답에 마틴은 굳은 얼굴로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우리 스태프 전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군요.”
마틴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부터 다 함께 레드 블레이트로 움직였다.
“여기가 라커룸.”
레드 블레이트를 처음 방문한 3명의 동기를 위해서 정지우는 그들과 함께 움직였고, 통역과 안내를 맡아 주었다.
“생각보다 낡았다.”
“오래된 구단이니까. 영국은 통상 100년쯤 돼야 아, 구단이 그래도 좀 됐구나 해. 나가 보자. 잔디부터 밟아 봐야지.”
정지우는 시골 쥐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3명을 데리고 그라운드로 나섰다.
무둔바가 그라운드에 있다가 정지우를 보고 손을 들었다.
“하이!”
“인사해. 영상에 나왔던 무둔바. 무둔바, 한국에서 온 동기들. 이쪽부터 신준석, 박상민, 이정렬.”
정지우는 한국어와 영어로 네 사람을 소개했다.
“Nice to meet you.”
“잘 부탁해.”
짧은 영어와 어색한 한국말 대꾸로 4명이 인사를 마쳤다.
“덩치가 어마어마하구나.”
“부딪치면 트럭과 마주치는 느낌이 들 거다. 저런 선수들이 유연하기까지 해. 밀리면 그 순간부터 영국 리그에서는 끝났다고 보는 게 좋아.”
운동이 간절했던 박상민, 최근 폼이 떨어져서 고민하던 신준석, 그리고 새로운 기회를 위해 달려온 이정렬이다.
빠르고 거친 챔피언십 경기를 영상으로만 확인한 그들에게 무둔바와의 만남은 영국 리그를 실감할 좋은 기회처럼 보였다.
신준석은 그나마 좀 나았다.
“잔디 좀 봐라.”
박상민과 이정렬은 레드 블레이트의 잔디를 손으로 만지며 연신 감탄을 쏟아 냈다.
“가자. 피트니스 코치가 기다린다.”
정지우는 3명을 데리고 2층으로 움직였다.
인사하기 바쁜 오전이었다.
3명을 소개하고 나자 피트니스 코치가 신준석과 박상민, 이정렬의 몸을 체크했고, 훈련 계획을 짜 주기로 했다.
첫날 오전이 그렇게 흘러갔다.
점심을 먹은 뒤에 정지우는 3명과 함께 옷을 갈아입고 그라운드로 나섰다.
“몸부터 풀어. 그 뒤에 공 가지고 그라운드에 적응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훈련은 내일부터 한다고 생각하자.”
“오케이.”
“고맙다.”
넷이서 천천히 몸을 풀었다.
5월 말의 햇살이 나쁘지 않았다.
정지우는 동기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상민은 당연하겠지만, 신준석과 이정렬의 몸을 끌어 올리는 데도 시간이 상당히 필요해 보였다.
다음 날 오전부터 함께 훈련했다.
무둔바와 함께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었고, 가볍게 달린 후에 2층으로 움직였다.
고맙게도 피트니스 코치가 3명의 동기에게 달라붙어 해야 할 운동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혼자 하던 운동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둔바와 3명의 동기가 함께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침에 함께 나온 박용근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마틴과 포메이션과 전술에 대해 의논했고, 프리미어리그에서 만날 팀들을 분석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박용근, 유정호와 함께 먹었다.
“오후 훈련은 내가 함께할 거니까 1시 30분까지 그라운드에 준비해라.”
“예.”
“지우 너는 골키퍼 코치가 따로 준비한 게 있다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네 훈련 하고.”
“예, 감독님.”
아직은 무둔바만 있어서 마치 한국인 팀에 외국인 용병이 끼어 있는 느낌도 들었다.
오후 훈련이 시작되었다.
함께 몸을 푼 뒤에 정지우는 골대로 움직였고, 3명의 동기가 박용근의 앞에 섰다.
웃기는 건 무둔바가 함께 훈련하고 싶다고 3명 끝에 서 있는 거였다.
박용근은 고깔을 세우게 하고, 4명에게 패스를 주고받으며 모두 12개의 고깔을 달리게 했다.
“좀 더 빠르게!”
별거 아닌 거 같은 훈련인데 막상 해 보면 고깔을 넘어트리지 않는 것과, 패스를 받아 다시 넘겨주는 타이밍을 잡는 게 쉽지 않다.
툭! 터엉!
무둔바와 신준석, 박상민과 이정렬이 각각 조를 이뤘는데 특히 박상민이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고, 그래서 고깔을 주로 쓰러트리고 있었다.
띠이이이!
한쪽 골대에선 타이머에 맞춰 정지우가 쉼 없이 뜀틀을 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4명의 선수가 고깔 사이로 공을 주고받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