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19화 (119/262)

제2장. 동대문의 개들. (3)

박용근을 본 신준석의 부친, 모친, 누나 둘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천에 있는 전은주의 꽃집 앞 커피 전문점이었다.

유정호와 함께 들어선 박용근이 신준석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감독님, 다른 말씀 필요 없습니다.”

머리와 꼬리를 뚝 잘라 낸 것처럼 신준석의 부친이 말을 꺼내 들었다.

“내일 준석이 놈 들어옵니다. 데려가셔서 죽이든 살리든 감독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실 게 아니라 여건을 들어 보시고…….”

“제 아들놈입니다, 감독님.”

신준석의 부친은 이미 결심을 세운 얼굴이었다.

“모자란 놈입니다. 그놈이 어찌어찌 포르투갈에 갔지만, 점점 처지고 있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감독님께서 지도해 주셔서 발전이 있다면 그건 모두 감독님 덕분이고.”

안식구를 한 번 돌아본 신준석의 부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자라서 돌아온다면 그건 제 자식 놈이 부족한 탓입니다. 혹여 이 길에서 선수 생활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손톱만큼도 감독님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모친과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친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안 되면 제가 하는 장사를 가르칠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동안 가르치셨던 정을 생각해서 이번에 꼭 좀 데려가 주십시오.”

신준석의 부친이 말을 마친 뒤에 신준석의 누나인 신윤희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듣자하니 사모님께서 고생하신다는데, 이번에 저 녀석을 같이 내보낼 참입니다. 음식도 잘하고. 흠.”

말을 자른 그의 시선이 노려보듯 유정호를 향하고 있어서 분위기는 확실하게 짐작이 갔다.

“아버님, 2군에 데려가는 겁니다. 언제 프리미어리그로 데뷔할지, 혹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도 어렵습니다.”

“괜찮습니다.”

이건 뭐, 박용근이 입을 열 틈이 없었다.

“어차피 지금 몸담고 있는 팀에서도 밀려나서 후보 신세고, 계약도 끝나 갑니다. 한국에 가겠다고 했더니 오히려 팀에서 반기더랍니다. 그저 못난 자식 놈 길 한번 열어 주십시오.”

박용근이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던 일입니다.’ 하자, 그제야 신준석의 부친이 안심된다는 듯 자세를 풀었다.

“저…….”

“자넨 가만있어.”

어쩐 일인지 유정호는 신준석 부친의 말에 캑 눌렸다.

짐작이야 대충 가지만 말이다.

“그게 아니라, 감독님 차를 주문해야 해서요.”

“뭐?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해!”

유정호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대로 움직였다.

“감독님 차 뭐 드실지 묻지도 않고 가?”

유정호는 확실히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정지우는 골키퍼 코치와 의논해서 운동 스케줄을 만들었다.

그 외에 따로 탄력 고무를 부탁했는데, 팀에서 마련해 준 것은 근력 운동을 할 때 사용하는 라텍스 밴드였다.

훈련은 무둔바와 함께했다.

그 역시 집이 근처였고, 개인 훈련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했다.

아침을 먹고 나와 몸 풀고, 운동장을 함께 달린 후에 기구를 이용한 근력 운동을 마친다.

무둔바가 왜 근력 운동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가 싶기는 했는데, 같은 선수끼리 그런 것에 대해 말하기는 어려웠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골키퍼 훈련이었다.

점프와 라텍스 밴드를 이용한 훈련의 순서였다.

무둔바가 꽤 관심을 보였다.

“이건 어디에 도움이 되는 거야?”

“점프. 나는 골키퍼치고 키가 작잖아. 그래서 점프를 얼마나 빠르고 민첩하게 하느냐가 내겐 정말 중요해.”

무둔바가 골대와 정지우, 그리고 라텍스 밴드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Ji.”

그는 굵직한 음성으로 정지우를 불렀다.

“나도 이걸 이용하면 탄력을 키울 수 있을까?”

“너는 수비수로서의 탄력은 괜찮아. 대신…….”

“대신 뭐?”

“내 생각으로는 민첩성을 좀 기르는 게 어떨까 싶은데?”

무둔바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이왕 말이 난 거다.

그리고 이런 건 정말 개인 훈련에서 기르는 게 가장 좋다.

정지우는 골대 옆으로 움직여 한쪽에 모아 둔 공을 하나 몰고 왔다.

“거기 골대 앞에 서 봐.”

정지우가 시선으로 가리킨 곳으로 무둔바가 움직였다.

“내가 드리블을 할 테니까 공을 뺏어. 슈팅 각도 잊어버리지 말고. 거기에 골키퍼와의 동선도 생각해 보고.”

고개를 끄덕인 무둔바가 자세를 갖췄다.

툭, 툭.

정지우는 공을 서서히 몰고 들어갔다.

축구에서도, 배구에서도, 농구에서도 페인트 모션은 승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상대방을 현혹시키느냐인데 말이 좋아서 그렇지, 막말로 속이기 위한 동작들이라고 보면 맞는 거다. 그걸 또 죽어라 연습해야 하는 거고.

툭! 휘익!

정지우가 공을 발바닥으로 누르며 왼쪽으로 몸을 트는 순간이었다.

무둔바의 커다란 덩치가 정지우를 따라 휘청였고,

툭!

정지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른쪽으로 치고 달렸다.

그냥 뚫린 거였다.

투우욱! 철렁!

무둔바가 멍하니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왜? 골키퍼라고 해서 그냥 손만 쓰는 줄 알았어?”

“그런 건 아니고.”

“경기 중에는 라파엘과 카알이 보조해 주니까 이런 상황을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거지. 넌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피지컬을 지녔잖아. 거기에 유연성과 기술만 기르면 센터백으로 최고가 될 거다.”

“흠, 유연성과 기술.”

“아무리 노력해도 너 같은 체격을 만들 수는 없는 거니까.”

무둔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늘 서브로 뽑힌 이유가 그거였지. 그런데 알고도 지금껏 안 됐던 거야. 지금 당장 그게 좋아질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Ji, 전에 필드 플레이어였어?”

엉뚱한 질문에 정지우는 피식 웃어 주기만 했다.

“내일 원하는 훈련 내용을 말하고 스케줄을 짜 달라고 해. 오늘은 저거 같이해 보고.”

정지우가 뜀틀을 가지러 가자 무둔바가 얼른 움직였다.

둘이서 일정한 간격으로 30센티미터 높이의 뜀틀을 5개, 3개, 그리고 다시 5개의 형태로 놓았다.

앞으로 다섯 번 점프해서 뒷걸음질로 1미터를 빠져나온 후, 옆으로 세 번 뛰고, 다시 뒷걸음질로 1미터, 마지막으로 5개의 뜀틀을 앞으로 뛰어넘는 단순하고 지루한 훈련이었다.

전자시계의 버튼을 누른 정지우가 무둔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시작해.”

무둔바가 이런 훈련을 모를 리 없었다.

정지우가 뒤에 서자 무둔바가 먼저 뜀틀을 뛰었다.

“발 떨어트리지 마!”

정지우는 무둔바의 양발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대뜸 고함을 질렀다.

두 발이 동시에 뛰어야 효과가 있는 훈련인 거지, 겅중겅중 돌다리 건너는 식으로 넘어서서는 굳이 이런 훈련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였다.

“헉헉!”

고작 10분쯤 하고 나서 무둔바가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좀 더 빨리해! 아니면 그만두고!”

무둔바가 하얗게 보이는 눈을 희번덕거렸으나, 정지우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거다.

무둔바가 잘한다고 정지우의 연봉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자꾸 처지면 개인 훈련에 방해만 된다.

20분쯤 되자 무둔바의 동작이 확연하게 처지기 시작했다.

띠이이이.

전자시계가 20분을 알렸다.

2분간 휴식이다.

“허억! 허억!”

정지우와 무둔바가 무릎에 손을 걸친 자세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띠이이이.

다시 훈련 시작이다.

힘든 게 다를 건 없다.

똑같이 숨이 막힌다. 물론 덩치가 커다란 무둔바가 조금 더 힘들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경계를 넘지 못하면 결정적인 승부에서 이기기 어렵다.

결국 무둔바는 20분 한 세트로 훈련을 마쳤다.

그가 무릎에 손을 올린 자세에서 노려보는 것처럼 정지우의 훈련을 지켜보았다.

툭툭툭툭툭. 주춤주춤. 툭툭툭.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당장 허벅지, 무릎, 정강이, 허리, 등이 끊어지는 것처럼 힘겹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껏 강도를 줄이며 건성건성 운동했던 것을 박용근은 정확하게 알아보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리그 중 하나에서 실력으로 밀리지 않으려면 답은 훈련밖에 없는 거였다.

또다시 20분이 지나서 2분간 휴식을 취했고, 그 2분이 지나자 정지우는 뜀틀을 향해 달려들었다.

멈추지 않는다.

지지 않는다.

지금 힘든 것보다 골을 먹는 게 더 끔찍하다.

보여 줄 거다!

그 잘난 협회 놈들에게, 아는 놈 끌어당기는 그 야비한 협회와 거기에 붙어서 축구 팬 우롱하는 이들에게!

정지우와 박용근이 하는 축구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를 꼭 보여 주고 말 거다.

무둔바가 지켜보는 앞에서 정지우는 이를 악문 채로 단순하디단순한 동작을 계속 반복했다.

띠이이이이.

마침내 1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정지우는 뜀틀 한쪽에 그대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허억! 허억!”

그동안에도 훈련을 한다고는 했지만, 지금처럼 악착같이 달려들지는 않았었다.

목표가 없어서였을까?

5분쯤 숨을 고른 정지우는 몸을 일으켜 골대로 움직였다.

먼저 라텍스 밴드를 연결해서 길게 묶어 고리를 2개 만든다. 그런 다음 그것을 골포스트에 묶고 상체에 X 자 형태로 걸었다.

전자시계의 타이머를 누른 정지우가 얼른 몸을 세웠다.

휘익! 주춤! 휘익! 주춤!

왼쪽으로 한 걸음 뛰어나가고,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오른쪽 앞으로 한 걸음 뛰어나가는 훈련이었다.

‘질 줄 알아?’

이를 악물고 하는 훈련이었다.

무둔바가 존경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저런 감탄을 얻어 내자고 하는 훈련은 아니었다.

“헉헉! 헉헉!”

지금의 고통이 결정적인 슈팅을 막을 힘이 되고, 간절하게 손을 뻗었을 때 승부를 결정짓는 점프를 할 수 있게 한다.

“끄응!”

휘익! 주춤! 휘익! 주춤!

정지우는 20분마다 쉬면서 결국 1시간을 채웠다.

띠이이이이이.

전자시계의 알람과 동시에 무릎에 손을 짚은 정지우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5분쯤 숨을 몰아쉬는 동안, 무둔바는 공을 다루며 정지우를 힐끔거렸다.

골대 중앙으로 움직인 정지우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번갈아 몸을 눕혔다.

점프가 아니라면 얼마나 빨리 바닥으로 몸을 눕히는가의 싸움이었다. 이때는 무릎을 바닥에 대며 옆으로 쓰러지는 것처럼 그라운드에 몸을 눕혀야 한다.

더럽게 단순한 동작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무둔바의 위치에서, 아니면 바로 코앞에서 슈팅을 날리는 상대 선수가 있다고 생각하면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20분쯤 훈련을 하고 있을 때, 골키퍼 코치가 스태프와 함께 다가왔다.

“무리하는 거 아냐?”

“무리하는 거야.”

둘이서 되지도 않는 농담을 주고받은 다음이었다.

양손을 위로 든 정지우에게 골키퍼 코치가 공을 던져 주었다.

받아서 돌려주고 세 걸음 제자리를 뛰고, 다시 공을 받아서 돌려주고 제자리를 세 걸음 뛴다.

휘이이익!

때론 골키퍼 코치가 정지우의 좌측이나 우측의 발아래로 공을 던지는데, 그때는 직전에 했던 훈련대로 무릎부터 몸을 눕히며 잡아야 하는 거였다.

치사하지만, 이런 훈련을 할 때는 오만 것들을 다 끄집어내야 한다.

어머니, 박용근, 전은주, 릴리,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 비웃고 밀어낸 협회까지.

지켜보세요! 두고 보자!

목표가 생겼다.

미친 것처럼 들릴지 모를 목표.

이정렬의 부모는 덤덤한 얼굴로 박용근과 마주하고 있었다.

언젠가 신준석과 함께 꽃집에 와서 함께 저녁을 먹었던 선수 이정렬의 부모였다.

“감독님, 우리 아들놈은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아 갑니다.”

“이해합니다. 혹시 정렬이가 바람이 들어갈까 봐 아버님을 먼저 뵙자고 했던 겁니다. 제가 부족해서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다른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차가 남았다.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다.

결론이 났다고 해서 바로 자리를 일어나기는 곤란한 사이인 거다.

박용근이 녹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감독님, 우리 정렬이가 재능은 있습니까?”

이정렬의 부친이 뜬금없는 질문을 꺼내 들었다.

제 자식 흉을 듣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나?

더구나 영국에 못 보낸다는 말을 하고 난 다음에 던진 질문에서.

“정렬이는 아시아권 선수치고는 피지컬이 대단합니다. 센스도 있구요. 다만 미드필더들이 정렬이를 받쳐 줘야 하는데, 언제고 그런 때가 오면 충분히 제 몫을 할 겁니다.”

“모자란 점은 뭐가 있을까요?”

어차피 축구로 연결된 사람들이다.

당연하게 화제는 축구였다.

“최근에 몸이 좀 무거워진 것 같습니다. 정렬이가 가지고 있던 순간 스피드가 떨어져 보이던데, 그 점을 좀 더 보강하고…….”

“아들놈 경기를 보셨습니까?”

박용근이 멋쩍게 웃었다.

“제가 부족해도 늘 관심이 가던 제자입니다. 경기를 챙겨 보는 게 대단할 것도 없구요.”

“전부 다 보셨다구요?”

“서브로 있어서 아쉬웠지, 뛴 경기는 전부 보았습니다.”

이를 악문 것처럼 이정렬 부친의 볼이 씰룩였다.

“감독님, 정말 우리 아들이 뛰어난 선수가 될 그릇이 됩니까? 제 말은 영국에 데려가셔서 키울 만한 재능이 있느냐는 그런 뜻입니다.”

“정렬이는 재능이 있습니다. 다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미드필더들이 어떻게 받쳐 주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골대 앞에서 정렬이처럼 몸싸움 잘하는 선수 드뭅니다.”

이정렬의 부친이 마른침을 꿀꺽 삼킨 다음, 부인을 힐끔 돌아보았다.

“여보, 정렬이 보내자.”

모친은 눈치만 살피며 입을 열지 못했다.

“그깟 연봉 6천에 애 바보 만들지 말고, 보내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 큰 세상으로 보내서 제대로 뛰게 하자.”

모친은 아직 답을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품 안에만 둘 거야? 내가 1년에 두 번씩 비행기 표 사 줄게. 그러니까 우리 아들놈 그냥 보내자.”

눈치를 살피던 이정렬의 모친이 결국 ‘그래야겠지?’ 하고 답을 했다.

“감독님, 말을 바꿔서 죄송하지만, 아직 기회가 있다면 자식 놈 데려가 주십시오. 그저 큰물에서 제대로, 원 없이 뛸 수 있게 한번 만들어 주십시오.”

이정렬의 부친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여 가며 박용근에게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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