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18화 (118/262)

제2장. 동대문의 개들. (2)

유정호만큼 먹는 사람이 또 있었다.

바튼이 있었다면 분명 밥과 고기가 모자랐을 거다.

장진모는 유정호마저 고개를 흔들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먹어 댔는데, 김치와 밑반찬의 절반 이상이 없어질 정도였다.

전은주가 극구 말렸지만, 다 같이 달려들어 설거지를 마쳤다.

정지우가 보약을 먹은 다음이었다.

장진모까지 끼어서 네 남자가 소파에 앉아 홍삼 봉지를 입에 물었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마지막까지 악착같이 홍삼 엑기스를 짜 먹은 장진모가 만족한 얼굴로 배를 만져 댔다.

“내가 살다가 기자 양반 밥 챙겨 먹인 건 이번이 처음이오.”

“객지 나왔더니 밤마다 김치가 아른거려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근처에 한국 음식점이나 슈퍼가 없어서 살 곳도 없었구요. 정말 잘 먹었습니다.”

뻔뻔스럽게 답을 한 장진모가 정지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지우 선수, 처음 봤을 때 옷 잡았던 거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예.”

말을 마친 장진모가 얼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절대 이 사진은 기사에 안 쓸 겁니다. 내가 진심으로 정지우 선수 팬인데,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읍시다. 평생 간직할게요.”

거절하기 어렵게 장진모가 정지우의 곁으로 다가서서는 전화기를 높게 들었다.

“부장한테 자랑할 거라 그런데, 좀 웃어 줍시다.”

뻔뻔스럽긴 하지만, 밉지 않은 사람?

정지우는 적당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찰칵!

사진을 찍은 장진모가 사진을 확인해서 정지우에게 보여 주고는 원래 앉았던 자리로 움직였다.

“진심으로 계약하신 거 축하드리러 왔었습니다. 전 사회부 기자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분야든 바른길을 가시는 분이 잘되면 그게 무엇보다 기분 좋더라구요.”

편안한 표정으로 장진모가 박용근을 향해 말을 건넸다.

“취재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기도 했구요. 감독님, 앞으로도 정지우 선수와 함께 멋진 모습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녁 정말 잘 먹었습니다.”

말을 마친 장진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이대로 간다고?

질문 하나도 안 던지고?

정지우와 박용근, 유정호가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이었다.

“감독님, 위에 앉았던 이들이 추악한 욕심으로 수모를 드렸다고 축구 팬들마저 외면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 축구라도 있어야 제2, 제3의 정지우 선수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한국 축구의 위상을 세워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지한 태도로 말을 마친 장진모가 ‘가 보겠습니다. 사모님, 저녁 잘 먹었습니다.’ 하고는 현관으로 움직였다.

“장 기자님.”

밖으로 나가기 직전이었다.

박용근이 불렀고, 신발을 신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던 장진모가 몸을 세웠다.

“나중에 차 한잔합시다.”

“감사합니다! 언제고 연락 주시면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밉지 않은 인사를 마치고 장진모가 현관을 나섰다.

“당신이 웬일이야? 기자분에게 차를 다 마시자고 하고?”

“저 친구같이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지우의 팬이라고 할 때 눈빛이 진심 같아서. 그게 고마워서 그랬어.”

박용근이 혼잣말처럼 하는 답을 끝으로 세 사람은 소파로 움직였다.

다음 날, 아침을 일찍 먹은 후에 정지우와 박용근, 유정호는 서재에 있는 탁자에 둘러앉았다.

세 사람 모두 편안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유니온 시티에서 받아 온 자료들과 지난 챔피언십의 46경기가 담긴 CD가 탁자 한쪽에 제법 높다랗게 쌓였다.

“너는 체력 훈련부터 시작하자.”

“예. 그럼 한국에 다녀오시는 동안 구단 스태프와 스케줄을 짜서 훈련하고 있겠습니다.”

“나는 내일 마틴 감독과 만나 볼 생각이다. 전술 훈련 일정을 확인하고, 리저브 팀 선수 중에서 포지션별로 보강해야 할 선수들도 챙길 생각이다.”

말을 마친 박용근이 잠시 입을 다물고 서류들을 들춰 보았다. 무거운 표정이었다. 정지우가 보기에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쉽게 꺼내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서재에 깔린 침묵 역시 박용근의 표정만큼이나 묵직한 느낌이었다.

“흐음-!”

커다랗게 숨을 내쉰 박용근이 서류에서 손을 떼고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지우야.”

“예, 감독님.”

입술에 힘을 잔뜩 준 박용근이 결심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이번에 한국에 가면 준석이 부모님과 상민이 부모님을 찾아뵐 생각이다.”

이런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유정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피는 앞에서 박용근이 다시 말을 이었다.

“수비만이 아니라 팀 전체에서 스웰던이 부담해야 하는 몫이 너무 크다. 그만큼 그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도 크고, 그래서 퇴장도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상민이가 제 몫을 한다면 팀에 크게 도움될 거다.”

화제가 이상한 곳으로 툭 튀어 갔지만, 이런 부분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독님, 스웰던이 필요한 건 아는데 퇴장이 잦았던 게 스스로를 누르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었나요?”

“영국 리그를 직접 본 것이 이번이 전부인 건 너도 알 거고. 영상들을 보며 확실히 알았는데, 이곳이 다른 리그와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 한 가지가 바로 몸싸움이더구나. 공이 없는 곳에서, 화면에 나오지 않는 곳에서도 몸싸움이 꽤 있었다.”

“예.”

이건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시간 날 때 지난 경기를 천천히 확인해 봐라. 어쩐 일인지 미드필드에서 계속 몸싸움에서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스웰던 혼자 너무 부담이 컸던 것 같고, 무둔바가 좀 더 뛰어난 활약을 할 수 있는 근거도 그런 것이고.”

정지우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일이었다.

“리저브 팀 선수들을 뒤져 보겠지만, 가능하다면 상민이와 준석이를 데려와 함께 훈련해 볼 생각이다. 준석이는 이적 문제가 걸렸는데, 그 점을 내가 장담할 수 없어서 부모님을 먼저 만나 볼 생각인 거고.”

“예.”

답을 하면서 정지우는 박상민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커다란 덩치와 그만큼이나 커다란 눈이 생각났다.

“그 두 녀석을 데려오는 것이 너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그게 가장 걱정된다. 그래서 네게 먼저 의논하는 거다.”

“감독님이 판단하셔서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감독님.”

정지우는 박용근의 말을 자르며 그를 불렀다.

버릇없는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박용근은 변명 따위를 늘어놓을 일을 할 사람이 아니란 믿음 정도는 있었다.

“감독님께서 옳다고 판단하셨으면 전 그걸로 됐어요. 지난 6년 동안 하루속히 감독님을 찾아뵙지 못한 게 억울한 시간을 보냈거든요. 앞으로는 하루라도 더 함께 지내고 싶고…….”

정지우가 힐끔 유정호를 본 다음 말을 이었다.

“다음 시즌은 프리미어리그에서 엄청난 성과를 이루고 싶어요. 그래서 감독님께 그런 팀을 만들어 달라고 조를 참이었어요. 감독님, 저 유니온 시티가, 그리고 프리미어리그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기억에 남을 그런 시즌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전국대회 때에도 알아서 선수들을 다그쳤었지, 이런 식으로 뜻을 건네지는 않았었다.

과일을 깎아서 들고 온 전은주가 분위기에 눌려 쟁반을 들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시즌을 통해서 감독님과 제가 실력이 부족해서 밀려난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감독님이 저를 얼마나 잘 가르치셨는지를 증명하는 경기를 하고 싶습니다.”

스물여섯 살 먹은 제자가 처음으로 당당하게 뜻과 의지를 밝히는 자리였다.

박용근이 작은 눈을 정지우에게 고정하고 꼼짝도 않고 있었다.

“유니온 시티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프로 선수라 어디로 이적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한 번쯤은 웸블리에서 느꼈던 것보다 큰 기쁨을 관중들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유정호가 마른침을 삼킬 정도로 분위기가 진지했다.

“제게 축구를 가르쳐 주셔서, 그리고 포기하지 않게 지켜 주셔서.”

정지우가 전은주를 한 번 본 다음 다시 박용근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쟁반을 든 전은주가 입을 삐죽이는 앞이었다.

낯간지러운 말을 뱉어 낸 것이 쑥스러워서 정지우는 시선을 떨구고 탁자를 바라보았다.

박용근이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갱년기가 맞긴 한가 보다.”

시선을 들었을 때 박용근은 손을 뻗어 전은주가 들고 있는 쟁반을 받고 있었다.

“얼른 앉아. 과일 먹자.”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잖아.”

“방금 다 끝났어. 과일 먹고 자료 검토하면 돼.”

“앉으세요, 사모님.”

정지우가 권했고, 유정호가 나서자 전은주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바쁘게 포크를 움직여 정지우에게 과일을 건넸다.

“감독님 먼저 드리세요.”

“당신 뭐해? 얼른 먹어.”

“이 사람이! 애 버릇 나빠져!”

“지우가? 우리 지우는 그럴 아이 아니야.”

박용근이 기가 막힌 것처럼 웃으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감독님, 준석이 부모님께는 연락하셨습니까?”

과일을 한입 베어 물며 기회를 엿보던 유정호가 얼른 질문을 던졌다.

“모레 출국이니까 오후에 전화해 봐야지? 김 감독에게 슬쩍 분위기도 물어봐야 하고.”

“제가 할까요?”

유정호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한국까지 달려갈 기세였다.

“프리미어리그는 로테이션이 반드시 필요하겠더라구. 게다가 유로파 리그도 병행해야 하고. 게다가 지우의 목표를 알았으니, 두 녀석 더 데려와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고개를 갸웃했던 박용근이 ‘그래! 그럼 준석이 부모님께는 자네가 전화하는 것으로 하지.’ 하고 답을 해 주었다.

사흘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훌쩍 흘렀다.

박용근과 전은주, 그리고 유정호가 한국으로 떠났고, 정지우는 훈련에 집중했다.

박상민은 원래 덩치가 좋았다.

부리부리한 눈을 지녔는데 그냥 바라보는 건데도 어딘가 좀 번들거리는 느낌을 주어서 어릴 땐 시비도 잦았다.

평택에서 돌을 깎던 아버지는 그 근방 씨름 대회에서 소도 여러 마리 탔을 정도로 통뼈에 힘이 장사였다.

교통사고를 당해 자리에 눕지만 않았다면 박상민도 돌 깎는 일을 했을지 모를 만큼 실력도 있었다.

오후 2시에 일어난 박상민은 밥을 먹고 샤워를 마쳤다.

“다녀올게요.”

모친은 박상민의 등을 쓸며 답을 하지 못했다.

“왜 그래?”

“너 망가지는 거 같아서 그래.”

“뭔 소리야? 나 돈 많이 벌어서 우리 김 여사랑 행복하게 살 거야. 요즘 감독님 잘되셨다는 소식 들어서 그나마…….”

삐이요! 삐비비비비비!

그때 새소리를 흉내 낸 게 분명한 벨이 울렸다.

이 허름한 평택의 2층 빌라에 올 사람은 없었다.

“누구세요?”

박상민은 질문을 던지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뒤에서 고개를 기울여 밖을 내다본 모친이 ‘감독님!’ 하며 먼저 외쳤다.

박상민은 그제야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오세요.’ 하고 몸을 비켰다.

어색하게 안으로 들어선 박용근이 과일 꾸러미를 모친에게 건넸고, 부친에게 인사드리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버지는 이 시간에 주무세요. 밤에 힘들어하셔서요.”

“그렇구나.”

“우선 앉으세요.”

모친이 후다닥 움직여 소파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챙겨 들었다.

낡은 가구와 문짝, 오래된 TV, 시큼한 김치와 반찬 냄새, 물기를 잔뜩 머금은 싱크대.

세 식구 살림살이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아볼 정도였다.

TV를 향해 길게 놓인 낡은 천 소파가 전부였다.

그래서 박용근은 그 앞 거실 바닥에 앉았다.

어색하게 박상민이 맞은편에 앉았고, 모친은 바쁘게 커피를 타겠다며 주방으로 움직였다.

“왜 전화를 안 받아?”

박상민은 답이 없었다.

모친이 자꾸만 눈치를 살핀다는 것을 박용근이나 박상민 모두 알고 있었다.

“내 소식 듣고서 전화 안 받은 거지?”

모친의 눈이 박상민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고 있는데도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급하게 탄 커피였다.

플라스틱 잔에 커피, 분말 크림, 그리고 설탕을 두 스푼씩 부어 넣어서 색은 참 보기 좋았다.

“감독님, 차 좀 드세요.”

모친의 정성이 고마워서 박용근은 뜨거운 플라스틱 잔의 끝을 엄지와 검지로 겨우 들고서 후루룩거리며 마셨다.

“나하고 영국 가자.”

박상민이 고개를 들어 박용근을 보았다.

“6개월만 함께해 보자. 그 안에 계약 안 되면 그때 돌아오고.”

“저 없으면 아버지랑 어머니 생활이 안 되세요.”

모친이 자꾸만 눈을 끔뻑이는 것을 외면한 채 박상민이 굵직한 음성으로 답을 건넸다.

“감독님, 상민이 데려가실 순 있으세요?”

“엄마!”

“엄마 일할 수 있어. 엄마 나오라는 데 많아. 그러니까 너는 제발 축구해.”

박용근이 낡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하얀 봉투를 꺼냈다.

“내가 받은 계약금이다. 그냥 주는 거 아니다. 네가 유니온 시티와 계약하게 되면 거기에서 이거 제할 거야.”

박상민도, 모친도 꼼짝 못하고 하얀 봉투만 바라보았다.

달달한 커피 냄새가 거실에 가득 차는 동안, 박상민은 답이 없었다.

“감독님께서 도와주셔서 작년까지 운동했었잖습니까? 언제까지 이러실 건데요? 한국에도 원하는 팀이 아무 곳도 없는데, 영국 간다고 달라질 거 있겠습니까?”

말과 달리 박상민의 목소리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공연히 저 데려가셨다가 감독님만…….”

“상민아.”

“예.”

“너, 나하고 했던 약속 기억하지.”

“예…….”

답이 조금 늦게 나왔다. 그리고 박상민의 고개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내가 너한테 했던 말도 기억하고?”

“예에…….”

박상민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주둥이를 기다랗게 늘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축구하자. 우리가 하고 싶었던 축구. 우리 그런 축구 한번 해 보자.”

“흐으으……. 흐으…….”

모친이 고개를 돌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저렇게까지 축구가 하고 싶었던 줄은 몰랐다. 그런 아들이 매일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져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랑 가자. 우리, 우리가 하고 싶었던 축구하자.”

“흐으으……. 흐으! 흐으…….”

박상민은 서럽게 울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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