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14화 (114/262)

제9장. 그래서 목표는 찾았니? (2)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제게 축구는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싶어서 했던 운동이었던 것 같았어요.”

“네가?”

“예.”

전은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감독님이나 나는 네가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줄 알았어. 워낙 뛰어난 실력을 보이기도 했었고.”

“재능은 좀 있는 거 같지요?”

확실히 전보다 넉살이 늘었다. 그래서 전은주는 안쓰럽게 바라보던 얼굴에 웃음을 담았다.

“최근에 생각했던 거예요. FA컵 결승전 끝나고 기자회견 할 때 장진모 기자란 분이 던진 질문을 듣고서요. 앞으로 목표가 뭐냐고 물어보는데 멍하더라구요.”

“그래서 뭐라고 답했니?”

“그때는 일단 다음 리그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 질문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질 않더라구요.”

소파에 양반다리로 앉은 정지우와 그 맞은편에서 편안하게 앉은 전은주의 모습만 놓고 보면, 영락없이 한가로운 날 나누는 모자간의 대화처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 모두 그런 느낌이었다.

“감독님께서 가르쳐 주신 축구는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그런데 전국대회 이후로 축구가 재미있어서 했던 적은 없었나 봐요.”

“살면서 재미있어서 하는 일은 별로 없지 않을까?”

“대신 목표가 분명했으면 싶어요. 그냥 리그에서 좋은 성적, 그리고 더 나은 대우를 위해서 경기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랬구나.”

다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전은주는 정지우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목표는 찾았니?”

“예.”

“정말? 그게 뭔데?”

전은주는 놀라고 궁금한 얼굴이었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런 축구를 하고 싶어요.”

그러나 정지우의 답을 들은 전은주의 표정은 무척이나 애매했다. 설마하니 초등학생이나 내놓음 직한 답을 정지우가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정지우가 씨익 웃자 전은주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유니온 시티에서 출발해 보려구요. 이곳의 관중들 대부분이 철강 노동자들이거든요. 그들이 FA컵 우승에서 얼마나 커다란 힘을 얻는지를 분명하게 보고 나니까 그런 욕심이 생겼어요.”

“그럼 다음 목표는 리그 우승이야?”

“예. 대신 앞으로도 유니온 시티에 이 우승이 전설처럼 떠돌, 그런 우승을 한번 해 보고 싶어요.”

“굉장하구나.”

정지우가 그만 커다랗게 웃고 말았다.

반쯤 알아들었으면서도 정지우의 뜻을 칭찬하려 애쓰는 전은주의 반응 때문이었다.

나이 많은 어른에게 하기에는 이상한 표현이지만, ‘귀엽다’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모습이기도 했다.

“감독님께 많이 의논드릴 거고, 도움도 필요하고, 그래서 앞으로 맞이할 시즌이 엄청나게 기대돼요.”

“어쨌든 목표는 찾은 거지?”

“예.”

정지우와 전은주가 비슷하게 웃었는데 느낌은 조금 달랐다.

장진모는 미디어 담당관 에이미의 도움으로 선수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데이빗, 카알, 라파엘, 무둔바, 기예르모, 스웰던까지 가능한 모든 선수들을 만났는데, 의도적으로 정지우의 이름을 꺼내지는 않았다.

솔직히 그럴 이유도 없었다.

한국인 기자라는 사실을 알고 난 그들이 먼저 정지우에 대해서 아는바, 느끼는 바를 술술 털어놓는데, 굳이 입 아프게 뭐하러 질문을 하겠나.

오전 내내 약속된 인터뷰를 마친 장진모는 에이미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제 알았다.

정지우의 활약이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에이미를 통해 박용근이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

그는 레드 블레이트를 나와 입구의 적당한 곳에 걸터앉았다.

시간 참 빠르게 지나간다.

벌써 FA컵 결승이 끝났고, 마지막 리그 경기를 앞두고 있는 거였다.

‘안에 들어가서 몇 개 사야 하나?’

우승 기념으로 유니온 시티는 유니폼과 기념품들을 싸게 파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부장의 얼굴도 떠오르고, 성적이 안 좋아서 대학을 마음에서 비웠다는 조카의 얼굴도 생각났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유니온 시티 기념품을 마음에 들어나 할까?

“장진모 너도 참!”

장진모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어 댔다.

열심히는 살았는데 평범한 것들을 너무 많이 놓쳤다.

봐라.

지금도 ‘안 생겨요!’인 외로운 인생인 거다.

대학만 가면 생기는 줄 알았었다.

군대 다녀오면 누구나 만나는 줄 알았었고, 직장 가지면 회사 내에 좋아하는 여자쯤 한둘은 깔린 줄 기대했었다.

“쩝!”

장진모가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눈앞에서 박용근과 유정호가 주차장을 향해 지나가고 있었다.

“감독님! 감독님!”

본능처럼 장진모는 후다닥 달려가 박용근을 따라잡았다.

“장진모입니다. 혹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평소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박용근이다.

그런데 기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원하시면 절대 기사 안 씁니다. 그건 정지우 선수에게 확인하시면 아실 겁니다.”

“아직도 쓸 기사가 남았소?”

“기자가 기사 떨어졌다는 건 거짓말이죠. 하지만 쓸 것과 안 쓸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난 할 말 없소.”

“감독님! 그러지 마시고 차 한 잔만 하시죠. 오늘 이야기 기사로 쓰면 제가 개 아들입니다.”

장진모의 말을 들은 박용근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하나만 먼저 물읍시다. 지우에 대한 그 기사, 무슨 생각으로 낸 거요?”

“정지우 선수가 더 억울하게 당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게 그 선수에게 더 큰 아픔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소?”

“했습니다.”

장진모가 당당하게 답을 했다.

“정지우 선수, 죄지은 거 없습니다. 그런 선수가 약점을 잡힌 것처럼 매번 끌려 다닙니다. 그래서 그 내막을 기사로 썼던 겁니다. 때론 주변에서 보는 게 더 정확할 때가 있습니다.”

박용근의 날카로운 눈빛 앞에서도 장진모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축구라면 몰라도 언론이라면 정지우 선수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가 될 선수라는 거 감독님도 아시잖습니까? 그런 선수가 억울하게 매도되어선 안 됩니다.”

“정지우를 얼마나 알고 계시오?”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플레이에 감동이 있는 것만은 알겠습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습니다만, 저는 그의 팬입니다. 그리고 기자입니다. 제 손으로 그가 빛나게 만들고 싶습니다.”

박용근과 장진모가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부탁합시다. 지우 좀 편안하게 살게 놔두쇼.”

“부탁드립니다. 감독님과 정지우 선수의 이야기를 제대로, 공정하게 보도할 기자가 있다는 것도 한 번쯤 믿어 주십시오.”

“우리는 그런 보도를 원치 않는다니까요.”

“외신 보도를 받아 적더라도 기사는 나갑니다. 활약이 클수록 추측성 기사, 잘못된 기사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럴 바엔 당당하게 말씀하실 것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후우-!”

박용근이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잘 알았소.’ 하고 몸을 돌렸다.

“감독님! 조동익 부회장과 한승관 기술 위원은 오늘 자로 검찰에 고발되었습니다. 이것이 언론의 힘입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잘한 것은 칭찬받을 수 있게 하는 것!”

걸어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장진모가 커다란 음성을 뚝뚝 던져 댔다.

“국가대표 하지 마십시오! 그걸 원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감독님과 정지우 선수가 왜 하지 않는지는 설명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좋아하는 정지우 선수가 공연히 욕먹지 않게요!”

저만치 걸었던 박용근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유니온 시티에 남는지, 어째서 그 큰 금액을 거절하고 이곳에 남으려는지, 정지우 선수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합니다. 그런 것들에서 정지우를 벗어나게 하고 싶습니다.”

박용근은 아직껏 꼼짝도 않고 장진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감독님이 아시는 것보다 더 큰 재능일지 모릅니다. 그런 재능이 엉뚱한 계략과 모함 때문에 6년을 헛되이 보냈습니다. 이제라도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장진모가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

승부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박용근이 돌아선다면 이후로 언제 그와 다시 연결될지 알 길이 없는 거였다.

그래도 진심을 전했으니까 됐다.

장진모가 쓴 입맛을 다실 때였다.

박용근이 말없이 몸을 돌려 그대로 걸어갔다.

부장은 요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나오느니 최고 클릭수 경신이요, 느느니 광고 수익이었다.

게다가 썩었던 협회를 바로잡은 언론의 참모습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아무리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허양수 집안이지만, 당장은 국민들의 눈초리가 매서워서 압력을 행사하지도 못했다.

보고서에 적힌 기록들을 살피며 부장은 헤벌쭉 웃었다.

어지간한 부서 서너 달의 실적을 장진모 혼자서 깔끔하게 밟아 준 꼴이니, 어떻게 입이 안 벌어질 수가 있겠나.

“흐흐흐.”

부장은 만족한 웃음을 흘리며 책상 한쪽 서랍을 열었다.

허상수, 허하수, 허양수로 이어지는 라인에 관한 자료들이었다.

“잘한다, 장진모. 이대로 시선 끌면서 허양수에게 불똥 튀게 만들어라. 나머지는 내가 거의 다 준비했다.”

부장은 다른 이들 모르게 서류들을 다시 살폈다.

누가 보면 오늘도 기사 반응이나 뒤적이며, 야근 수당 챙기는 전형적인 부장의 모습이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번호를 확인한 부장이 얼른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형, 나요.]

“그래. 오늘은 뭐 좀 나왔냐?”

[쉽게 안 되네.]

“거머리가 그러면 쓰나? 소금을 쫙쫙 뿌려도 나는 바다 거머리요, 하고 달려들어야지.”

[거참! 뭐 좋은 소식은 없어요?]

“지금 여기 자정 넘어간다. 특별할 일이 뭐가 있겠냐? 건강은?”

[괜찮아요. 맥 빠져서 목소리나 들으려고 전화했었어요.]

“건질 것 없으면 적당히 하고 들어와. 이 정도여도 사실 차고 넘친다.”

부장이 슬쩍 약을 올린 직후였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내가 정지우 만나기 전에 들어갈 것 같아요? 하여간 또 전화할게.]

“그래. 힘내라.”

전화를 끊은 부장은 등받이에 몸을 깊숙하게 기댔다.

이제 정말 퇴근할 시간이었다.

***

사람 사는 일이다.

온갖 일들이 벌어지지만, 시간은 늘 공평하고 꾸준하게 흘러간다.

금요일 오후.

유니온 시티의 마지막 리그 경기가 다가왔다.

레드 블레이트는 축제를 즐기려는 홈 관중으로 가득했다.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은 경기 시간 전부터 밀려드는 팬들로 북적였는데, 역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정지우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과 상품들이었다.

입스위치 FC는 오늘 승리해서 승점 3점을 확보하면 강등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오늘은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들어야 하는 경기였다.

유니온 시티는 챔피언십에서 치르는 마지막 경기 외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는 경기였다.

솔직히 약간은 맥 빠지는 경기?

오늘 경기가 주는 느낌은 그랬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홈 관중들은 챔피언십 마지막 경기에서도 한결같은 응원을 펼쳐 내고 있었다.

장진모는 그라운드의 한쪽에서 관중석을 둘러보며 픽 하고 웃고 말았다.

처음 왔을 때는 놀라웠던 응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웸블리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서 어딘가 서운한 응원처럼 들렸다.

“사람 참 간사한 거야.”

그가 혼잣말을 뱉어 낼 때였다.

“우와아아아-!”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섰다.

장진모가 시선을 돌려 선수 통로를 바라보는 앞에서 마침내 정지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예에에에에에-!”

지금껏 제대로 불붙지 못했던 레드 블레이트가 한순간에 달궈지는 느낌이었다.

관중들은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하는 응원가를 펼쳐 냈다.

그라운드를 반으로 나눠 양 팀 선수들이 이리저리 달렸고, 골키퍼들은 골대 앞에서 공을 주고받으며 나름으로 몸을 풀었다.

정지우는 기예르모와 함께 몸을 풀고, 천천히 공을 주고받았다.

“오늘은 괜찮겠어?”

“물론입니다.”

기예르모는 확실히 지난 경기에서 두려움을 털어 낸 것처럼 보였다. 그 증거로 선발로 나선 서브 선수들이 지닌 묘한 흥분이 눈과 얼굴에 올라 있었다.

공을 내려놓은 정지우는 기예르모와 함께 천천히 골대 좌우를 뛰었다.

“선수 파악은?”

“적어 준 자료는 다 외웠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

이 정도 모습이라면 긴장 때문에 경기를 망치는 일은 없을 거였다.

정지우는 기예르모와 함께 라커룸으로 움직였다.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라고!”

오늘도 어김없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고함이 들려왔는데, 역시나 그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챔피언십 마지막 경기 시작이 한 시간쯤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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