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13화 (113/262)

제9장. 그래서 목표는 찾았니? (1)

월요일에 박용근과 마틴의 약속만 잡은 후, 정지우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집에서만 지냈다.

월드컵 예선 쿠웨이트전과 맞물려 한국 내의 반응이 예상 밖으로 거센 탓에 사실은 조신하게 지냈다는 것이 맞았다.

게다가 쉬쉬하던 정지우의 스카우트 소식이 제대로 한국의 언론에 보도되었다.

<각 리그를 대표하는 다섯 개 팀들의 스카우터를 런던에서 만나다.>

<정지우를 바라는 세계 정상의 팀>

<바르셀로나, 정지우를 위해 600억 준비>

역시나 장진모가 쓴 기사였다.

이 기사에 달린 축구 팬들의 댓글은 ‘절대 이런 물에 섞이지 말고, 세계적인 선수로 커라’와 ‘그래도 한국 대표로 우리 축구 팬들에게 희망을 달라’는 것으로 크게 나뉘었다.

조동익은 한승관과 함께 아침 일찍부터 김문호의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조동익과 한승관을 본 김문호가 붙잡을 틈도 없이 바로 나가 버렸는데, 그를 기다리는 것 말고 달리 해결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식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보며 조동익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순 없는 거다.

물론 손톱만큼 개인적인 욕심을 차린 것은 있다.

하지만 솔직히 떡 만지다가 들러붙은 떡고물 좀 입에 넣었다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가 이대로 죽을 것 같으냐?’

조동익은 시선을 떨군 채 이를 악물었다.

이 수모를 견디고 일어나리라.

그렇게 자리를 되찾고 나면 가장 먼저 옆자리에 목을 빼고 앉아 있는 한승관을 먼저 날려 버리고…….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치욕을 삼키며 미래를 그리던 조동익의 주머니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한승관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도록 조동익은 전화를 받지 못했다.

어째서 벨 소리가 이렇게 섬뜩하게 들리는 걸까?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멈춘 것 같던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는 것은 아닌 거다.

내심 한숨을 내쉰 조동익은 전화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야. 왜?”

[부회장님.]

직원은 기껏 불러 놓고 말을 못한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이 미친 것도 아니고, 가뜩이나 심란한 사람에게 전화해서 한숨을 쉬어?

“무슨 일이야!”

조동익이 버럭 소리를 지른 다음이었다.

[어제저녁에 귀국한 대표팀 선수 중 유병조, 이진용, 그리고 몇 명이 술판을 벌였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조동익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천지에 술에 환장한 놈들도 아니고, 어떻게 이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알았어. 내가 이곳 일 좀 보고…….”

[회장님께서 부회장님과 한 위원을 검찰에 고발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조동익은 뒤통수를 수술용 메스로 길게 가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멍한 얼굴로 대꾸조차 못했다.

[지금 검찰에 고발장을 제출합니다. 저는 부회장님께서 결백하시리라 믿습니다. 기운 잃지 마십시오.]

전화를 끊기 직전에 들렸던 직원의 음성이 ‘마십시오. 시오. 시오. 시오오오.’ 하고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십니까?”

한승관을 돌아보던 조동익이 소파의 등받이에 축 늘어졌다.

“부회장님? 왜 이러십니까? 기운을 차리셔야지요!”

‘이걸로 정수리를 때리면 죽으려나?’

조동익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앞에 있는 인간을 죽이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다.

쿠웨이트전을 끝내고 돌아온 한국 대표팀이 그날 저녁에 가라오케에서 술판을 벌인 사진이 연달아 보도되었다.

여론은 한마디로 ‘죽어라!’로 요약되었다.

그리고 불난 집에 화끈하게 기름을 부어 대는 기사가 새롭게 올라왔다.

<브라질과의 평가전에 숨겨진 이야기>

평가전을 앞둔 훈련 과정에서 1조와 2조를 나누었고, 그때 있었던 체력 훈련이 제대로 보도되었다.

보도는 역시나 장진모였다.

‘절대 이곳을 돌아보지 마라!’

‘세계무대를 평정하는 훌륭한 선수가 돼라.’

‘그동안 지켜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했다.’

장진모의 기사마다 댓글이 수만 개씩 달렸고, 축구 팬들의 의견은 하나로 모아졌다.

<협회, 조동익과 한승관을 검찰에 고발, 선수 선발에 관한 추문을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

댓글마다 축구 팬들의 환호성이 가득 담긴 보도가 뒤를 이었다.

김문호는 종이컵에 봉지 커피를 타서 소파로 움직였다.

“여긴 이런 것밖에 없습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합니다.”

김문호의 맞은편에서 송인수 기술 위원장이 씁쓸한 얼굴로 종이컵을 받았다.

편안한 양복에 노타이 차림인 그는 그나마 협회에서 제 몫을 해내는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말씀드렸듯이 박 감독하고 통화는 됩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워낙 완강해서 더는 말을 붙일 여지가 없습니다.”

“이해합니다. 나라도 그런 대우를 받았다면 쳐다도 보기 싫을 것 같으니까요.”

둘이서 어색한 얼굴로 종이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다.

“김 감독, 그렇더라도 우리 축구가 이대로 물러서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종이컵을 매만지며 송인수가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최선을 다해 보고 물러서더라도 물러서야지, 이건 무엇보다 우리 국민과 축구 팬에 대한 도리가 아니에요.”

김문호의 대꾸가 없자 송인수가 얼른 말을 이었다.

“당장 외국인 감독을 부르기도 어렵고, 또 지금 상태에서 부를 만한 감독 적임자도 없습니다. 다들 시즌 중이고, 또 이 자리를 맡아 봐야 뒤에 뭐가 남는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걸 왜 꼭 박 감독을 원하십니까? 오히려 그 친구만큼은 빼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송인수가 슬쩍 시선을 들었다.

“국민들이 납득할 감독 적임자가 당장 박 감독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머뭇거리던 송인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박용근 감독이 월드컵 예선 두 게임만 맡아 주는 것으로 처음부터 못 박고,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협회와 내가 지겠다고 발표하면 어떻겠습니까?”

“제발 좀 살겠다는 친구 좀 그냥 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협회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축구와 국민들을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그 국민을 위하는 마음이! 왜! 지금껏 내내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나오는 겁니까! 사람을 씹고 씹어서 아주 난도질을 해 놓고, 이제야 국민을 위하고 우리 축구를 위한다니!”

버럭 고함을 질렀던 김문호가 이를 악물고 노려보기만 하는 바람에 사무실 안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전반전이 잘못되었다고 후반전을 버릴 수야 없는 노릇 아닙니까? 후반이라도 바로잡아서 다음 경기를 치를 발판을 마련해 보겠다고 이러는 겁니다.”

김문호를 다독이는 것처럼 송인수의 음성은 나직했다.

“두 경기입니다. 박 감독이 유니온 시티의 리저브 팀을 맡는다고 해도 영국 리그 훈련과 개막에 맞춰 돌아갈 수 있습니다. 선수 선발에 관한 전권, 그리고 어떤 개입도 없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김문호는 답을 하지 않았다.

“김 감독, 마지막으로 말이나 한번 건네 봐 주시오. 그래도 거절한다면 두 번 다시 말 않겠습니다.”

“흐음!”

송인수를 본 김문호가 커다랗게 신음을 내뱉었다.

박용근은 유정호와 함께 마틴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고,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번의 제안이 유효하다면 유니온 시티의 리저브 팀을 맡아서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야기 중간에 박용근이 한 말을 유정호가 전했다.

“마스터의 결단에 감사합니다.”

마틴이 내민 손을 박용근이 잡았고, 두 사람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바튼을 통해 다음 시즌에 상대해야 할 팀들의 자료와 리저브 팀에 속한 선수들의 자료를 모두 보내겠습니다. 정식 계약은 이번 주 마지막 라운드를 치르고 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다시 한 번 마스터의 결단에 감사합니다.”

마틴이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서 박용근과 악수를 나눴다.

“호칭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마스터라 부르지 말고, 다른 팀들이 부르는 것과 동일하게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참고하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두 사람은 축구 전반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괜찮다면 휴식기에 정지우의 훈련을 보강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Ji를요?”

말을 전했던 유정호마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볼 만큼 박용근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휴식기에 개인 훈련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부상의 위험이나 다른 문제들이야 마스터가 알아서 하실 바니까 그 점도 문제가 없구요. 그런데 무슨 훈련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는 평가를 받는 정지우였다.

그런 그에게 보강할 훈련이 있다니? 당장 골키퍼 코치도 훈련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황에서?

마틴은 진심으로 이유를 듣고 싶은 눈치였다.

“오랜 기간 제대로 경기에 뛰지 못했던 탓인지, 결승전에서의 움직임이 특히 힘겨워 보였습니다. 저 상태라면 조만간 부상이나 슬럼프가 올 수도 있습니다.”

마틴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침묵은 박용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온 게 분명했다.

“목표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겁니다. 아무리 재능을 타고났더라도 그 능력을 받쳐 줄 체력과 근력이 필요한데, 지금의 지우에겐 그것들이 바닥났습니다.”

박용근은 마틴을 이해시키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한두 경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시즌에 뛰어야 할 정규 리그 38경기에 리그컵, FA컵 등을 병행하려면 이번 휴식기에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마틴은 이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해 드릴 것이 있나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시선이 집중될 테니 적당한 장소를 추천받고 싶습니다.”

“흠! 그렇다면 우리가 전지훈련지로 생각하고 있는 곳에 먼저 가 있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나중에 장소를 알려 주시면 검토하겠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사람들처럼 박용근과 마틴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몇 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검토한 다음이었다.

“지우의 훈련 때 한국 선수 몇 명을 동반해도 될까요?”

박용근이 지나가는 것처럼 질문을 던졌는데, 유정호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유니온 시티가 정한 전지 훈련장이라고 들어서 그래. 외부 선수가 그곳에 있는 것이 불편할 수 있으니까.”

“아! 예, 알겠습니다.”

유정호가 알아들었다는 얼굴로 박용근의 말을 바로 전했다.

“혹시 그중에 추천하고 싶은 한국 선수들이 있습니까?”

“꼭 그런 건 아니고, 혼자 하는 훈련이 지루하다 보니 서로 손발을 맞출 선수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답을 한 마틴이 이번에는 현재 있는 선수들의 자료를 가져와 박용근에게 건네주었다.

“다음 시즌에 별일이 없다면 이 인원은 그대로 프리미어리그로 올라갈 겁니다. 선수 분석과 포지션별로 필요한 점들을 미리 점검해 주었으면 합니다.”

대충 끝났으면 하는 유정호의 바람과 달리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정지우는 소파에 앉아 쿠웨이트전을 지켜보았다.

이미 박용근, 유정호와 함께 보았던 경기였다.

그런데도 전술에서 궁금했던 점 몇 가지와 쿠웨이트 선수 중에서 움직임을 파악하고 싶은 선수가 있어서 다시 보는 중이었다.

“지우야, 이것 좀 먹으면서 봐.”

맛있는 냄새가 난다 싶더니 전은주가 학공치를 구워서 가져왔다.

“같이 드세요.”

“방해되지 않아?”

“설마요?”

정지우는 얼른 영상을 꺼 버렸다.

“왜? 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다시 보는 거 아니었어?”

“심심해서 보는 거였어요. 그리고 이게 제가 늘 꿈꾸던 시간이었거든요.”

넉살이 는 정지우를 보며 전은주가 기쁘게 웃었다.

정지우가 학공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릴 때였다.

“고마워, 지우야.”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전은주가 나직하게 인사를 전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 감독님과 사모님께서 계속 함께 계셔 주시는 게 너무 감사한데요.”

학공치를 삼킨 정지우는 말을 이었다.

“요즘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요. 축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구요.”

“넌 뭘 해도 잘했을 거야.”

“감독님과 사모님이 함께해 주시는 일이라면요.”

전은주가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감독님과 사모님이 계셔서 제게 축구가 의미 있었던 것 같아서요. 그동안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전국대회 끝나고 일본에 가서 어머니 먼저 보내 드린 다음에요.”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그래서 전은주는 안쓰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감독님과 사모님도 안 계시니까 제게 축구는 의미가 없었어요. 이곳에서 릴리를 만나지 못했다면 전 아직 그렇게 지냈을 거예요.”

정지우는 최근 느꼈었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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