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12화 (112/262)

제8장. 내가 그만두라고 했었지! (3)

일요일 오후였다.

약속을 하지 않았으니 집에 없을 수도 있지만, 정지우는 일단 빌의 집을 먼저 찾았다.

흔히 보이는 유니온 시티 노동자의 집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았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벨을 누르고 서 있으려니 안쪽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끼이이익.

문을 연 사람은 빌의 아버지 토미였다.

“Ji!”

과거의 전우를 만난 듯한 표정으로 토미가 손을 내밀었다.

“유니온의 수호신!”

“잘 지내셨죠!”

악수가 아니라 세워서 내민 오른손을 잡은 상태에서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인사였다.

“빌은요?”

“안에 있지. 괜찮다면 잠시 들어와.”

토미가 고갯짓으로 현관 안을 가리킬 때였다.

샌디와 빌이 그의 뒤로 나타났다.

“Ji! Ji!”

빌이 아버지 토미를 헤치다시피 달려 나와 정지우를 안았다.

“Hi, buddy(이봐, 친구)!”

허리를 안은 빌의 등을 다독여 준 정지우가 자세를 낮춰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

“그냥. FA컵 결승전에서 Ji의 활약을 봐서 그래.”

정지우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빌은 감동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찾아오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괜찮다면 잠시 안에서 차라도 하고 가.”

“그럴까요? 한 사람 같이 들어가도 되나요?”

“Ji가 인정한 사람이라면 우린 언제든 좋아.”

정지우는 차에서 기다리던 바튼을 손짓으로 불렀다.

“유니온 시티 구단 직원이에요. 당장 제 일을 봐주고 있구요. 바튼, 이분들은 내가 유니온 시티에 정착할 수 있도록 커다란 도움을 주신 분들이야. 토미, 샌디, 그리고 나의 친구, 빌.”

정지우의 소개로 4명이 돌아가며 인사를 마쳤다.

토미의 제안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식탁과 소파, 그리고 그 앞에 놓인 TV.

기다란 소파에 정지우와 바튼이 앉았고, 1인용 소파에 토미가 앉았으며, 빌이 식탁 의자를 가져와 함께 앉았다.

좁은 거실 벽 한쪽 면에 유니온 시티의 유니폼이 걸려 있었다.

“저 이사했거든요. 그 바람에 인사 못 드렸어요. 다음 주 지나서 주말에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앉아서 듣고 있던 토미와 차를 가져온 샌디가 정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샌디는 언젠가 티켓을 가져다줄 때처럼 엄청나게 감동한 얼굴이었다.

“우린 자네가 우리를 잊었다고 생각했어.”

“그럴 리가요? 빌은 제 친구인데요.”

정지우의 대답에 눈이 붉어진 토미가 팔을 내밀었다.

꽈악!

그리고 다시 정지우의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렸다.

주말에 초대하는 게 이렇게 대단한 일인가?

“일이 좀 많았어요. FA컵 결승 티켓 준비하지 못했던 일은 미안해요.”

“무슨 소리야? 그동안 받았던 것만 해도 우리에겐 굉장한 선물이었어. FA컵 결승전 때 우리 세 사람도 웸블리에 있었다고. 자네의 그 엄청난 활약을 직접 봤어.”

어제의 감동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흥분한 토미의 말 뒤에서 ‘차를 들어.’ 하는 샌디의 권유가 있었다.

“자네에 대한 기사가 새로 뜬 건 알아?”

“우승 소식에 관한 건가요?”

“아니. 이걸 한 번 보라고.”

토미가 소파 옆에서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들어 정지우의 앞에 놓아 주었다.

일본의 기사를 번역한 내용이었다.

영국에서도 이런 기사가 나왔는 줄은 몰랐다.

거기에 한국의 반응까지를 보도했다.

가장 먼저 웃음이 나왔고, 다음으로 느닷없이 장진모의 커다랗고 쌍꺼풀 짙은 눈이 떠올랐다.

“우리 팀에 남는다면서?”

“예. 그렇게 될 것 같아요.”

토미와 샌디, 빌이 번갈아 시선을 마주하더니 얼른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자네를 원하는 굉장한 팀들이 있다는 걸 알잖아? 오늘 오전 교회에서 만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 웸블리에서의 우승을 선물해 주었으니까, 자네가 행복해할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존중해야 한다고.”

“나는 유니온 시티에 있는 게 행복해요.”

“지금 이 말을 내 동료들에게 전해도 될까?”

“물론이죠.”

토미가 정말이지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전해도 되겠나?”

“토미가 원한다면요.”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전화기를 향해 움직였다.

정지우는 대화를 듣고 있던 빌에게 시선을 주었다.

“요즘 운동은 어때?”

“별로야. 성적이 영 안 나와.”

빌이 답을 할 때, 거실 저쪽에서 ‘지금 Ji가 우리 집에 있다니까!’ 하는 토미의 흥분한 음성이 들렸다.

좋았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축구 선수이기에 얻을 수 있는 행복이란 생각도 들었다.

“난 왜 Ji처럼 수비수들을 통제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어. 지난 경기에서는 두 골이나 먹었어.”

빌의 아쉬워하는 눈을 보자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웃으면 안 되는 거다.

“훈련은 언제 해? 내가 한번 가 봐도 될까?”

“정말? 정말 그래 줄 수 있어?”

“친구가 힘들어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냐? 리그 경기 끝나고 한번 시간 내 볼게.”

옆에서 말을 듣고 있던 샌디가 더 기쁜 얼굴을 했다.

그때 흥분한 얼굴로 토미가 다가왔다.

“다들 미쳐 날뛰어. 우린 Ji가 분명 다른 팀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커다란 덩치를 가진 철강 노동자 토미와 그의 가족에게 축구가 어떤 의미이기에, 정지우가 남는다는 소식에 이렇게 기뻐하는 걸까?

힐끔 돌아본 곳에서 바튼이 미소를 담은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 가족의 반응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눈치였다.

잠시 앉아서 빌의 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현관문을 부수는 듯한 거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벨이 있을 텐데?

정지우가 돌아보았을 때, 토미가 얼른 일어나 현관으로 움직였다.

우르르르르!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토미의 작은 집으로 들어섰다.

“세상에! 정말 Ji야! 미스터 어메이징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정지우를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모두 다가와 정지우와 손을 잡고는 어깨를 부딪쳤다. 절반쯤은 부인과 함께 왔고, 어떤 부부는 빌 또래의 아이와 함께였다.

“이거 보라고!”

점퍼를 벗어 던진 남자가 13번의 등 번호와 위에 정지우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보여 주기 위해 얼른 몸을 돌렸다.

“멋진데요?”

“사인해 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입고 있는 유니폼의 등에 정지우가 이름을 써 주었다.

가족별로 달려들어 정지우와 함께 사진을 찍느라 대략 20분쯤이 지났다.

그들의 몸에서 나는 음식 냄새, 땀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Ji, FA 우승 정말 고마워. 앞으로 어떤 성적이 나오든, 우리는 이번 FA컵을 추억 삼아 견딜 수 있을 거야. 언제고 우리 아들이 컸을 때, 지금 Ji의 모습을 반드시 전해 줄게.”

예상하지 못했던 우승 축하 파티를 하는 것 같았다.

정지우의 몸값이 얼마가 되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다. 어쩌면 티켓의 가격만 높아질지 모른다.

그런데도 이들은 정지우가 좀 더 좋은 팀에 가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마저 마쳤다.

“Ji가 활약한 이후의 유니온 시티는 이전과 전혀 다른 팀이 되었지. 그런 자네가 프리미어리그로 함께 가 준다니, 나는 오늘부터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것 같아.”

정지우를 둘러싼 거친 남자들이 유니온 시티 팀의 미래를 기대하며 들떠 있어서, 빌의 집이 완전히 펍처럼 느껴졌다.

“자넨 행복할 권리가 있어! 축구로 감동을 전해 줄 수 있는 선수는 흔하지 않지! 자네가 어느 팀으로 가든 우린 영원히 미스터 어메이징을 응원해! 설마 브리스톨로 가지는 않겠지?”

누군가가 흥분해서 떠들다가 마지막에 자신 없는 음성으로 말을 건네는 바람에 다 함께 웃기도 했다.

“가 봐야겠어요.”

예상보다 시간을 더 보내기는 했는데 기쁘고 만족한 시간이었다.

“유니온 시티를 지켜 줘!”

“자네가 어떤 모습이든, 이곳에 있는 우리를 기억해! 자네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우리가 가장 앞에 설 거야!”

축구가 아니라 어쩌면 종교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삶에 기쁨과 희망을 준다는 의미에서라면.

“빌, 초대하면 와 줄 거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Ji의 초대를 어떻게 거절하겠어?”

애늙은이 같은 빌과 인사를 나눈 다음이었다.

남아 있는 이들과 손을 마주 잡아 가며 정지우는 토미의 집을 나섰다.

바튼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한국인들의 정서가 유니온 시티 분위기와 많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바튼이 기분 좋은 표정과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마스터와 사모님도 그렇고, 식사를 함께할 때가 오늘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빌의 가족은 내가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도 날 응원해 주었었거든. 저들은 내게 가족과 같아.”

“그렇군요.”

병원에 도착한 정지우는 바튼과 함께 현관으로 들어섰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놀라운 반응이었다.

정지우를 보는 이들이 손뼉을 치며 반겨 주었고, 또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 하이파이브를 하고 지나갔다.

FA컵 우승만 가지고는 좀 과한 느낌인데 싶었지만,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묻기는 어려웠다.

먼저 클레이의 병실에 들렀는데 그곳에 얀센이 함께 있었다.

“괴물이 왔군.”

얀센이 웃는 얼굴로 농담을 던지며 손을 내밀었고, 이어서 클레이와 인사를 나눴다.

“우리 다음 주에 퇴원이야.”

“잘됐어. 정말 반가운 소식이네.”

“클레이는 구단에서 재활하기로 했고, 나는 이번 전지훈련에는 참여할 수 있다고 들었어.”

“빨리 돌아와. 안 그러면 기예르모가 밀어낼지도 몰라.”

“그 애송이는 아직 부족하지.”

이제 이런 농담 정도는 주고받을 사이가 된 것 같았다.

“Ji.”

농담의 끝에서 얀센이 정지우를 진지하게 불렀다.

“결승전 멋졌다. 감동적이었어.”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여 가며 손을 내밀었다.

이런 때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정지우는 고맙다는 의미로 그의 손을 힘껏 잡아 주었다.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이 우는 것을 보았지? 직선적이고 강한 이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위로가 필요해. 가족을 위해 힘들었던 노동을 잘 이겨 냈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과 같은 위로. 너의 축구가 그들에게는 그런 의미일 거야.”

“잊지 않을게.”

얀센이 건네주는 진지한 조언에 정지우는 비슷한 표정과 음성으로 답했다.

“한국에 가지 않는다면 내 훈련을 도와줘야 해.”

“내 재활도!”

“그건 고민 좀 해 보고.”

클레이에게 농담을 던진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주에 레드 블레이트에서 보자고.”

“오케이!”

어쩐지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느낌이었는데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병실을 나서기 직전이었다.

“참! 자네가 이곳의 아가씨를 위해 보여 준 세레머니 때문에 병원 스태프와 환자들 반응이 전과 다를 거야. 참고해!”

얀센이 병원에 들어섰을 때의 반응을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에게 손을 들어 준 정지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릴리의 병실로 향했다.

어떤 얼굴로 맞아 줄까?

두 팔을 뻗어 줄 거라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릴리는 전과 다르게 얌전한 얼굴로 정지우를 맞이했다.

‘무슨 일 있어요?’

시선을 준 곳에서 릴리의 엄마 메기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웃기만 했다.

뭔데 이러지?

일단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 공주님이 왜 이렇게 얌전하지?”

정지우가 침대 앞 의자에 앉아서 얼굴을 들여다볼 때였다.

“Ji가 TV를 통해 사람들 앞에서 키스해 준 거라고 하더니, 그때부터 저렇게 부끄러워해.”

메기가 웃음을 삼키며 전해 준 설명이었다.

수줍어서 그런 거라고?

TV를 통해 장갑에 키스한 것 가지고?

정지우가 웃으며 들여다보자 곧바로 릴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공주님? 안 반겨 주면 갑니다.”

“그런 건 아냐.”

함께 들어온 바튼이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앞이었다.

“그럼 전처럼 반겨 줘야지.”

정지우가 뻗은 팔 안으로 릴리가 쏙 들어왔다.

예쁘다.

그리고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고맙다.

“Ji, 다른 팀으로 가면 안 돼.”

“그럴 마음은 없는데?”

“정말이지?”

“그럼.”

이것 역시 축구를 했기에 얻는 행복일 거다.

우승한 덕분에 좀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

왜 축구를 하는지, 목표를 무엇으로 해야 하는지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았다.

좋아하는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그런 것들이 정지우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당장은 좀 더 실력을 쌓고 싶었다.

설렁설렁 뛰었었던 브라질팀이 악착같이 달려들어도 무실점을 기록할 수 있는 골키퍼가 되고 싶었다.

일단 프리미어리그에서 시작한다.

정지우는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과 품 안의 작은 소녀에게서 무언가 커다란 것을 선물받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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