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11화 (111/262)

제8장. 내가 그만두라고 했었지! (2)

“나가시라니까!”

김문호가 고함을 버럭 지른 다음이었다.

조동익의 눈치를 받은 한승관이 비척비척 소파와 테이블 사이를 나와서는 바닥에 냅다 무릎을 꿇었다.

김문호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바닥을 향해 떨군 한승관의 머리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알았어. 여기 키 둘 테니까 나갈 때 잠그고 가. 열쇠는 문 옆 편지함에 넣어 두고.”

“이봐, 김 감독.”

“왜요? 이번엔 부회장님도 무릎을 꿇으시게요?”

“이 사람이!”

울컥했던 조동익이 얼른 구겼던 인상을 바꿨다.

“막말로 우리도 우리 축구를 위해서 애쓰다가 이렇게…….”

“박 감독을 어린이 축구 교실에서 쫓아내는 일도 우리 축구를 위한 길이란 말입니까? 그럼 끝까지 그렇게 가야지, 왜 또 부르려고 그럽니까?”

“어허, 이 사람이 왜 그렇게 삐딱하게만 그래? 그러지 말고, 우리 지금부터라도 인간적으로 대화를…….”

“아니, 그럼 지금까지는 내가 개처럼 말했다는 겁니까?”

“하아!”

성격 지랄 맞기로 동대문 2번 개가 김문호였다.

말문이 막혔는지 조동익이 한숨을 푹 내쉬었는데, 어떡해서든 김문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력이 담겨 있었다.

“아무튼, 난 모르겠으니까 문이나 잘 잠가 놓고 가십쇼.”

열쇠를 테이블에 올린 김문호가 붙잡으려는 조동익의 손을 홱 피하고는 대뜸 문을 나서 버렸다.

콰앙!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는 순간, 조동익은 고개를 틀며 인상을 찌푸렸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데다 한쪽 머리는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그렇더라도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지 박용근과 정지우를 잡아야 검찰 수사를 피할 처지인 거다.

“일어나지!”

조동익은 이를 악문 채로 말을 씹어서 뱉었다.

저 버러지 같은 놈이 일만 제대로 했으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한승관을 조동익이 살쾡이 같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밤새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런지 얼굴이 완전히 반쪽이었다.

저 식충이 같은 인간이 오늘 밥도 제대로 못 넘겼다.

‘그래, 너라고 속이 편하겠냐?’

조동익은 나오려는 울분을 또다시 억지로 삼켰다.

이런 인간이라도 있어야 당장 박용근과 정지우를…….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느닷없이 울리는 전화기 소리가 조동익의 생각을 뚝 잘랐다. 직원들만 아는 번호였다.

“나야. 무슨 일이야?”

[부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번엔 또 뭐! 왜? 어제 알고 봤더니 두 골 먹은 거래?”

[그게 아니라, 어제 한 위원님이 접대부 있는 술집에서 나온 사진이 인터넷에 보도되었습니다.]

“뭐?”

[이거 뭐라고 답을 합니까?]

아니, 그럼 얼굴이 반쪽이고, 밥을 못 처먹은 게 밤새 술을 처먹어서?

“일단 잠깐 끊어 봐.”

한승관이 조동익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이 개만도 못한 인간아! 당신이 사람이야!”

김문호의 사무실에서 조동익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 나왔다.

쥬피터는 마틴의 사무실에 앉아서 찻잔을 앞에 두었다.

태연하게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내심 조급한 눈치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Ji가 분명히 훈련에 참석하겠지?”

“잠시 후면 바튼과 함께 도착할 시간입니다.”

“혹시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진 것은 아닌가 염려돼서 그런 거네. 그렇다면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해서 말일세.”

“그랬다면 먼저 연락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군.”

벽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본 마틴이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가 보겠습니다. 혹시 Ji를 만나 볼 생각이시면 이리 오라고 할까요?”

“어제 큰 경기를 마친 선수에게 그래서야 쓰나? 그래도 이왕 온 거니까 그라운드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이나 보다가 돌아가겠네.”

“알겠습니다.”

마틴이 책상을 돌아 나오는 동안 쥬피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스터와의 계약은 언제쯤 할 생각인가?”

“오늘 Ji와 의논해서 박 감독을 먼저 만나고 일정을 정하도록 하지요.”

“자네에게 너무 많은 일을 맡겨서 미안하네.”

두 사람은 사무실을 함께 나섰다.

회복 훈련을 위해 레드 블레이트에 도착한 정지우는 라커룸에서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며 그라운드에 나섰다.

스트레칭과 가볍게 달리는 것을 두 번 반복한 후, 포지션에 맞는 훈련을 30분쯤 하는 것이 전부였다.

관중석에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구경하러 나온 관중들과 취재차 나온 기자들, 그리고 구단 이사진이 있었는데 이곳에선 일상에 가까운 일이었다.

모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훈련을 마쳤다.

“Ji, 근력 운동을 할 생각인가?”

“예. 한 시간 정도? 몸을 풀어 주는 게 좋으니까요.”

훈련을 마치고 돌아서는 정지우에게 마틴이 다가와서 질문했고, 정지우가 답을 했다.

“그렇다면 점심을 먹고 갈 생각이군. 혹시 그 후에 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되나?”

“충분합니다. 끝나고 사무실로 가면 되나요?”

“그렇게 해 주게.”

마틴과의 짧은 대화를 마친 정지우는 곧바로 2층의 근력 운동실로 들어섰다.

전에는 거의 혼자서 하던 훈련이었는데, 지금은 기예르모와 무둔바가 늘 함께하다시피 했다.

기예르모야 그렇다고 쳐도 무둔바는 유연성을 길러 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러나 사람이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겠다는 뜻이라면 그건 또 뭐라 할 게 아닌 거다.

운동과 샤워를 마친 후 들어선 식당은 한가했다.

우승한 다음 날인가 싶을 정도였다.

“Ji, 리그 끝나면 한국에 가나?”

정지우가 포크를 들어서 샐러드를 집는 순간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무둔바가 굵직하게 울리는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아직은 잘 몰라. 왜?”

“괜찮다면 식사 초대를 할까 해서.”

정지우의 시선을 받은 무둔바가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내가 했던 말을 들은 와이프가 자네를 초대하고 싶어 했거든.”

“리그 끝나기 전에 답을 해도 되지? 너는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계획이야?”

무둔바가 ‘응.’이라고 답을 하고 나서였다.

“나는 스페인에 다녀올 겁니다.”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던지 기예르모가 자신의 계획을 얼른 알려 주었다.

셋이서 적당하게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정지우는 바로 마틴의 사무실로 움직였다.

똑똑똑.

“들어와.”

정지우가 들어서자 마틴은 책상에서 일어나 앞에 의자를 가리켰다.

“차를 줄까?”

“괜찮습니다.”

정지우는 오랜만에 책상 앞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하나씩 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우선 박 감독님과 만나고 싶은데 시간을 잡아 줄 수 있겠나?”

“오늘 들어가는 대로 말씀드리고, 전화로 약속을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고맙군. 그럼 그렇게 부탁하고. 마지막 리그 경기는 기예르모를 선발로 내세울 생각이다.”

“그거야 코치가 결정할 일입니다.”

“흠.”

답을 들은 마틴은 어쩐 일인지 한숨을 나직하게 내쉰 후에 입을 열었다.

“자네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대략 다섯 개 정도의 팀이 런던에 있는 모양이다. 각 리그에서 우승을 다투는 팀들이고, 더불어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확정된 팀들이기도 하지.”

정지우가 놀랐다는 투로 눈을 떠 보이자 마틴이 픽 하고 웃었다.

“내가 공연히 자네 앞길을 막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불편해. 그러니 혹시라도…….”

“코치.”

정지우는 마틴의 말을 자르며 그를 불렀다.

“사실 기자회견에서 받았던 마지막 질문에 아직 답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마틴이 그 질문이 뭐였더라 하는 것처럼 고개를 틀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는가였습니다.”

“그랬던 것 같군. 이제 기억이 나.”

“지금은 유니온 시티에서의 생활에 충분히 만족합니다. 당분간은 그렇게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자네는 확실히 좀 독특하군.”

마틴이 재미있다는 것처럼 웃었다.

“아스널전에서 어제 경기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방황하기보다는 내 실력을 좀 더 확인하고, 증명한 뒤에 당당하게 옮기고 싶습니다.”

“자넨 정말 돈에 대한 욕심이 없나?”

“그렇게 오해하시면 다음번에는 코치를 신뢰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으하하하!”

마틴이 지금까지 이렇게 커다랗게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는 정말이지 통쾌하게, 그리고 길게 웃었다.

“좋아! Ji! 자네에게서 여유가 보이니 내 마음이 다 편안해지는군! 그렇다면 걱정할 것은 없겠네. 그렇더라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까, 마음이 변할 조건을 듣는다면 결정을 내리기 전에 내게 한 번쯤은 의논해 주겠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답을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군. 그럼 오늘은 이만하기로 하지. 박 감독께 안부 전해 주고 약속을 잡아 주게.”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지우는 마틴과 짧은 악수를 나누고 그의 방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바튼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정지우는 물끄러미 창밖을 보았다.

다음 목표로 무엇이 있을까?

운동선수로서, 팀의 일원으로서의 목표는 당연히 있다.

당장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거다.

그러나 과연 정지우라는 골키퍼가 가진 목표는 무엇일까?

무실점 기록?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지는 일이었다.

승리를 원하기는 하지만, 무실점 연속 게임이 목표인 건 어쩐지 슬프다.

백 골을 막았다가도 한 골에 무너지는 목표라면 말이다.

높은 주급?

받으면 좋지만, 그게 목표인 건 어째 내키지 않는다.

더불어 좋은 집, 좋은 차 역시 삶의 목표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뭘 그렇게 생각합니까?”

운전 중에 고개를 살짝 돌렸던 바튼이 얼른 시선을 앞으로 가져갔다.

“그냥 내 목표가 뭐지 하는 생각?”

“우승을 하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드나 봅니다.”

“그런가?”

바튼에게는 배부른 고민쯤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박용근이 권해서 축구를 시작했고, 그런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악착같이 매달렸었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일본에 갔고, 그 뒤로 릴리를 만나 여기까지 달려온 거였다.

한 번 생각이 그렇게 달려가자 왜 축구를 하는지, 실제로 축구를 좋아하고는 있었는지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정지우는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당장 최선을 다하기에도 힘겨운 시간이었다.

리그가 끝나면 앞으로 경쟁해야 할 팀들은 정지우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비디오를 분석할 거고, 그렇게 참고 자료를 만들어 낼 게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철학적인 생각을?

‘하여간 이상하게 그 기자만 만나면 불편해지네.’

정지우는 장진모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픈 곳이 있습니까?”

“아니, 그냥 뭐 생각난 게 있어서. 참! 말이 난 김에 아직 저녁 시간까지 여유 있으니까 병원 쪽으로 가 줄 수 있어?”

“릴리 때문입니까?”

“응. 그리고 가는 길에 한 곳 더 들를 곳이 있어.”

정지우는 오랜만에 어린 친구 빌을 만나 보기로 했다.

정지우가 없는 틈을 이용해 유정호는 박용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 이야기는 충분히 알겠다니까. 그런데 지금 준석이를 추천해 봐야 거절할 확률이 높고,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 추천하기 어려워져.”

박용근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 제자를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것이 고맙지. 게다가 그 녀석의 실력이야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하지만 앞에 말했던 이유들 때문에 섣불리 추천하기는 어려워.”

“안타까워서 그렇습니다. 지난번에 한국에 다녀가고 마음을 못 잡는 것 같아서요. 이럴 때 감독님과 지우까지 있는 이곳에 올 수 있다면 녀석은 분명 펄펄 날아다닐 겁니다.”

박용근은 아니란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나보다 잘 알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배려하지 않아. 당장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잣대가 되고, 다음은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느냐로 평가하지.”

유정호는 한숨만 내쉴 뿐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데이터를 내밀어야 하는데 그건 어렵고, 그렇다고 아직은 나를 믿고 일단 데려오자고 하기에는 내가 보여 준 것들이 부족해. 그러니 지금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거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나 역시 선수를 추천한다면 가장 앞에 녀석이 있으니까. 다만 이 팀에 필요한 포지션을 추려야 할 때가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는 시간을 갖고 지켜보자고.”

“알겠습니다. 부담만 드려서 죄송합니다.”

박용근은 넉넉한 미소로 유정호의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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